'전교1등 전과자의 자살'로 바뀐 한 경찰관 인생

선진국건설 작성일 13.01.16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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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인천 부평경찰서 강력반에 한 고등학생이 붙잡혀 들어왔다. 여자보다 더 곱상한 외모였다. 손목을 감고 있던 은색 쇳덩어리(수갑)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손이 매끈했다.

당시 강력반 형사였던 박용호(57·현 인천 남동경찰서) 경위가 본 A군(당시 고교 3학년)의 첫인상이었다.

대입학력고사를 3개월여 앞둔 늦가을이었다. 집에서 공부하다가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온 A군은 운전석 창문이 열린 채 열쇠가 꽂혀 있는 승용차 1대를 우연히 발견했다.

호기심이 일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던 모습을 어깨너머로 봤던 것을 떠올렸다. 열쇠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시동이 걸렸고 차량이 서서히 움직였다. 당황한 A군은 뒤차의 경적 소리에 놀라 중앙선을 가로질러 차량을 몰았고, 인도를 걷던 행인 2명을 치었다.

덜컥 겁이 났고 차량을 두고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순찰 중이던 경찰관에게 붙잡혔다. A군의 혐의는 절도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피해자 2명은 합의금으로 2천만원과 3천만원을 각각 요구했다. 그러나 A군의 집에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합의가 되지 않자 검찰은 구속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하라고 했다. 전교 1등, 학력평가성적 전국 5위권이었던 모범생이 한때의 실수로 철창에 갇히는 순간이었다.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진학을 바라던 A군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박 경위는 구속만은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다. "저는 학창시절 친구들 많이 때리고 돈도 빼앗던 '꼴통'이었거든요. 그런데 천사의 얼굴로 수갑을 찬 모습이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안타까웠어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는 탄원서와 서명을 받으러 학교를 쫓아다녔다. 그러나 A군의 구속을 막지는 못했다. 유치장 앞에 선 A군은 뒤틀린 자신의 미래를 본 듯 괴성을 지르며 발악했다.

박 경위가 A군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2년쯤 뒤였다. 또래 학생들을 때리고 돈을 빼앗다가 붙잡혀 온 한 고등학생의 조서를 작성하던 중이었다. 가족사항을 진술하던 학생의 입에서 A군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알고 보니 그 학생은 A군의 남동생이었다.

"너희 형 지금 뭐하냐?" 놀란 박 경위가 물었다. "학익동 집창촌에 가 보시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그곳에서 알코올에 중독된 A군을 봤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다. "미안하다. 내가 너를 망쳐놨다. 정말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A군의 소식을 접한 건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박 경위의 동료 경찰관이 다가왔다. "형님 그 학생 자살했대요"
부평서 강력반 근무 시절인 1989년부터 3년 연속으로 전국 강력범 검거 부문에서 1위를 기록했던 박 경위였다.

"그때는 범인을 많이 잡는 게 좋은 건 줄 알았습니다. A군을 보면서 느낀 거지만 그게 아니더라고요. 범죄예방이 더 중요합디다"

한 모범생 전과자의 죽음이 그의 경찰 인생을 바꿔 놓았다. 1995년 청소년 2급 지도사 자격증을 땄고, 전국 각지의 학교를 찾아다니며 범죄예방 교육을 했다.

강력반 형사 시절 앓던 B형 간염을 치료하지 못하면서도 17년 동안 찾아다닌 학교가 1천곳이 넘었다. 그곳에서 20여만명의 학생을 만났다. 강의료는 받지 않거나 받더라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고 있다.

박 경위는 15일 "강의를 듣는 천사 같은 학생들의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티없이 맑다"며 "어른들이,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나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용한 지 오래돼 액정 일부가 깨진 그의 휴대전화에는 강의를 들었던 학교폭력 가해학생들이 보낸 감사의 문자메시지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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