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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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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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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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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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중 하나인 오나라의 초대왕이자 황제, 호족집단을 이끌어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 <손권>
그의 실제 역사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손권, 코에이 일러스트>
<손권 - 전반기>
182년 생으로 손견의 차남이며 자는 중모입니다.
손견이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주준에게 발탁되기 전, 하비승 시절에 손권이 태어났는데
강표전에 따르면 네모난 얼굴에 입이 크고 눈에서 광채가 나 손견이 매우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사각얼굴...? 푸른눈의 자색수염에 대한 묘사는 연의의 묘사이지 정사에 기록된 내용이 아님.
다만 <헌제춘추>에서는 자색수염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한데 곧이 곧대로 믿기가 좀...)
바로 위 형 손책과의 나이 차이가 7살이나 났기에 어려서부터 형을 꽤나 잘 따랐는지 손책이 강동을 평정할때부터
항상 형을 따라다니며 군무에 관한 여러가지 계책을 올리니 손책은 동생을 꽤나 기특하게 여깁니다.
그리고는 종종 장수들 앞에서 손권을 돌아보며 "이들이 너의 제장들이다" 라고 얘기하곤 했다고 합니다.
(<강표전>에 실린 내용인데 나중에 끼워 맞춘 내용인지는 모르겠음)
손책은 멀리 있으면서도 한황실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아 예물을 종종 보내곤 했습니다.
이에 황실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답례품과 함께 사자로 유완이란 사람을 보낸적이 있었는데
유완이 다녀와 사람들을 보며 말하기를,
"제가 보건대, 손씨 형제는 비록 각기 재능이 출중하고 사리에 통달했을지라도 모두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오직 둘째 손권만은 모습이 기이하고 특이하며, 골상도 평범하지 않아 크게 귀하게 될 징조가 있으며,
수명 또한 가장 깁니다. 여러분들은 제 말을 기억해 두십시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역시 나중에 끼워맞춘 내용이 아닌지..?)
200년, 손책이 대사를 손권에게 맡기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이제 겨우 19세에 불과한 손권은 울음을 그치지
못할 정도로 매우 슬퍼했습니다.
(<건강실록>에 따르면 손책이 사망할 당시, 장소 등을 불러 후사를 논의할 때 장소는 손책을 닮은 손권의 동생
손익을 후사로 잇게 하라고 권했으나 손책은 손권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손권이 잘못하면 그대가 취하라" 라고
장소에게 말했다고 하는데 이 내용은 유비가 제갈량에게 했던 말과 같으므로 그 일화를 갖다 붙인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손권은 장소를 꾸준히 꺼려하고 싫어했는데 아마 장소가 손익을 추천한 것이 맞다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기에
이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추측됩니다)
이에 장소는 손권에게 지금이 울고 있을때냐며 과거 주나라 백금의 예를 들어 상복을 벗게 하고는 군대를 순시하게 합니다.
사실 손책이 강동을 제패해 양주를 차지하긴 했으나 그의 부하들은 손책을 따랐던 것이지 손권에게까지 그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었고 명분도 없었습니다.
손책의 벼슬도 높았던게 아니고 어떤 명분을 통해 강동 지방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그저 힘으로 제압한 것이기에
군신 간의 의리도 상당히 약한 편이었죠. (손권의 이때 벼슬을 생각해보면 군신 관계라 하기도 애매함..)
손책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온 주유는 장소와 상의한 뒤 손권이 대업을 함께 이룰만하다 생각해 그를 지지해 주자
그제야 겨우 동요가 잦아들 정도였으니 이 때 만약, 주유와 장소가 등을 돌렸다면 강동의 세력은 모래성처럼
무너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손권의 기반은 매우 미약했습니다.
이 때, 조조는 손책의 사망을 틈타 강동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마침 조정에 와있던 장굉이 북에 원소도 있는데
남의 장례를 틈타 공격하려는게 사람이 할 짓이냐 라는 뉘앙스로 조조를 말리자 조조는 이를 철회하고 표를 올려
손권을 토로장군으로 임명합니다.
(손책 사후, 손책이 임명한 여강태수 이술은 손권을 따르지 않고 손권을 반대하는 자들을 속속 맞아들이며 거역하자
이에 손권이 이술에게 편지를 보내 이들을 모두 되돌려 보내라고 요구했으나 이술은
"니가 덕이 없어서 그런거 아니냐. 니가 덕이 있었으면 다 돌아가지 않았겠냐? 내가 왜 그래야 하냐" 며 한방 맥입니다.
그러자 손권은 딥빡. 미리 조조에게 "나 이놈 칠거니까 말리지 마슈" 하고 선언한 뒤 여강을 공격해 이술을 붙잡아
목메달아 죽입니다.
그 뿐 아니라 심지어는 집안 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손권의 사촌인 손분이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내통하려고 하다가
딱 걸려 손권에게 죽는 사건이 생길 정도로 초반의 손권은 손책이 이루어놓은 기반을 온전히 물려받지 못한 채
많은 내홍을 겪어야 했습니다. 거의 이러느라 시간 다 보냈다고 봐도 될 정도..)
주유와 장소의 지원과 어머니 오국태의 지원, 충성스런 장수들이 보좌해주자 강동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손권은 스스로 몸을 숙여가며 여러 인재들을 발탁합니다. (노숙, 제갈근, 여몽 등 그러나 여전히 반란의 불씨가..)
202년, 조조가 관도전투에서 원소에게 크게 승리하고 손권에게 인질을 요구하지만 손권은 이를 거절했고
얼마 안있어 어머니 오국태가 사망합니다.
장례를 치른 뒤, 203년이 되자 아버지 손견의 원수 강하의 황조를 치는데 이 때, 능조를 잃게 되지만 (감녕에게 사망)
황조군을 격파하고 몰아붙여 공성전까지 돌입합니다.
그러나 이 때, 각지에서 산월족의 침입 및 반란이 일어나 손권은 강하 공략을 포기한채 결국 돌아와
반란 진압 및 산월족 격퇴에 임합니다.
그리고는 다스림에 어려움이 있는 파양에는 여범을, 악안에는 정보, 해혼에는 태사자 등 기타 곳곳에 측근 장수들을
보내 안정시키고자 합니다.
204년, 어머니 오국태를 잃은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동생 손익마저 부하들에게 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손익의 부인 서씨의 기지로 이들을 제압, 그의 뒤를 사촌형 손유에게 잇게 합니다.
(이복동생을 제외한 아버지 손견, 어머니 오국태, 형 손책, 동생 손익, 막내동생 손광마저 병사하니 손권의 직계는
모두 이른 나이에 사망함..)
205년부터 208년 동안 손권은 내부의 각종 반란을 진압하고 점령지를 안정화 시키는 등 내적 성장에 집중을 했고
외부로는 황조를 공격해 드디어 강하를 함락, 황조의 목을 베어 아버지 손견의 원수를 갚습니다.
이 과정에서 황조에게 있던 감녕을 얻었고 감녕은 후에 주유에게도 영향을 끼친 천하이분지계를 처음으로 제안합니다.
(이는 감녕이 익주 출신으로서 익주부터 형주까지 두루 돌아다녀 봤기에 내놓을 수 있는 대계였음.
그러나 실현 가능성은..쩜쩜)
이렇게 조조가 원소를 격파하고 하북 일대를 모두 점령하고 있을 때, 손권은 지지기반 다지기에도 벅찰 정도로
바쁘게 보내는데 겨우겨우 안정을 시키며 한숨돌리나 했더니
208년, 드디어 조조가 하북을 완전히 제압하고 군을 돌려 남쪽으로 향합니다.
폭풍같은 기세로 유비를 패퇴시키고 형주의 항복을 받아 금새 장강까지 다다르자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요즘은 죄상을 들어 죄지은 자들은 토벌했고, 군기가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이 항복했소.
이제 수군 80만을 단련하여 바야흐로 오(吳) 땅에서 손장군과 자웅을 가려보려고 하오."
<삼국지 정사 오주전 주석 강표전>
위와 같은 내용으로 편지를 보내니 손권 이하 강동의 대신들은 패닉에 휩싸입니다.
이윽고 대책회의를 열었으나 장소를 필두로 항복론이 대세를 얻어가자 손권은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한숨만 쉬다가 잠시 화장실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회의 내내 조용히 있던 노숙이 따라 나옵니다.
(80만은 뻥카였고 24만정도.. 그러나 손권은 겨우 최대 동원해봐야 3만~10만 정도였으니 병력차가 압도적이었던건 맞음.
게다가 위에서 서술했던 바와 같이 손가가 점령한 강동의 세력은 어떠한 명분없는 호족 연합체에 불과, 협천자를
했던 조조에게 명분상에서도 상대가 될리가 없었음. 따라서 주전론보다는 항복론이 힘을 얻는건 당연..)
이에 손권이 노숙을 돌아보며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라고 묻자 노숙이 대답합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전적으로 장군을 잘못되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과는 대사를 도모할 가치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지금 제가 조조를 맞이한다면, 조조는 당연히 저를 거두어 높은 벼슬을 줄것입니다.
그러나 장군께서 조조를 맞이한다면, 장군은 어찌 되겠습니까?
원컨대 큰 계획을 일찍 정하여, 사람들의 의견을 쓰지 마십시오"
<삼국지 정사 노숙전>
라고 대답하니 손권은 "그대는 하늘이 내게 내려준 사람이오" 라고하며 크게 기뻐하고 곧 노숙을 보내 유비와의
동맹을 추진, 파양에 나가있던 주유도 불러들입니다.
주유 역시 4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싸울 것을 주장하자 손권은 이에 전쟁을 결심하고 강동의 대신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책상을 칼로 베며 결연히 싸울 것을 선포합니다.
그리고는 군대를 소집하지만 이미 싸우기도 전에 질 것이라 생각한 호족들이 대다수였는지 다들 병사를 내놓길
꺼려한데다가 산월족의 습격, 반란 등을 대비한 잔여병력을 두어야 했기에 손권은 겨우 3만의 병사를 모집합니다.
이에 본인이 중군 1만을 이끌고 주유에게 1만, 정보에게 1만을 주어 좌우도독으로 삼고는 유비군 2만과 함께 적벽으로
나아가 조조와 대적합니다. 그리고 황개의 사항계를 통해 적벽을 화염에 휩싸이게 하며 수많은 제장들 의 분전에 힘입어
(황개, 한당, 정보, 주유, 노숙, 감녕, 여몽, 주태, 능통, 여몽, 서성 등 오의 내노라 하는 에이스 총출동)
마침내 조조를 격퇴, 형주 지방까지 얻는 쾌거를 이룩합니다. -<적벽대전 조조편 참고> -
<실제 적벽, 생각보다 꽤 큽니다>
(적벽대전이 실제 일어나지 않은 전투라고 잘못 알고 계신 분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습니다.
삼국지 연의에서 나관중이 묘사했던 적벽대전은 실제로 진우량과 주원장의 '파양호 전투' 를 일부 각색해서 적어놓은게
맞습니다. 그러나 적벽대전도 실제 일어났던 전투이고 삼국지 연의만큼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진 않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조는 적벽에서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고 그 원인은 군내에서 돌았던
전염병에 의해 전투력이 크게 깎인 상태에서 화계에 당해 군진이 완전히 무너졌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여파로 동오의 대신들, 특히 항복론의 선두주자 장소는(완전히 밀려난건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입지가
상당히 축소되었고 기세를 몰아 손권은 유비의 표에 의해 거기장군 겸 서주목에 오르며 동오 세력의 중앙 집권화를
서서히 꾀합니다.
210년, 조인을 격파해 남군까지 얻어왔던 주유가 전투중 입었던 부상으로 인해 결국 사망하고 뒤를 노숙이 이어 받자
세력의 미약함으로 인해 지키지 못할 남군을 유비에게 대여해주고 본격적으로 힘을 기르기 시작하는데...
(이 노숙이 어떤 인물인고 하니, 연의에서 그저 제갈량과 손권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이용만 당하는 캐릭터로 그려졌는데
이것을 노숙이 봤다면 관에서 벌떡 일어나 나관중의 싸다구를 후려쳤을 정도로 연의에서 심하게 너프당한 인물입니다.
"조조에게는 순욱, 유비에게는 제갈량, 손권에게는 노숙" 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손권에게 있어서 노숙은 굉장한 영향을
끼쳤는데 왜냐하면 노숙은 애초부터 한황실에 충성하기 보다 손권이 한고조 유방의 대업을 본받아 손권이 제왕의 자리에
오르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이는 후에 노숙 편을 쓸 기회가 생기면 다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