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사법체계는 결국 유럽의 체계를 도입해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의 것과 독일의 것 등을 차용했는데, 일본이 유럽의 법체계를 본받아 자신들의 법을 만들었으므로.
유럽의 역사를 보면, 중세에서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기존의 봉건제에 반발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중요시하게 되었죠.
이때문에 형벌권에 대한 유럽의 시각은, 국가가 개인에게 함부로 형벌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규제하며 개인을 보호할 것을 강조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강조가 지나치다 보니, 형벌에 관련된 당사자에 대하여 형벌을 행하는 국가와 형벌을 당하는 개인, 양자만을 주로 고려하게 되어, 나머지 한 당사자를 간과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범죄의 피해자도 형벌의 한 당사자입니다. 범죄의 피해자가 있기 때문에 개인이 처벌받는 것입니다.
형벌의 기능에는, 대리보복의 기능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익에 피해를 받은 사람이 이에 대하여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보복하고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회의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제도와 윤리로 보복을 가로막고, 사적 보복을 금하는 대신에 국가가 형벌로 보복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과거함무라비 법전에서 “눈에는 눈”을 규율한 것이, 형벌의 보복적 기능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보복적 기능을 지나치게 경시한 나머지, 보복을 원하는 피해자의 요구에 한참 못미치는 가벼운 처벌만이 행해진다면, 이는 결국 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법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형벌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사적 보복이 자행될 것입니다.
과거 판사에게 석궁을 쏜 사건을 되짚어 볼 일입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국가형벌권의 불충분한 작동 또는 오작동이 거듭되는 것은 억울한 피해자를 범죄자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형벌을 결정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하여 국가의 형벌권을 감시 규제하더라도, 가해자가 받는 형벌의 무게는 피해자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만큼은 무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벌의 무게를 보고 피해자가 더 억울해하고 좌절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가해자에 대한 갱생이나 선도는 그러한 전제를 충족하는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피해자의 권익은 가해자의 권익보다 우선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