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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토마를 타고 관우ㆍ장비의 협공을 막아낸 여포가 최고의 武將, 2위 관우, 3위 장요, 4위 장비, 5위 하후돈, 6위 조자룡, 7위 마초, 8위 안량, 9위 장합, 10위 황충
최근 발간된 「나관중도 몰랐던 三國志 이야기에는 동양의 고전 三國志에 관한 각종 조사·기록이 실려있다. 이 가운데 「三國志 최고의 武將은 누구일까」 내용 중 일부를 발췌 요약 했다.
1위:『사람 중에 여포, 말 중에 赤兎가 있다』
삼국지 등장 인물 중 최고의 武術實力(무술실력)을 지닌 장수로 呂布(여포)를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曹瞞傳(조만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이 사람 중에 여포요, 말 중에 赤兎(적토)가 있다고 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을 보면 여포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탁이 少帝(소제)를 폐위시키려 하자, 幷州刺史(병주자사) 丁原(정원)이 반기를 들고 일어선 일이 있었다. 이때 여포는 정원을 義父(의부)로 섬기고 있었는데, 그는 동탁군을 단번에 몰아붙여 기세를 꺾어놓았다. 이 일로 인해 동탁은 여포를 탐내게 되었고, 여포는 결국 같은 고향사람 李肅(이숙)의 권유로 정원을 죽이고 동탁의 진영으로 가게 되었다.
17로 제후연합군이 동탁에서 대항하여 일어섰을 때, 여포는 호로관에서 제후들의 숱한 장수들을 죽여 그 솜씨를 뽐내기도 하였는데, 삼국지 「연의」에서는 그 부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포는 철기 3000을 이끌고 나와 王匡(왕광)을 맞이했다. 전열 정비를 끝낸 왕광이 말을 타고 陣門(진문) 앞에 나와 바라보니, 적진에서는 여포가 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머리는 세 갈래로 묶어 그 위에 자줏빛 금관을 얹었고, 짐승의 머리를 연이어 새겨넣은 갑옷 위에, 西川(서천)의 명물인 붉은 비단에 수백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화려한 戰袍(전포)를 걸치고 있었다.
허리는 영롱한 사자상이 새겨진 띠로 팽팽하게 조여맸고, 활을 비껴멘 채 손에는 方天畵戟(방천화극)을 들고 적토마 위에 앉았는데, 과연 「사람 중에 여포요, 말 중에 적토」라는 평가가 헛말은 아니었다>그는 이렇게 화려한 자태를 한껏 뽐내며, 하내태수 왕광의 장수 方悅(방열)을 5합 만에 말 아래로 떨구어버린 뒤 적진을 유린했다.
여포는 다시 상당 태수 張楊(장양)의 부장 穆順(목순)을 단 1합 만에 쓰러뜨렸고, 10합 만에 북해태수 孔融(공융)의 부장 武安國(무안국)의 어깨를 잘라버렸으며, 백마 장군 公孫瓚(공손찬)을 단 몇합 만에 혼내주기도 했다. 게다가 당대 최고 수준의 무장인 관우와 장비 그리고 유비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싸웠다.
여포의 무예 솜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동탁이 장안으로 달아날 때의 일이다. 그는 동탁의 뒤를 쫓던 조조를 滎陽(형양)에서 맞아 싸웠는데, 맹장 夏候惇(하후돈)을 물리치고 조조軍을 곤경에 빠뜨렸다. 그뒤 僕陽(복양) 싸움에서 다시 조조軍을 상대한 여포는 許(허저)와 20여 합을 싸웠다.
이 때 조조가 『여포는 허저 한 사람만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고 하며, 典韋(전위), 하후돈, 夏候淵(하후연), 李典(이전), 樂進(악진) 등의 장수들을 한꺼번에 달려들게 하자, 여포는 그제야 달아났다.
여포는 활솜씨도 뛰어났다. 유비와 원술이 싸울 때, 그는 150보 밖에 방천 화극을 세워놓고 단번에 쏘아맞추어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도 했다. 이런 모든 전적들을 볼 때, 삼국지 최고의 武將(무장)으로는 역시 여포를 꼽을 수 밖에 없겠다.
2위:『관우 두려웠던 조조, 도읍 옮기려 했다』
2위로는 아무래도 관우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사실 관우를 두 번째 武將으로 꼽는 데 조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의」가 그를 실제 모습보다 다소 부풀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의」에서는 17로 제후연합군이 동탁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섰을 때 관우가 동탁의 장수 華雄(화웅)을 죽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화웅은 손견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조조에게 투항해 있던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듣고 떠나가면서 조조의 여섯 장수를 베었다고 하는 「五關斬六將(오관참육장)」 이야기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원소의 장수 文醜(문추) 역시 관우의 손이 아닌 조조에 의해 죽었다.
그러나 관우가 원소의 자랑이던 하북의 맹장 顔良(안량)을 죽인 일과, 형주를 지키고 있으면서 조조의 장수 于禁(우금)을 사로잡아 중원을 떨게 한 일을 결코 가볍게 볼 수는 없었다. 「정사」는 관우가 안량을 죽일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관우는 안량의 대장기와 마차의 덮개를 멀리서 바라보더니,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가 수만의 병사들 사이에 있는 안량을 찔러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그러나 원소의 여러 장수 중 능히 관우를 당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원소는 하는 수 없이 백마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당시 중원 최강의 실력자 원소의 진영에도 그를 당해낼 장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관우가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의 목을 베자, 그의 위엄은 華夏(화하:중국을 일컫는 말)에 떨쳤다고 한다. 이때 조조가 관우의 공격을 두려워해 도읍을 옮길 것을 고려했다 하니, 제후들이 그를 얼마나 두렵게 여겼는지 짐작할 만하다.
물론 당시 무명에 가깝던 龐德(방덕)과 150여 합을 겨뤄 승부를 가리지 못한 일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이때는 전성기를 한참 보낸 58세의 나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이 그의 진면목을 드러낸 싸움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조 같은 인물이 탐냈고, 손권 또한 그를 사로잡은 뒤 투항을 권유하기도 했을 만큼 관우는 당시 영웅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그에게 여포 다음 가는 랭킹 2위 자리를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3위:『800 군사로 10만을 물리친 장요』
여포와 관우 다음가는 장수로는 張遼(장요)를 들고 싶은데, 독자들은 아마 이 부분에서 상당히 의아해 할 것이다. 그 많은 삼국지의 장수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장요를 3위로 꼽느냐는 것일 테지만, 장요는 유비가 아니라 조조의 수하에 있었기 때문에 「연의」에서 적지 않게 손해(?)를 보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장요가 여포를 섬기고 있을 때 그의 됨됨이를 알아본 관우는 「공과 같은 인재가 왜 여포 같은 역적을 섬기느냐」라고 했다 한다. 인물은 인물이 알아본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여포가 小沛(소패)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를 공격할 때의 일이다. 장비가 장요를 맞아 싸우려고 하자 관우가 나서며 이를 제지했다.
「저 사람의 무예가 너와 나에 비해 못하지 않으니…」 관우가 아우 장비를 말린 것은 그만큼 장요의 무예가 뛰어남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정사」가 전하는 장요의 활약상은 눈부실 정도이다.
조조가 원소를 격파할 때 장요는 魯國(노국)의 여러 현들을 평정했고, 東海(동해)에서는 昌(창희)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 후에도 그는 黑山賊(흑산적) 孫輕(손경)의 항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요동의 도적 柳毅(유의)를 격파했다.
장요는 다시 오환의 單于頓(선우답돈)의 목을 베어 오환족 토벌의 수훈갑이 되었으며, 天柱山(천주산)의 험한 지형을 무릅쓰고 들어가 陳蘭(진란)과 梅成(매성)의 목을 베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뛰어난 실력을 뽐낸 것은 바로 「肥大戰(합비대전)」에서였다.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조는 장요에게 병사 7000명을 주며 악진, 이전 두 장수와 함께 합비를 지키도록 했다. 그런데 손권이 10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와 합비를 포위해 버렸다.
이때 조조는 『적이 올 때 뜯어보라』고 하며 편지를 써준 일이 있었다. 장요가 장수들과 함께 뜯어 보니, 「손권이 오거든 장요와 이전은 나가서 싸우고, 악진은 성을 지키라」는 내용이었다. 그 뜻을 파악한 장요는 정예병 800명을 뽑아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수십 명의 적을 죽이고 장수 둘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렇게 적진을 돌파한 장요는 손권이 머물고 있는 오군의 본진까지 치고 들어갔다. 이에 손권은 크게 놀랐고, 오나라의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언덕으로 달아나 긴 戟(극:창의 일종)으로 자기 몸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다.
뒤늦게 장요의 군사가 많지 않은 것을 안 손권은 주위를 겹겹으로 포위하게 했다. 그러나 장요는 아랑곳하지 않고 좌충우돌하며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그런데 뒤를 보니 부하 수십 명이 아직 포위를 뚫지 못해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에 장요가 다시 들어가 부하들을 모두 구출해 내자, 손권의 군사들은 기가 질려 더 이상 대적하려는 자가 없었다. 합비대전은 장요를 삼국지의 장수 중 무력 순위 3위에 자리매김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고 있다.
4위:『여포와 겨뤄 무승부 이룬 장비』
4위로는 장비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지략보다는 괴력으로 더 알려져 있는 장비는, 천하무적 여포와 虎關(호로관) 싸움에서 맞붙어 50여 합을 겨루면서도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當陽(당양)의 長阪破(장판파)에서는 조조의 대군을 호통 하나로 물리쳤으니―사실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그 괴력을 알 만하다. 이때의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조조의 모사 程昱(정욱)은 「관우와 장비는 萬人之敵(만인지적)할 만한 맹장들이었다」고 평가했다 한다.
장비는 관우와 함께 촉나라의 최고가는 장수였다. 진수는 관우와 장비를 함께 일컬어 「虎臣(호신:용맹스러운 신하)」이라 했고, 趙子龍(조자룡)과 黃忠(황충)에게는 「촉한의 爪牙(조아:발톱과 송곳니)」라고 했다. 관우와 장비는 조자룡과 황충 등과는 그 격이 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관우보다 아래의 서열에 놓는 이유는 진수와 제갈량의 평가 때문이다.
진수는 「정사」 장비전에서 「장비의 굳센 기상과 용맹은 관우에 버금간다」고 했고, 제갈량은 馬超(마초)를 평하면서 「문무를 겸비한 데다 용맹은 보통사람을 뛰어넘는 당대의 거물이며, 布(경포)나 彭越(팽월) 같은 류의 인물로 益德 (익덕:장비의 자)과는 견줄 수 있지만 美髥公(미염공:관우)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5위:『完體將軍으로 불린 하후돈』
5위에는 하후돈을 들고 싶다. 역시 조자룡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러면 왜 수많은 인물들을 제치고 하후돈이어야 하는가를 설명해 보기로 한다.
사실 「연의」에서는 하후돈의 활약상에 대해 두드러진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눈에 띌 만한 것으로는, 조조가 장안으로 달아나던 동탁을 추격하다가 여포에게 패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도 조조를 괴롭히던 형양태수 徐榮(서영)을 단 몇합 만에 죽인 일이다. 물론 이 싸움 이전에 하후돈은 여포와 마주쳤다가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그러나 이 싸움은 조조의 군대가 여포軍에 의해 여기저기서 돌파당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달아난 하후돈을 탓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그뒤 하후돈은 복양싸움에서 여포와 다시 맞붙어 수십 합을 겨루었는데, 갑자기 퍼붓기 시작한 비 때문에 승부를 내지 못했다.
소패성 근처에서 조조가 여포와 싸울 때, 하후돈은 여포의 부하 장수 高順(고순)과 맞붙은 적이 있었다. 이때 하후돈을 당해내지 못한 고순은 곧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이를 추격하던 하후돈은 조성이 쏜 화살에 맞아 왼쪽 눈을 실명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싸움이었다.
하후돈은 위기관리 능력도 갖춘 장수였다. 조조가 徐州(서주)를 토벌하러 나갔을 때, 張邈(장막)이 여포와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이들의 기세가 얼마나 강했는지 조조의 본거지인 복양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하후돈은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하후돈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평일 것이다. 하후돈을 수하에 두고 있던 조조는 그를 가리켜 「천하의 기재」라 했고, 조조의 사람들에 대해 혹평을 서슴지 않았던 衡(예형)조차도 하후돈을 가리켜 「完體將軍(완체장군)」이라고 했다.
예형은 荀彧(순욱)과 같은 모사를 喪家(상가)에나 드나들 인물로 평가했는데, 그런 그가 하후돈만은 깎아내리지 않은 것을 보면 하후돈이 어떤 장수였는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6위:『조자룡의 「당양전투」는 과장됐다』
6위에는 조자룡을 들고 싶다. 그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 장수는 장무, 여광, 형도영, 진응, 포륭, 모용렬, 한영, 한경, 한덕, 주찬, 한기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하후연이 황충에게 죽은 뒤, 조조가 한중을 되찾기 위해 대군을 몰고 쳐들어 왔을 때 조자룡이 보여준 솜씨는 실로 탁월한 것이었다. 조조軍의 군량을 빼앗기 위해 나갔던 황충이 도리어 포위당하자, 조자룡은 조조의 진영을 종횡무진하며 그를 구해냈다.
그러나 부하장수 張著(장저)가 부상을 입고 뒤에 처지자 다시 돌아가 구해냈으며, 張翼(장익)이 지키던 沔陽(면양)으로 들어가서는 성문을 활짝 열어놓고 조조軍을 맞는 대담함도 보였다. 그리고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군사를 물린 조조軍을 향해 쇠뇌를 퍼부어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를 둘러본 유비는 「자룡의 몸은 담력덩어리로구나!」라며 감탄했다 한다.
싸움을 잘 하려면 무예솜씨도 뛰어나야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담함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런 점을 볼 때, 조자룡의 한중싸움은 그를 돋보이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그런 조자룡이 장요 등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것은 그의 대표적인 싸움인 당양전투 때문이다.
그는 이 싸움에서 조조의 80만 대군 사이를 뚫고 유비의 아들 劉禪(유선)을 구해냈다고 하지만 이 내용은 「연의」가 과장한 것이고, 실제 조조軍은 기병 5000뿐이었다. 그러므로 손권의 10만 대군 사이를 헤집고 다녔던 장요의 합비대전보다 더 낮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당양싸움에서는 조자룡의 활약 때문에 승패가 뒤바뀌는 일이 없었지만, 합비대전에서는 장요 한 사람의 활약으로 인해 승패가 뒤바뀌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장요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7위:『17세부터 두각 나타낸 마초』
7위의 인물로는 마초를 들고 싶다. 마초는 처음 西凉太守(서량태수)이던 아버지 馬騰(마등)을 따라 이각과 곽사와 싸웠다. 이때 그의 나이가 17세. 하지만 그는 이각과 곽사의 장수 王方(왕방)을 단 몇합 만에 죽이고 李蒙(이몽)을 사로잡았다.
일찍부터 뛰어난 자질을 선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韓遂(한수)와 합세한 潼關(동관) 싸움에서 조조가 수염을 깎고 紅袍(홍포)마저 내던지며 달아나게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사」에서는 확인이 안되는 사실이다. 이 싸움에서 마초는 조조의 장수 허저와 무려 230여 합을 겨루어 승부를 내지 못했고, 萌關(가맹관)에서는 장비와 220여 합을 싸워 자웅을 가리지 못했다.
그만큼 무예가 뛰어나기도 했지만 체력 또한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楊阜(양부)가 조조에게 마초를 평하면서 「韓信(한신)과 布(경포)의 용맹을 지녔다」고 했고, 제갈량은 「경포나 맹월 같은 류의 인물로서 익덕과 견줄 수 있다」고 했으니 그에게 무력 7위의 순위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만 장비와 자웅을 가리지 못할 만큼 뛰어난 무예 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마초가 장비보다 한 단계 아래의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활약이 장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8위:안량
8위로는 하북의 맹장 안량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안량은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뚜렷한 활약을 보인 적이 없다. 白馬(백마) 싸움에 나서 관우에게 목숨을 잃은 게 고작이다. 그러나 안량이 그토록 맥없이 죽을 만큼 별 볼일 없는 장수였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다른 설이 있다. 당시 관우와 의형제 사이인 유비가 원소의 진영에 있었기 때문에, 안량은 관우를 알아보고 손짓으로 부르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관우는 안량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달려들어 목을 날려버렸다는 견해이다. 평소 안량이 그렇게도 뛰어난 무예를 자랑했다고 하는 점과 당시의 정황들로 볼 때 이것은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설일 것이다.
어쨌거나 안량을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근거는 백마싸움에서 조조의 장수 宋憲(송헌)을 3합 만에, 그리고 魏續(위속)을 단 1합 만에 목을 베어버린 그의 뛰어난 무예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중원최대의 강자로서 張(장합)과 같은 맹장을 수하에 두고 있던 원소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한 장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는 충분히 8위로 꼽힐 만한 자격이 있는 장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9위:장합
9위로는 장합을 들고 싶다. 「연의」에서는 장합을 지략이 형편 없는 장수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 장합은 街亭(가정)에서 馬謖(마속)을 물리쳤고,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진영을 설치하는 데 능해 제갈량과 촉의 장수들이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장합의 용맹을 잘 드러내준 싸움은 武都(무도)와 陰平(음평)을 놓고 사마의와 제갈량이 대치했을 때였다. 사마의의 명을 받은 장합은 戴陵(대릉)과 함께 촉군의 배후를 급습하다가 제갈량의 계략에 걸려들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촉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되어 빗발치는 화살 세례를 받는 상황에서도, 적진 사이를 좌충우돌하며 포위망을 뚫었다. 더구나 미처 포위를 뚫지 못한 대릉을 다시 돌아가 구해내기까지 하였다.
10위:『老將 황충의 활약』
10위로는 촉의 노장 황충을 들어야겠다. 유비가 長沙(장사)로 쳐들어올 무렵, 황충은 60세에 가까운 나이로 태수 韓玄(한현)을 섬기고 있었다. 당시 그는 한창 때를 훨씬 넘긴 나이였음에도, 유비 진영의 최고 맹장 관우를 맞아 180~190여 합을 겨뤄 자웅을 가리지 못할 만큼 대단한 무예를 뽐냈다.
그것만 가지고도 황충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뛰어난 용맹은 조조의 장수 하후연의 목을 벤 일을 통해 확인된다. 황충은 定軍山(정군산)에서 적장 하후연의 목을 베어, 한중을 놓고 유비와 조조를 겨룬 이 싸움에서 유비편으로 승리가 기울어지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사」의 기록은 「싸움에서는 항상 앞장서서 적진을 공략했고, 용감하고 강인함은 三軍(삼군)의 으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灌(관영:한고조 유방의 기병대장)⊃公(등공:하후영, 한고조 유방의 장수로서 하후돈의 조상이다)과 같은 인물에 비교하고 있다. 더구나 황충은 100보 밖에서 버들잎을 명중시키는 기막힌 활솜씨마저 지니고 있었으니, 그에게 10위 자리를 주어도 괜찮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