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志晩 머리 깎아 주다가 청와대行 - 陸여사가 머리 감을 물 데워 주기도 - 朴대통령은 『그렇게 큰 집에 살면 부끄럽지 않나』, 『국수나 한 그릇 먹고 가면 되지 뭐』, 『고속도로는 잘 닦았는데 인부가 많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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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순 엉터리』
대통령의 이발사라는 특이한 소재를 다룬 영화 「효자동 이발사」가 개봉 2개월 만에 관객 200만 명을 동원한 뒤 6월10일 현재 점유율 0.6%로 순위경쟁에서 밀려났다. 「효자동 이발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억압적인 시대의 父情(부정)을 잘 그렸다」는 평에서부터 「정면도전하지 않고 우화적으로 그려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는 혹평까지…. 필자의 경우 시대상황을 억지스럽게 반영하려는 시도보다는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과 소시민 이발사의 우정을 진솔하게 그렸더라면 훨씬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효자동 이발사」의 실제 모델 朴秀雄(박수웅·67)씨를 만나기 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영화를 봤을 때, 영화 속의 대통령은 惡의 이미지와 善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대통령이라는 공인은 인권을 탄압한 독재자로 부각되는 반면, 개인적으로는 이발사를 술자리에 초대하여 술을 권하는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朴正熙 대통령의 아들 志晩씨가 운영하는 (주)EG의 李光炯(이광형·55) 사장 사무실에서 朴秀雄씨를 만났다. 朴씨는 지난 5월 「효자동 이발사」가 개봉된 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빗발쳤으나 모두 거절했다. 영화를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고 한다.
『영화에 나온 게 다 엉터린데, 거기 나오는 이발사가 내가 아닌데 만날 필요가 없지요. 내용이 순 엉터리라』
경남 김해 출신인 朴秀雄씨는 극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해 경상도 출신인 필자도 가끔씩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朴씨의 관람평은 한마디로 『기가 차더라』는 것. 영화 첫 자막에 『이 내용은 실제 사실과 관련이 없다』고 나오지만, 朴正熙 대통령 시절 15년간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이발사로 일한 사람은 朴秀雄씨밖에 없으니, 그의 분개는 이해할 만했다.
『영화에 보니 효자이발소를 썩은 이발소로 만들어 놨데요. 효자이발소는 경무대와 같이 지은 최고로 좋은 이발소였는데, 2층이었고 타일을 다 붙여서 얼마나 좋았다고』
朴秀雄씨는 처음부터 영화에 대한 불만을 가득 털어놓았다. 그는 지난해 여름 「효자동 이발사」 제작사 청어람의 관계자를 만난 일이 있다고 했다.
『月刊朝鮮 기사를 읽고 영화 만들겠다고 해서 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 이야기로 돈 벌 생각하지 말라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보물 발굴 사업이 성공하면 내가 진짜 잘 만들 생각인데…. 시나리오를 갖고 와서 한번 읽어 보라고 하기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서 읽었어요. 내용이 순 엉터리여서 이상한 부분에 표시를 해 지난해 10월26일 朴대통령 기일 때 朴槿惠 한나라당 총재 비서 중의 한 사람에게 전했어요. 그러면 그쪽으로 전해지겠지 하고. 그러고 나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영화가 나왔데요』
「朴」자만 나와도 우는 사람들
月刊朝鮮 2001년 11월호에 朴秀雄씨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 그 기사를 보고 영화 관계자들이 기사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연락을 月刊朝鮮으로 해왔다. 「효자동 이발사」를 감독한 임찬상씨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발사는 상상의 인물이지만 시사종합지에 실린 실제 대통령 이발사의 인터뷰 등도 참조했다』고 밝혔다.
朴秀雄씨는 1964년부터 朴正熙 대통령의 이발을 담당하여 1979년 朴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崔圭夏 대통령의 이발을 담당하다가 1980년 8월 崔대통령이 하야할 때 청와대를 떠났다. 朴秀雄씨는 그동안 청와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지난해 10월26일, 청와대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朴槿惠씨와 朴志晩씨를 만났고, 朴正熙 대통령 생각에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朴秀雄씨와 잠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주)EG의 李光炯 사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朴대통령의 부속실에서 근무했던 李光炯씨는 「효자동 이발사」 영화를 안 봤으며 앞으로도 볼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TV에서 리뷰하는 걸 봤는데 영화를 완전히 코미디로 만들었더군요. 사실적으로 그렸으면 제대로 보고 평을 하겠지만,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고, 드라마일 뿐인데 볼 이유가 없지요』
어떤 장면이 실제와 다르냐고 물었을 때 李사장과 朴秀雄씨의 의견이 거의 일치했다. 대통령 앞에서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이 싸우는 장면은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라고 한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대통령이 이발할 때 경호실장이 뒤에 버티고 서서 이발사를 지켜보고 있는 것도 잘못됐다는 것이다. 朴秀雄씨는 『이발하는 데 뒤에 왜 서 있어. 영화를 얄궂게 만들었다』며 개탄했다.
朴대통령이 이발할 때 가끔 陸英修 여사가 와서 물을 떠줄 때는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朴대통령 혼자 왔다고 한다. 영화에서 이발사의 아들이 대통령의 아들을 넘어뜨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일이 생길 소지는 아예 없다고 한다. 영화라곤 하지만 억지스러운 장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두 사람의 의견이었다.
영화에서 이발사 성한모가 대통령과 술을 세 번이나 마시는 장면에 대해, 朴秀雄씨는 『그런 게 어디 있어, 택도 아닌 소리지』라며 한심해 했다.
『이발하는 놈이 어데서 술을 마셔. 그 앞에서 물도 한잔 못 먹는데. 내가 수차 어르신을 따라다녔지만 항상 바깥을 돈다고. 사진에 혹시 비칠까 싶어서』
朴秀雄씨는 朴正熙 대통령이 지방 나들이를 할 때면 가 보고 싶어서 기자들 차에 동승하곤 했다.
영화 후반부, 이발사가 점쟁이의 지시에 따라 대통령 초상화의 안구 부분을 면도칼로 긁는 장면에 대해 朴秀雄씨는 『말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李光炯씨는 기가 막히는 설정이라고 했다.
『朴선생님은 작년에 나를 만나자마자 손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어요. 이분은 朴대통령 「朴」자만 나와도 우는 분이에요. 충성심이 나보다 더한 분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요.
올해 초 朴선생님이 EG 금산공장에 연락도 안 하고 불쑥 나타났어요.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우는 겁니다. 그저 朴대통령 아들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사실에 감격해서. 朴대통령에 대해 100%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분입니다』
「朴」자만 나와도 울고 아직도 100% 충성심을 갖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李光炯 사장은 이런 분들이 많다며 한국야쿠르트 尹德炳(윤덕병) 회장과의 일화를 들려 줬다.
『반 말을 하지 않는 朴대통령』
『尹회장님도 5·16 주체세력인데 경호실 차장으로 일하다가 초기에 그만두고 사업을 하셨지요. 지금 나이가 여든이 다 되신 어른이에요. 나만 보면 「李동지, 令息(영식·朴志晩) 잘 부탁해」라고 말씀하시더니, 어느 날 令息을 좀 데려 오라는 겁니다. 朴志晩 회장은 이분을 잘 모르지요.
한국야쿠르트가 근년에 강남 신사동 사거리에 빌딩을 새로 지었어요. 지난해 11월에 그 사무실에 갔을 때 尹회장님이 선 채로 朴회장의 두 손을 잡더니 그냥 통곡을 하시는 겁니다. 5분도 넘게 눈물을 줄줄 흘려서 민망할 정도였어요.
한참 우신 후 朴회장을 껴안더니 소파에 앉히더군요. 손을 잡고 한 시간 반을 눈물을 글썽이며 얘기를 나눈 다음 朴회장에게 「나랑 약속해. 朴대통령 혈손을 잇는다고 약속해」라고 하시더군요. 요즘도 尹회장님이 전화하셔서 「朴회장 언제 결혼하느냐」고 물으십니다』
朴秀雄씨는 李사장이 얘기할 때 손수건까지 꺼내 들고 눈물을 닦았다. 李光炯 사장은 『朴대통령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나도 각하 얘기만 나오면 눈물이 납니다』라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朴秀雄씨는 혼잣말처럼 『인정이 얼마나 많으신 분인데』라며 또 눈물을 흘렸다. 李光炯 사장은 朴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TV 드라마 등에서 朴대통령을 냉혹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그리고, 말도 딱딱 끊어서 하는 것처럼 연기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회의를 할 때 소리지를 때도 있지만 보통 때의 모습은 진짜 경상도 시골의 어른처럼 다정다감한 모습입니다.
제가 27세에 청와대 부속실에 들어가서 33세에 나왔어요. 朴대통령 마지막 집권 시기에 제가 모셨지요. 朴대통령과 저의 나이가 서른 살 정도 차이 났는데 한 번도 반말을 안 하셨어요. 「李군, 이것 좀 해주게」라고 하셨죠. 아주 젠틀하고 인정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항상 손을 잡아 주면서 말씀하셨죠. 「바쁘다고 핑계대지 말고 공부 게을리 하지마」 라고 하셨지요. 집안의 어른이 자녀나 손주에게 하듯 다정다감한 말투였어요』
李光炯 사장의 목소리도 자꾸 잦아들었다.
『인정이 많아서 뭐 있으면 자꾸 주셔요. 자식에게 주듯이 주고 싶은 거예요. 손에 들고 와서 「李군, 이거 한번 써 보게」 하면서 브라운 전기면도기를 주셨는데, 아직도 갖고 있어요. 우리나라 전기면도기가 나오지 않았을 때, 외국 갔다 온 사람들이 선물한 걸 나에게 주셨어요. 만년필도 주시고 볼펜도 주셨어요. 매일 새벽 6시에 인터폰하셔서 「李군, 운동하자」 그러시면 빨리 단장하고 나갑니다. 배드민턴도 하고 뛰기도 했지요. 나와 체격이 비슷하셨어요. 하루는 팔에다 뭘 걸고 내려오셔요. 「李군, 이거 내 입던 건데 자네 한번 입어봐 맞을 거야」 하시며 청색 트레이닝복을 주셨어요. 참 인정이 많았어요』
李光炯 사장은 『청와대에 근무할 때 「이 순간 이 어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그건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심정으로 일했어요. 「새마을 운동을 통해 조국 근대화를 이루는 大역사의 한 부분에서 일했다는 게 내 생애와 내 家門의 영광」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朴志晩, 『우리 아저씨』
李사장은 최근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육사교장의 편지」를 자녀들에게 읽어 주다가 목이 메어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朴대통령과 서독 광부들, 간호사들이 그렇게 고생한 걸 대학생인 아들들이 몰랐다고 하더군요. 나에게 「아버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라고 했습니다. 당시 모두들 순수한 충성심을 갖고 일했어요. 이권개입을 하거나 밥 얻어먹은 적이 없어요. 밖에 나가서 친구를 만나도 청와대에 근무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게 충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朴대통령이 종이 한 장을 아끼고 절대 돈을 못 쓰게 하니 다들 본받아서 그랬지요. 근검하고 소박한 분입니다』
李光炯 사장은 朴대통령이 언제나 모범을 보였고, 자신은 일거수 일투족을 배우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청와대에 장조카 박재홍씨 외에 어떤 친인척도 못 오게 했어요. 박재홍씨에게 집안의 모든 것을 보고받은 뒤 밥 먹고살기 힘든 사람을 도와주라고 지시했죠. 朴대통령이 친인척 관리를 철저히 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을, 2004년의 잣대를 놓고 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 당시 국민소득과 정치·문화·교육 수준을 감안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해야지요. 필요에 따라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朴대통령을 평가하면 안 됩니다』
李光炯 사장은 「효자동 이발사」가 코미디물이긴 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실미도」라는 영화를 1000만 명이 봤습니다. 완성도가 있기 때문에 영화를 많이 봤겠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시 실정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그 영화를 보고 「진짜 저랬구나」하고 믿더군요. 영화를 보니 결정적 순간에 아닌 게 많았습니다. 「효자동 이발사」를 보고 젊은 사람들이 「아, 저때 저랬구나」 하고 믿어 버릴까 봐 걱정이죠』
대화를 하고 있을 때 朴志晩 회장이 사무실에 들렀다. 어릴 때부터 머리를 깎아준 朴秀雄씨의 손을 잡고 『우리 아저씨』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朴秀雄씨는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 朴志晩씨에게 인사하다가 또 눈물을 지었다.
다음날 朴秀雄씨를 광화문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효자동 이발사」 때문에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그가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자주 쓰는 말은 『택도 아닌 이야기』, 『얄궂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1937년생인 그는 고향 경남 김해에서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제주도로 건너갔다가 거기서 8개월 동안 이발 기술을 배웠다. 서울에 올라와서 이발소에 취직하려고 여러 군데 다녔지만 도통 자신을 받아 주는 데가 없었다.
경무대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청와대 근처에 왔다가 청와대 코앞에 있던 효자이발소에 들렀고, 그곳에 취직이 되었다. 1960년 4·19가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다. 이발소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국민대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할 요량으로 이발사로 일했다.
志晩 어린이 이발하다 청와대와 인연
1964년에 朴正熙 대통령이 청와대로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효자이발소 직원들에게 흰가운을 입혀 연도에 도열시켰다. 그날 그는 「대통령의 이발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후 어떤 아이가 보호자와 같이 머리를 자르러 왔다. 머리를 자를 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그 아이를 위해 동화책을 외워서 얘기해 주었고, 아이가 이야기에 열중할 때 순식간에 머리를 잘랐다. 그때 종로경찰서 경사가 데리고 다녀 부잣집 아이로만 알고 있다가 어느 날 『뉘집 아이입니까』라고 물었고, 그제야 그 아이가 경복유치원에 다니는 朴대통령의 아들 志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1964년 5월쯤, 지프차가 한 대 오더니 이발할 사람이 있다며 청와대로 가자고 했다. 데리러 온 사람은 陸英修 여사의 운전기사인 구인서씨였는데, 청와대에 가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준 일이 없다고 한다. 그저 높은 사람이 머리를 자르려나 보다 생각했다. 청와대 2층의 작은 사무실에 가니 경대 하나와 허름한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경대에 美製 중에 가장 싼 로션과 스킨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 朴대통령이 들어왔고 그는 「각하」라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 얼떨결에 『안녕하십니까』라고만 인사했다.
머리 감는 물을 데워 준 陸여사
―영화에서 경호실장이 『용안에 상처를 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 장면이 나오던데 떨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 한 사람도 없고 옆에 지키고 있는 사람도 없었어요. 순 엉터리라. 대통령께서는 워낙 동작이 빠르셔서 순식간에 자리에 앉으셨고 일절 말씀이 없으셨어요. 나도 한번 하는 건데 뭐 떨 것도 없고 해서 재빨리 잘랐지. 내가 뱃심이 얼마나 좋은데. 내 이발의 특기는 속성으로 자르는 거라. 영화에 보니까 목을 베서 피가 나오던데 그런 게 어딨어. 면도를 속성으로 잘했지요』
머리를 자르고 나자 비서실에서 돈을 받아가라고 했다. 그는 『대통령 이발을 한 것만 해도 영광인데, 돈은 무슨 돈이냐』면서 그냥 돌아왔다. 하지만 대통령이 외상이발을 할 수 없다며 청와대에서 사람을 시켜 돈을 보내 왔다.
그날로부터 열흘에 한 번 정도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의 이발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전에는 대연각 호텔의 여자 이발사가 대통령의 이발을 했었다. 하지만 여자 이발사가 드나드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陸英修 여사의 작전에 의해 朴秀雄씨가 청와대에 입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이발사들이 많은데, 실력이 있으니 청와대까지 가신 거 아닌가요.
『실력은 무슨. 志晩 어린이를 잘해 주니까 그냥 부르신 거지. 내가 좀 못 해도 사모님이 이발사를 바꾸기 위해 「아저씨 참 이발 잘하신다」고 하셨어요. 2층 사무실이 간이 이발소가 된 거라. 사모님이 더운물과 찬물을 섞어서 머리 감도록 가끔 도와주셨지. 내 신원조회도 안 해보고 부르셨다니까요』
청와대에 자주 가게 되자 대통령의 이발사가 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 됐다. 그래서 효자이발소 고객인 농림부 차관 출신의 김종대씨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분이 「그 안에서 어르신하고 얘기했던 거 남들에게 말하지 말고, 그 안에서 들었던 이야기 밖에 나와서 하지 말고, 그 안 사람들에게 그 안의 사정을 묻지도 말게. 그저 맡은 일만 묵묵히 하게. 참 어려운 일을 맡았네」라고 하시더라고. 그분이 말씀하신 걸 늘 가슴에 새기고 그대로 지켰지요』
朴秀雄씨는 김종대씨의 조언처럼 밖에서 자신이 청와대 이발사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고, 청와대에서 일어난 일도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朴秀雄씨는 朴正熙 대통령을 「각하」,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陸여사는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청와대 안에서는 다들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곱슬머리 朴대통령, 『너무 자르지 마래이』
朴秀雄씨가 처음 청와대에 갔을 때 朴正熙 대통령은 이마의 머리카락이 목 뒤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곱슬머리여서 그런 머리 스타일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朴씨는 갈 때마다 조금씩 짧게 잘랐다. 그러면 朴대통령은 『머리 너무 자르지 마래이』라고 주의를 줬다.
朴대통령 내외분이 워낙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朴대통령이 이발할 때 가끔 陸여사가 와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어느 날 陸여사가 『결혼할 때는 곱슬머리가 아니었는데 왜 그동안 곱슬머리가 됐느냐』고 의아해했다. 朴대통령이 陸여사가 곱슬머리인 줄 몰랐던 비결을 말해 주었다고 한다.
『옛날에 「찌꾸」라는 게 있었어요. 소기름처럼 시커멓고 냄새도 안 좋은데 예전에 포마드가 없어서 그걸 발랐어요. 대통령 되시기 전에 군대에서 찌꾸를 바르고 참빗으로 머리를 뒤로 싹 빗어 넘겼답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쫙 펴졌지. 얼마나 당겨 빗었던지 눈썹이 막 딸려 올라갔답니다. 각하께서 그 얘기를 하시자 사모님이 웃었지요』
朴秀雄씨는 『陸英修 여사가 저기서 오시면 복도가 다 환해질 정도로 기품이 있었어요. 그런 인물이 없지. 근혜 총재도 인물이 좋지만 엄마 못 따라가요』라고 회상했다.
朴秀雄씨는 고향에 다녀오면서 시골집에서 딴 단감을 비서실에 선물했다.
『두 접이 넘었을 겁니다. 며칠 후에 사모님이 나를 보시더니 시골에서 가져온 감을 잘 먹었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더니 중국 담배하고 술하고 해서 한보따리를 집으로 보내 주셨어요. 내가 마치 단감을 선물한 것처럼 되었어요. 나는 그냥 비서실 직원들 먹으라고 준 건데』
朴씨가 청와대 이발사가 되자 효자이발소 주인 신모씨는 청와대에서 번 돈을 나누자고 했다. 그는 청와대에서 받는 돈의 액수를 공개할 수 없어서 아예 효자이발소를 그만두고 1965년에 인근에 북악이발소를 차렸다.
朴秀雄씨는 청와대에서 일하면서부터 다니던 국민대학교도 그만두었다. 일국의 대통령 이발사가 되었으면 성공했는데, 다른 걸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서였다.
청와대에 드나들 때 깔끔하게 차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사동 가구점에서 가방까지 맞추었다. 오동나무에 옷칠을 하고 자개를 박아 만든 007가방 형태의 나무 가방을 1만원을 주고 만들고, 다른 사람들은 5000원에 사 입는 흰가운도 1만원을 주고 맞추었다.
朴秀雄씨는 북악이발소를 1년 정도 운영하다가 청와대의 부름에 전념하기 위해 처분해 버렸다. 朴正熙 대통령은 보통 열흘에 한 번 정도 이발을 했으나 울산에 비료공장을 건설할 때는 29일 만에 朴秀雄씨를 찾은 적도 있다고 한다. 한번은 밤에 이발을 하러 갔는데 朴대통령이 이발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울산에 한비 사카린 사건 났을 때였는데 너무 피곤하셨던 거라. 이쪽을 다 잘랐는데 깨울 수도 없고 난감하더라고. 근데 조금 있으니까 알고 고개를 돌려 주셨지요.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셨다고』
처음에는 면도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나 나날이 면도하는 것이 민망했다고 한다. 게다가 朴대통령은 수염이 한쪽으로만 난 게 아니라 엇갈려서 나는 스타일이어서 면도하기가 힘들었다.
『어르신도 수염이 깎기 힘들게 났다는 걸 아셔요. 갈수록 어려워서 안전면도라는 걸 구해서 「이걸로 직접 하시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혼자 해보시더라고. 안전면도라고 일회용 면도기였는데 그때만 해도 국산은 그런 게 없었지요』
『길은 좋게 되었다만 인부들이 많이 죽었다』
朴秀雄씨는 청와대에 들어갈 때마다 가방을 검열당했는데, 긴 면도칼과 가위는 보기에 따라 흉기가 될 수도 있는 것들이다.
1969년에 청와대 안에 이발소를 개설하면서 朴秀雄씨는 아예 청와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총무처 별정직 직원으로 청와대에 파견 나가는 형식을 띠었다. 이발사 1명과 면도사 2명, 머리감는 사람 1명을 관리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朴秀雄씨는 아무 심사도 받지 않고 청와대에 들어갔지만, 그 외 이발소 직원들은 비서실에서 엄선했다고 한다. 청와대 직원들은 그를 「朴실장」, 「朴씨」 등 내키는 대로 불렀다. 그는 청와대에 근무할 때 직원들에게 은근히 괄시를 받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朴대통령은 이발소 직원들을 친근하게 대했다. 당시 면도사 중에 박순옥씨가 있었는데 朴秀雄씨는 『3朴씨가 잘 통했다』며 웃었다. 朴대통령은 가끔씩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얘기해 달라』는 요청도 했다.
『농촌에 오토바이도 많이 생기고, 반찬도 많아졌다는 얘기를 했지요. 그전에 먹고살기가 힘들었거든. 한창 산림녹화를 한다고 지방관리들이 소를 산에 못 올라가게 했어요. 「촌에서 노인들이 소를 산에 못 올라가게 한다고 수군거리는 얘기를 들었다」는 보고를 드리니까 각하께서 「내가 무슨 얘기를 하면 밑에 내려가면서 針小棒大(침소봉대)가 된다. 소가 산에서 소나무를 뜯어 먹는 것도 아니고 풀밖에 안 먹는데 왜 못 올라가게 하나」고 하시더군요』
朴秀雄씨는 고속도로가 개통된 뒤 『고속도로를 잘 만들었는데다 이정표와 가드레일 같은 시설물도 좋더라』고 말하자 朴대통령은 『길은 좋게 되었다만 인부들이 많이 죽었다』며 비통해했다고 한다.
『장기 집권한다, 독재한다』는 얘기도 전했느냐고 하자 朴씨는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나』라고 했다.
청와대 안의 이발소는 朴대통령 父子와 비서실 직원, 출입기자들이 주로 이용했다. 이발 요금은 2500원이었다. 기자들 중에는 이발을 하다가 朴대통령이 오면 황급히 일어나느라 신발을 못 찾아서 허둥대는 사람도 있었으나, 의자에 누운 채 입으로만 인사하는 기자도 있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그런 일에 개의치 않았지만, 朴씨는 동네 어른이 와도 일어서는 게 예의인데 버젓이 누워서 인사하는 걸 볼 때 자기가 분통이 터졌다고 했다.
이발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어떤 날은 하루 매상이 1만원도 오르지 않을 때가 있었다. 순경 월급이 2만6000원일 때 朴씨는 10만원을 받았다. 월급을 많이 받기가 미안해서 『놀고 먹는 것 같다』고 말하자 朴대통령이 『이 사람아, 돈 벌려고 이발소 만들었나. 자네 좀 편하게 있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가끔 朴대통령이 용돈을 따로 주었다. 그러면 그걸 이발소 직원들과 똑같이 분배한 뒤 다음날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만큼 실력이 뛰어나서 그런 대우를 받은 게 아니냐고 묻자 朴씨는 『그게 다 緣(연)이지요』라고 답했다.
사모아의 눈물바다
朴秀雄씨는 朴대통령을 따라 해외 나들이를 다섯 차례나 했다. 1966년 처음 해외 나들이를 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청와대에서 그에 관한 신원조회를 의뢰했다.
『여권 만들려면 신원조회를 해야 되거든. 청와대에서 고향의 시골 파출소에 연락하니 고향에서 난리가 났지요. 우리 형님들에게 동생이 청와대에 있는 훌륭한 사람인 걸 왜 말 안 했냐면서. 이발하는지도 모르고. 일절 밖에다 말을 안 했으니까 다들 몰랐지요. 그 뒤에 나에게 이런저런 청탁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일절 응하지 않았지요』
1966년 朴正熙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비서실 김성구씨가 수행했고, 朴秀雄씨도 따라가게 되었다.
『각하가 「자네, 해외여행 처음이제?」 하셨어요. 홍콩·월남·필리핀을 4박5일 동안 방문하셨는데 우리는 각하가 주무시는 바로 옆방에서 잤지요. 각하의 이발도 해드렸지만 양말도 빨고, 손수건도 빨고, 구두도 닦고, 잔심부름하러 간 거지. 과일이나 양주 같은 거 오면 우리가 먼저 맛을 보고, 커피도 오면 먼저 먹어 보고 그랬지요』
그 후에도 朴正熙 대통령을 따라 호주·뉴질랜드·캐나다를 다녀왔으며, 미국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고 한다.
『미국에 갈 때 존슨 대통령이 공군 1호기를 보내 줘서 그거 타고 가셨지요. 가는데 마다 朴대통령을 환영하고 선물을 많이 줘서 돌아올 때 가방 40개에 선물을 가득 담아 왔어요. 가방을 옮기다 보면 손이 벌겋게 되었지요. 어디를 가든지 대통령을 엄청 환영했어요. 서울에 도착하면 군용트럭이 와서 선물들을 청와대로 싣고 갔지요. 나야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지. 월남에서 받은 게 있었는데 그걸 공항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보니까 양주더라고.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참 좋은 구경했지요』
朴대통령은 닉슨과의 회담을 마치고 우리나라 어부 5000명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南태평양 사모아 섬에 간 적이 있다. 朴대통령 환영식이 열린 자리에 한국 어부들 500여 명이 참석했다.
『朴대통령이 어부들에게 「처자식을 두고 먼 남태평양까지 와서 거친 바다와 싸우며 열심히 일하는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연설을 할 때 울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그때 사모님도 같이 가셨는데, 사모님도 울고 수행한 사람들도 다 울어서 울음바다가 되었지요』
그는 얘기를 하는 틈틈이 울어서 필자도 콧날이 시큰할 지경이었다.
朴秀雄씨는 朴正熙 대통령이 자상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엄한 분이라고 말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처음 지을 당시 분양이 되지 않자 현대건설에서 아파트 20여 채를 프리미엄 없이 경호원들에게 판매하였다. 이 사실을 안 朴대통령은 특혜분양을 받은 경호실 직원 28명을 해고했다. 朴대통령은 청와대 某 인사가 부부동반 해외 나들이를 다녀오자 바로 파면했다. 달러를 아껴야 하는 어려운 시기에 부부가 해외에 갔다온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수나 한 그릇 먹고 가면 되지』
朴秀雄씨는 청와대에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朴대통령의 이런 엄격한 면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어르신께서 한번 화나면 천장이 들썩거릴 정도였지요. 일국의 대통령이 되면 서릿발이 내릴 정도로 차가워야지요. 확실한 어른이기 때문에 처신을 잘하려고 다들 노력했지요』
청와대 직원들이 朴秀雄씨에게 『각하가 오늘도 이발했나. 오늘은 어디로 행차하신다고 하더냐』고 묻기 일쑤였지만 『그런 거 알아서 뭐하느냐』고 말했을 뿐 청와대 안에서도 입조심을 했다.
한번은 朴正熙 대통령이 대구로 지방 출장을 갈 때 朴秀雄씨도 기자들이 탄 그레이하운드에 동승해 따라갔다. 朴대통령은 대통령 전용차를 타고 내려와서 업무를 마친 뒤 비행기로 돌아가기 위해 대구비행장에 도착했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식사를 하고 떠나기 위해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좀처럼 점심이 나오지 않았다.
車智澈 경호실장이 추풍령의 한 식당에 꼬리곰탕을 시켰는데, 너무 멀어서 제시간에 닿지 못했던 것이다. 朴대통령이 예전에 이용한 적이 있는 집이었다. 나중에야 朴대통령이 추풍령으로 점심 주문한 사실을 알고 『국수나 한 그릇 먹고 가면 되지, 여기서 추풍령이 어디라고 점심을 시켰느냐』며 식사도 하지 않고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큰 집에 살면 부끄럽지 않나』
그날 朴秀雄씨는 대통령 전용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대통령 차를 타고 대통령이 드시는 과자도 먹고 그랬지. 올라오면서 운전기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요. 운전기사가 건평이 한 60평 되는 집을 샀답니다. 대지까지 합치면 200평이나 되는 큰 집이었는데 한번은 어르신이 부르시더니 「집이 전체 몇 평이냐」고 물으시더랍니다. 그래서 200평이라고 대답을 하니까 각하가 「동네 사람들 부끄럽지 않나. 그렇게 큰 집에 살면 부끄럽지 않나」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다음날 당장 집을 팔고 보고했답니다. 대통령께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점검하시니 다들 조심했지요』
朴秀雄씨는 효자이발소 손님이었던 권모씨가 들려 준 얘기도 소개했다. 朴대통령과 사범학교 동기생인 권모 비서관이 삼청동에 으리으리한 집을 지었을 때 朴正熙 대통령은 경호실에 누구 집인지 조사하고 사진을 찍어 오게 했다. 朴대통령은 권모 비서에게 『혁명할 때는 다 잘 살자고 했지 혼자만 잘 살려고 한 거 아니지 않느냐』며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이 초창기부터 주변을 철저히 살펴 부정부패의 소지가 생기지 않도록 하셨어요. 각하가 깨끗하니까 그런 얘기를 하면 다들 꼼짝 못했지』
그런가 하면 朴대통령은 집이 없는 朴秀雄씨를 측은하게 여겼다고 한다.
『청운동 셋집에 살 때 면도사 박순옥씨에게 「朴군 집은 있나」라고 물어보시더랍니다. 박순옥씨가 「셋집에 산다」고 하자 어르신께서 「나는 새도 들의 짐승도 밤에 자기 둥지로 가는데 집이 없다니」라고 말했답니다』
朴秀雄씨는 1976년 용산구 청파동에 13평짜리 연립주택을 마련했다. 1년 후인 1977년에 세검정 가는 길에 있던 과학수사연구소를 헌 자리에 청와대 직원들을 위한 아파트 두 동이 들어섰다. 朴대통령은 아파트가 완공되자 朴秀雄씨에게 『셋집에 살지 말고 아파트로 오라』고 했다.
朴秀雄씨는 스무 살 차이 나는 朴대통령이 아버지 같았다고 회고했다. 처음에는 朴군이라고 불렀지만 나중에는 「임자」라고 불렀을 정도로 자신을 신임했다며 또 울먹였다. 朴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오래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100만원씩 보너스를 준 일이 있었다. 朴秀雄씨는 자신이 5년 동안은 밖에서 드나들었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르신이 「자네, 오래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돈 받았나」 하기에 나는 「해당이 안 됩니다」 그랬지요. 언제부터 했냐고 하셔서 「1964년부터 했지만 5년 동안은 밖에서 왔다갔다 했습니다」라고 했더니 손가락을 꼽아 보시더라고. 그러더니 「10년이 넘었네. 朴군을 빠뜨릴 수 있나」 하셨어요. 내가 청와대 안에서 얼마나 괄시를 많이 받았다고. 정식 직원도 아니고 이발사니까. 그래서 날 빼놨지. 근데 다음날 총무비서실에서 100만원을 줬어요. 그런 일 하나하나 생각하면 다 고맙지요』
車실장에게 대들다
청와대에 있을 때 자신은 특별히 어디 소속된 데가 없어서 누구에게 고개 숙이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높은 사람들 차가 지나갈 때 다들 인사하는데 자신은 인사하지 않아서 「뻣뻣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朴秀雄씨는 1년 동안 車智澈 경호실장의 머리를 해준 적이 있다. 車智澈 경호실장 비서가 車실장이 오기 전에 꼭 전화를 해서 아무도 오지 않게 하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한테 「경호실장이 그렇게 무섭나, 그 사람 오면 우리는 오지도 못하게 하고 왜 그러냐」고 말하기도 했어요. 이발소가 꼭 머리만 깎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휴게소처럼 자주 들락거리면서 바둑도 두고 그랬는데, 車智澈 실장은 혼자만 사용하려고 했지요』
朴씨는 이발소를 좀더 즐거운 장소로 만들기 위해 카세트를 하나 구입해 늘 노래를 틀어 놓았다. 朴대통령이 「황성옛터」라는 노래를 좋아하는 걸 알고 가사를 적어주기도 했다.
『대통령께서 가사를 보시더니 「朴군, 황성옛터의 「황」 자가 틀렸네. 이 때는 임금 皇(황)이 아니라 황폐하다는 荒(황)을 써야 맞지. 그러셨지요』
車智澈 실장은 나중에 아예 朴씨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이발을 하게 했다. 매일 아침에 가서 이발을 했는데 車실장은 약속시간보다 점점 늦게 나타나더니 나중에는 1시간씩 늦게 오곤 했다.
『경호실에서 이발소까지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렸어요. 각하가 갑자기 머리할 일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더라고. 매일 아침에 車실장 방에 갔다가 안 보이면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뚜껑 덮어 놓고 그냥 기대서 잤지 뭐. 그러다가 문 소리가 들리면 나갔지. 점점 부아가 나요. 대통령도 시간을 안 어기고, 좀 늦으면 늦는다고 직접 와서 말씀해 주시는데, 아무 연락도 없이 매일 아침 늦게 오니 화가 났지.
朴대통령은 머리할 때 생전 말씀이 없으셔요. 한 번도 불만을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근데 車실장은 머리카락 한 올 가지고 트집 잡고 좀더 올리라느니 내리라느니. 도저히 못 참겠어서 어느 날 내가 그랬어요. 「실장님, 내일 아침부터 다른 이발사 불러요.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당최 안 되겠어요」 그랬더니 눈이 둥그레지더라고. 그리고 그냥 나와 버렸지 뭐』
朴秀雄씨는 朴대통령이 陸英修 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고 전한다. 陸여사가 총탄에 쓰러진 그날 아침 朴秀雄씨는 빗을 떨어뜨렸는데, 공교롭게도 부러져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朴대통령이 눈치채지 못하게 부러진 빗을 의자 밑으로 밀어 넣고 다른 빗을 꺼내서 일했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두 분의 이별을 암시한 거 같다며 한숨지었다.
陸여사 장례를 치른 뒤 처음으로 朴대통령이 이발하러 오던 날의 일이다.
『송구스러워서 얼굴을 볼 수 없었어요. 인사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을 수 없어서 「각하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렸어요.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어르신이 의자에 앉으시려다가 내가 상주에게 인사하는 걸로 아시고, 의자 옆으로 물러서서 고개를 숙이시면서 인사를 받으셨어요. 예의가 정말 바른 분입니다』
公과 私가 분명했다
朴志晩씨가 육군사관학교 입학할 때쯤 朴대통령은 눈에 띄게 쓸쓸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대통령께서 우리 志晩이 내일 육사 입교하는데 머리 좀 깎아 달라」고 하실 때 왜 그렇게 쓸쓸해 보이던지. 다음날 아침에 어르신이 학부모 자격으로 志晩씨와 함께 육사 입학식에 가셨어요. 나는 몰랐지요. 얼마 후에 나와 알고 지냈던 육사 헌병대장인 김수길씨가 전화를 했어요. 「朴대통령이 육사 오시는 거 미리 좀 알려 주지 아무도 안 알려 줘서 다들 혼비백산했다」면서.
육사 앞에서 헌병이 보초를 서고 있는데 차가 한 대 지나갔답니다. 거기 朴대통령이 타고 있어서 헌병이 깜짝 놀라 헌병대장에게 연락하고 교장에게 연락하고 다들 난리난 거지. 그때 벌써 대통령은 육사 생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어요. 교장이 달려와서 인사를 하니까 대통령이 「나는 오늘 대통령이 아니라 학부모 입장이니 이해하라」고 했답니다. 公과 私가 분명한 분입니다』
朴秀雄씨는 인터뷰 틈틈이 계속 눈물을 훔쳤다. 대통령 집무실에 걸어 놓은 浩然之氣(호연지기)의 뜻을 음미하며 살았다는 朴씨는 朴대통령이 늘 외우던 朱子(주자)의 詩도 암기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아직 못 가의 봄풀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어느덧 세월은 빨리 흘러 섬돌 앞의 오동나무는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느니라)
『어르신이 이 詩를 참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나도 매일 외웠지요. 어느 날 어르신이 「집을 왈칵 사는 거보다 조금씩 불려 가는 게 좋다」고 하시더라고. 「왈칵」이라는 게 갑자기 큰 거 산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지. 대통령께서 「나도 군대생활 하느라 집이 없었다가 나중에 신당동에 집을 사놨다. 대통령 그만두고 조금 있으면 신당동으로 갈 텐데…」 이러시더니 고개를 돌리시더라고. 그 말씀을 듣고 나도 마음이 한정없이 가라앉더라고. 신당동으로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10·26 다음날 풍경
1979년 10월27일 새벽 5시30분경 朴秀雄씨는 아파트 앞의 낙엽을 쓸고 있었다. 청와대에 살면서 朴대통령을 모시는 게 너무 영광스러웠다는 그는 전날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경호실 직원들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朴秀雄씨가 『왜 새벽부터 돌아다니느냐』고 묻자,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청소만 하고 있냐』고 말했다.
『그러더니 각하가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뭐 어째? 내가 깜짝 놀라서 빗자루를 던지고 청와대 쪽으로 올라가 봤어요. 기자들이 와 있었는데 자세한 소식을 잘 모르더라고. 경호원 말만 듣고 믿을 수 없는 데다 함부로 각하 소식을 물을 수도 없어 동향만 살피고 있었죠. 마음은 불안했지만 설마하고 있는데, 한 오전 7시쯤 되니까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각하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 조금 있으니까 직원들 전부 모이라고 하더니 문상 가자는 겁니다. 그때 「아이쿠, 진짜 가셨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더라고. 청와대에 올라가는데 향 냄새가 코를 찔러요. 그때부터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지요』
당시 10일장을 지냈는데 허탈한 직원들이 이발소에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비서실에 있는 여직원이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朴대통령에게 야단 맞고 눈물 흘리는 걸 봤답니다. 나도 몇 번 중정부장과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데 사람이 당차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복도에 혼자 나와 있는 걸 몇 번 봤는데, 왜 나와 있나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朴秀雄씨는 朴대통령 下官 장면을 TV로 보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朴대통령 돌아가시고 매일 눈물만 흘렸지요. 下官하는 거 보면서 내가 「이번에 잘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다들 「朴형이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하더라고. 그때 굉장히 시끄러울 때잖아요. 「한 번 죽는 건 정한 이치인데 이 시기에 가시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니 그나마 마음이 좀 안정되더라고. 살아 계셨으면 그때 정치꾼들이 어르신을 얼마나 나쁘게 말했을까…』
외교특보를 지내다가 총리실로 갔던 崔圭夏 국무총리가 청와대로 오게 되었다. 외교특보 때부터 朴秀雄씨에게 이발을 했던 崔圭夏 대통령은 총리공관으로 간 이후에도 두 달에 한 번 정도 청와대 이발소에 들렀다. 그런 인연으로 朴秀雄씨는 대통령이 바뀌어도 청와대에 남게 되었다.
『그때 사람들이 많이 나갔는데 나는 계속 있었어요. 崔圭夏 대통령은 무골호인이지요. 머리하고 난 다음에 드라이도 안 해요. 사람을 참 편하게 해주셨지요』
崔圭夏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朴秀雄씨도 청와대 이발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어서 청와대 주인이 된 全斗煥 대통령이 작전차장보로 경호실에 근무할 때 1년 정도 이발을 한 적이 있었으나 더 이상 緣이 닿지 않았다. 朴씨는 全斗煥 차장보 후임으로 온 盧泰愚 차장보의 이발도 딱 한 번 한 적이 있다.
『全斗煥 대통령은 원래 손이 컸어요. 이발하고 나면 돈을 세어 보지도 않고 그냥 주머니에서 꺼내서 회식하라면서 줬어요. 두세 번 받았지요. 盧泰愚 대통령은 내가 한 번 하고 신라호텔로 간 문씨가 담당했는데 언제나 이발비 2500원만 내놓고 갔지요』
이발소 직원들은 계속 바뀌었으나 朴秀雄씨는 1964년부터 1980년까지 16년간 청와대 이발사로 살았다.
그때로 돌아가면 다시 모시고 싶다
朴秀雄씨는 청와대에서 나와 보름 동안 밥을 못 먹었다고 한다.
『朴대통령 각하가 그렇게 가실 줄 몰랐지요. 평생 모신다는 생각만 했지요. 그러니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어요. 청와대 있을 때부터 일제가 묻어 놓은 케이블선과 보물에 관심이 많아 월급받으면 거기다 다 썼고, 내가 씀씀이가 헤퍼서 돈을 모으지 못했어요. 대통령이 언제 그만둔다는 걸 알았더라면 몇 년 전부터 준비를 했을 텐데 갑자기 당하니 어안이 벙벙했지요.
다들 온다 간다 소리도 없이 헤어졌어요. 청파동에 있던 13평짜리 집도 뭐가 잘못되어서 날아가 버리니 오갈 데도 없었어요. 청와대에서 청춘을 다 보내고 빈손으로 허무하게 나왔지요』
몇 달 후 청와대에서 퇴직금을 받으라고 연락이 왔다.
『각하가 좋아서 일했지 퇴직금 받으려고 일한 거 아닌데 퇴직금 받으려니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돈이 없으니 1300만원을 받았지요』
―16년을 청와대에서 보냈는데 그 일이 朴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버려놨다고 생각해요. 서민으로 살아갈 건데, 건방진 거 몸에 배고… 몸 자세를 갖추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 안에 미련이 남아가지고. 각하 생각나고 그 안의 일이 생각나서. 내가 사회에 나왔으면 이제 일반사회를 생각해야지, 자세가 왜 이러나 해서 스스로 많이 깨우쳤지요』
朴秀雄씨는 1988년부터 일본이 패망하면서 부산에 숨겨 놓았다고 소문난 보물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게 다 운명이지요. 청와대만 안 들어갔으면 보물이 있다는 정보도 몰랐을 테고,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자식들하고 아내에게 미안하지요. 보물 찾으러 돌아다니니 집안 살림은 아내가 책임졌지』
朴秀雄씨는 1980년 청와대를 떠나온 뒤로 한 번도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가 인터뷰 바로 전 날, 24년 만에 청와대 앞에 가 봤다. 보물 발굴과 관련된 서류를 만들 일이 있어 청와대 인근에 있는 중국대사관에 갔던 것이다.
『오랜만에 가 봤더니 길도 못 찾겠더라고. 청와대 앞에 가니 만감이 교차했지요. 그 안에서 대통령께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사람들에게 괄시도 많이 받았어요. 그쪽 하늘은 쳐다보기도 싫어요. 하지만 내가 스물일곱 살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朴대통령의 이발을 할 기회가 온다면 나는 기꺼이 朴대통령을 모실 겁니다. 지금도 「날 사랑해 주고 믿어 주신 어르신을 살아생전에 더 잘 모실걸」 하는 후회밖에 없어요. 지금도 그 어른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朴秀雄씨는 심장이 안 좋아서 그동안 세 번이나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보물 발굴작업이 성공한다면 朴正熙 대통령 기념관을 짓고 「효자동 이발사」 영화를 다시 만드는 데 지원하고 싶다고 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몰라요. 내가 만약 뜻을 못 이루면 다른 사람이라도 그 어른을 왜곡하지 말고 제대로 그린 좋은 영화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