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출생 bc552
사망 bc479
저서 '논어'
여객기가 추락해 눈 덮인 안데스 산맥에 떨어진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기적처럼 일부 승객들이 살아남았다. 식량은 떨어져
가고 구조대는 도착하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부상당한 사
람들이 죽어 갔다. 몇십 일이 지나 구조대가 이들을 발견했을
때 생존자 가운데 일부는 살아남기 위해 인육을 먹은 상태였다.
이 소설 같은 실화는 곧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살기 위해 인육을 먹은 사람
들은 비난받지 않았다. 극한 상황에서 발현되는 생존 본능은 사
회 규범과 윤리, 도덕이라는 관념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인
정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2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극한 상
황은 더욱 자주 발생했다. 과학 기술과 산업의 발달 정도가 보
잘것 없던 시절, 하늘만 쳐다보며 땅파먹던 시절, 대다수의 백
성들에게 굶주림은 자주 겪는 일이었고 그 속에서 극한 상황은
더욱 자주 발생했다. 숙종 22년(1696) 2월 5일의 「숙종 실록」
은 이렇게 증언한다.
숙종 30권 22년 2월 5일일 (신묘)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 이어둔이 인육을 먹었으나 실성한 것이
므로 사형을 감면하다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 이어둔(李於屯)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는
데, 임금이 그것이 몹시 굶주려서 실성하였기 때문이라 하여,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39 집 413 면
굶주림 외에도 의료 시설의 부족이나 무지로부터도 극한 상황
은 발생했다. 선조 9년(1575) 6월 26일의 기록은 그 참상을 이렇
게 전한다.
선조 10권 9년 6월 26일 (정해)
간담이 창질에 효과가 있다는 낭설로 사람들이 죽자, 현상금을
걸어 체포하게 하다
전교하였다.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하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공
사로 만들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경연관의 아룀에 의한 것이다. 이 때 경외의 사
람들이 인육(人肉)과 사람의 간담(肝膽)을 창질(瘡疾 부: 나병 즉 문둥병)을 치료하
는 약으로 쓰기 때문에 흉악한 무리들이 소아(小兒)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괴함은 물론이고 비록 장성한 남녀라도 혼자 길
을 가는 경우에는 겁략하여 모두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었는
데, 이는 그 쓸개를 팔면 많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무에 묶여 배를 갈리운 자가 산골짝에 잇달아 있으므
로 나무꾼들의 나무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법을 만
들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한 것이다.
【원전】 21 집 339 면
공자도 인육을 즐겨 먹었다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都?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
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할 때는 한 칼
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
였다.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
의 )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 ,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 )’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
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
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
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
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
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
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
리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
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
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
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
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
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
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
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
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都募?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
[제일 잔인한건 역시 인간이라는 말이 참 와 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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