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역사나 날조된 신화보다 더 서글픈 건 세뇌당한 영혼이다.”(박정희 비평서적 서문)
역사의 무지와 오만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독일에는 ‘나치독일’의 수장 히틀러를 찬양하는 단체가 존재하고 중국에선 ‘문화혁명’ 주역인 마오쩌둥이 추앙받는다지만 아직 우리에겐 낯선 모습이 하나 있다.
회원 수 1만3100여 명. 2003년 10월 16일 구성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전사모·cafe.daum.net/leejongpirl)이 바로 그것이다. 5·18민주화운동과 12·12쿠데타 등 현대사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모습을 드러낸 뒤 최근엔 경남 합천의 ‘일해공원’ 논란으로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아직 파급력은 미미하지만 활발한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거대 팬클럽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일단 회원 수만 놓고 보면 정치인 팬클럽 중 ‘명박사랑’(이명박 전 시장 지지모임)과 비슷한 규모. 전사모는 2004년께 ‘5공화국’ ‘12·12’와 관련해 한 차례 온라인 공간에서 세를 규합하며 몸집 불리기에 나선 바 있다.
2003년 설립 회원수 1만3000여 명
전사모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전 전 대통령의 아호 ‘일해’를 연상시키는 사진 밑에 ‘각하 프로필‘이 눈에 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업적’ ‘뛰어난 선견지명을 보여준 전두환 각하’ ‘그 당시(전 대통령 시절)를 경험해보지 못한 학생들에게’ 등의 카페글도 초기화면에서 클릭할 수 있다.
최근 이곳에서 가장 많은 클릭 수를 얻고 있는 주제는 단연 일해공원 개명건. ‘합천 일해공원 조성 지지성명을 부탁드린다’는 글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각하 사랑합니다’ ‘각하의 생신을 머리숙여 경하드립니다’라는 문구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자유게시판 내 목록.
게시판 내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박문수’(닉네임)란 논객은 지난 1월 18일 전사모 운영자인 자신과 한 라디오 방송의 인터뷰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년 ‘폄하정치’의 결과로, 교수(신율 명지대 교수)라는 지성인이 저런 식견과 단정을 하고 있는 지경이다. 일반 백성들이 부정적 단정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차기 보수진영이 정권을 잡아, 국민 여론이 반전되기를 소원해 본다.”
문제가 된 인터뷰 내용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쿠데타 주역’ ‘공포정치로 피해자 유발’ ‘하나회 조직’ ‘전 재산 29만 원’ 등을 언급한 부분이다. 실상 세간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서울·인천 등 지역지부는 물론 해외지부, 카페 내 ‘전략종합상황실’까지 갖춘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 항간에선 ‘전 전 대통령이 고용한 알바’란 추측에서 ‘정신나간 사람들’이란 비난까지 설만 분분하다.
해외지부에 전략종합상황실까지
뉴스메이커는 지난 1월 12일 전사모 홈페이지를 통해 공식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16일). 점심식사를 겸해 서울 서대문에서 운영자인 박문성씨(52)와 만났다. 앞서 언급한 논객 ‘박문수’(닉네임)가 바로 그다. 박씨는 거리낌없이 이름을 밝히고 신분확인을 위해 자발적으로 주민증도 제시했다. 사진촬영에도 기꺼이 응했다. 그는 “생애 첫 인터뷰”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동석자 고모씨(47)는 익명을 요구했다. 한 전문지 기자라고 밝힌 그는 80년대 군생활을 했다고 한다.
첫 인상은 수수하고 순진한 편. ‘순수 팬클럽’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만했다. 세간의 부정적 여론 때문에 인터뷰를 꺼려왔지만 이제 참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게 이들의 설명. 사실 전사모는 2004년 MBC드라마 ‘제5공화국’이 방영될 때 한 차례 언론의 관심을 받은 바 있다. 다음은 박씨와의 대화내용.
- 어떻게 가입했나.
“2004년께 신문을 보니 전사모란 게 있더라. 그래서 들어가보니 회원 수 1000명 정도의 카페였는데 27세 카페지기가 운영했다. 내친김에 ‘역대 어느 대통령이나 잘잘못은 있다. 정권만 바뀌면 깐다. 평가는 후세 역사가들이 할 수 있다’는 글을 올렸더니 카페지기가 운영진을 맡아달라 했다.”
- 뭘하는 분인가. 사조직이란 얘기도 있던데.
“지금은 (직업을) 쉬고 있다. 진실을 말씀드리러 나왔다. 조금의 가식도 있어선 안된다. 운영진이 ‘찾아뵙고 싶다’고 의사타진해도 연희동 쪽에선 ‘조용히 있으라. 골치아프다’는 반응만 나온다. 밥 한 끼 얻어먹은 적도 없고 우리 회원 중 5공시절 정부 녹을 받아먹은 사람도 없는 것으로 안다. 다 자발적이고 순수한 사람들이다. 운영진 5명이 공동으로 운영한다. 회비도 없고 오프모임에 나오지 않을 경우 철저히 신분도 보장된다.”
- 주변 평가가 부정적이다.
“인터넷에서 전사모에 대한 평가는 ‘미친 사람들이다’ ‘한나라당이 운영한다’ ‘전통의 알바들’이라는 것이다. 고3아들도 ‘아빠가 전두환 모임에는 뭐하러 가느냐’고 한다. 내 사랑하는 아들부터 (생각이) 왜곡돼 있는 게 통탄스럽다. 김영삼·김대중은 잘잘못이 없나. 김정일에겐 ‘위원장’이란 호칭을 붙이면서 아이들까지 ‘전두환’이라고 부른다.”
사실 전사모는 지난해 5월 회원 중 한 명이 대구 팔공산으로 가는 카페 워크숍길에 피습을 당했다. 회칼에 두 번 찔리는 중상이었는데, 이는 전 전 대통령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시각을 대변한다.
- 전 전 대통령을 따른다는 게 낯설다.
“전 전 대통령의 죄에 대해선 ‘추정’만 있을 따름이다. ‘5·18’도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발포명령자란 게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밝힌다면 나도 기꺼이 (카페를) 탈퇴한다. 재판정에서 유추하는 걸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보안사령관은 실병력이 없고 지휘체계를 따른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발포명령을 했을지 누가 아나. 다 짐작이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건 정당한 것 아닌가. 3S정책을 얘기하는데 오늘날 프로야구가 왜 있고 세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게 다 누구 덕분인가. 지금 잣대로 ‘군바리’가 대통령이 됐다고 하는데 일촉즉발 위기에서 영관급 장교들이 추대한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멀쩡한 왕을 두고 위화도회군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이성계도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개인욕심도 있었겠지만 4·13호언조치 뒤 6·29선언의 영광을 노태우에게 안겨주며 직선제를 가져오지 않았나. 경상도 특히 대구에선 전 전 대통령이 존경받고 있다. 역으로 대구 쪽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씨’ 자도 안 붙인다.”
“다 자발적이고 순수한 사람들”
대화 중 이들은 부인했지만 ‘극우성향’ ‘영남지역색’이 강하게 풍겼고, 80년대 군생활을 했거나 당시 향수를 품고 자란 30~50대 남성이 다수 회원을 형성한 것으로 유추됐다. ‘회원 전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대목도 그렇다. 이들이 세를 얻은 것도 실정 많은 참여정부의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 그래도 부정적 시각이 많은데.
“전 전 대통령, 그분은 ‘참 남자다’. (노 대통령과 달리) 제대로 된 표현 쓰면서 할말만 멋있게 했다. 청와대 직원에게 인기투표하면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순이라 들었다.”
- 전 전 대통령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낀 시점은.
“그 부분 말씀드려도 되나(동석자와 상의). (동석자가 대신) 우리가 애들도 아니고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는지 얘기하기 곤란하다. 시국 돌아가는 것 봤을 때 전두환·박정희 대통령만한 분 있나. 요즘 정치부 기자들은 객관성이 없다. 지금도 민주화라 할 수 있나. 종이 한 장 뒤집은 차이다.”
-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사태’란 표현을 쓰고 또 일부 회원은 ‘당시 북한군이 투입됐다’는 글을 올려놨다. 편향된 것 아닌가.
“그쪽에도 피해자가 있으니 ‘폭동’이란 단어는 자제하고 ‘사태’란 표현을 쓴다. ‘부마사태’라고 쓰지 않나. 윗글은 당시 언론보도를 인용한 한 온라인 사이트 글을 퍼온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귀순용사들의 증언을 들으면 알 수 있다. 5·18은 자위권발동이라 생각한다.”
- 올 대선에서 전 전 대통령이 특정후보를 지지하면 전사모도 따라가나.
“전혀 안 하실 것으로 믿는다. 회원 중에도 끝까지 ‘순수함’을 지키자는 사람이 많다. 이전 2004년 가을께 이 문제로 조짐이 있었지만 해결됐다. 원희룡 의원 건도 그렇다. 만남이란 존경하는 사람만 만나는 건 아니다. 사과성명 낼 것까진 없었다.”
- 일해공원 문제는.
“군민에게 맡겨야 한다. 타 지역민들이 왜 간섭하는가. 인간에겐 고향이 있다. 호남에도 김대중컨벤션센터가 있는 것으로 안다.”
시민사회단체 “황당하다”
전사모측 언행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내비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측 한 관계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직접 당사자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관계자는 “자칫 지역감정으로 비쳐질까 적극적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다”며 “‘이 세상에 없어야 할 사람’ ‘사면받고 나온 사람’에 대해 지역 출신이란 이유로 우상화·합리화하는 게 정당한가의 문제”라고 규정했다. 그는 또 “이 세상에 법은 없다”는 말로 서러움을 토로한 뒤 “지역에 얼마나 잘해줬는지 모르지만 엄청난 죄를 대신할 수 없다. 너무나 무서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유족회 측은 ‘일해공원’ 문제는 지역 스스로 신중하게 생각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보고 있다.
김재휘 중앙대 교수(심리학)는 전사모 회원의 심리에 대해 “누구나 소속감을 가져야 하는 존재라는 커뮤니티 개념에 따라 가입하고 표현하고 지지하는 것”이라며 “누구를 무엇을 지지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로 보통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소속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 “전사모 문제는 복잡하다.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는 건 어렵지만 어느 정도 숭배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줘야 한다”면서 “긍정적 대상을 지지하는 모임이 훨씬 결속력이 강해지게 마련”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같은 상황을 초래한 이유를 국민성·과거의 경험에서 찾았다. 상당히 기형적 성장과정을 거쳐 다른 이의 생각을 포용할 여유가 없는 사회상황이 빚은 또 다른 괴리감이란 것이다. 선진사회라면 이보다 더한 모임도 존재하겠지만 아직 우리 사회로선 조금 이르다는 입장이다.
합천군 ‘일해공원’ 명칭 논란
세간에 회자된 ‘일해공원’이란 이름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다. 경남 합천군이 군내에 자리한 5만1000여㎡ 규모 군민공원을 일해공원으로 변경할 것을 시사하며 논란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일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호. 합천군은 지난해 말부터 군내 ‘새천년 생명의 숲’을 개명하는 문제를 군민들 사이에서 논의해왔다. 표면적으론 “대통령을 배출한 고장이란 점을 강조하면 인근 창녕이나 해인사를 찾는 관광객이 늘어날 것”이란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지역 시민단체와 일부 군의원은 심의조 합천군수가 독자적으로 전 전 대통령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벌인 일이라 의심하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마산교구사제단·경남민언련·열린사회희망연대 등이 중심이 돼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일부는 지난 1월 18일 서울 연희동 전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해 항의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합천군 일에 타 지역 사람들이 간섭한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무지와 착각”이라며 “전두환이 저지른 엄청난 죄값을 합천이 모조리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결코 해선 안될 일”이라 밝혔다. 현재 합천군은 이로 인해 내홍을 겪으며 군민 간 의견도 갈린 상태다.
그렇지만 합천군은 공원 이름을 일해공원으로 바꾸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내 새마을지도자·이장은 물론 군의원 등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근거로 들고 있다. 합천군은 1월 말 군정조정위원회를 열고 공원이름을 확정지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