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어느 날, ㅅ오빠가 나를 꼬드겼다. 주성치 주연의 <소림축구>가 개봉했는데 보러가지 않겠느냐며, 수업을 땡땡이 치자는 거였다. 난 썩 내키지 않았다. 그 때 내가 오빠에게 했던 말은 "그런 영화를 왜 수업까지 땡땡이치고 돈 내가면서 영화관에서 봐야돼요?" 아...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망발이었다. 어쨌든 주성치의 광팬이었던 ㅅ오빠는 "내가 보여줄게"라며 꼬드겨서 결국 영화관으로 날 끌고 갔다. 신촌의 한 영화관에서 나는 10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신세계를 체험했고 영화관에서 *년처럼 웃었으며 주성치라는 인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적 기억하기로 우리 아버지는 영화광이었다. 특히나 아버지가 실직이라도 했다치면 집에는 어김없이 비디오 테잎이 하루에 10개씩 쌓여있었고 아버지는 새로 직장을 구하며 남는 시간 동안을 담배+과자+비디오 테잎으로 채우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 연소자 관람불가가 아닌 영화들은 나와 함께 보기도 했는데 대부분이 액션 영화나 무협 영화였다. 그래서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애들 치고는 액션이나 무협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는 것일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버지가 영화를 보다보다 종국에는 주성치 출연 영화를 빌려오게 됐는데 그 땐 내가 어렸을 때였고 주성치 영화 속에 녹아있는 페이소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왜 위대한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가끔 아버지는 주성치 영화를 보며 아주아주 즐겁게 웃으셨다. 주성치가 주절거리는 풍자적 농담이나 성적 농담을 똑같이 되뇌이면서 푸하하, 하고 웃으며 공감을 구하듯 어린 딸을 쳐다보셨는데 난 당연히 이해 못하니까 멍한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봤고 아빠는 내가 이 어린 것을 데리고 지금 무슨 짓인가 싶었는지 똑같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2초간 쳐다보시곤 했다. 그렇게 주성치에 대한 기억은 대뇌피질 저너머로 사라져가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나, 우연히 비디오 폐기처분을 하는 샵에 들렀다가 주성치 주연의 <파괴지왕>을 구입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즐겨봤던 영화의 주인공, '주성치'라는 이름이 눈에 띄기도 했었고, 비디오의 겉표지에 울트라맨의 복장을 하고 있는 외계인 같은 느낌의 남자에게 확 꽂혀서 테이프를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비디오 테잎은 1000원이었던 것 같다. 집에 와서 그 테이프를 보고 정말 박장대소를 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이제와서 돌이켜 보건대 그 테잎은 광동어 더빙이라 주성치 특유의 목소리+억양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파괴지왕>은 <서유기 선리기연>, <식신>과 더불어 주성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 중 하나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난 행운아였다. 그 땐 <파괴지왕>을 보면서 그저 신나게 웃었고, 보고난 뒤에도 그 영화의 웃긴 장면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뒤로 몇 편 주성치의 영화를 찾아보긴 했으나 그냥 몇몇 장면에서 크게 웃고 끝났기 때문에 내게 주성치는 "독특한 개그를 구사하는 b급 코미디 배우"정도의 이미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소림축구>를 극장에서 보고 내가 받았던 충격은 과장 좀 보태서 지구에 유성이 충돌했을 때 받을만한 그런 충격이었다. 그의 영화는 그냥 웃기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정말로 슬픈 영화인 것이다. 현실의 잔혹함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도 꿋꿋이 희망을 잃지 않는 loser들과 outsider들을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던 것이다. <소림축구>에서의 무쇠다리 씽씽이 구멍이 숭숭 뚫린 운동화를 신고 다니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친구들을 모으고, 자신감이 너무 없는 만두집 여자 아매에게 당신이 최고라는 걸 잊지 말라고 하는 그런 장면들에서 나는 마음이 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주성치라는 배우가 진지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물론 웃긴 장면들도 많아서 영화관이 떠나가도록 아주 즐겁게 웃었지만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 짠한 기분. 그 기분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 난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집에 돌아와서 주성치가 출연한 대부분의 작품을 다시 구해서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내 꿈대로 되지 않는 것도 많다는 걸 알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주성치의 영화를 보며 즐겁게 웃기만 하던 어린 시절은 어그러졌고, 이제 그의 영화 속에 녹아있는 비극적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축복받은 것일까 아니면 서글픈 일일까. 집에 돌아와서 주성치의 이전 작품들을 다시 보며 내가 느낀 건 주성치는 너무나도 비극적인 희극배우라는 것이다. 하나하나 찾아보니 그의 표정 자체가 이미 비극이었고 그의 눈빛은 참으로 슬펐다. 얼뜨기 같은 주성치를 잔인하게 골탕먹이는 악당들은 바로 그의 주변 사람들이었고, 바로 우리들이었다
<파괴지왕>에서 순해터진 하금은을 괴롭히는 학생 무리, <소림축구>에서 첫째사형 무쇠머리에게 팬티를 쓰라고 강요하는 안경잡이, <희극지왕>에서 엑스트라인 윤천구를 개무시하는 영화 스텝들, <무장원 소걸아>에서 그에게 개밥을 먹으라고 명령하는 관가 사람들까지. 심지어 그는 자신이 그런 역할을 맡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식신> 초반에서의 안하무인의 모습, <홍콩마스크 : 백변성군> 초반에서의 모습도 정말 야비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저건 직접 겪지 않으면 생각할 수도 없고 연기할 수도 없을거다, 주성치 분명 어렸을 때 고생 많이 했을거다.
주성치는 슬픈 눈빛을 가지고 있는 코미디 배우다. 그가 공식석상에 있을 때나 인터뷰를 할 때에 사심없이 웃는 사진을 찾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있다. 모든 사진 속의 눈빛들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우울하다. 아니, 쓸쓸하고 우울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비극적이다. 항상 무언가가 결핍되어있는 환경에서 밑바닥까지 경험하고 난 뒤에야 가질 수 있는 그런 비극이다. 주성치가 90년도에 <도성>으로 크게 성공했고 그 이후로 거의 탄탄대로 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가 부와 명성을 거머쥔 나이는 28살이다. 젊은 나이이다. 그 이후로 17년 동안 그는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내주지 않은 채 꿋꿋히 거성처럼 서 있다. 28살의 성공이 있기 전까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알수는 없지만 그는 그것을 말로하지 않고 영화 속의 연기로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플 때가 있다.
파괴지왕>에서 실연한 하금은이 쓰레기장에 주저 앉아 있는데 누군가 와서 그를 손가락질하며 욕한다. "자네 거기 앉아있으니 잘 어울리는구만, 너도 쓰레기야" 그러자 하금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푹 파묻은 채, "난 상처받지 않아. 이미 난 상처투성이야."라고 독백한다. 이 장면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너무 상처가 많아서 상처받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슬픈 대사인가.
아직 난 살아야할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더 남았다는 나이이지만, 내 인생 최악의 시기 베스트 3안에 들어갈거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내 암담한 시절들, 약 5년간의 그 시기동안 주성치의 영화를 알았더라면 조금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영화를 보면 울고 웃으며 위안이 되기 때문에. 저렇게 상처받은 사람들도 서로 힘내자고 말하면서 꿋꿋이 살아가는데, 찌질이 하금은도 무적풍화륜이라는 처절하고도 비참한 무술로 사랑을 쟁취하는데 내가 못 할게 뭐가 있나 싶다.
희극배우인 당신의 비극도 사랑합니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