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대난투극.

으히히힉 작성일 08.01.15 00: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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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왔어.

 

오랜만이지. 요즘 좀 바빴어.

 

왜 자꾸 인생이 빈티지스타일로 흘러가는지 모르겠어. 요즘 좀 힘들어.

 

그래도 내가 그 뭐냐, 그 창작게시물...어찌고 하는 위원회 회장이잖아.

 

사실 감투 쓰고 남들 앞에 나서는 거 갱장히 싫어해. 왜 A형이거든.

 

하지만 이왕 감투를 썼으니 맡은 일을 열심히 하자는게 내 주의야.

 

서론 길고, 이 글도 반응 없을 거 같은 예감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확 꽂혀와.

 

그래도 쓴다.

 

 

때는 2005년 여름, 내가 막 성인이 됐을 때(나메크성인이 아니야.), 아, 그 땐 갱장히 풋풋했는데, 풋사과였어.

 

과수원주인이 아직 따지도 않았어. 너무 풋풋해서.

 

각설하고, 그 때 난 노량진 편의점에서 새벽 알바를 하고 있었어.

 

왜, 아부지랑 사이가 안좋았거든. 신경전 막 하고, 신경통 생기는 줄 알았어.

 

그래서 자급자족을 위해 일을 했지.

 

근데 그 날은 나랑 동거하던 룸메이트(빌어먹게도 남자였어.)랑 고향에서 서울구경온 내 친구 촌놈 한마리.

 

이렇게 셋이서 횡단보도 하얀 페인트에 새벽이슬이 맺히는 걸 바라보며 즐겁게 노가리를 까고 있었지.

 

그 때 어떤 아저씨가 한 명 들어왔어. 구겨진 하얀 셔츠에 며칠은 안감은 듯한 곱슬기 있는 머리.

 

그래도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 왜, 원래 동네가 갱장히 빈티지하거든.

 

그 아저씨는 가게를 한 바퀴 쏵 돌고는 삼각김밥을 골랐어. 두 개 사면 1000원에 해준다는 두개 한묶음짜리.

 

맞어. 경제논리에 입각해서 결정한거지. 400원이 절약되거든.

 

그리고선 바나나우유를 집었어. 김래원네 어머니가 냉장고에 넣어주시는 바로 그거.

 

그 때, 망설이더군.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어. 난 놓치지 않았어.

 

그 아저씨는 다시 바나나우유를 놓고선 그냥 흰 우유 용량 250ml짜리를 집었지.

 

그리고 계산하며 1600원을 냈어. 난 50원을 거슬러줬지.

 

그러더니 즉석에서 시식을 하더군. 밖은 어둡고 무섭지. 이해했어.

 

신경끄고 친구들이랑 노가리를 까는데 그 아저씨 나에게 다가와 말했어.

 

이거 맛이 조금 이상한데?

 

아니! 24시간 소비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의점에서 날짜 지난 것을 진열해 놓은건가??? 폐기하지도 않고?

 

난 바로 유통기한을 확인했지. 근데 유통기한은 문제없어. 앞으로 6시간동안 밥풀 하나씩 먹어도 아무 이상없겠더군.

 

난 말했어.

 

그거 유통기한 안지났는데요. 괜찮을텐데.

 

맛이 이상해. 먹어봐.

 

난 생각했어. 이 아저씨가 날 이성으로 생각하나. 나와 간접키스를 원하나.

 

근데 내가 미쳐다고 그런 아저씨가 먹던 삼각김밥을 먹겠니.

 

아닙니다. 유통기한도 안지났어요. 그냥 잡숴도 별 무리 없어요.

 

아니야...이거 바꿔줘.

 

그럴 수 없습니다. 바꿔줘. 안된당게요. 순간 흥분해서 사투리가 나왔어. 맞어. 나 전라도에서 13년 지냈어.

 

못 바꿔줘? 네 못바꿔드립니다. 내 친구들도 내 편에 서서 말했지. 상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바꿔주냐고.

 

그렇게 실랑이가 몇 번 오갔어.

 

그 아저씨 체념한 거 같더니

 

갑자기 진열대의 바나나우유, 그래 아까 김래원꺼, 를 집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구녕을 뚫어서 막 마시더라.

 

난 그 때서야 내 머리속의 모든 퍼즐조각이 모여서 맞아 돌아가는 걸 느꼈어.

 

아하, 이 아저씨가 돈이 1600원밖에 없었는데 바나나우유가 무척 마시고 싶었구나, 그래서 이런 모험을 감행했구나.

 

난 제갈공명의 현신을 보는 듯 했어.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 완벽한 언변. 사람을 휘두르는 카리스마.

 

나와 내 친구들은 순간 벙쪘지. 영화 아이덴티티의 마지막 반전을 보는 느낌이랄까.

 

난 정신을 차리고선 말했어. 아저씨, 그거 계산도 안하고 마시면 어떡합니까. 800원 내세요.

 

못 낸대. 그래 못 내겠지. 돈이 없으니까.

 

난 흥분했어. 난 A형이지만 성격은 모났어. 젖같다는 소리지.

 

그래서 아저씨와 같이 쌍두문자 배틀을 붙기 시작했어.

 

니들도 알겠지만 욕은 전라도가 짱이야. 걸걸하지.

 

아저씨도 처음엔 받아치다가 나중엔 밀리더라구. 당황한거지. 걸걸하거든. 이런 놈인 줄 몰랐거든.

 

계속 그렇게 옘병지뢀을 떠니까 내 친구가 파출소로 달려가서 경찰을 불러오고,

 

난 편의점을 내 친구에게 맡기고서 그 아저씨와 함께 파출소로 갔어.

 

난 순경아저씨한테 얘기했어.

 

이건 무전취식입니다. 전 고발하겠습니다. 고발을 취하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단호하지. 남자는 이런 면이 있어야 여자한테 사랑받는거야. 체크해두고.

 

근데 순경아저씨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자기가 나한테 천원을 주고는 그냥 가래.

 

난 생각했어. 여기서 한 번 더 개기면 내가 혼나겠지. 그것보다 나는 200원 거슬러주러 다시 파출소로 와야되나...

 

그래서 난 고소를 취하하고(고소장도 작성 안했지만서도) 편의점으로 돌아왔어.

 

십 분정도 뒤에 그 아저씨가 편의점으로 찾아와서 화해의 악수를 청하더라.

 

난 뒤끝있어서 됐다고 계속 거부했지만 내 친구들이 어른이 사과하는데 이러지 말라고 해서 악수를 받아줬어.

 

사실 내가 악수를 안 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 아저씨가 내민 손의 지저분한 이물질들을 봤기 때문이야...

 

아무튼 그렇게 편의점의 대난투극은 끝나고 태양은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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