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국내의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성인남자들에게 “여가시간 때 가장 많이 즐기는 게임이 무엇이냐?”라는 설문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압도적인 표 차이로 1위를 차지한 것이 ‘고스톱’이라는 화투花鬪놀이였다. ‘꽃들의 싸움(어떤 분들은 화투를 ‘화토’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다.)’으로 해석되는 화투를 고안해낸 사람은 일본인이다. 그들은 화투를 화찰花札, 일명 하나후다(はなふだ)라고 불렀는데, 19세기말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뱃사람들에 의해 한국에 유입되면서 화투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 화투가 수입되기 전까지, 조선에서는 숫자가 적힌 패를 뽑아 우열을 겨루는 ‘수투數鬪’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화투가 들어오면서부터 수투가 화투에 밀려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것을 보면, 단순한 숫자보다 세련된 이미지(꽃그림)를 좋아하는 것은 1세기 전의 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비슷한 것 같다.
한국인들은 으레 세 사람 이상만 모이면, 어디서든지 고스톱 판을 벌인다. 심지어 신성한 국회의사당 내에서 고스톱 판을 벌인 국회의원들까지 있을 정도다. 정치현장까지 노름판으로 격하格下시킬 만큼의 위력을 지닌 화투이고 보니, 어쩌면 우리나라 전체가 ‘고스톱 공화국’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작 화투 48장의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화투에 숨겨진 일본 문화의 비밀코드에 대해서는 하등의 지식을 갖지 못한 채, 그들이 전해준 고스톱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月별로 각각 4매씩 총 48장으로 구성된 화투는 일본 문화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화투의 낱장 하나하나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거기에는 일본 고유의 세시풍속, 월별 축제와 갖가지 행사, 풍습, 선호, 기원의식 심지어는 교육적인 교훈까지 담겨져 있다.
우선 1월의 화투는 아래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20점짜리 삥 광光, 5점짜리 홍단, 그리고 2장의 피로 구성되어 있다. 세칭世稱 삥 광의 화투 문양을 보면 1/4쪽 짜리 태양, 1마리의 학鶴, 소나무, 홍단 띠가 나온다. 여기서 태양은 신년 새해의 일출을, 학은 장수長壽와 가족의 건강에 대한 염원을 나타내는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적 코드다.
또 1월의 화투에 소나무가 등장하는 이유는 가도마쯔(門松; かどまつ) 행사에 소나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1월에 맞이하는 일본의 대표적 세시풍속인 가도마쓰는, 일본인들이 1월 1일부터 1주일 동안 소나무를 현관 옆에다 장식해 두고, 조상신과 복을 맞아들이기 위한 일련의 행사를 의미한다. 또 학을 의미하는 츠루(鶴; つる)가 소나무를 뜻하는 마쯔(松; まつ)의 말운末韻을 이어 받는 것도 일본식 풍류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청색과 적색에 관한 한?일 양국간의 시각 차이다. 한국에서는 빨간색이 사망, 공산당, 화재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만, 일본에서의 빨간색은 쾌청한 날씨, 경사慶事스러움, 상서로움을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화투 일, 이, 삼의 5점짜리가 홍단의 구성요소라는 것은, 그마만큼 일본인들에게 1, 2, 3월이 매우 상서로운 달임을 시사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또 꾀꼬리는 ‘우구이스다니’라는 도쿄의 지명地名에도 남아 있을 만큼 일본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꾀꼬리가 봄철이 아닌 2월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조류학자들에 따르면, 철새인 꾀꼬리가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시점은 대체로 4월 이후라고 한다.
그런데도 2월의 화투에 꾀꼬리가 그려져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아직까지 그 의문을 시원스럽게 풀어줄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꾀꼬리와 매화가 봄의 전령사임을 노래하는 대표적 시어詩語인 동시에 꾀꼬리의 일본어 표기인 우구이스(うぐいす)와 매화를 뜻하는 우메(うめ)간에 두운頭韻을 일치시키려는 일본인들의 풍류의식을 반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4월의 화투 문양은 흑싸리가 아니라 등나무 꽃이다!
4월은 일본에서 등나무 꽃 축제가 열리는 계절이다. 그래서 4월의 화투 문양은 등나무 꽃(보라색을 띤 등나무 꽃은 마치 포도송이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아래 그림과 같이 화투를 배열해야 옳은 배열이 된다.)이 주류를 이룬다. 등나무는 일본 전통시의 시어詩語로 쓰이는 여름의 상징이며, 4월의 화투 10점짜리에 그려져 있는 두견새 역시 일본에서 시제詩題로 자주 등장할 만큼 일본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등나무 꽃을 한국 사람들이 ‘흑싸리’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흑싸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골에서 자란 40?50대 사람들은 빗자루를 만드는 재료로 활용되는 싸리나무의 색깔은 녹색이며, 가을철에 그것을 베어 햇볕에다 말리면 갈색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5월의 화투에 등장하는 것이 ‘난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난이 아니라 붓꽃이다. 5월의 붓꽃은 보라색 꽃이 피는 습지의 관상식물(습지와 난은 상극관계에 있다.)로서 여름을 상징하는 시어詩語다. 또 한국 사람들은 5월의 10점짜리 화투에 나오는 3개의 작은 막대기는 애연가들이 좋아하는 딱성냥으로, T자 모양의 막대는 건축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제도용 막대 자’정도로 알고 있는데, 그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여기서 T자 모양의 막대는 붓꽃을 구경하기 위해 정원 내 습지에다 만들어 놓은 산책용 목재 다리이며, 3개의 작은 막대기는 목재 다리를 지지하는 버팀목이다. 일본인들은 그런 목재 다리를 ‘야츠하시(八橋; やつはし)’라고 부른다. 또 다리 끝에는 붓꽃을 감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삼광光에서와 마찬가지로 화투 하단의 보이지 않는 1인치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을 볼 수 없다.
6월의 화투 문양은 모란꽃이다. 모란꽃은 여름의 시어詩語일 뿐만 아니라 고귀한 이미지마저 갖는 꽃으로서 일본인들의 가문家門을 나타내는 문양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꽃과 나비하면, 바로 모란꽃을 떠올릴 정도로 동양 사회에서는 모란꽃을 꽃의 제왕으로 쳐준다. 그러나 한국화韓國畵에서는 모란과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 것이 오래된 관례慣例라고 한다. 그것은 당 태종이 신라의 선덕여왕에게 보낸 모란꽃의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는 점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그러나 6월을 의미하는 화투를 보면 일본화日本畵의 관례대로 모란과 나비가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한국과 다른 일본 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참고적으로 6, 9, 10월의 화투 5점짜리에는 청단이 있는데, 일본에서 청색은 우울하거나 좋지 않은 일을 암시하는 색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6, 9, 10월 달에 태풍이나 집중호우로 인한 수재민들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평균적으로도 1년 중 이 기간에 각종 사건?사고가 비교적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7월의 화투 문양은 싸리나무다. 7월의 화투 중에서 10점짜리에만 싸리나무 숲에서 멧돼지가 노니는 모습이 등장하고 나머지 화투에는 싸리나무만 등장한다. 7월의 화투에 멧돼지가 나오는 이유는 근대 일본에서 성행했던 멧돼지 사냥철이 7월이었기 때문이다.
8월의 화투 문양을 보면 산山, 보름달, 기러기 3마리가 등장한다. 이는 일본에서도 8월이 오츠키미(달구경; おつきみ)의 계절인 동시에 철새인 기러기가 대이동을 시작하는 시기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문화적 암호다. 또 한국에서 제작되는 8월의 화투에서 검은색으로 처리된 것이 산이다. 10점짜리와 피에서 흰색으로 처리된 부분은 하늘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8월의 한국 화투에는 산에 억세 풀이 없는데 반해, 일본의 화투에는 억세 풀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8월의 화투에는 5점짜리 화투도 없고 홍색이나 청색 띠도 없다. 그것은 일본에서도 8월 달이 1년 중에서 제일 바쁜 추수철이기 때문에 한가롭게 시詩를 쓰고 낭송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시사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스톱꾼들이 9월의 화투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는?
9월은 일본에서 국화 축제가 열리는 대표적인 계절이다. 따라서 9월의 화투문양으로 국화가 등장하는 것이다. 또 9월의 화투에서 10점짜리를 보면 ‘목숨 수壽’자가 새겨진 술잔이 등장한다. 이는 9세기경인 헤이안 시대부터 ‘9월 9일에 국화주를 마시고, 국화꽃을 덮은 비단옷으로 몸을 씻으면 무병장수를 한다.’는 일본의 전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특히 국화가 일본의 왕가王家를 상징하는 문양임을 고려할 때, 그것은 일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흐르는 물에다 술잔을 띄워놓고 국화주를 마시면서 자신들의 권세와 부귀가 영원하기를 기원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9월의 화투 가운데 10점짜리 화투만이 자기 맘대로 쌍 피(2장의 피)가 될 수도 있고, 10점짜리 화투로 남을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도 바로 9월의 10점짜리 화투가 일왕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왕만 되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필자는 9월의 화투문양 중에서 10점짜리 화투만 보면, 신라시대의 고관대작들이 포석정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임금과 자신들의 태평泰平과 안녕安寧을 기원했던 풍류가 연상된다. 술잔을 의미하는 사카즈키(さかずき)와 국화를 뜻하는 키쿠(きく)간에 말운末韻과 두운頭韻이 연속성을 갖는 점도 흥미 있는 일이다.
일본에서 10월은 전통적으로 단풍놀이의 계절인 동시에 본격적인 사슴 사냥철이다. 10월의 화투를 보면, 10점짜리 화투에 수(♂)사슴과 단풍들이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계절의 특성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사슴을 의미하는 시카(鹿; しか)와 단풍을 뜻하는 카에데(丹楓; かえで)간에도 말운末韻과 두운頭韻이 일치하는데, 이것 역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화투 ‘오동’과 ‘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차이
11월과 12월을 의미하는 화투는 한?일 양국간에 큰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오동’은 11월의 화투이고 ‘비’는 12월의 화투인데 반해, 일본은 그 반대이다. 즉 일본에서는 ‘비’가 11월의 화투이고 ‘오동’은 12월의 화투이다. 일본에서 ‘오동’이 12월의 화투가 된 것은, ‘오동’을 뜻하는 기리(きり)가 에도江戶시대의 카드였던 ‘카르타’에서 맨 끝인 12를 의미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점들을 사전적으로 이해하고 화투 ‘오동’과 ‘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고스톱을 즐기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동이다. 속칭 ‘똥광’으로 불리는 오동의 광光은 광으로도 쓸만하고 피皮 역시 오동만이 유일하게 3장이다. 물론 일왕을 상징하는 9월의 화투 중에서 10점짜리가 쌍 피가 되겠다고 하면, 9월의 화투도 피가 3장이 될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 더러움, 지저분함, 고약한 냄새의 이미지를 주는 오동이, 왜 고스톱꾼들에게는 제일로 각광받는 화투패가 되었을까? 그 비밀은 오동의 화투 문양에 있다. 오동의 20점짜리 광에는 닭 모가지 모양의 이상야릇한(?) 조류鳥類와 고구마 싹 같은 것이 등장한다.
한국인들은 그 대상이 무엇이고, 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나타내 주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11월의 화투문양 중에서 검정 색깔의 문양은 고구마 싹이 아니라 오동잎이다. 일본 화투를 보면, 오동잎이 매우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오동잎은 일왕보다도 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막부幕府의 쇼군을 상징하는 문양이며, 지금도 일본 정부나 국?공립학교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일본 화폐 500엔(¥)짜리 주화에도 오동잎이 도안으로 들어가 있을 정도다. 그리고 닭 모가지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는 조류 또한 평범한 새鳥가 아니다. 그것은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품격과 지위를 상징하는 봉황새의 머리이다.
이쯤 되면 일본인들이 왜 그렇게 오동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감이 잡힐 것이다. 한국인들은 오동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지 점수를 나는데 유리한 화투 오동의 광光과 3장의 피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9월의 화투문양인 국화와 11월의 화투문양인 오동 중에서 누가 더 끗발이 세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화투 ‘오동’이 더 세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화만 가지고 있게 되면 광 박을 뒤집어쓰지만, 오동의 광을 갖고 있으면 광 박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월의 화투문양을 보면 20점짜리 ‘비’광에는 양산을 쓴 선비, 청색의 구불구불한 시냇가, 개구리가 등장한다. 또 10점짜리 화투에는 색동옷을 걸친 제비가 나오고, 쌍 피로 각광을 받는 ‘비’피를 보면 정체불명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스톱에 사족을 못 쓰는 노름꾼들에게 광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화투 패가 엉망일 때, 제일 먼저 집어내 버려야할 대상으로 지목되는 ‘비’광을 보노라면, ‘광 팔자가 따라지 팔자’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렇지만 고스톱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필자의 경우, 5개의 광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광이 다름 아닌 ‘비’광이다. 그 이유는 ‘비’광의 그림이 에도시대에 성행했던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浮世繪; うきよ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화투 ‘비’에 숨겨져 있는 엄청난 비밀과 교훈
절기節氣상으로 12월은 추운 겨울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광을 살펴보면 웬 낯선 선비 한 분이 양산을 받쳐 들고 ‘떠나가는 김삿갓’처럼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수양버들(실제로는 녹색인데, 검은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고, 그 옆에는 개구리 한 마리가 앞다리를 들며 일어서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름 양산과 땅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어야 할 개구리가 혹한酷寒의 계절인 12월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매우 신기하다. 그러나 ‘비’광 속에 나오는 그림은 과거 일본 교과서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 유명한 ‘오노의 전설’을 묘사한 것이다. 즉 ‘비’광 속의 갓 쓴 선비는 오노노도후小野道風라는 일본의 귀족으로서 약 10세기경에 활약했던 당대 최고의 서예가다. 한국 화투에서는 일본 화투에 나오는 그 선비의 갓 모양만 일부 변형시켰을 뿐, 나머지는 일본 화투와 동일하다. 또 개구리를 뜻하는 카에루(かえる)와 양산을 의미하는 카사(かさ)의 두운頭韻이 일치하는 것도 일본인들의 풍류의식에 따른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오노의 전설’에 대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의 서예가였던 오노가 붓글씨에 몰두하다 싫증이 나자 잠시 방랑길에 올랐다. ‘비’광에 등장하는 선비의 모습이, 머나먼 방랑길을 떠나는 오노의 모습이다. 그런데 오노가 수양버들이 우거진 어느 길목에 다다랐을 때, 아주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그것은 개구리 한 마리가 수양버들에 기어오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 개구리는 오르다가 미끄러지고 또 오르려다 미끄러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그 실패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오르기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오노는 연속적인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수양버들에 기어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개구리의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미물微物인 저 개구리도 저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는데, 하물며 인간인 내가 여기서 포기해서 되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얻은 뒤, 곧장 왔던 길을 되돌아가 붓글씨 공부에 정진하였고 결국 일본 최고의 서예가가 되었다고 한다. 또 쌍 피로 대접받는 ‘비’피의 문양을 보면,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 방안의 커튼, 문짝 등 여러 가지가 연상된다.
그런데 ‘비’피의 문양은 ‘죽은 사람을 내보내는 일종의 쪽문’으로서, 라쇼몬羅生門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50년에 다이에이大映 영화사가 라쇼몬이라는 영화를 제작(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주연: 미후네 도시로, 교마치 코) 하여 큰 관심을 거두기도 하였다.
한편, ‘비’피가 쌍 피로 대접받는 것은 라쇼몬이 죽은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귀신이 붙어있을 것이고 따라서 귀신을 잘 대접해야만 해코지를 면할 수 있다는 일본인의 우환의식憂患意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와 비슷한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흔한 얘기로 ‘손’이라 함은 귀신을 의미한다. 어른들이 가족의 중대사(예: 결혼, 이사 등)를 결정할 때, 가장 먼저 체크하는 것이 ‘손’없는 날인가의 여부다. 그때의 ‘손’이 바로 귀신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손’이라는 단어보다는 ‘손님’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쓴다. ‘님’자를 붙여주는 이유 또한 ‘손’에다 ‘님’자를 붙여줌으로써 귀신에게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는 심리 때문이 아닐까?
고스톱꾼들이여, 이제 우리도 반성 좀 하며 살자!
이처럼 일본인의 세시풍속과 문화의식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화투가 지난 100여 년 동안 한국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것은 정말로 부끄럽고 수치스런 일이다. 그러고도 우리가 5,000년의 찬란한 문화와 전통을 가졌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후손들에게 어떠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줄 것인가 ?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
옛날 우리 민속놀이의 대부분은 향토방위를 위해서 공동으로 무예武藝를 연마하는 연무유희鍊武遊戱였다. 정월 대보름날 이웃 마을의 젊은이들끼리 편을 가른 뒤 돌을 던지며 놀았던 편쌈이나 대보름날 부녀자들의 유희였던 놋다리밟기도 전시戰時에 다리를 건너는 도강무술渡江武術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그에 반해 화투는 내 고향이나 조국을 지키기 위한 놀이가 아니라 패가망신을 부추기는 저질의 놀이에 불과하다. 더구나 화투는 화해의 놀이가 아니다. 일단 3명 이상이 있어야 고스톱을 할 수 있고, 또 거액의 판돈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언제나 금전적인 피해를 본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돈을 떼인 사람이 돈을 딴 사람과 화해할 수 있는가? 판돈을 챙긴 사람이 돈을 잃은 사람들에게 딴 돈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지 않는 한, 노름꾼들간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이것으로 보면 화투는 민족을 이간시키고 동질성을 분열시키는 반화합적反和合的인 오락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화투를 만든 일본인들은 화투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로 즐기는 놀이는 마작과 빠찡코이며, 약 5%미만의 일본인들이 그것도 어쩌다가 한번 정도 즐기는 놀이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 화투를 한국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즐기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일본과 일본인들을 경멸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화투에 미친 한국인들이 많다는 점에서 필자는 한국인의 이중적 사고와 성격을 재발견하게 된다.
한국인들이여 !
이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심사숙고 해보자. 앞으로도 화투를 즐기고 싶다면, 일본식 화투를 우리 한국식 화투로 완전히 개량시켜 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의 세시풍속과 수준 높은 문화의식을 적절하게 반영한 국산 화투를 개발한 다음, 화투의 종주국인 일본에다 역수출해서 일본 화투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볼 의향은 없는지... 마치 일본에서 야구를 수입한 한국 야구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일본 야구를 격파시켜 버린 것처럼. 사실 국산 화투만 개발된다면, 일본 화투를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화투의 제조 및 인쇄기술이 일본보다 월등하게 좋다. 게다가 가격도 국산 화투가 일본 화투의 약 1/5수준이기에 가격경쟁력도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고스톱을 치는 방식도 우리나라만큼 다양하지 못하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일본인들이 고스톱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을 고스톱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마작이나 빠찡코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신종 고스톱의 규칙을 새롭게 개발하여 그들의 혼을 뺏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그러면 국산 화투도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화투에 대한 문화적 비밀코드도 잘 모르면서 노름꾼의 길로 달려가는 한국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무 지나치게 일본 화투만 즐기지 마라. 정 고스톱을 치고 싶다면, 고스톱을 치면서도 일본 화투를 능가할 수 있는 국산 화투의 밑그림을 그려 보라. 만약 그럴 능력이 없다면, 오늘부터 당장 고스톱을 때려치우라.”고 말이다.
끝으로 화투 48장에 숨겨진 비밀에 대하여 글을 쓸 수 있도록 관련 자료와 조언을 아끼지 않은 동덕여대의 이덕봉 교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김덕수의 파워칼럼]화투는 일본문화의 축소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