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트 치던 노인

대단하시군 작성일 08.09.22 22: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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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해 전 일이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야구를 보기 위해 잠실운동장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잠실 운동장 경기장에 야구 감독하던 노인이 있었다. 야구나 한 판 보려고

표값좀 깍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표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야구표 한장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이겨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번트만 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강공을 하는가 하더니, 날이 저물도록

이리 번트대고 저리 번트대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쳐도 될거 같은데, 자꾸만 번트를 대고 있었다.




"병살 나도 좋으니 그냥 치게 두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차근차근 해야 점수가 나지, 그냥 강공한다고 점수가 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팬이 강공이 좋다는데 무얼 더 번트를 댄단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지루해 죽겠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그냥 다른 팀 팬하우. 한화가던가."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칡빠 되기는 싫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점수가 안난다니까. 점수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쳤다가 병살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주자 1,2루에서 4번타자에게 태연스럽게 번트를 지시하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게임이 다 끝났다고 한다.

사실 경기는 아까부터 다 끝나있던 경기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경기를 해 가지고 팬이 많을리가 없다. 팬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일류선수만 되게 부른다.

팬서비스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집에 와서 야구표를 보여줬더니 10년 골수 엘지빠 아내는 재밌는 경기였다고 야단이다. 예전 순철이보다도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감독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좋은선수 다른팀에 팔아치우고

있던선수 은퇴시키고 무전략 무개념 무전술로 일삼다가 막장의 길로 빠진것에 비하면 지금이 차라리 낫다라는

것이다. 강공을 시켜도 공도못건드리고 삼진이나 당하고 병살이나 치는 지금의 선수들에게 요렇게 꼭 알맞는 전술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경기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꼴리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명경기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야구경기장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소문을 듣자하니 그 노인은 구단주와 다투고 경질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두산관중석의 댄스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몸동작으로 두산댄스녀가 몸을 흔들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댄스녀를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번트를 대다가 유연히 두산댄스녀의 댄스를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며느리가 tv로 생중계를 보고 있었다. SK라는 듣보팀이 번트를 대고 있었다.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에서 김재현이 안타를 쳤던 생각이 난다. 캐넌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딱하는

경쾌한 공맞는 소리도 들을수가 없다. 문득 번트 대던 노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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