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종교의 광기 - -
나치가 개발한 사린 독가스(sarin gas)를 살포한
반사회적 컬트(cult) 교단 일본 신흥 종교법인 "옴진리교"(aum shinrikyo)
옴진리교"(aum shinrikyo)
aum[om] 이란
산스크리트어(sanskrit, 범어)로 "a는 우주의 창조", "u는 우주의 유지", "m은 우주의 파괴"라는 의미.
일본 종교법인이 자행한 사상 최악의 사건
1988년부터 "옴진리교"(オウム眞理敎, aum shinrikyo)로 불리는 일본 종교집단이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이 다른 여타 종교 집단 사건과 크게 다른 점은 직접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국가전복을 기도 했다는 점과 국가가 관리 가능한 생화학 무기와 같은 대량 살상무기를 신자들이 자체 개발하여 실제 테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각 신자는 의학, 화학, 물리학 그리고 기계공학 등을 전공한 엘리트 집단으로 군사조직과 같은 상하명령 체계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이 사건은 일본 범죄 역사상 일반범죄 그리고 종교법인이 저지른 사건을 포함하여 사상최대의 규모의 조직적인 범죄였다.
그리고 이 종교집단에 의한 최종적인 피해는 사망자 28명, 중경상자 6,000명 이상으로 일본 역사상 최악의 흉악 범죄였다. 또 이 범죄집단의 재판 판결 결과는 2009년6월11일 현재 사형확정 17명, 무기징역 1명 그리고 징역형 다수. 이 외에 할복자살 1명, 칼에 찔린 타살 1명이다.
여기에 이 악명 높았던 사건의 전말을 모두 공개하기로 한다.
이 종교는 국가전복을 기도하기 위해 화학병기(sarin gas) 공장까지 만들어 제조, 양산 그리고 실제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츠모또(松本) 사린 독가스 사건", "사카모또 쯔즈미(坂本 堤) 변호사 일가 살해사건" 그리고 "동경 지하철 사린 독가스 사건" 등등 수 많은 테러활동를 자행 악명을 떨치고 해체소멸된 종교였다.
사린(sarin gas)
1938년 나치 독일(nazi germany) 하에서 개발된 유기 화합물질로 신경가스의 일종이다. 사린이란 이름은 개발에 관계한 슈레이더 (schrader), 암브로스(ambros), 루드리거(rudriger) 그리고 린데(van der linde) 등 4명의 과학자 이름에서 붙여졌다. 살충제 개발과정에 발견된, vx 가스와 같은 작용으로 독성이 강해 살인 목적 이외에는 사용 용도가 없다.
사린은 원래 1902년에는 이미 합성되어 있었으나, 그 독성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 독성에 착목한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양산을 계획하여, 나치는 종전까지 7,000톤 이상의 "사린"을 저장해 두고 있었으나, 종전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 패전을 맞이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요셉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사린"투입을 주장했다. 그리고 국방군 최고 사령부 총장 빅헬름 카이텔 육군 원수도 전황 타개책으로 "사린" 투입에 적극적이었다.
사린 화학식 c4h10fo2p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독가스 때문에 시신경이나 뇌신경 장애로 목과 눈에 부상 입은 경험이 있는 히틀러는 참모인 그들의 진언을 전혀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히틀러 마저 이 "사린 가스"를 전쟁이나 유태인 살해용으로 사용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네스트존 미사일의 m139 사린 화학탄두(발사대 mgr-1 honest john)의 내부가 잘 보이도록 만들어 놓은 것.
사린을 충전한 수 많은 m139 소형 화학탄이 보인다. 이 사진은 샘플로 만든 탄두이며 실전용 실탄은 아니다.
1950년대 nato는 "사린"을 표준적인 화학병기로 채용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도 군사용으로 "사린"을 생산했다.
1953년 영국 공군의 로날드 매디슨(ronald maddison) 이등병이 "사린" 실험 중에 사망했다.
1960년 대에 록키 마운틴 화학병기공장(rocky mountain arsenal, rma)에서 대량의 "사린"을 생산 했으나,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 1970년 대에 모두 폐기 처분되었다.
마츠모또 찌즈오(松本智津夫)의 성장과정
교주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라고 불리는 인물은 본명을 마츠모또 찌즈오(松本智津夫)라고 한다. 1955년3월2일 쿠마모토현 야시로시(熊本縣八代市)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경찰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전에 한국으로 건너가 경찰서장을 지내고 전쟁 뒤로 고향에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타다미 기술자(疊職人)였으나 집안은 가난하고, 게다가 5남 2여로 7명씩이 되는 자식을 두었다.
마츠모또(松本)는 이 집안의 4남으로 태어났으나, 그가 철이 들 무렵의 집안은 이미 극빈이라고 할 정도로 쪼그라 들었다. 집은 기울어지기 직전의 오두막과 같았으며, 아이들은 생 고구마를 씹어 먹으며 밥 대신으로 연명하는 것을 근처의 주민이 목격했다. 이 시대는 고도 경제 성장기의 일본으로 사람들은 누구나가 빠르게 여유있게, 풍요로움을 구가하고 있었으나, 마츠모또 가(松本家)만은 이 시대의 조류에서 탈락한 생활과 같았다. 마츠모또(松本)의 큰형은 두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으로 쿠마모토(熊本) 시내의 기숙사제 맹아학교에 진학했다.
마츠모또(松本)도 선천성 녹내장으로 시력은 상당히 낮았으며, 그의 동생 5남도 같은 증상으로 시력이 약했다. 큰형의 완전한 맹인이었으나, 마츠모또(松本)는 어느 정도의 시력은 있었다. 그러나 부모는 마츠모또(松本)와 5남을 큰형과 같은 맹아학교 넣었다. 이유는 학비가 면제되는 점과 기숙사비도 일체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시 6살의 마츠모또(松本)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상당히 반항하기도 했으나, 결국 그는 맹아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그가 성인이 되어 "부모한테 버림받았다고. 라고 생각했다"라며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맹아학교에서 13년 간을 보내게 되나, 이 사이 부보가 면회온 적이나 전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기숙사 책임자는 마츠모또(松本) 형제가 예의 없이 자라서 마치 "새끼 원숭이와 같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부모없는 자식과 같았다고도 했다.
새해가 되면 전 학생들이 귀성할 때도, 마츠모또(松本)의 부모는 자기 자식을 데리러 오는 적이 없었다. 어린 3형제 만이 기숙사에 남아 명절을 보내야 했다. 일반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 일가의 부모는 냉혹했다. 이것이 당시의 마츠모또 가(松本家)의 현실이었다.
소위 "맹인국에서는 외눈박이가 임금이다."라고한다. 맹아학교에서 마츠모또(松本)는 말 그대로 "외눈박이 임금"이었다. 그는 양쪽 눈이 안 보이는 생도를 깔보고,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으며, 과자와 금전 등을 착취하는 악동으로, 반항하는 생도는 폭력으로 지배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상적으로 이해타산에 민감하고, 이용 가능한 인간은 중용했으나, 그 외의 인간은 노예취급으로, 전 생도 가운데 마츠모또(松本)의 폭력을 당하지 않은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유도를 배워 중등부 생도를 구타, 골절 시키는 등 폭력을 일상적으로 일으켜, 근신처분을 받았다. 고등부 졸업 무렵 그의 폭력에, 생도의 학부형들이 "마츠모또(松本)를 퇴학시켜라!"라는 진정서가 제출되기도 했으나, 이래저래 겨우 졸업이 되었다. 맹아학교에서 그는 위와 같은 "폭력에 의한 지배", "현저한 권력지향" 그리고 "금전에 대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폭력에 의한 지배"란 대인관계의 결점에서 나타난 독선적인 인격이며, "금전의 집착" 문제는 빈곤한 집안의 출신이라는 경위 그리고 "권력지향"은 항상 타인 보다 위에 서려는 이상심리의 표출이다.
더불어 그는 생도회장에 3번 입후보했으나, 3번 다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한참 뒤로 1990년(平成2年)에는 일본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역시 결과는 참패로 끝났다. 그는 원래 선거라고 하는 민주적인 제도에는 맞지 않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종업 뒤로 "침"과 "마사지"를 배우면서, 대학진학을 꿈꾸었다. 그래도 목표는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인 "동경대학 법학부"였다. 그러나 맹인학교 성적이 "중간에서 조금 위"라는 마츠모또(松本)에게는 "동대"는 너무 높은 장벽이었다. 이러한 불가능을 넘 보는 그의 "엘리트 지향" 성격은 이때 이미 형성되었던 것 같다.
1975년 맹아학교 전공과를 졸업하자 부모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쿠마모토(熊本) 시내에 있는 침술원에서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무태도가 나쁜 것은 물론, 인간관계에서도 많은 결점이 있었다. 마츠모또(松本)는 원장에게 "장래는 변호사나 종교가가 되고 싶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1976년에는 친구를 구타해 상해죄로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1977년 상경하여 동경대학 입학시험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교주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 彰晃) 본명 마츠모또 찌즈오(松本 智津夫)
마츠모또 찌즈오(松本智津夫)의 결혼과 "옴진리교" 탄생
뒤에 마츠모또 토모코(松本知子)인 이시이 토모코(石井知子, 구성)는, 1958년 치바현(千葉縣)에서 태어났다. 조모와 양친이 교사라는 직업을 둔 가정으로 착실하고 성적 우수한 여학생이었다. 그러한 그녀는 대학 입시에 실패하여 입시학원에 매일 다니고 있을 무렵, 전차 안에서 우연히 옆 좌석에 있던 마츠모또(松本)와 알게되어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임신하게 되어 부모에게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1789년 두 사람은 입적했다. 이때 마츠모또(松本) 23살, 토모코(知子)는 아직 19살이었다.
신혼생활의 집은 후나바시시(千葉縣 船橋市)에 토모코(知子)의 부모가 세워 주었으며, 마츠모또(松本)는 그 근처에 침술원을 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처방전을 무단으로 허위작성해 조제보수의 보험금을 부정청구했다는 명목으로 670만엔을 반환하라는 현(千葉縣)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1981년 건강약품 판매점 "bma 약국"을 개업해으나, 다음해 무허가로 의약품 제조판매한 약사법위반으로 체포되어 20만엔의 벌금을 물었다. 1982년에는 약사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그 뒤로 마츠모또(松本)는 "수행하러 간다."고 하며, 처자를 남겨 두고 후나바시(船橋)로부터 모습을 감추었다.
교주의 "공중부양"
(달 돌 싯디, kundalini yoga) 데몬스트레이션
1984년 마츠모또(松本)는천리교의 보시(布施) 시스템을 배워, 동경에서 뒤에 "옴진리교"가 되는 요가도장 "옴 신선회"(aum 神仙會)를 열어, 이때 자신의 이름을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라고 했다. 1984년 오컬트(occult) 계의 잡지인 월간지 "무"(mu, 학습연구사 발행, 1979년 창간)가, 이 "옴 신선회"(神仙會)를 취재하여 사진을 실었다. 이 사진은 좌선(座禪)한 상태에서 비약한다는 것으로, 소위 교단이 말하는 "공중부양"(달 돌 싯디, kundalini yoga)이라는 것이었다.
"무"(mu) 1984년11월호에는 사카이 카쯔토키(酒井勝軍)의 예언서 "신비의 일본"을 기초로 한, 초능력 개발을 가능하게하며, 영적으로 진화하기 위한 "돌"(히히이로카네)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투고했다. 1987년 년초, 이러한 잡지의 발표 덕분으로 "옴 신선회"(神仙會)의 회원은 600명으로 늘었다. 8월에 "옴 신선회"(aum 神仙會)를 "옴진리교"(オウム眞理敎, aum shinrikyo)로 명칭을 바꾸었다. 년말에는 1,000명을 넘었다.
"옴진리교"의 교의
"옴진리교"의 교의는, 원시 요가, 원시 불교를 토대로 티베트 밀교의 기법을 교의로 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는 하나의 길"이며 모든 종교는 요가, 불교적 우주관의 일부에 포함된다. 또 그스도교의 종말론은 aum[om] 즉, 불교적인 "창조, 유지, 파괴"의 반복 과정의 하나인 파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옴진리교"를 움직인 주요 핵심 멤버들
교단은 일본지배를 획책하여 국가 조직과 똑 같은 일본 관청제 "성청(省廳)" 등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교주 자신은 교단에서 "신성법황"이라고 불렀다.
마츠모또 토모코(松本 知子)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는 우정성 장관
교주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의 처로 구성은 이시이 토모코(石井知子)라고 한다. 주식회사 "옴진리교" 출판사 사장. 아사하라 사이에 남자 2명, 여자 4명의 자식을 두었다. 교단 내의 지위는 교주의 처라는 입장으로 "넘버 2"에 가까운 지위였다. 교단의 사건 발각으로 1998년 징역 6년 판결을 받고, 이 판결에 불복 공소했으나 기각되어, 6년 복무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죠우유 후미히로(上祐 史浩, 1962년-)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는 공보부장, 교단 긴급대책 본부장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으로 부친은 무역상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아 사실상 어머니 혼자서 키웠다. 어렸을 때의 학교 성적은 "톱 클래스"였다. 점잖하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일본 명문 와세다(早稻田, waseda university, 1920년 설립) 대학에 진학해 영어 서클에 소속해, 디베이트(debate, 최 광의의 토론)의 기술을 터득 "디베이트의 신" (academic debate)이라 불릴 정도로 활약했다. 대학원까지 진학하여 수사과정 수료한 뒤로 취직하였으나, 옴진리교로 출가한다. "공중부양" 사진을 본 것이 "요가 도장"에 다니게 된 이유이다.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 구성 마츠모또/松本)를 부친으로서 존경하게 된다.
디베이트(debate, 최 광의의 토론) 포드와 카터의 대통령 후보 토론회(1976년)
하야시 이쿠오(林 郁夫, 1947-)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는 치료성 장관, "옴진리교" 부속의원 원장
동경 출신이며 생가가 병원을 운영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성적 우수한 노력가였다. 동경 명문 케이오기쥬우쿠 대학(慶應義塾大學, keio university, 1920년 설립) 의학부 졸업. 미국 유학 중에 처 "리라"(りら)와 결혼. "리라"(りら)는 일본 고급관료를 아버지로 두고 있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명의가계(名醫家系) 출신이다. 사고를 일으킨 것이 원인이 되어 부부가 "옴진리교"에 입신, 뒤로 일가가 출가한다. 1998년5월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으나, 공소하지 않고, 이대로 형이 확정되어 현재 복역 중에 있다. 그는 사린 사건으로 사망한 피해자의 이름을 매일 염불하고 있다고 한다.
아오야마 요시노부(靑山 吉伸, 1960년-)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는 법무 장관, "옴진리교" 고문 변호사
오사카(大阪府)의 중견 어패럴 회사 창업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명문 교토 대학(京都大學, 1897년 설립, kyoto university) 법학부에 합격했으며 21살 때에 일본 사상 최연소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그는 요통이 원인으로 "요가도장"에 다니게 되어 "옴진리교"의 교의에 깊이 빠지게 된다. 1988년 "옴진리교"에 입신. 다음해 출가. 그리고 그가 출가하기 한달 전에 "옴신리교"의 가장 중대한 사건의 하나인 "사카모또 쯔즈미(坂本堤) 변호사 일가 실종사건" 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는 "옴진리교"의 법률적인 문제를 담당하여 대외적으로 크게 활약하게 된다. 살인 미수죄를 적용 2002년2월 징역 12년의 형이 확정되어 현재 복역 중에 있다.
이시이 히사코(石井久子, 1960년-)
카나카와현(神奈川縣) 출신으로 성격은 착실하고 온순한 우등생으로 자랐다. 산업능율 단기대학 비서학과를 졸업하여 ol 시절의 친구인 이이지마 에리코(飯田 エリ子)와 함께 건강을 위해 "요가도장"에 다니게 되면서 "옴진리교"의 교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88년 출가. 10년간이나 사귀던 애인과 가족을 버리고, 모든 결혼자금을 교단에 보시로 기부했다. 그리고 그녀와 교주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와는 내연의 관계에 있었으며, 이들 사이에는 3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미야코자와 카즈코(都澤 和子, 1965년- )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는 西 신도청 장관.
착실하고 어른스런 성격의 소유자로 맨션 경영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우수한 성적으로 월반을 거듭하여 단기대학에서 강의할 정도로 우수했다. 죠우유 후미히로(上祐史浩)와는 이전 애인관계로, 그의 권유로 그를 따라서 입신 출가하기에 이르렀다. 신자 설득력이 탁월했던 인물. 1995년 징역 1년 판결 복역 후 출소.
엔도우 마코토이치(遠藤 誠一, 1960년-)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는 제1 후생성 장관
북해도 삿뽀로시(北海道 札幌市) 출신으로 북해도 삿뽀로 고등학교 졸업 뒤로 오비히로(帶廣) 축산대학 가축 미생물학 수의과 졸업. 동대학원 수의학 전공수료와 함께 이때 수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명문 쿄우토(京都) 대학원 의학연구과 바이러스 연구소에서 "혈청면역" 전공, 박사과정 중퇴와 동시에 "옴진리교"에 출가했다.
페스트균(yersinia pestis) 탄저균(bacillus anthracis) 보툴리누스균(clostridium botulinum)
"사카모또(坂本) 변호사 일가 살인사건"의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했던, "피의 이니시에이션"(initiation, 입문식/입회식)에서 교주 아사하라(麻原)의 dna 효과의 진위가 문제가 화제로 되었을 때에 아사하라(麻原)의 dna를 배양한 인물이다. 교단 시설 건물을 한동 배정 받아 보툴리누스균(clostridium botulinum), 탄저균(bacillus anthracis) 그리고 페스트균(yersinia pestis) 등 세균병기의 배양에 착수했다. 세균병기 제조에 성공하였으며 직접 각종 사린 사건에 관여했다. 1995년4월26일 후지산 총본부에 은폐해 있었으나 경찰에 체포되었다. 2002년10월11일 제1심, 2007년5월31일의 공소심에서도 사형판결을 받고, 현재 상고 중에 있다.
쯔찌야 마사미(土屋 正美, 1965년-)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 제2 후생성 장관
쯔쿠바 국립대학(筑波大學, 1973년 설립, university of tsukuba) 농림학을 배우고 동 대학원 화학과로 진학, 대학원 1년생 봄 때 당한 교통사고로 "요가도장"에 다니기 시작하여, "옴진리교" 입신했다. 그는 사린 대량생성 방법의 완*술을 성공하자, 교주는 이들에서 "사린 70톤 생산계획"을 명령했다. 이 사린을 대량 살포하기 위해 러시아제 대형 헬기를 도입했다. 그리고 vx 가스 연구에 착수. 2004년 제1심에서 사형판결, 2006년 공소심에 본인이 출석하지 않은 채 사형판결을 받고, 2009년6월 현재 변호단이 판결에 불복하고 최고 재판소에 상고 중에 있다.
교단 시설의 사린(sarin gas) 제조 플랜트
members of the media scrutinize aum shinrikyo's sarin gas plant in kamikuishiki,
yamanashi prefecture, in september 1998.
하야시 야스오(林泰 男. 1957년-)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는 과학 기술성차관의 한 사람.
동경 출신으로, 주간에 직장다니면서 1983년 대학 전기공과(야간부)에 다녔으나, 무리한 양면의 생활이 체력에 무리를 가져오게 되었다. 체력을 단련시키기 위해 "요가도장"에 다니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졸업 뒤로는 취업하지 않고 4년간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요가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의 저서를 읽고 교단에 입신, 1988년12월6일 출가했다.
교단에서 다른 핵심 멤버와 달리, 그는 비록 엘리트도 브르조아 계급도 아닌 간부였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에 부친이 북한에서 귀화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어 자신도 일본국적으로 귀화했다. 그의 조부모는 북한의 비밀 공작선 지원 용의로 일본 공안 조사청의 주요 감시 대상자였다. 사형판결로 상고하였으나 2008년2월15일 상고기각, 사형확정.
토요다 토오루(豊田 亨, 1968년-)
동경대학 물리학부 물리학과 졸업 뒤로, 동경대학 물리학계 연구과에서 소입자론을 연구, 물리학 전공 수사과정 수료. 물리학 박사과정으로 진학했으나, 1개월 정도 뒤로 "옴진리교"에 출가하여 대학원은 포기했다.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 청산가리 사건, 자동소총 밀조 사건 등에 관여. 2000년7월17일 제1심, 공소심에서 사형 판결, 2009년6월 현재 상고 중에 있다.
후지산(富士山) 기슭에 위치한 야마나시 현(山梨縣)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
히로세 켄이치(廣瀨 健一, 1964년-)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는 과학 기술성차관의 한 사람
일본 명문대 와세다(早稻田, waseda university, 1920년 설립) 대학 졸업. 1987년 동대학 이공학부 응용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 동대학 대학원 이공학 연구과 응용 물리학과 전공 수사과정 수료. 수사과정에서 "고온 초전도의 2차원"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이 논문은 당시 세계 "톱 사이엔스"라고 절찬 받았다.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88년3월 "옴신선회"에 입신. 이미 기업 연구직에 취업이 내정되었으나, 이것을 사퇴하고 1989년3월 출가했다.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 청산가리 사건, 자동소총 밀조 사건 등에 관여. 2004년 사형 판결, 2009년6월 현재 상고 중에 있다.
요꼬야마 마코토(橫山 眞人, 1963년-)
동해(東海) 대학 공학부 응용 물리학학과 졸업. 재학 중에는 태양전지 등의 개발을 전공했다. 1988년 아사하라(麻原彰晃)의 저서를 읽은 것이 인연으로 교단에 입신, 대학졸업 뒤로는 취직하였으나 1989년2월 회사를 사직하고 출가를한다. 2007년7월20일 사형 확정.
하시모토 사토루(端本 悟, 1967년-)
일본 명문대 와세다(早稻田, waseda university, 1920년 설립) 대학 법학부 입학과 졸업. 1988년7월 "옴진리교"에 입신. 1989년 대학 3년생 때 중퇴하고 출가했다. 1989년 교단내 무도 카라데(空手) 시합에서 우승하여 교주 아사하라(麻原彰晃)의 경호를 담당. 1993년 "옴 수중도시 구상"을 세운 아사하라(麻原彰晃)의 명령으로 건조한 "특수 잠항정(소형 잠수함)"의 조종사 역이 되었으나, 항구에서 진수식을 겸한 시운전과 동시에 침물하여 잠수정 내부에 갇혔으나, 다이버들에 의해 가까스로 구출 되었다. 1995년7월9일 사형 판결, 상고했으나 기각되어 사형 확정.
하야카와 키요히데(早川 紀代秀, 1949년)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는 건설성 장관
코우베(神戶) 대학 농학부에서 바이오를 공부고 오오사카 대학원에서 녹지 계획공학을 전공하여 수사논문은 "유토피아 도시론"이었다. 수료 뒤로 대형 건설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으나, 공금횡령사건에 연류되어 퇴사. 1986년 "옴 신선회"에 입신, 교주보다 나이가 많으며, 교단의 숨은 실력자로 성장했다. 교주 아사하라(麻原彰晃)를 질타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5년4월19일 살인사건 등 7개의 부분에 관여한 죄로 기소되어 1심, 2심에서 사형판결, 현재 상고 중에 있다.
나카카와 토모마사(中川 智正, 1962년-)
교주 아사하라(麻原彰晃) 주치의, 쿄토부립(京都府立) 의과대학 의학부 졸업. 의대 6년생 때인 1988년2월에 "옴 진리교"에 입신. 졸업후 의사면허를 취득해, 오사카 철도병원에서 연수의로서 소화기과에서 근무하면서 "옴 진리교" 오사카 지부에 다녔다. 그 뒤로 외과로 방향전환하여 암환자를 담당했으나,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고 인간의 무력함에 빠지게 된다. 어느날 수술실에서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병원을 쉬기로 했다. 이때 마침 아사하라(麻原彰晃)로부터 "가까운 시일 안에 부속병원을 설립한다."라는 보고를 받고, 애인과 같이 출가했다. 2003년 제1심에서 사형판결, 2007년7월13일 공소심에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공소심 판결에서는 교주의 마인드컨트롤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위에 열거한 간부와 사건에 관여한 신도는 이 외에도 많이 있으나
이 이상의 소개 일단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
"옴진리교" 전국 신도자수 및 지부 도표
1987년3월 "옴진리교"는 동경 도지사로부터 "종교법인 규칙인정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반대운동이 일었다. 11월에는 뉴욕 지부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이것을 극복하고 1989년8월25일 동경도의 인정을 받아 "종교법인. 옴진리교"가 탄생했다. "종교법인. 옴진리교"의 총 본부는 후지산(富士山) 기슭에 위치한 야마나시 현(山梨縣)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라는 곳에 있었다. 신도수는 이 시점에서 약 3,000명 있었다고 한다.
티베트 망명 종교 지도자 다라이 라마 14세(14th dalai lama of tibet)와 인도에서
이 해에 아사하라(麻原彰晃)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일본 대표로 있는 페마 걀포(pema gyalpo)에 접촉하여, 그 조력으로 1987년2월24일에서 1988년7월6일에 티베트 망명 종교 지도자 다라이 라마 14세(14th dalai lama of tibet)와 인도에서 회담했다. 아사하라(麻原彰晃) 측은 양자의 회담 모습을 비디오와 사진으로 촬영했으며, 회담에서 다라이 라마 14세가 "일본에 진정한 불교를 포교해 달라."라고 아사하라(麻原彰晃)에게 부탁했다며, "옴진리교"는 이것을 홍보와 선전에 크게 이용했다. 종교법인으로 인가를 받자 일본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개설 그리고 러시아, 스리랑카 등의 해외에도 지부를 두었다. 1989년 당시는 약 1만 명의 신자가 있었다.
교주 아사하라(麻原彰晃)
"마지마 사건(眞島)" 발생
1988년9월22일에 출가하지 않은 신자였던 마지마 데루유끼(眞島照之, 25세)가 교단 도장에서 100일 수행을 받았으나, 그는 원래 약물중독 증상이 있어, 그 행동이 다른 신자의 수행에 자주 방해가 되었다. "머리를 식혀줘라!"라고 하는 명령을 받고, 여자 욕실로 데리고 가 몇회 욕조에 머리를 쳐박자 그는 익사했다. 인공호흡을 시작했으나 그대로 죽었다. 만약 이 사건이 발각되면 게획하고 있던 종교법인 신청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확실했다.
이 때문에 아사하라(麻原)는 증거인멸을 지시하여 은폐공작을 했다. 그의 시체는 드럼통에 넣고 호마단(護摩壇)에서 태우고 뼈는 망치로 잘게 부수고 하여, 다시 이것을 유발에 넣고 가루로 만들어 후지산 근처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의 쇼우지코(精進湖) 호수에다 버렸다. 이 사건을 교단관계 최초의 "옴진리교 재가신자 사망사건"(옴眞理敎 在家信者 死亡事件)이라고 한다.
교단의 시체 소각방법 : 전자 레인지 원리를 이용한 마이크로파를 발생하는 장치로 소각을 한다.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 지.도 2006년3월1일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甲府市에 편입되어
당시의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는 현재 富士河口湖町로 이름이 바뀌었다.
---- 쇼우지코(精進湖), 국토 교통성 국토화상정보, 1975년---
"타구치 사건 (田口事件)" 발생
1989년2월10일 이것을 "옴진리교 남성신자 살해사건"(옴眞理敎 男性信者 殺害事件)이라고 한다. 출가 신자였던 타구치(田口信二, 21세)가, "眞島事件"의 진상을 목격하고, 또 시체를 넣은 드럼통을 운반하기도 하여 교단에 대한 불신감을 나타내기 시작하며, 불평불만과 귀향을 암시하였다.
이것을 들은 교주 아사하라(麻原)는 타구치를 "독방 수행"을 명령했다. 독방수행이란 통기 구멍만 있는 좁은 방에 창도 전기도 없는 암흑과 같은 콘테이너 방을 말햐며, 그는 여기에 감금되어 열쇠가 채워졌다. 하루 종일 아사하라(麻原)의 설법과 만트라(mantra, 불교·힌두교 : 기도, 진언, 주문)의 녹음 테이프를 듣기만 해야하는 끝없는 날이 시작되었다.
화장실은 변기 하나가 주어졌을 뿐으로, 콘테이너 속은 악취로 충만한 가운데 식사도 이 속에서 해야했다. 그러나 타구치는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탈회할 것을 천명했기 때문에 아사하라(麻原)로부터 "포아(죽여라, pore, phowa) 해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아사하라(麻原)의 말에 의하면 "포아에 의해 더 이상 악행을 쌓지 않고 끝나므로 행복한 것이다."라고하는 논리이다. 타구치의 목은 로프로 졸려 목뼈가 부러져 사망했다.
시체는 마지마 데루유끼(眞島照之)와 같은 방법으로 드럼통으로 소각한 다음, 그의 재(遺灰, 유회)는 총 본부 시설내에 뿌려졌다.
"포아" : "사후의 의식 전향"을 의미하는 티베트 불교용어(옴진리교에서는 "살해" 혹은 "죽음"의 뜻, pore/phowa)
"사카모또 쯔즈미(坂本 堤, 33세) 변호사 일가 살해사건" 발생
1989년11월 "마지마 사건"(眞島事件), "타구치 사건"(田口事件)과는 달리, 교단 내부의 살인이 아닌, 밖으로 향한 살인이었다. 이 사건은 "옴진리교"의 종교법인이란 정체성을 포함하여 커다란 사회적인 물의와 함께 교단 최대 위기가 되는 사건으로써 의미가 크다.
이 사간은 6월 사카모또(坂本) 변호사 등이 "옴진리교 피해대책 변호단"을 설립한데서부터 시작된다. 메스컴을 통해 변호단은 "옴진리교"를 비판해 가며, 점차로 피해자 모임과 함께 소송준비를 착수했다. 11월3일 드디어 교주 아사하라(麻原)는 살해 실행반에 "5분에 죽일 수 있도록 포아해라! "라고 명령을 내렸다. 실행반은 하야카와(早川紀代秀, 40세), 무라이(村井秀夫, 30세), 니이미(新實智光, 25세), 오카자키(岡崎一明, 29세), 나카카와(中川智正, 27세) 그리고 하시모토(端本悟, 22세) 등 6명이었다.
사카모또 쯔즈미(坂本 堤, 33세) 변호사 일가
11월4일 오전 3시 무렵, 실행반은 사카모또(坂本) 변호사의 요코하마 자택에 침입하여 하야카와(早川)는 장갑을 잊고 와, 다른 일행이 문 손잡이를 열고 침실에서 자고 있는, 사카모또(坂本) 변호사를 하시모토(端本)가 올라타고 준비한 주사로 몇 번이고 주입했으나 효가가 없자, 오자키키(岡崎一明)가 목을 졸랐다. 니이미(新實)는 변호사의 처(都子, 29세)를 목을 졸랐다.
니이미 토모미치(新實智光, 1964년- , 당시 25세) 아이치 가쿠잉대학 (愛知 學院大學) 법학부 졸업,
출가전에 교주로부터 "고행을 느끼지 못하면 수행의 길로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교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대학 졸업후 식품회사에 취직했으나, 2번씩이나 자동차 사고를 일으켜 "마가 끼었다."고 믿어 퇴사후 출가했다.
교단 내에서의 위치는 "자치성 장관"이었다, 제1심과 공소심에서 사형판결, 현재 상고 중에 있다.
그리고 장남(龍彦, 1세)은 하시모토(端本)가 입을 막아 질식사했다. 사카모또(坂本) 변호사의 시체는 니이카타 현(新潟 縣)에다, 변호사의 처는 토야마 현(富山縣)에다 그리고 장남은 나가노 현(長野縣)의 산속에다 각각 유기했다. 변호사의 처는 "돈이라면 드리겠으니, 제발 어린 아이 만이라도..."라고 절실이 탄원했으나 그녀의 비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 실행반은 결정적인 증거품들을 남기도 살해현장을 떠났다.
그것은 하시모토(端本)가 사카모또(坂本) 변호사의 저항으로 손가락을 물려 피를 타다미 위에 흘렸다. 무라이(村井)는 변장용 가발을 집안에 떨어뜨리고, 나카카와(中川)가 교단 뱃지를 방에다 떨어 뜨렸다. 이때 가발은 하야카와(早川)가 발견하여 줏어 들고 갔으나, 교단뱃지는 누구나 눈치채지 못했다. 시체가 발견 된 것은 부부가 1995년9월6일에, 장남은 9월10일에 발견되었다.
변호사 살해 사건은, 지금까지 반 "옴진리교" 운동을 전개해 온 그가, 선거전에서도 대립하는 언동을 반복해 왔다. 결국 선거전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해 아사하라(麻原)가 변호사 살해를 지시했다.
이 살인 실행범은 자기 스스로 배를 찔러 자살한 무라이(村井)를 제외하고, 전원 사형판결을 받았다.
정치단체 "진리당" 결성
11월15일 이 사건의 공개 조사가 시작되자 11월21일 교주와 범인 일행은 독일로 출국하여 본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는 것을 주장했다. 귀국 뒤로 1990년2월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진리당"을 결성하여 아사하라(麻原) 자신을 당수로 하여, 25명을 무더기로 입후보로 출마시켰으나 결과는 무더기로 전원 낙선했다. 공약은 "소비세 폐지.의료개혁.복지추진.국민투표제도 도입" 등이었다.
러시아에서 촬영한 교주 아사하라(麻原)
이 선거 참패의 결과 교주 아사하라(麻原)는 무력으로 권력탈취의 필요성을 느끼고, 뒤로 교단이 더욱 폭력화가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결과로 아사하라(麻原)는 교단 간부에게 "보툴리누스균 세균"을 배양하도록 지시했다. 이 균은 식중독 원인균으로 특히 사망율이 높고, 시각, 발성장애를 가져온다. 그리고 이 무렵 러시아로부터 자동소총과 권총 부품을 밀수하여 요꼬야마(橫山眞人)에게 최종적으로 1,000자루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자동소총 밀조사건" 발생
1993년6월 "옴진리교"의 무기 밀조사건은 "옴진리교"는 이전부터 신자들에게 하르마게돈(armageddon)의 도래와 외국군대에 의한 독가스 공격을 예언.설법으로 신자교화(세뇌교육)를 꾀했다. 그리고 인류구제를 위해서는 무차별 대량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armageddon :
신약성서의 요한 묵시록에 기술된 세계의 종말에 있어 "선과 악"의
최종적 결전의 토지를 나타내는 말로 "재앙"을 의미.
이러한 가운데 독가스 개발과 무장화를 기도하였다. 소련군이 채용하고 있는 "ak-74"를 일본에서 밀조를 계획, 밀조의 참고용으로 러시아에서 총과 실탄을 구입해, 이 것을 분해해 설계로 참고하기 위해 미디오 녹화와 사진촬영을 해 귀국했다. 1993년6월부터 교단간부는 교단시설에서 러시아에서 작성한 도면과 견본 등을 참고로 본격적으로 설계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이전에 교단이 사기로 탈취한 회사, 유압 실린더 제조 메이커인 "오카무라 철공소"에서 운반해 온 대형 공작기계로 부품의 제조방법의 연구를 했다. 1994년4월 말 무렵에는 본부가 있는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 내에 대형 공작기계 몇대를 설치해 총기제조공장을 완성했다. 1995년1월1일 시작품의 소총 제1호를 완성했다. 교단은 이 보고로 소총의 대량생산과 총탄을 제조를 개시했다.
그러나 3월 교단 시설에 경찰의 강제수사기 실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급히 도면을 소각하고 증거품들을 근처의 댐 물속에 투기하여 은폐공작을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교단은 최종적으로 "1,000자루의 자동소총과 100만발의 총탄 제조 계획"했던 것이 밝혀졌다.
"오카무라 철공소" 탈취사건
1992년 "옴진리교"가 이시카와 현(石川縣)소재 기업 "오카무라 철공소"를 탈취한 사건을 말한다. 이 회사는유압 실린더 제조 회사였으나, 자금융통이 어려워 경영이 악화되자, 은행의 추가 융자로 재건을 모색했다. 그런데 이 회사 경영자가 "옴진리교"의 신자로 교주 아사하라(麻原)에 상담하고부터 교단이 경영에 관여하게 되었다. 아사하라(麻原)는 "2개월 이내에 무차입 경영실현"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과학 기술동"
오카무라 철공소의 대형 공작기계들은 이 건물로 운반되었다.
1992년9월14일에는 교주가 직접 이 회사의 사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회사의 벽에 "옴진리교"의 포스터를 붙히고, 사내방송으로 "옴진리교 교리의 음악"을 보내는 등 회사의 "옴화"를 추진한 결과 사회사원의 80%가 퇴직하고, 취임 2개월째 드디어 회사는 도산했다. 다음해 이 회사의 공작기계를 교단 시설로 운반해 자동소총 제조에 쓰게된다.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사린 습격 미수사건"
1993년12월18일 "옴진리교" 신자에 의한 살인 미수사건이다. 이 사건의 표적이 된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종교가, 공명당 창설자, 시인, 작가, 1928년-)는 일본 소우카각카이(創價學會, 日蓮正宗, 현 연립여당 공명당 지지단체)의 명예회장으로, 사실상 동교단의 최고의 지위에 있는 인물이다.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麻原)는 소우카각카이(創價學會)를 적대시 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소우카각카이(創價學會)는 불교단체를 표방하면서 번뇌를 긍정하고 있는 종교"이며, "원시 불교나 티베트 불교를 경멸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을 소우카각카이(創價學會)로 개종시키려 공작하고 있으므로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를 포아(살해)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따라서 소우카각카이(創價學會)가 "옴진리교"를 타락으로 빠뜨리므로 빨리 이케다(池田大作)를 죽여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사린" 제조에 성공하자 아사하라(麻原)는 이케다(池田大作) 암살할 것을 기도, 실행을 명령했다. 1993년12월18일 토요일 소우카(創價) 대학에서 연주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며 여기에 이케다(池田大作)도 출석하기로 되어있었다.
당일 새벽 소우카(創價) 대학 근처에 있는 소우카각카이(創價學會) 시설 "동경 마키노 기념회관(牧口記念會館)"에 "옴진리교"의 "사린 분무차"가 도착하여 3kg의 사린 용액을 분무했다. 그러나 일행이 방독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회관 경비원에게 발각되자 곧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실행범 니이미(新實)는 사린을 대량흡입했으나, 교단 운영의 부속병원으로 반송되어 치료를 받고 겨우 목숨을 구했다.
후지산이 보이는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 옴진리교 교단
"前 신자 오치다(落田耕太郞)린치 살해사건"
1994년1월30일 이 날 새벽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 옴진리교 교단 시설에서 전 신였던 오치다(落田耕太郞)가 살해되었다. 오치다(落田)는 교단 부속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있었으나, 이 병원에 파키슨병 치료로 입원하고 있는 여성환자와 알게 되었다. 오치다(落田)는 아사하라(麻原)의 "옴진리교"가 탄압받고 있다는 언동에 의심을 품고 약 보름 전에 교단을 탈퇴했다.
또 이 여성의 치료에도 의문을 갖게 되어, 이 여성을 교단 병원에서 탈출시키려고 이 여성의 아들이며 신자이기도 한 보다 히데아키(保田英明, 28세)와 함께 교단 시설로 침입하여 여성을 발견하였으나, 반대로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은 교주 아사하라(麻原) 앞으로 끌려가 아사하라는 보다(保田)에게 "오치다(落田)는 포아(죽음)를 면할 수 없다. 니가 살해한다면 너의 목숨은 건질 수 있다."라고 해 살해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교단 간부 11명이 보는 앞에서 오치다(落田)의 목에 밧줄을 걸어 살해했다. 시체는 전자 레인지 원리를 이용한 마이크로파를 발생하는 장치로 소각했다.
"마츠모또(松本) 사린 독가스 사건"
1994년6월 나치 독일이 화학병기로 개발한 "사린"을 제조하여 성능 테스트로 나가노현 마츠모또 시(長野縣 松本市)에서 분무한 사건이다. 이때의 피해는 사망 7명, 중경상자 144명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제일 먼저 통보한 k씨가 의심받기도 했었다.
왼쪽이 k씨 마츠모또(松本) 사린 독가스 사건 현장
"공증증서 사무장납치.살해사건"
1995년2월 동경 메구로구(目黑區) 공증증서 사무장인 카리야( 假谷淸志)씨를 재산탈취 목적으로 납치한 사건이다. 그의 여동생은 "옴진리교" 신자였으며, 죽은 남편의 유산 6,000만엔 정도를 교단에 기부했었다. 그러나 교단측은 아직 남은 유산 일부까지 뱉어내게 하기 위해 그녀에게 lsd를 투여한 위에 이니시에이션(initiation, 입문식/입회식)을 시켰다. "모든 재산을 기부하여 출가한다."라고 선서하게 시켰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가 도망했기 때문에, 교단은 오빠인 카리야(假谷淸志)씨를 납치감금해 마취제와 자백제를 대량으로 주사한 결과 심부전으로 그는 죽었다. 시체는 이전과 같이 드럼통에 넣어져 태우고 유골은 가루로 만들어 호수에 뿌려 투기했다.
초 대형 "지하철 사린 사건"의 전조
1995년3월 동경 시내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한다. 대형사건으로 발전 3월18일 새벽에 교주 아사하라(麻原)는 하야시 이쿠오(林郁夫)와 무라이(村井秀夫) 그리고 교단 과학 기술성차관 하야시 야스오(林泰男)를 불러, "머지않아 경시청이 공정증서 사무장 사건으로 여기에 강제수사가 있을 예정이니, 먼저 수사를 교란할 목적으로 3월20일 아침 러쉬아워 시간에 맞추어 지하철 카스미가세키(霞ヶ關) 근처에 사린(sarin)을 뿌려, 대도시를 패닉상태로 빠뜨려라!"라고 말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교주 아사하라(麻原)로부터 이상적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하철 사린 사건 잘생 당일 레스큐 대원들
어느날 "미군과 자위대로부터 독가스 공격으로 마스타드 가스, 사린, vx가스에 제자들이 두통과 구토 등으로 신체 이상을 느끼고 있다."라고 의미있는 설법을 반복했다. 이해하기에 따라서는 국가가 동교단을 종교탄압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뉘앙스였다. 이것을 곧이 곧대로 믿은 제자들이 "코스모 크리너"라는 공기 청정기를 설치하여 이 덕택에 피해가 작게 발생했다고 믿었다.
동경 메트로 "지하철 사린 사건"의 무대가 된 주요역
동경 메트로 "지하철 사린 사건"
1995년3월20일 드디어 전대미문의 사상최대의 "지하철 사린살포" 범행은 실행되었다.
제1범행, 같은 날 오전 8시 히비야센(日比谷線)의 아키하바라(秋葉原) 근처를 통과 중인 전차 안에서 하야시 야스오(林 泰男)가 바닦에 놓은 사린 비닐봉지를 우산끝으로 찔러 안에 있는 사린을 유출시켰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 8명, 중경상자 2,475명.
제2범행, 같은 날 오전 8시 히비야센(日比谷線)의 에비스(惠比壽) 근처를 통과 중인 전차 안에서 토요다(豊田 亨)가 같은 수법으로 사린 비닐봉지를 터뜨려 을 유출시켰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 1명, 중경상자 532명.
제3범행, 같은 날 오전 8시 마로노우찌센(丸の內線)의 오차노미즈(御茶ノ水) 근처를 통과 중인 전차 안에서 히로세 켄이치(廣瀨 健一)가 같은 수법으로 사린을 유출시켰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 1명, 중경상자 358명.
제4범행, 같은 날 오전 8시 치요다센(千代田線)의 신오차노미즈(新御茶ノ水) 근처를 통과 중인 전차 안에서 하야시 이쿠오(林 郁夫)가 같은 수법으로 사린을 유출시켰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 2명, 중경상자 231명.
사린가스 제독작업
제5범행, 같은 날 오전 8시 마루노우찌센(丸の內線)의 요쯔야(四谷) 근처를 통과 중인 전차 안에서 요꼬야마(橫山眞人)가 같은 수법으로 사린을 유출시켰다. 이 사건으로 중경상자 200명.
이 날 하루 만에 사망자 12명, 중경상자 3,796명을 낸 미증유의 대참사였다. 그리고 실행범들은 사린의 포장지로 "성교신문", "적기" 등 다른 단체 발행의 신문을 일부러 선택해 한층 수사를 어렵게 하려는 교묘함을 보였다. 이 신문을 구입한 사람은 니이미(新實)였다.
"쿠니마쯔 타카지(國松 孝次)경찰청 장관 저격사건"
1995년3월30일 "옴진리교"에 대한 일제 수사가 시작된 8일 뒤 3월30일 오전 8시 30분 무렵, 쿠니마쯔(國松, 58세) 장관이 출근하기 위해 자택 맨션을 나서자, 부근에서 잠복하고 있던 남자부터 콜트 파이슨(colt python)으로 추정되는 38구경의 권총으로 4발 발사되어 이 중에 3발이 장관의 복부 등에 맞고 1년 6개월의 중상을 입업다. 남자는 자전거를 타고 도주했다.
"쿠니마쯔 타카지(國松 孝次)경찰청 장관 저격사건" 관련을 보도한 신문
현장에는 조선 인민군의 3대혁명 적기훈장 뱃지와 한국의 100짜리 동전이 발견되었다. 이 저격사건 약 1시간 뒤에 "옴 교단 건설성 간부"로부터 tv국에 전화해 와 다음의 타켓트는 이노우에(井上 幸彦) 경시총감과 오오모리(大森 義夫) 내각 조사실장 등의 이름을 거명하며 교단수사를 중지하도록 협박했다.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입원한 쿠니마쯔(國松) 장관은 수술 중에 심장이 3번이나 멈추어 위독상태에 빠지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80일이 경과하여 공무에 복귀했다.
쿠니마쯔 타카지(國松 孝次)경찰청 장관 저격사건 현장
사건 전날 "옴진리교" 신자가 장관의 맨션에서 경찰을 비판하는 문서를 뿌리고 있었던 점을 중시해 이 교단 관계자의 범행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으나 범행과 직접 관계되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1996년5월 "옴진리교"의 전 신자였던 경시청 경장 출신 코바야시(小林敏行, 31세)가 교단간부 4명과 같이 "자신이 직접 장관을 쐈다."라고 자수했다. 이 조사에서, 범행의 구체적인 상황과 범행에 사용한 총을 칸다 강(神田川)에 버린 장소까지 상세히 진술했다.
동경 시내를 흐르는 칸다카와(神田川)
강에 잠수부를 동원해 증거품 수색을 했으나 휴기로 사용한 권총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범인의 진술에 모순점이 많아 결국 입건까지는 되지 않았다. 경장은 교단간부에게 중요한 정보를 누설했다는 이유로 징계면직 처분을 받고, 지방 공무원법 위반 용의로 집행유예를 받았다.
"드미트리 시가쵸프" 사건
"옴진리교"의 러시아 신자로 교단 교주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 탈환을 꾀한 대일본 테러 미수사건으로 일본 각지에 폭탄 테러의 계획이 되어 있었으나 러일 정부 당국의 협력으로 미수에 그쳤다. 1991년 교주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는 러시아에 처음으로 방문해, 모스크바에서 당시 러시아 부대통령이었던 알렉산더 루츠코이(aleksandr vladimirovich rutskoi)와 빅토르 체르노므이진(victor stepanovich chernomyrdin) 그리고 유리 루시코프(yurii mikhailovich luzhkov) 등의 정계 상층부와 접촉했다.
다음해는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장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 아사하라(麻原彰晃)에게 자금 지원을 부탁하기도 했으며, 이때에 "옴진리교"의 러시아 진출이 기시화되었다. "러시아의 목소리"에 교단의 교리가 방송되고, "키렌"이라 오케스트를 조직했다. 일본에서는 러시아 특수부대 시설에서 실시하는 "사격훈련 투어"가 교단이 운영하는 여행사를 통해 모집되었다.
그리고 교단은 러시아로부터 직접 헬리콥터와 군수물자를 수입하고 있다. 러시아 국내 여러곳에 교단지부를 설치, 소련체제 붕괴 뒤로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던 많은 러시아 청년들이 "옴진리교"에 관심을 같게 되었다. 이때 드미트리 시가쵸프도 그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교단이 "사린사건"으로 체포해체되자 1995년 러시아도 "옴진리교"를 금지했다.
tokarev tt-33 ak-47(mikhail kalashnikovak-47)
그래도 이 러시아인 드미트리 시가쵸프는 교주 아사하라(麻原彰晃)에 대한 신앙이 깊었다. 1999년 다른 신자 2명과 함께 아사하라(麻原彰晃) 해방하여 러시아로 탈출 시키려는 계획으로 "테러 그룹"을 조직했다. 토카레프 권총(tokarev tt-33)과 칼라시니코프 ak-47(mikhail kalashnikovak-47) 등의 무기를 조달했다. 전기공학에 정통한 파괴공작 일행 한 사람은 고도한 전기신관을 설계했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원격조작으로 폭발시키는 것으로 세계 어디서나 신호를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자금제공은 일본 조직으로 받으며, 일본에의 침투 교통편을 고려해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을 거점으로 정했다. 여기서 아파트 2곳을 빌려 폭탄제조 전문가가 인터넷으로 원격으로 전기신호를 발생하는 전자장치를 주문했다. 그러나 이 주문을 받은 사람은 이것이 폭탄제조용이란는 것을 알고 당국에 신고하여 연반 보안청(fsb)에 의해 이 조직은 일망타진되었다.
"옴진리교"의 국가전복 계획
1994년2월22일 교주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는 간부시잔 6명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 아사하라(麻原彰晃)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 朱元璋, 1328-1398)의 환생이라고 자칭하며, 남경(홍무제 때의 수도)과 효릉(홍무제의 릉) 등지를 여행했다. 여행 도중에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는 "1997년 나는 일본의 왕이 된다. 2003년까지 세계의 대부분은 옴진리교의 세력이 된다. 진리에 방해가 되는 자는 하루 빨리 포아(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설법, 일본국을 무력으로 타도하여 "옴국가"를 건설해, 나아가 세계정복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밝혔다.
귀국 뒤인 2월27일, 도내의 어느 호텔에서 "이대로는 진리의 뿌리가 끊기고 만다. 사린을 동경에 70톤 살포하는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 뒤로 교단은 신자의 재산탈취, 성청제 발족, 자동소총과 사린가스 등 교단의 병기 대량생산, vx가스로 적대자 말살 등 과격한 테러조직의 길로 치닫게 된다.
11월 전쟁 이 외의 테러 계획
11월 전쟁 1995년3월 경찰의 강제수사로 모든 계획이 좌절되자 교단은 11월에 "11월 전쟁"이라고 불리는 "무차별 대량 살육계획"을 세운 것이 밝혀졌다.
이 계획에 의하면, 1995년11월의 국회 개회식에 맞추어, 교단소유 러시아제 헬리콥터로 동경 상공에서 사린을 살포, 천황.각료.국회의원을 포함 동경 도민을 대량 살육한다. 그리고 일본 혼란을 틈타, 미.러.북조선의 각 군대로 하여금 핵전쟁을 유발시킨다. 그 사이 교단은 핵전쟁 종료 뒤에 국가기능이 소멸한 일본을 통치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과 별도로 다음과 같은 계획이 있었다.
마이니찌 신문사 폭파계획(1989년10월)
"옴진리교"의 비판적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는 "선데이 마이니찌"를 반격하기 위하여 마이니찌 신문사 본사를 폭파하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교단은 폭약이 없어 불가불 단념해야 하는 계획이었다. 대신 "사카모또 쯔즈미(坂本 堤) 변호사 일가 살해사건"으로 작전변경 실행했다.
일본 본토 보툴리누스균(clostridium botulinum) 살포계획(1990년4월)
교단 신자들이 오끼나와에서 수련회를 하는 것을 기회로 본토에 보툴리누스균 살포하는 계획이 있엇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황태자 결혼 퍼레이드 탄저균(bacillus anthracis) 살포계획
결혼 퍼레이드 때에 탄저균을 산포하기 위해 현장조사를 마치고 황거를 향해 탄저균 산포의 실험을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993년6월)
일본 천황 암살계획(1993년 가을 무렵)
진구우 야구장(神宮球場)을 방문 예정이란 정보를 입수하여, 여기서 사린을 살포한다는 계획이었다.
제1공전부대 탈취계획(1994년-1995년)
일본 육상 자위대 제1공정부대를 탈취하기 위해서는, 공정단장의 딸을 유괴하여 인질로 공정단장을 협박, 제1공정단을 "옴 공정단"의 정예부대로 하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실제로 딸이 사는 맨션에서 옴 관계자가 설치한 도청기가 발견되었다. 한편 공정대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도 "옴진리교" 권유활동 및 교묘한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외의 주요 사건으로는
국토 이용계획 위반사건, 오카무라 철공업소 탈취사건, 자본가 납치사건,
피아니스트 감금사건, 주차장 경영자 vx가스 습격사건, 신주쿠역(新宿驛) 청산가리사건,
회사원 vx가스 살해사건, 회사원 vx가스 살해사건, 동경 도청 소포 폭발물 우송사건
"옴진리교 피해자 구제회 회장 vx가스 습격사건" 등등을 남겼다.
"교단의 입" 죠우유 후미히로(上祐史浩) 교단 성청제(省廳制)에서는 공보부장, 교단 긴급대책 본부장
fumihiro joyu, center, leader of a doomsday cult that released deadly nerve gas into tokyo's subway system in 1995
그러나 당연한 결과로 범인들이 의도했던 경찰수사의 교란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5월16일 교주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 본명 마츠모또 찌즈오/松本智津夫)는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의 교단 총본부에서, 한 사람이 겨우 드러누을 정도의 작은 비밀방에서 며칠간 숨어지낸 관계로 몸 전체가 배설물 투성이인 채로 발견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 범행에 관계한 범인들이 차례차례 체포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도망 중인 전 "옴진리교" 신자들의 현상금 포스터
"옴진리교"의 핵심 범인들은 일망타진되었으나, 일반 신자들은 교주 아사하라(麻原)에 대한 신앙심이 깊어 이 사건을 진실을 받아 들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핵심 인물들이 속속 구속되고 경찰의 끈질긴 수사로 차츰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이 무렵부터 신자들이 무거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하철 사린살포" 사건 전까지 만 해도 많은 신자들은 "교단이 독가스 공격으로 종교탄압을 받았다."라는 것을 처음에는 진심으로 믿었었다. 이공계의 엘리트로 모인 "고지능 고지식 집단"으로 구성된 간부들인 그들이었으나,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사고는 틀림없는 "어린이 사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교주 아사하라(麻原)를 숭배하도록 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구사, 진짜 "공중부양"을 하는 초능력자로 눈가림. 그리고 뛰어난 교의가 이닌, 뛰어난 매스컴 공작의 말로는 이렇게 종말을 맞이했다. 지금까지 많은 성실했던 신자들이, 그를 "스승으로 아버지로" 숭배했던 아사하라(麻原)는 현실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으며, 자기 사랑만을 비대화 시켜 온 인간이었다. 모든 이들이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순간이었다.
경찰에 체포되어 호송 중인 교주 아사하라(麻原)
"옴진리교"의 무장화
러시아제 헬리콥터 mi-17 구입 -- 구소련 미르 설계국에서 개발된 대형 헬리콥터로 로켓트탄과 대전차 미사일 등의 탑제가 가능하다. 간부 하야카와 키요히데(早川 紀代秀)는 1992년부터 21회에 걸쳐 러시아를 방문하고 있다. 인재발굴과 무기구입에 동분서주하여 사린 살포용으로, 1994년 러시아에서 대형 헬리콥터를 구입하여 네덜란드 경유로 일본 교단본부로 반입했다.
러시아제 헬리콥터 mi-17(미르-17, nato 코드네임 :hip-h) 미군용 jeep "hummer"
군용폭약(rdx) -- "동경 도청 소포 폭발물 우송사건"에서 사용된 폭약으로, 이것을 실은 헹글라이더 "인간형 로켓트 폭탄"(카미카제식 폭탄)을 만들려고 기도했다. 그러나 자폭각오의 신자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아, 교주 아사하라(麻原彰晃)의 공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미군용 특수짚차 "hummer 구입"
tt-33 & ak-74 제조 -- 토카레프 권총(tokarev tt-33)과 칼라시니코프 ak-47(mikhail kalashnikovak-47) 등 소련군이 채용하고 있는 무기를 일본에서 밀조를 계획, 밀조의 참고용으로 러시아에서 총과 실탄을 구입해, 이 것을 분해해 설계로 참고하기 위해 미디오 녹화와 사진촬영을 해 귀국했다. 1993년6월부터 교단간부는 교단시설에서 러시아에서 작성한 도면과 견본 등을 참고로 본격적으로 설계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시제품을 완성했다.
특수 잠항정(소형 잠수함) 제조 -- 1993년 "옴진리교"의 "옴 바다속 도시구상"의 일환으로 동력은 디젤 일렉트릭 기관으로 개발되었다. 하시모토 사토루(端本 悟)가, 시즈오카현(靜岡縣) 항구에서 진수식을 겸한 시운전과 동시에 침물하여 잠수정 내부에 갇혔으나, 다이버들에 의해 가까스로 구출 되었다.
우라늄형 원자폭탄 -- 핵개발에 필요한 우라늄을 입수하기 위해 호주에서 우라늄 광맥이 있는 토지를 구입했다. 그러나 교주 아사하라(麻原彰晃) 일행이 시찰 목적으로 입국할 때 "불법약물" 반입이 발각되어, 이 다음부터 입국이 금지되어 핵개발 계획은 포기되었다.
보툴리누스균(clostridium botulinum) -- 엔도우 마코토이치(遠藤 誠)가 개발
탄저균(bacillus anthracis) -- 엔도우 마코토이치(遠藤 誠)가 개발
페스트균(yersinia pestis) -- 엔도우 마코토이치(遠藤 誠)가 개발, 세균병기 제조에 성공하였으며 직접 각종 사린 사건에 관여했다.
vx가스 -- 교단 내에서는 "신통력"이란 은어로 통했다.
호스겐(phosgene, cocl2)-- 1994년 무렵 호스겐 합성에 성공했다. 이 해에 저널리스트 에가와 쇼우꼬(江川紹子, "에가와 호스겐 습격사건") 테러에 사용되었다. 무색으로 상당히 독성이 강하다 흡입으로 호흡곤란 등의 급성증상이 나타나며 사망에 이르기도한다. 공업용으로 폴리우레탄, 염색재료의 합성원료로도 쓰이고 있다.
마스타드 가스(mustard gas, c4h8cl2s) -- 1994년 무렵 함성에 성공했다. 이것은 "옴진리교 남성 현역신자 린치 살인사건"에 실제로 쓰였다.
각성제 lsd 제조
etc...
아사하라(麻原) 재판 과정
교주 아사하라(麻原)는, 후일 공판과정에서 모든 공소사실을 철저하게 부정과 묵비권 행사로 일관해 왔으며, 범행은 신자들이 독자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라고 끝까지 부정했다. 1996년4월24일 총 17건의 사건으로 기소되어 동경 지방 재판소에서 첫공판이 있었다. 겨우 48석의 일반 방청석에 대해 12,292명이라고 하는 일본 형사재판 사상 가장 많은 방청 희망자가 재판 전에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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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이 피고에게 이름을 물으면, 증언대에서 "마이 네임 이즈..."라고 영어로 대답하고, 일부러 졸리는 척하기도 하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가 일쑤였다. 재판장으로부터 자주 주의를 받고 또 퇴장 명령까지 받기도 했었다.
1995년12월 "온진리교"의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남은 성실한 신자들이 모여 "옴진리"를 부활 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종교집단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 컸다. 사회가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그들 역시 사회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가는 곳 마다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여기저기 전전하면서 종교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옴진리교"를 모체로 새롭게 "아레흐"(aleph) 로 개명한 교단을 주민들이 추방과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2003년2월 그들끼리 모여 "옴진리교"를 모체로 새롭게 "아레흐"(aleph)라고 개명했다. 1999년 출소한 전 "옴진리교" 교단 홍보 담당간부 죠우유 후미히로(上祐史浩)를 중심으로 대표로 하는 "종교단체 아레흐"가 설립되었다. 지역과 시민들의 뜨거운 눈총을 받아 가면서 종교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아직도 이들 종교는 경시청과 시민의 상당한 감시를 받고 있다.
아사하라(麻原)의 사형 판결을 보도하는 "산케이 신문 호외판" 기사사
"아사하라(麻原) 피고에 사형판결", "옴 13건 사건의 주모자"
"음모 그리고 중대한 범죄"
2003년4월 제1심에서 사형이 구형되었다. 이때 아사하라(麻原)는 "일본의 범죄사상 가장 흉악한 범죄자"라고 규탄했다.
2004년 동경 지방 재판소는 "구제라는 종교의 미명 아래 일본을 지배, 자기 스스로 왕이 되려는 공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화하려는 과정에서 일련의 사건을 일으켰다."라고 인정하여 사형을 판결했다. 총 공판횟수는 254회를 넘었다.
2006년9월15일 최고 재판소는 교주 아사하라(麻原)에게 사형을 판결, 형이 확정되었다.
2008년11월10일 변호단은 동경 지방 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9년3월18일 이 청구를 기각했다. 3월23일 이 기각에 대해 불복하여 다시 항고 중에 있다.
"옴진리교"(オウム眞理敎, aum shinrikyo)로 불렸던 이 종교집단 때문에 발생한 최종적인 피해는 사망자 28명, 중경상자 6,000명 이상으로 일본 역사상 최악의 범죄조직이었다.
(아직도 사린 살포 후유증으로 심적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만성적 피로, 눈과 시력장애 등의
중상 치료중인 많은 피해자가 있다.)
그의 기행들
"교주 아사하라(麻原)는 전세가 이집트의 왕이었다."라고 하여 이집트 투어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나의 전세는 요미우리 자이언트의 투수였다."라고 신자에게 발언했다.
인도에서는 불타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명상했던 최고 성지로 알려진 "금강보좌"에 멋대로 앉기도 해 관리자에게 쫒겨났다고도 한다.
중의원 선거 때 여*자로부터 "만약 총리대신이 되면, 일본의 국민 전원이 옴진리교에 입신하지 않으면 안 되냐?"라는 질문에 그는 쓴웃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본 tv의 버라이어티 프로의 "아사하라 쇼우코우(麻原彰晃)의 인생상담"에서, 어느 여성시청자가 "머리를 감을 때 린스를 씁니까?"라는 질문에 "린스는 안씁니다. 샴프는 베이비 샴프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shoko asahara, leader of aum shinri kyo (supreme truth) cult.
1995년4월3일 호에 time 지의 표지에 실린 그는, 일본인으로서는 1971년10월4일호의 쇼와천황(昭和天皇)이래로 23년 만이었다.
해외 이동 때에는 일본 jal은 그의 탑승거부하여, 주로 일본 ana나 러시아 항공의 퍼스트 클래스 전체를 전세내어 탑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자기 전용의 의자를 지참하려 했으나 항공사로부터 거절당했다.
교주 아사하라(麻原)와 그의 여인들
"옴진리교"는 출가신자의 계율에는 "성행위와 수음"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교주 아사하라(麻原) 본인은 "최종 해탈자"라고 하여, 계율을 초월한 존재로 아사하라(麻原)는 자신 전용의 할렘을 만들었다. 정식으로 결혼한 처를 포함하여 6명의 여자와 12명의 자녀를 두고있었다. 그리고 주목할 부분은 그는 이무렵에는 이미 시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애인들은 한결같이 미인만을 골랐다.
이 외에도 다수의 여신도를 종교의식이라고 해 육체적 관계를 맺었으며, 이때 반듯이 여자의 증거물을 병에 담아 소유자의 이름을 붙여 콜렉션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경찰의 강제수색으로 압수된 병이 100개 정도있었다.
아끼요시 쿠미꼬(秋吉 久美子) 미야자와 리에(宮澤 りえ) 리에 사진집 "산타페"(santa fe)
여배우, 탤런트 아끼요시 쿠미꼬(秋吉 久美子, 162cm, 1954년-)의 열렬한 팬이었다. 또 여배우이자 탤런트 미야자와 리에(宮澤 りえ, 167cm, 1973년-)와는 후세의 부부라고 공언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충격적인 미야자와 리에(宮澤 りえ)의 누드 사진집 "산타페"(santa fe)를 신자들에게 구입시키게까지 했다.
*santa fe : 1991년11월 아시하 출판사(朝日出版社) 발행, 시노야마 키신(篠山 紀信) 촬영, 당시 미야자와의 인기가 절정이었을 때로 150만부가 팔렸으며, 일본 연예인 사진집으로는 아직도 최고부수의 기록으로 남았다.
옴진리교" 교주 松本智津夫(麻原彰晃)의 18번 "空中浮揚"
이미 사형확정
그날이 올 때까지 회개하며 오늘도 내일도 뛴다.
"옴진리교"(aum shinrikyo) 관련 서적의 일부
"그래도 살아간다" "경찰이 저격되었던 날" "지하철 사린의 실행범들"
ps. 국내 기독교 및 불교 등.. 종교가 아닌..
해외 사이비 종교이고 , 흥미로운 소재라 올려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