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딸 이사벨이 '펀치(Punch)!'하고 말하더군요. 과일음료를 달라는 뜻이었죠. 단어를 하나라도 더 사용하게 하려고 좀더 예의 바르게 말해보라고 했더니 뭐랬는지 아세요? '펀치 미(Punch me)!'래요. 하하, 자길 때리라니…."
자폐증을 가진 17세 소녀 이사벨의 아버지는 농담하듯 이렇게 말했지만 그 웃음 뒤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미국 조지워싱턴대의 인류학자인 로이 리처드 그린커(47·사진) 교수. 10년 전 『한국과 그 미래:통일과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저서를 내는 등 한반도 전문가였던 그는 자폐증 딸을 키우며 '전공'을 바꾸었다. 이제 그는 미국 인디언 거주지는 물론, 한국·인도·남아프리카 등에 다니며 각 나라나 민족의 고유 문화가 어떻게 자폐증을 인식하고 대응하는지를 인류학적으로 연구하는 자폐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미국·캐나다·한국 등 다국적 전문가들이 경기도 고양시에서 현재 진행 중인 '자폐증 유병률 조사' 연구팀의 책임자도 맡고 있다.
22일 덕영재단 주최로 열린 '자폐스펙트럼장애(ASD) 워크숍' 강연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마침 그의 저서 『낯설지 않은 아이들』이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됐다. 자폐증에 대한 의학적·인류학적 고찰과 자신의 딸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미국에서 자폐증은 1950년대만 해도 1만 명 중 3명꼴로 발생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건당국은 150명 중 한 명이 자폐증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라 그 병을 인식하고 진단하는 상황이 바뀐 것뿐이죠."
그린커 교수는 "내 딸도 10년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정신지체나 소아정신분열로 진단받아 정신병동에 보내졌을 것"이라며 "자폐증에 대한 분류 기준이 체계화하면서 정부 지원도 많아졌다"라고 말했다.
최근 미국의 일부 자폐아 가족들이 소아용 백신 속의 수은이 자폐증을 불러왔다며 미 연방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해선 "과학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며 "자폐증은 태어날 때부터 있는 병"이라고 말했다. 이런 병을 한국에선 부모가 잘못 길러서 생긴 '반응성 애착장애'로 오진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 죄 없는 부모, 특히 맞벌이 엄마들에게 자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문제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도 같은 경우를 당했다. 의사가 아이 엄마의 책임을 추궁하는 바람에 많은 상처를 줬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인 그의 부인은 재미교포 2세인 한인이다.
그는 "자폐증은 일찍 발견해 치료를 시작할수록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다"며 "사회와 가족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이에게 끊임없이 도전의 기회를 주다 보면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영화 '말아톤' 덕분에 한국인들의 자폐증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23일 서울 강남 교보문고에서 저자 사인회 등 일정을 마친 뒤 27일 출국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