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가난 대물림되는 '신분'
이상민(38·가명)씨, 서울 대치동에 산다. 할아버지는 종로, 아버지는 서초동에 살았다. 지금 그의 집은 60평대 아파트다.
박경하(40·가명)씨, 봉천동에 산다. 할아버지는 충북 제천, 아버지는 남산 밑 판잣집에 살았다. 지금 그의 집은 7평짜리 월세 단칸방이다.
이씨의 할아버지는 경기도 이천과 파주에 걸쳐 땅을 가진 대지주였다. 조선시대부터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다. 아버지는 해방후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뒤, 사업을 시작해 60년대엔 월남전 특수, 70년대엔 건설경기를 타고 재산을 더욱 늘렸다. 강남권 개발 정보를 입수하고 서초동으로 집을 옮긴 것은 물론이었다.
이씨는 연세대(84학번)로 진학했다. 학생운동에 잠시 관심을 보이자 아버지는 그를 미국으로 보내버렸다. 미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국내에 돌아와 자동차부품 공장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험미숙으로 3년만에 문을 닫았다. 2년의 ‘근신’ 기간을 거쳐 1999년 유통사업을 시작했다. 두 번 다 사업자금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두번째 사업은 반석 위에 올랐다.
그의 취미는 식도락이다. 내년에 친구들과 강남에 이탈리아 식당과 일본식 카레집도 열 생각이다. 그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아들이 있다. 딸은 영화감독, 아들은 금융인이 꿈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딸은 영국, 아들은 중국의 사립학교에 각각 보낼 계획이다. 다음 세대의 무대는 한반도가 아닌 전세계라고 믿기 때문이다.
박경하씨. 할아버지는 소작농이었다. 마흔도 못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씨의 아버지는 해방 직후 중학교를 중퇴하고 무작정 상경해 서울역 앞에서 지게를 졌다.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하기도 했지만, 쌀을 빼돌리다 쫓겨났다.
박씨에게 어린 시절은 배고픔과의 전쟁이었다. 어머니는 시장바닥에 떨어진 배추를 주워와 시래기로 죽을 끓여 가족들을 먹였다. 박씨는 어려운 살림에도 공부를 꽤 잘했지만, 공고를 중퇴했다. 육성회비 2천원이 없어서였다. ‘노가다’가 첫 직업이었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최근까지 그는 노가다판을 못 떠났다. 그나마도 막노동판에서 얻은 허리병으로 3년전부터는 거의 일을 못 나간다. 아내의 파출부 월급으로 생계를 꾸린다. 그의 유일한 낙은 담배와 소주다.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은 가끔 집에 안 들어온다. 그에게는 삶을 고쳐살 기회가 한번도 오지 않았다. 자녀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 같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