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7일 새벽 6시 쌍방울 레이더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이다(사진=쌍방울 레이더스 팬클럽)
주년(周年)은 ‘일 년을 단위로 돌아오는 돌을 세는 단위’다. 주기(周忌)는 ‘사람이 죽은 뒤 그 날짜가 해마다 돌아오는 횟수’를 뜻한다. 올해로 sk는 창단 10주년을 맞는다. 반면 쌍방울 레이더스는 올해가 해체 10주기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러나 우리 곁에 분명하게 있었던 쌍방울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쌍방울을 기억하는 이들이 해체 10주기를 맞아 ‘돌격대’의 과거를 돌아봤다. 전설이자 역사이며 상처이자 교훈이었던 쌍방울을 통해 한국프로야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보자는 의도다.
쌍방울 팬이 자랑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쌍방울의 모자와 유니폼이 야구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이었던 때가 실제로 존재했었다(사진=쌍방울 팬클럽)
1990년 봄이었다. 전주시에 살던 나는 전북을 연고로 하는 새로운 야구팀이 창단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태 말고 무슨 팀?’하며 고개를 갸웃한다. 신생팀은 다름 아닌 쌍방울 레이더스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모님의 배려로 동생과 함께 쌍방울 어린이 팬클럽 회원이 된 나는 그때부터 ‘돌격대’의 일원으로 산다.
지금도 하얀색 비닐재질의 가방과 잠바 그리고 유니폼, 모자 등으로 구성된 쌍방울 어린이회원 선물이 기억난다. 그때만큼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즐거웠던 적도 없으리라.
우리야 쌍방울 어린이회원 선물을 들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즐거워했다지만, 정작 전주구장 1루 관중석에 앉아 있던 어른 야구팬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당시 어린이회원들이 ‘자존심’이 뭔지나 알았겠는가. 돈 없고 ‘빽’없는 구단 쌍방울은 어른들에게 굴욕이자 수치이기도 했다는 걸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여기다 ‘이태까지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했는데 갑자기 쌍방울을 응원해야 한다니’ 당시 어른들이 느꼈을 정체성 혼란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도 눈에 선한 장면이 많다. 한번은 전주구장에서 쌍방울이 ob(두산의 전신)와 맞붙었을 때였다. 맥주를 마시던 아저씨가 쌍방울이 역전을 당하자 갑자기 “왜 전주구장에서 ob맥주를 파느냐”며 “당장 쌍방울 맥주를 들여놓아라!”라고 소릴 질렀다. 옆에 있던 관중이 아저씨의 고함을 듣고 배를 잡고 웃으며 박수를 치던 게 기억난다.
1999년 쌍방울은 28승 7무 97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kbo 통산 역대 최소승률 2위이자 역대 최다패 공동 1위의 꼴찌였다. 그러나 그들이 약속한 '내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사진=쌍방울 팬클럽)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쌍방울의 성적은 줄곧 하위권이었다. 잘하면 6등, 못하면 꼴찌였다. 그러다 1996년 김성근(현 sk) 감독이 부임하며 짧은 전*가 찾아왔다. 쌍방울이 정규시즌에서 2위까지 오르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다음 해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며 쌍방울은 ‘만년 꼴찌’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1999년 10월 29일 금요일
오늘 한화가 1999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우리 팀과는 너무 멀게 느껴져서이었을까?
나는 야구를 보다 축구를 보다 하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오늘도 잠 때문에 또 학원 못 갔네……. (생략)
과거 쌍방울 팬이었던 한 이의 일기장이다
1999년 쌍방울이 위기에 몰리자 직장인과 대학생으로 구성된 ‘포에버레이더스’란 팬클럽이 조직된다. 이들은 sk가 재창단의 형식을 띠며 야구판에 들어왔을 때 sk를 쌍방울의 후신으로 생각해 열성적으로 응원했다. 초창기 sk 응원가를 보면 쌍방울 응원가와 닮은 게 많다.
‘안타 쳐 주세요~sk가 승리하도록~’도 원래는 ‘안타 쳐 주세요~쌍방울이 승리하도록~’이었다. sk의 ‘간판 타자’ 박경완의 응원가는 2006년까지 쌍방울 때 쓰던 응원가를 사용했다
제주도 서귀포 '야구박물관'에 전시된 쌍방울 유니폼(사진=쌍방울 팬클럽)
그러나 sk가 연고지 인천에 뿌리내리려고 ‘쌍방울’ 색을 지우기 시작하자 많은 쌍방울 팬이 떨어져 나갔다. 그 가운데 일부는 kia 팬으로 또 다른 일부는 기타 구단으로 그리고 나머지 팬들은 아예 야구에 등을 돌렸다.
sk는 몇 년 간 꾸준하게 ‘태평양 데이’등의 행사를 통해 자신들이 ‘인천야구의 적자’임을 밝히고 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를 보면서 쌍방울 팬들은 마음이 무척 복잡했다. sk에게는 서운해도 김성근 감독님은 존경하고,
전주고 출신의 박정권과 군산상고 출신인 이승호, 정대현이 활약하는 게 기뻤기 때문이다. kia에도 쌍방울 출신의 조범현 감독, 최태원, 장재중 두 코치가 있었으니 또한 기쁠 수밖에.
sk와 kia의 한국시리즈를 보며 ‘쌍방울이 살아남았다면 다 우리 감독, 우리 코치, 우리 선수들인데’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은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쌍방울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최태원(사진=쌍방울 팬클럽)
kbo를 비롯해 야구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당신들에게 ‘역사’란 무엇이냐”고.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를 어떻게 보존하고 있느냐”고.미국의 예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일본만 하더라도 야구박물관이 도쿄돔 지하에 있다. 오사카 고시엔구장에는 고교야구 박물관이 있다
한국야구의 산증인인 동대문야구장이 철거됐다. 장충리틀야구장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귀중한 사진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kbo 회관 지하창고와 목동구장 창고에서 썩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늦은 때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한국야구의 이대로 유산이 사라지면 후대의 야구팬들은 뭘 보고 느끼란 말인가.
10년 전 쌍방울이 한국프로야구에 남기고 간 교훈을 잘 기억하는 이들은 지난해 히어로즈의 기습적인 ‘선수 팔기’를 보며 많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아직도 쌍방울을 기억하고, 쌍방울의 팬이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이들은 언제까지고 ‘돌격대’의 역사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에 힘쓸 것이다. 히어로즈를 돕기 위해 가능한 많은 일을 할 참이다. 그것이 팀을 잃어본 자들이 팀을 잃을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위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씁쓸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