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많이 거느린 중국황제들

면죄자 작성일 10.04.02 11: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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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의 여성 편력 역사는 황제(黃帝) 때부터 시작한다.

황제가 이미 1200명의 여인들을 거느렸다고 하니, 참으로 장구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주나라 때에는 황제가 합법적으로 121명의 아내를 맞을 수 있었다.

 

우선 1명의 황후가 보름에 한 번씩 황제와 잠자리를 할 수 있었고, 3명의 부인은 역시 보름에 한 번 세 사람이 함께 황제를 모셨다. 9명의 구빈도 마찬가지로 함께 황제와 잠자리를 했다.

 

그 아래 27명의 세부는 5일에 한번씩 제비를 뽑아 세 명이 함께 황제를 모신다. 마지막으로 81명의 여어들은 남은 14일 중에 매일 다섯이나 여섯 명이 함께 황제와 잠자리를 하였다.


이런 황당한 ‘배정 방식’도 나름대로 성인들에 의해 정해진 것. <예기>에서 그 원문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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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시황제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군주답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는데 비빈들의 수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황제가 한 나라를 정복할 때마다 그 왕비와 공주, 귀족 가문의 미인들을 입궁시켰는데, 이렇게 거느린 후궁이 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황제의 기록은 뒤이은 한무제에 의해 쉽사리 깨져버린다.


한무제는 시대의 풍운아인 동시에 희대의 방탕아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 황제이다.

 

진시황 때에는 비빈을 8개의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한무제 때에는 이 등급이 14개로 늘어난다.

이에 맞추어 여성들의 수도 진시황 때의 만여 명에서 18000명으로 증가한다. <구당서 식화지>에는 한무제의 후궁이 수만 명에 달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한무제는 ‘3일 동안 먹지 않고 살 수는 있어도, 여인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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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18000명의 후궁들에게는 재앙이었다. 황

제의 여인들이 워낙 많다 보니, 운이 좋아 총애를 받은 여인도 몇 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한 번 황제를 만날 기회가 주어질 정도였다.

한편 단 한번의 총애조차 받지 못한 이들은 그야말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들은 30세가 지나 황제의 관심을 끌 수 없어졌을 때에 이르러서야 출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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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西晋)의 진무제 사마염도 한무제에 버금가는 여성편력가였다.

사마염은 273년 공경보다 낮은 집안의 여자들을 육궁으로 삼고자 영을 내리고, 이를 위한 여성들이 선발되기 전까지 모든 혼인을 금지시켰다. 다음해에 5000여 명의 여성들이 선발되어 입궁되었는데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8년이 지나자 입궁한 여성들의 수는 만 여명에 달했다.

 

한편 궁녀의 수가 너무 많아져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양을 풀어놓고 그 양이 이르는 처소의 궁녀에게 황제가 발걸음을 했다고도 한다.

이렇게 되자 궁녀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양이 멈춰 서도록 처소 앞에 먹이를 풀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무제도 사마염도 가장 많은 여인을 거느린 황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여인을 거느렸던 황제는 누구일까?

정답은 당 현종. 그가 거느린 궁녀만 4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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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는 귀비, 숙비, 덕비, 현비의 4비를 부인으로 하고 후궁은 6국 24사에 설치되어 총 190명으로 모두 품계가 있었다. 한편 품계가 없는 궁녀는 더욱 많아 장안과 대명, 흥경의 3궁과 동도, 상양의 궁녀가 모두 4만 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당대의 관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다. 당시 당의 총 인구는 5000만 가량으로 백성 천명 중 한 명은 당 현종의 여자였다는 뜻이 된다.

 

현종이 양귀비 한 사람만을 총애하고 있었을 때, 나머지 4만 명의 궁녀들은 허망하게 황제가 발걸음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당대의 시인 원진은 궁 안에서 남의 수족 노릇을 하며 외롭게 늙어가는 궁녀들의 안타까움을 시로 읊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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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는 음식과 여자를 즐기는 것을 인생의 최고 즐거움으로 여기던 시기다.

황제 역시 산해진미와 여색에 탐닉했는데, 명대의 황제들이 유약하고 명이 짧은 원인이 이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도교에 심취하였던 가정제는 불로장생의 욕망과 성욕을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동정녀하고만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 보면 청대의 궁녀들은 황제의 성욕을 해결시켜주거나 자식을 낳아주는 도구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청대에는 태감들이 패에 여성들의 이름을 적은 후, 매일 밤 황제의 저녁식사가 끝나면 패들을 올렸다. 황제가 마음에 드는 패를 골라 뒤집어놓으면, 태감이 물러가서 호명된 여인을 데려온다.

이 때 태감은 여인의 옷을 모두 벗기고 외투로 감싼다. 그리고 황제가 누워서 기다리는 어탑까지 업어온 후 다시 외투를 벗겨 황제의 눈앞에 대령시킨다.

 

이러한 합궁 과정은 황제가 마치 마음에 드는 여성을 음식처럼 고르는 듯한 느낌을 연상시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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