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이야기

슈퍼치킨z 작성일 10.10.27 00: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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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건데요

 

좀 길어도 재미있어요~ 읽어보세요 ㅋ

 

 

 

 

잠에서 깨어나니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몽롱하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았다.

눈꺼풀이 무거워 눈이 떠지질 않아, 그대로 눈을 감고

평소에 하던 대로 컴퓨터 본체가 있을만한 부근에 슬며시 발가락을 댔다.

술기운 탓인지 평상시와 다르게 쉽게 본체에 발가락이 닿지 않았다.

‘원래 이쯤에 본체 파워버튼이 있는데’

잘못 갖다댔나 싶어 발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컴퓨터는 커녕 책상에도 발가락이 닿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여긴 내 방이 아닌데? 어제 친구들이 나를 여관에 옮겨놨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았다.

손에는 500원짜리 하나가 잡혔다.

뒷주머니까지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았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이 어디 갔지? 어라? 지갑도 없네.’

불현듯 예전에 9시뉴스에서 보았던 아리랑치기가 떠올랐다.

재빨리 신고를 하기위해 방문을 열고 여관주인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여관의 중앙에는 할아버지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  그리고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하나가 있었다.

“7번째 사람인가? 이제 한 사람,”

할아버지가 나를 보면서 중얼거린 말이 거슬려서 자세히 들으려했지만,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염아저씨 때문에나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나한테 가까이 오지마세요.”

수염아저씨는 내 물음에는 답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느 새 수염아저씨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고, 나는 너무 놀라 수염아저씨의 복부를 발로 찼다.

“저리 꺼져!!”

내 발차기 한방에 나가떨어진 수염아저씨는 배를 움켜지며 나를 노려봤다.

나 역시 물러날 기분이 아니었기에 똑같이 노려보며 면상에 한방 먹여줄 준비를 했다.

순간 할아버지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보게, 너무 성급하지 않은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가가면 안 돼지,
그리고 젊은이도 어른을 그렇게 발로 차면 쓰나,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니 진정 좀 하게. 그나저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자네의 상의 좀 걷을 수 있을까?”

“무슨 말이죠?”

“자네도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런 거라네. 이해 좀 해주게”

할아버지의 차분한 말투 때문인지, 금세 진정된 나는 할아버지의 부탁대로 상의를 위로 올렸다.

상의를 걷자 내 가슴팍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심장 쪽에 이상한 기계가 부착되어 있었다.

“자네도 우리랑 같은 처지로군.”

“같은 처지라니? 무슨 처지요?”

“나도 그렇고 저 수염이 난 사내도, 저기 학생도 그리고 젊은이 자네도
모두 이곳에 갇힌 거야, 그 녀석한테.그 녀석은 우리한테 이상한 걸 요구하지. 우리를 죽일 수도 있어. 저기 복도 끝에 있는 철문이 유일하게 나갈 수 있는
문으로 보이는데 굳게 닫혀있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 녀석이 누군데요? 그리고 이거 떼어도 상관없죠?”

내가 가슴에 붙어 있는 기계를 떼어내려고 손을 갖다대려하자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안 돼! 젊은이. 억지로 떼려하면 죽을 수도 있어”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 못하고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그걸 억지로 떼려하면 그 녀석이 아저씨를 죽일 거야”

옆에 가만히 있던 학생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아이고, 학생~ 그녀석이라뇨. 나한테는 조카뻘인데 녀석이라니, 속상하네요.”

어디서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듣기 거북한 변조된 음성이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관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니, 이곳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여관이 아니었다.

나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의 정체가 누군지 궁금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에요? 그리고 지금은 뭐하는 상황인거죠?”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만 중요한 건 우리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거지.”

할아버지는 말씀을 하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할아버지~ 목숨이 뭐가 위험해요.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그새 까먹으셨나? 아니면 혹시 치매? 이건 그냥 역할놀이일 뿐이에요.
각자 방문 안쪽에 붙어있는 종이에 적힌 것이 바로 자기들이 해야 될
역할이에요.자세한 건 그 종이에 모두 쓰여 있고요.
할아버지 눈이 안 좋으셔서 못 읽으니까 읽어드려야 하나?
할아버지~ 읽어드려요?”

“아니, 그 종이는 이미 10번도 넘게 읽었어.”

모두 처음 듣는 소리라 나에게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난 방에서 그런 종이 못 봤는데?”

“너무 빨리 나와서 못 봤나보네. 다시 가봐라 겁쟁이야”

겁쟁이라는 단어에 울컥했지만,

나는 상황을 좀 더 차분하게 생각하기위해 무시하고, 내가 있던 방으로 돌아갔다.

방의 안쪽 문에는 정말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역할놀이


당신의 역할은 ??? 입니다.
모두를 ??? 해주세요.

규칙도 있습니다.

-제한시간은 4일, 역할놀이에 필요한 인원은 총 8명
-자신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되도록이면 비밀입니다.
(비밀로 하는 게 본인의 목숨을 위해 좋을 겁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 제대로 안하면 가슴에 달린 폭탄이 펑!
-멋대로 폭탄을 뜯어내려 해도 펑!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4일 동안 역할을 멋지게 수행하시면 살려드립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역할놀이를 못하신 분은 역할놀이를 다시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시작!


‘뭐야? 이건’

나는 종이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나니, 아까보다는 진정되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방밖으로 나갔다.

마침 내 방의 반대편 방에서 어떤 여자가 나왔다.

“짝!”

그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아버지도 건드리신 적이 없는 나의 싸대기를 후려쳤다.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붉어진 뺨을 손으로 비비면서, 나를 때린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네 짓이냐? 이 변태새끼야! 지금 장난해? 여긴 어디야?”

내가 이렇게 아무 저항 못하고 있을 때,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다가와서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모자 쓴 남자의 뒤를 이어,

팔에 문신이 가득한 건장한 남자랑 정장차림의 아줌마가 뒤따라 왔다.

“너희들은 뭐야? 너희도 한 패냐? 니들 콩밥 먹고 싶어?”

여자는 모두에게 소리를 지르고, 팔을 거세게 흔들며 저항했지만,

모자를 쓴 남자의 힘에 꼼짝 못하였다.

“저기요, 저희가 아무래도 같은 처지인 거 같은데, 그만 하시죠.”

모자를 쓴 남자는 침착하게 여자를 타일렀다.

“그래요. 아가씨, 좀 진정하세요.”

얼떨결에 뺨을 맞은 나였지만,

나 역시 그 여자보다는 지금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있던 터라 침착하게 여자를 진정시켰다.

“오호, 드디어 8명이 모두 모였네요.”

스피커에서 역겨운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그리고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목소리가 나오는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여러분, 일단 복도 중앙에 넓은 곳으로 나오세요. 그리고 그곳에 있는
원탁에 빙 둘러 앉아서 제 얘기 좀 경청하세요.”

“이건 또 뭐야?”

역시나 그 여자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불쾌한 소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와 무력에 눌려 순순히 그 녀석의 지시대로 행동했다.

스피커에서 나온 말대로 복도 중앙은 다른 복도와는 달리 공간이 넓었고,

그 가운데에 정확히 여덟 개의 의자가 놓여있는 원탁이 있었다.

그리고 복도의 네 귀퉁이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붉은 불빛이 반짝거렸다. 카메라가 있는 게 분명했다.

“다 모였는데 이제 어떻게?”

할아버지가 먼저 천장의 스피커를 향해 입을 여셨다.

“모두들 자리에 앉으셨군요. 일단 문 앞의 종이는 모두 보셨으리라 믿겠습니다.
제가 정성들여 만든 건데 보셔야죠. 하하하. 우선은 서로 같이 역할극을
할 건데 누가 누군지 알아야겠죠? 자기소개를 하시죠. 서로들 모르잖아요?”


그 녀석의 말을 듣고, 모두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일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 그리고 낯선 장소, 그리고 불쾌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자기소개라니. 참으로 어이없는 요구다.

‘기분 나쁜 녀석, 네 소개나 하시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녀석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자기소개를 해댔다.

“쑥스러워하시기는, 빨리들 하시지. 그럼 사교성 있는 저부터 할게요.
저는 여러분을 가둬 놓은 납치범이자, 여러분의 몸속에 폭탄을 심어놓은 폭탄테러범이자, 역할극을 꾸민 감독이자,
이제부터 여러분의 역할극을 보게 될 관객이라고 합니다. 하하하”

녀석은 흥에 겨워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우리에게 저지른 악행을

마치 자랑하듯이 떠벌리는 게 영 못마땅했다.

“저 새끼 말투가, 아주 넌 잡히면 뒤져 그냥! 쥐새끼 같은 놈!”

팔에 가득한 문신, 쩍 벌어진 어깨,

딱 조폭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본인 소개나 하시죠, 괜히 도발하지 마시고. 일단은 저 분의 말을 따릅시다.
당신들이 일어나기 전에 저도 몇 번이나 대화를 시도했지만 저 분하고는 대화가 안 돼요.
우선, 저분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저분도 우리를 밖으로 보내주겠죠.”

정장차림의 아주머니가 안경을 고쳐 쓰며 조심스레 한마디 했다.

아주머니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미묘하게 떨리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 꽤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게

아마도 이 낯선 상황에 꽤 적응된 것으로 보였다.

거칠게 말하던 아저씨도 아주머니의 말씀에 조금 기가 눌린듯했다.

“아유, 저 새끼 때문에 흥분해서 죄송했습니다, 아주머니. 그럼 저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뭐냐,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 있는 강남에서 아주 잘나가는 조직,
빡구파의 고위간부 쌍용이라고 합니다. 이상용”

상용 아저씨는 자신의 셔츠를 걷어서

양쪽팔뚝에서 승천하는 용두마리, 쌍용을 보여주며 말했다
.
꽤나 힘을 과시하는 타입으로 보였다.

아니, 확실히 남에게 힘을 과시하는 타입이다.

“그 다음은 제가 소개할게요. 저는 대학생으로,”

“대학 어디? 무슨 대학?”

상용 아저씨는 모자 쓴 남자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끼어들며 질문했다.

“네, 서울대 다니고 있습니다.”

모자 쓴 남자는 상용 아저씨에게 의미를 알 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이, 지금 확인 못한다고 둘러대긴”

상용 아저씨는 모자 쓴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상용 아저씨의 시비에도 모자 쓴 남자는 표정변화 없이 침착함을 유지했다.

내 생각에 둘 중하나 일 것이다.

상용 아저씨한테 겁먹었거나, 진짜로 서울대가 아니거나.

모자 쓴 남자의 소개가 끝나고, 5초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그대로 놔두면 침묵이 길어질 거 같아서 내가 소개를 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그동안 조용히, 말 한마디 없던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 다음은 제가 소개해도 될까요?”

학생의 비브라토 섞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모두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예, 저는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고요.

이름은, 이름은, 이름은 꼭 말해야 하나요? 모르는 사람들인데,”

가방끈을 양손으로 꼭 붙잡은 채, 주눅 들어 자기 소개하는 걸 보니, 내가 다 안쓰러웠다.

게다가 학생의 이름은 이미 명찰보고 알고 있었다. 안세형.

근데 그렇게 굳어 있는 세형학생에게 상용 아저씨는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야, 넌 남자새끼가 어깨 좀 피고, 너 이 새끼 학교에서 맞고 다니지?
내가 학교 다닐 때, 너 같이 기생오라비 같은 애들이 제일 싫었는데”

상용 아저씨의 질책에 세형학생은 울먹였다.

“상용씨, 제가 써준 역할대로 행동하세요. 나대지 말고!”

스피커에서 처음으로 옳은 소리가 나왔다.

스피커의 소리는 빡구파의 쌍용이라는 닉네임에 쫄아서

한마디도 못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뻥 뚫어주었다.

상용 아저씨도 갑작스런 지적에 당황해하다가

이내, 천장의 스피커를 향해 욕을 해댔다.

“뭐라고? 이 새끼야! 거기 숨어서 쪼개지 말고 나와!”

“상용씨, 역할대로 행동하시죠? 마지막 경고입니다.”

좀 더 냉랭해진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모두가 목소리의 분위기가 바뀐 걸 눈치 챘지만

상용 아저씨만은 더욱 흥분해 소리치기 바빴다.

“나오라고!! 새끼야! 숨져볼래?”

“펑!”

기계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던 상용 아저씨의 입에서

육두문자대신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사방에 흩어졌다.

입에서 피를 토해내던 상용 아저씨는

그의 육중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철푸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꺄악!!!”

“으아!!”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자는 자신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기자 비명을 질러댔고,

세형학생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역할을 제대로 했어야지. 서울대를 나왔다는 모자 쓰신 분,
힘들겠지만 상용씨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종이를 꺼내 그의 역할이 뭔지 확인해주세요.
그가 얼마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는지 모두가 알아야하니까요!”

스피커는 지시를 했고, 스피커의 지시에 따라 모자를 쓴 남자는

천천히 상용 아저씨의 시체에 다가가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에서는 구겨진 종이가 나왔고,

모자를 쓴 남자는 그 종이를 펼쳐서 보더니 나에게 건넸다.

나는 당황한 와중에 종이를 건네받았고,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당신의 역할은 ‘겁쟁이’입니다. 모든 것들을 두려워해주세요.

 

애초에 상용 아저씨가 소화하기에는 불안한 역할로 보였다.

‘저런 건달한테 겁쟁이라니’

이윽고 사람들이 상용 아저씨의 종이를 돌려보자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상용씨의 역할은 ‘겁쟁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겁쟁이처럼 행동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여러분들도 공감할겁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역할극이라도 좋으니 사회에서 힘 좀 쓰는 사람이 겁먹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어쨌든 이제 다들 자기가 맡은 역할의 중요성은 알겠죠?
뭐, 역할의 중요성은 상용씨 하나로 깨우쳤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절반 이상이 패닉상태인 채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모자를 쓴 사내는 고개를 숙여, 피가 번지고 있는 바닥을 응시한 채 멍하니 있었고,

옆에 여자는 엎드린 채, 울고 있다.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는 황급히 상용 아저씨의 시체가 나뒹구는 자리를 떠났고,

수염 아저씨는 학생이 걱정되는지 학생의 방문을 두드렸다.

모두들 진짜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감지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 깨달았다.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은 중요하다고.

이제부턴 목숨을 걸고, 역할극을 해야 한다고.

나 또한 그렇다. 이제부터 내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상용 아저씨가 본보기로 죽은 후, 모두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았다.

나 역시 문을 잠그고 혼자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변조된 목소리로 나를 괴롭히던 천장위의 스피커 역시 상용 아저씨가 죽은 후로 잠잠했다.

그 녀석은 상용 아저씨를 죽일 때,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 이유 또한 별 것도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역할놀이 때문에. 두려움과 분노에 몸이 떨려서, 억지로 잠들려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나서

‘악몽을 꿨네.’

이러고 그냥 훌훌 털고 일어나서

평소처럼 대충 아침 겸 점심으로

계란 하나 ‘탁’ 깨뜨려 넣은 라면 하나 끓여서 먹고,

남은 국물은 찬밥에 말아 먹은 다음.

해가 질 때까지 계속 컴퓨터를 하다가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밤에 모여서 소주 한잔하면 좋으련만.

무심코 손목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종이에는 제한시간이 4일이라고 했다.

그러면 4일 후, 역할을 잘하면 집에 보내 주려나?’

“똑똑똑”

누군가의 노크소리에 감고 있던 눈이 떠졌다.

나도 모르게 잠깐 졸아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졸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2시정도 됐겠지’라고 생각하며 손목시계를 보니,

8시였다. 졸았던 게 아니라 마음 놓고 푹 잔 거였다.

난 정말 대단하다.

“똑똑똑”

계속되는 노크소리에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문고리를 쥔 순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문의 옆의 벽에 기대어 말했다.

“누구세요?”

함부로 문을 열어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신중하게 행동했다.

“아, 저는 어제 서울대 다닌다고 소개한 사람입니다.”

“근데, 무슨 일로?”

“할아버지 기억나시죠? 할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다들 불렀거든요.
지금 모두 모이고 그쪽만 남았는데.”

나는 혹시나 해서 쥐새끼 한 마리 들어올 정도로 문을 조금 열고, 바깥을 바라봤다.

모자를 쓴 남자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보였다.

나는 머쓱해서 산발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열고 나왔다.

바깥 통로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뭐하세요?”

할아버지는 내게 복도의 중앙에 번져있는 피를 눈으로 가리키며 충 눈치를 줬다.

순간적으로 중앙복도에 상용 아저씨의 시체가 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체가 있는 곳에서 대화를 하기에는 들 심장이 너무 약한 모양이었다.

“하실 말씀이 도대체 뭐죠?”

모자를 쓴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했다.

“흠”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한번 하시더니, 주위를 둘러보곤 말을 이으셨다.

“아무래도 우리가 서로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불렀습니다.
우리가 여기로 잡혀온 이유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에헴”

할아버지는 말씀을 하시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셨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도 정말 용기를 내서 하신 말씀일 것이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서로가 서로를 알고, 신뢰하고,

힘을 합치면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 나름인지라.

“서로의 무엇을 알자는 거죠?”

정장차림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에, 그러니까, 뭐 자세한 건 아니라도,”

할아버지는 아주머니의 비협조적인 말투에 당황하셨는지,

말을 더듬으셨다.

“최재희라고 합니다. 어제 말했다시피 대학생이고요.
그리고 이름정도는 서로 알아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자신의 역할까지는 무리더라도”

모자를 쓴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흠,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꽤 멋있게 말했다.

역할의 비공개 또한 좋은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규칙에 쓰여 있던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종이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역할을 함부로 말할 리가 없었다.

재희씨는 말을 마치고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제가 먼저 소개를 했어야 했는데. 저는 권태식이라고 합니다.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주십시오. 그게 편하니까, 에헴.”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전 김수정 이예요. 그리고 아저씨, 저번에 때린 건 미안해요.”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 여자는 불쑥 자신의 이름을 말하더니,

이내 나를 보며 저번에 나의 따귀를 때린 것을 사과했다.

하지만 건성으로 사과를 한 것인지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보고 아저씨라니, 하여튼 요즘 여자들은.

“저는 우소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아닙니다.”

나는 소개를 하면서, 내가 정말 소인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저씨가 아니라는 말은 수정이라는 여자를 보며 해댔으니.

“저는, 저는 안세형입니다. 고등학생이고요.”

특유의 비브라토 섞인 소리로 세형학생이 소개를 했다.

뭐, 이름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진정이 됐는지, 목소리의 떨림이 덜하다.

이제 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은 둘.

차분한 아주머니와 말 한마디 없는 수염 아저씨.

모두가 그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자 아주머니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숙이라고 합니다. 그냥 정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세요.”

정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고 모두 수염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염 아저씨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X자 표시를 하며 입에 댔다.

그러고 보니, 저 수염 아저씨가 말하는 걸 못 봤다.

“말을 못하시나?”

재희씨가 떠보듯이 말하자, 수염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는 허공에 손을 휘둘러댔다.

“여기, 수화 할 줄 아는 분 있나요?

저 아저씨가 수화로 말하시는데 통역 좀 해주세요.”

재희씨는 수염 아저씨의 수화를 알아보려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모르는데요.”

다들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수화를 할 줄 안다.

대학교 다닐 때,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고,

덕분에 간단한 의사소통은 다 할 줄 안다.

하지만 내가 수화를 해봤자, 수염 아저씨는 못 알아 볼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저 아저씨가 하고 있는 손짓은 모두 엉터리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 아저씨는 실제로 말을 못하는 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 역할은 벙어리일 테지.

당분간 이 사실은 나만 아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거기 가방에 필기구 있지?”

“네,”

“그러면 그걸로 의사소통하면 되겠다.”

세형학생은 재희씨의 말대로 종이와 펜을 꺼냈고, 재희씨는 그것을 수염 아저씨에게 주었다.

수염 아저씨는 펜을 가지고, 무언가를 썼다.

- 박만도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

그렇게 각자의 소개가 마무리 지어졌다.

대충 뭔가 마무리 지어지니,

잊고있던 허기가 느껴져 배가 고파졌다.

 

여기 온 후로 물도 못 마시고, 아무것도 못 먹었다.

나는 주위를 살피다가

여기서 가장 친절해 보이는 재희씨에게 슬며시 물었다.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물은 어디에 있죠?”

나의 분위기를 확 깨는 질문에 재희씨는

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귓속말로 말해주었다.

“방에 보면 구석에 냉장고가 있을 거예요,

거기에 음식들이 있는데

역할극이 끝나는 4일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재희씨의 역할은 혹시 천사일까?

남자한테까지 친절한 남자는 보기드믄데 정말 존경스러웠다.

재희씨의 말을 듣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반대편 방을 쓰는 수정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소형씨라고 했죠. 궁금해서 그러는데.

여기서 굶어야하나요? 음식은 어떻게 해결하죠?”

“모르겠는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문들 닫고 냉장고를 찾았다.

방의 구석에는 재희씨의 말대로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냉장고에는 물이랑, 식빵, 그리고 초콜릿 등이 있었다.

나는 빵과 물을 집어서 침대에 앉아서 먹었다.

간소했지만 배고픈 내 배에게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는 대충 우리가 하고 있는 역할놀이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역할은 ???,

그리고 수염 아저씨, 아니 만도 아저씨의 역할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벙어리.

나와 만도 아저씨가 맡은 역할을 봤을 때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그리고 아직은 그들의 역할을 모르겠지만

세형학생, 재희씨, 수정씨, 할아버지, 정 선생님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세형학생은 겁이 많은 거 같고, 재희씨는 착하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고,

정 선생님은 말하는 게 좀 깐깐하지만 뭐 위험해 보이지는 않고,

수정씨는 좀 위험하지만 뭐 여자니까,

우리를 가둬 놓은 녀석의 말대로 역할만 제대로 수행하면

그렇게까지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나가자, 방의 반대편에 수정씨가

빵을 손가락으로 뜯어 먹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눈을 마주치기가 겁나 그냥 무시하고,

재희씨와 할아버지 그리고 정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갔다.

셋은 모여서 뭔가 대화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이곳이 꽤 따뜻한데도

아직 정장을 제대로 갖춰 입은 정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덥지 않으세요? 전 더워서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데”

“제 마음이에요, 상관하지 마세요.”

나는 날카로운 반응에 움찔했다. 뭐, 어느 정도 깐깐한 건 알았지만.

같이 대화를 하던 할아버지와 재희씨도

정 선생님의 갑작스런 정색에 꽤 놀란 눈치였다.

“전 이만 방으로 가보겠습니다.”

정 선생님은 그러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민망함에 눈치를 보다가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괜히 짜증이나 내고, 잠이나 자야지.’

나는 찝찝한 마음을 안고 잠을 청했다.

생각했던 거보다 안전하다고 느껴서 그런지는 몰라도

첫날보다 편안했다.

생각해보니 벌써 이틀 째,

오늘은 그 녀석의 목소리도 하루종일 안 들렸다.
그래서 그런지 잠이 잘 왔다.

 

 

 

 


“털썩, 뚜벅뚜벅, 또각또각.”

잠귀가 밝은 탓에, 밖에서 나는 괴상한 소리에 눈이 떠졌다.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나 말고도 재희씨, 정 선생님이 통로에 나와서 숨 죽이고 복도중앙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재희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모르겠어요. 복도 중앙 쪽에 뭔가 있어요.”

재희씨는 그렇게 말하고,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는

서서히 복도중앙 쪽으로 다가갔다.

나 역시 재희씨를 따라갔다. 그리고 내 뒤를 정 선생님이 따랐다.

재희씨는 눈치를 보다가 순간적으로 뛰쳐나갔다.

나 역시 재희씨의 뒤를 따라 나갔다.

복도중앙의 구석에 뭔가 보였다.

“누구냐?”

재희씨가 구석에 있는 그것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것이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세형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광경이 가히 호러스러웠다.

바닥에는 누군가의 팔과 다리가 잘려져 널브러져 있고,

피로 물든 교복 와이셔츠를 입은 세형학생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이 들려 있었다.

무엇보다 끔찍했던 건 세형학생의 울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에요”

세형학생이 우리에게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나는 너무 놀라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때, 뒤에 있던 정 선생님이 정장마이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탕”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던 세형학생은 ‘털썩’ 쓰러졌다.

재희씨가 황급히 손에 권총을 든 정 선생님의 손을 붙잡았지만

이미 방아쇠가 당겨진 후였다.

총알은 애석하게도 세형학생의 이마에 명중했고,

세형학생은 비명한마디 없이 즉사했다.

순간적으로 이마에 구멍이 뻥 뚫린 채,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는 세형학생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고,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날, 죽이려고 했어.”

정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세영학생을 죽이고, 이성을 잃은 듯했다.

“소형씨 좀 도와주세요.”

정 선생님의 권총을 뺏으려는 재희씨는 힘이 부치는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예?, 네”

도와준다고 대답은 했지만, 난 주저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아도,

곧 총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할아버지와 만도 아저씨가

대충 눈치를 채고 재희씨를 도와

이성을 잃은 정 선생님을 뒤에서 붙잡았고,

그 틈에 재희씨가 권총을 정 선생님의 손에서 빼내었다.

그리고는 총구를 정 선생님의 이마에 겨누었다.

순식간에 상황종료였다.

“권총을 이리 줘, 내꺼야”

정 선생님은 만도 아저씨에게 붙잡힌 채,

자신을 겨누는 재희씨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왜 총을 쐈죠?”

재희씨는 비교적 침착함을 유지하며 정 선생님에게 물었다.

“날, 죽이려 했어, 손에 칼을 쥐고 있었어!!”

정 선생님은 악을 써댔다.

“울고 있었어요! 칼도 손에서 버리려했고!”

재희씨의 말이 맞았다.

나 역시도 세형학생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뭐랄까?

그다지 위험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생명의 위협은 느끼지 못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정 선생님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총을 쐈다.

우리들 중에 가장 안전한 맨 뒤에 있었으면서.

“왜 죽였냐고요!! 그리고 권총은 어디서 났어요?!!”

재희씨는 다시금 물었다. 권총을 손에 쥔 채 부르르 떨면서.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재희씨가 총을 쏠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재희씨는 남에게 총을 쏠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지금 총을 쏜다면 뒤에서 정 선생님을 붙잡고 있는 만도 아저씨도 총에 맞을 게 분명했다.

재희씨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재희씨가 이렇게까지 정 선생님을 위협하며 추궁하는 이유는?

‘아마도 권총까지 가지고 있는 정 선생님이 맡은 역할을 알아보기 위해서겠지.’

“그게 내 역할이니까!!! 그래서 총을 쐈어.”

정 선생님이 울면서 주저앉았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재희씨의 추궁에

정 선생님은 자신의 역할이었음을 실토해냈다.

뭐, 처음 보는 학생의 목숨보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역할이 더 소중한 것은 당연한 거니까.

그렇다고 ‘그냥 죽이고 싶어서 쐈어’라고 할 수도 없고.

이로써 내가 생각했던 안전한 역할놀이는 끝이 났다.

“와우! 드디어 여러분들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군요. 관객으로써, 지루했었는데 이제야 보기 좋네요. 팝콘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네요. 하하하”

오랜만에 스피커에서 그 녀석의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눈앞에 그 녀석이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렸겠지만,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 녀석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듣는 것밖에 없었다.

“우소형씨,”

스피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예?”

나는 엉겁결에 대답을 했다.

“방금 전에 죽은 학생의 역할이 뭐였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학생의 방에 들어가서 가방앞쪽의 포켓을 열어보세요. 하하하”

나는 스피커의 소리를 듣고서 그냥 천장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 내게 재희씨가 말했다.

“제가 가볼게요.”

재희씨는 천천히 세형학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르고,

방문을 열고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당신의 역할은 시체처리반입니다.

시체가 생기면 칼로 썰어서

중앙복도의 구석에 있는 수거함에 넣어주세요.
(칼은 침대 밑에 있습니다.)

“학생은 우리를 해치려하지 않았어요.

그건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어요.

내가 조금만 빨리 움직였어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재희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도 만도 아저씨도, 할아버지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이대로 있어봤자 우리는 모두 죽을 거예요.

아무도 지키지 못하고.”

재희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세영학생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너무 순식간이라 말리려 했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탕”

문밖으로 단발의 총성이 새어나왔다.

모두들 놀라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총소리가 복도에서 울리다가 사라지고,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아무도 방안을 확인하지 못했다.

2분정도 지났을까?

나는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의 중앙에는 재희씨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

‘재희씨, 이 방법밖에 없었나요?’

나는 조용히 다가가서 재희씨가 떨어뜨린 권총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문을 닫았다.

“어떻게 됐는가?”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재희씨는 자살했습니다.”

할아버지와 만도 아저씨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정 선생님은 벽을 짚고 일어섰다.

저 사람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둘이나 죽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은 내가 죽이겠어.”

나는 권총으로 정 선생님을 겨눴다.

하지만 나는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고,

정 선생님은 그런 나를 담담히 보다가

내가 들고 있는 권총을 손으로 쳐냈다.

총은 쇳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내가 총을 다시 주워서 다시 정 선생님을 겨누자,

정 선생님이 말했다.

"총알은 2발밖에 없었어. 자살도 죽은 건 죽은 건데"

정 선생님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벽을 짚고 힘겹게 걸어갔다.

나는 더욱 화가 났고, 만도 아저씨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정 선생님에게 달려드는 나를 막아섰다.

“내 역할은 이제 끝났어.”

정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했다.

정 선생님이 방문을 열자 방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며

정 선생님을 반대편벽으로 밀어냈다.

지금까지 안보이던 수정씨였다.

수정씨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고, 그 칼은 정 선생님의 배에 정확히 꽂혔다.

수정씨는 칼에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정 선생님의 귀에 대고 말했다.

다 들리게끔.

“왜 웃고 있는 거야? 죽어버려!”

정 선생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수정씨는

그런 정 선생님을 아랑곳하지 않고 칼로 배를 더욱 깊이 쑤셨다.

“펑!!”

순간, 기계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고,

칼로 배를 찌르던 수정씨의 얼굴에 정 선생님이 피를 토해냈다.

피로 범벅이 된 수정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나는 혹시 수정씨도 죽었나하고, 얼른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그녀는 기절한 것 뿐이었다.

나는 상의를 벗어 그녀의 얼굴에 잔득 묻은 피를 어느 정도 닦아내었다.

순간 스피커에서 그녀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우, 뜸을 들였던 만큼 모두가 화끈하게 보여주는 군요.

제가 원했던 거예요. 특히나 젊은 아가씨, 참 대단하군요.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하하하”

그 녀석은 우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었다.

결국 모든 상황이 놈이 바라던 대로 됐고,

우리는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했다.

“와우? 지금 감탄이 나와?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이 개죽음을 당했는데?

고작 네 녀석이 엉성하게 짜놓은 역할놀이 때문에!!”

나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워~워~, 진정하세요. 소형씨, 그나저나 궁금하지 않으세요?

총을 들고 있던 아줌마의 역할.

궁금하시다면 아주머니가 입고 있는 상의의 안주머니를 보세요.”

나는 원망가득한 눈으로 천장을 한번 보고,

천천히 정 선생님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결코 그 녀석의 지시를 따르는 게 아니다.

나는 그 녀석이 지시를 하지 않았어도 그녀의 역할을 확인했을 것이다.

정 선생님의 역할이 너무 궁금했다.

그녀의 몸은 피와 살점으로 뒤덮여 어떤 게 옷이고, 어떤 게 가죽인지 헷갈렸다.

나는 한참을 헤집다가 겨우 마이의 안주머니에서 빨갛게 물든 종이를 찾아냈다.

피가 묻어 있었지만 충분히 글씨는 알아볼 수 있었다.

*중요역할

당신의 역할은 총잡이입니다.
총으로 2사람을 죽이세요.

총알은 2발이며 본인을 쏴도 상관은 없답니다.
(총과 총알은 냉장고 안에 있습니다.)

“아주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어요, 총잡이 빵야! 하하하”

“중요역할? 역할놀이는 개뿔!”

나는 종이를 구겨서 바닥에 내팽겨 쳤다.

결국 처음부터 정 선생님은 누군가를 꼭 죽여야만 했다.

그래야 정 선생님이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타깃이 내가 될 수도 있었다.

‘잠깐, 내가 죽을 수도 있었어?’

죽을 수도있었다라는 생각에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땀을 닦아내려다가 피로 붉게 물든 손을 보고 잠시 멈추었다.

기분이 더러워서, 피가 묻은 손을 연신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바지는 더러워져도 상관없었다.

그저, 내 손에 피가 묻는다는 게 너무 싫었다.

피를 어느 정도 닦고,

패닉상태에 빠져 멍하니 앉아있는 만도 아저씨와

기도를 하시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계신 할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아가씨는 살아있나?”

할아버지가 눈을 감은 채 내게 말했다.

“네, 기절한 거예요. 좀 있으면 일어나겠죠.”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 이제 아무도 죽지 않겠죠? -

만도 아저씨가 내게 종이를 건넸다.

“이제는 아무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말을 하면서도 힘이 쭉 빠졌다.

“저 아가씨, 기절했다고 했지? 역할을 확인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좀 찝찝했지만,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그녀 역시 우리의 눈앞에서 정 선생님을 죽였기에, 그녀의 역할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네, 그럼 제가”

일어서려고 하자, 할아버지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아니야, 아니야. 자넨 여기 있어. 내가 가지.”

할아버지는 일어나셔서 수정씨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 지금 몇 시야? -

만도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새벽 4시네요. 오늘로 3일째네요.

내일이면 이 끔찍한 일도 끝이네요.”

끝이라는 말에 나와 만도 아저씨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칼을 들고 수정씨를 사정없이 쑤시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짓이에요!!”

나는 할아버지를 향해 소리쳤고,

만도 아저씨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우리의 말을 듣고,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바닥에 내던지고 두 손을 들었다.

“이제 끝났어. 이제 죽을 사람들은 죽었어.

나를 믿어줘! 여기! 그 종이는 내 역할이야”

할아버지는 우리 쪽으로 종이를 던졌고,

나는 종이를 주워서 펼쳤다.

당신의 역할은 인구조절입니다.
본인포함, 3명을 남겨주세요. 그 이하 그 이상도 안 됩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절로 줄어들 테니.)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뜨자 스피커가 달려있는 천장이 보였다.

일어나려고 고개를 들자 한 밤의 끔찍했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뒤엉켰고,

이내 할아버지가 수정씨를 찌르던 장면이 클로즈업되었다.

“으악!!”

침대 옆에 버젓이 앉아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진정시키려는지 멀찌감치 떨어졌다.

할아버지와 같이 내 곁에서 떨어져있던 만도 아저씨는

무언가를 적더니 놀라서 바짝 긴장한 내게 보여주었다.

- 자네 기절했었어. -

만도 아저씨가 종이를 보여주면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두들겼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죠?”

“여기는 내 방이고, 기절한 자네를 데려온 거야”

“그거 말고요. 수정씨요.”

할아버지는 나의 질문에 움찔하시더니 이내 말씀하셨다.

“그게 내 역할이라 어쩔 수 없었어. 이왕 세 사람이 남는 거라면,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사람들과 남고 싶었어.

그리고 처음부터 느낌이 왔어, 여기 있는 자네와

수염이 있는 친구는 안전할거라는 느낌이.”

“그래서 만족하시나요?”

할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씀 못하시고 고개를 숙이셨다.

나도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목숨 또한 소중하니까,

하지만 수정씨를 죽이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할아버지를 바라보기 힘들었다.

- 여기 그 아가씨의 역할 -

만도 아저씨는 내게 종이와 함께 메모를 보여줬다.

나는 만도 아저씨가 준 종이를 펼쳤다.

그것은 수정씨의 역할이었다.

당신의 역할은 최후의 여자입니다.
다른 여자를 죽이고, 최후의 여자가 되어주세요.
본인이 죽이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살려는 주겠지만,

역할놀이를 제대로 했다고 볼 수 없겠죠?
(칼은 침대 밑에 있습니다.)

수정씨가 죽고 나서 스피커를 통해서 마구 웃어댔을 그 녀석 생각에 주먹이 쥐어졌다.

'엿 같은 역할놀이’

나는 이 빌어먹을 역할놀이가 앞으로 얼마나 남았나 보려고

시계를 봤다. 밤 11시 50분이었다.

제한시간인 4일까지는 10분밖에 안 남았다.


‘오늘만 지나면 4일, 정말 끝이다.’


끝이라는 단어에 다시금 긴장이 풀려 침대에 드러누웠다.


“자네의 역할이 위험하지 않다는 건 알겠는데 자넨 역할이 뭔가?

그냥 궁금해서 그러네.”

 

할아버지가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내게 불쑥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정작 내가 맡은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순간 내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 거 같아서 불안해졌다.

- 역할을 말하기 곤란한가요? -

만도 아저씨가 종이를 내밀었다.

“아뇨, 말하기 곤란하진 않은데,

제가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나 싶어서요.”

사실 그랬다.

주변에서 워낙 큰일들이 일어나서

정작 가장 중요한 내가 맡은 역할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역할이 뭐 길래 그런가?”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만도 아저씨 역시 궁금했는지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고, 그 둘을 번갈아 보고 말했다.

“솔직한 사람이요”

할아버지와 만도 아저씨는 내 말을 듣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야? 역시 생각대로 별로 위험한 역할은 아니었지만

참, 대단하군.”

할아버지는 내 역할에 대한 놀라움과

이제 더 이상 끔찍한 일은 없을 거라는 안도감에 표정이 밝아지셨다.

그리고 나는 재빨리 이성을 되찾고 지금까지의 일들에 대해 생각을 더듬었다.

내가 역할을 잘 수행했는지, 못했는지.

분명 나는 100% 완벽하게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설마.’

시계를 보니 11시 59분에서 12시로 넘어가려했다.

어느 정도 상황파악이 된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펑!!”

기계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가 피토를 하면서 쓰러졌다.

만도 아저씨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너무 놀라서

거칠게 숨만 쉬었다.

사실 내 역할수행에 대해 생각을 할 때,

나는 내가 종이를 펼쳤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당신의 역할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모두를 속여주세요.

이것이 종이에 적혀있던 내 역할이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내가 맡은 거짓말쟁이 역할에 대해서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나도 모르게 모두에게 거짓말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수화를 할 줄 알면서도 모른척했고,

수정씨를 골려주기 위해서 음식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 모른다고 했고,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재희씨에게 도와준다고 해놓고 도와주지 않았고,

정 선생님을 내 손으로 죽인다고 해놓고 죽이지 못했고,

좀 있으면 일어 날거라고 했던 수정씨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을 알려주는 등의 간단한 의사소통을 빼고는 거의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이건 정말 내 의지와 상관없지만,

내가 자살했다고 했던 재희씨는 아직 살아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멀쩡히 살아 있는 걸 보면.

그리고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그 사실은 확신으로 다가섰다.

왜 몰랐을까?

재희씨가 죽었을 때,

다른 사람이 죽었을 땐 역할이 뭔지 가르쳐주면서 떠들던 스피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경솔했다.

단지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는 것만으로 재희씨를 죽었다고 생각해버렸다.

지금 문 앞에 서있는 재희씨를.

재희씨는 자신의 옆구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니, 눈치 채고 있었나보네요. 소형씨.”

“재희씨, 역시 죽지않았군요. 5분전에 알았어요. 그나저나 재희씨한테 고마워해야겠는 걸요.

전 당신이 방에 들어가 스스로에게 총을 쐈을 때, 사람들에게 당신이 죽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살아있었죠.

덕분에 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을 해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고요.

만약에 당신이 진짜로 죽었다면 전 진실을 말해서 죽어버렸겠죠.”

“똑똑하시네요.”

“저도 서울대 다니거든요.”

재희씨는 내 농담을 듣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만도 아저씨는 나와 재희씨의 대화가 이해가 안 됐는지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며 나와 재희씨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끝났는데 당신의 역할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나는 재희씨의 역할이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역할을 맡았길래, 죽은 척까지 하는지.

“저는 사실 경험자에요.”

“경험자라니요?”

“저는 이전에 있었던 역할놀이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생존자들 중에서 가장 역할 수행을 못해서 이번에 다시 역할놀이를 하게 된 거거든요.”

재희씨의 말을 듣고, 종이의 규칙이 다시 생각났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역할놀이를 못하신 분은 역할놀이를 다시하게 됩니다.

“당신이 맡은 역할은 뭐죠?”

재희씨는 말을 하지 않고 대신 내게 종이를 건넸다.
당신의 역할은 시체3입니다.
세 번째로 죽는 시체역할을 맡아주세요,

물론 진짜 죽으라는 게 아닙니다.
(경험자니까 능숙하게 잘 할 수 있겠죠?)

재희씨는 종이를 보고 있는 나를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제 역할이 시체다 보니, 우선 시체처리를 맡은 사람을 처리해야했어요.


그 전의 역할놀이서 시체처리 역할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첫 번째 희생자가 생겼고,

밤에 잠들지 않고 ‘누가 시체를 치울까?’ 하고 밤에 몰래 지켜봤죠.

역시나 누군가 몰래 나와서 시체 근처로 가더군요.”

“세영학생이었죠.”

“맞아요, 그래서 만만하다는 생각에 혼자 처리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웬 아주머니가 나타나더군요. 예상 밖의 일이었어요.

거기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당신도 나타났어요.”

“근데 운이 좋게도 아주머니가 학생을 총으로 쏘더군요.

하지만 마냥 좋은 건 아니었어요,

여기서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더 죽으면

제가 3번째로 죽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필사적으로 총을 빼앗았군요.”

“그래요, 애당초 그 총으로 누군가를 해할 마음은 없었어요.

 

그리고는 스피커에서 당신에게 세영학생의 가방을 보라고 했을 때,

기회는 이때다 싶어 제가 대신 들어갔죠.

생각할 시간도 벌고, 총알의 숫자도 세려고요.

정말 하늘이 돕는지 총알이 딱 하나 남아 있었고,

어줍짢은 연기로 대충 자살로 넘어갔죠.

그리고는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죠.

물론 총으로 쏜 곳은 응급처치를 하구요.”

“이야!! 재희씨는 딱 한번해보고 완벽하게 적응하셨네요!!!

대단해요!! 하하하.”

스피커에서 감탄하는 그 녀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모두 끝났으니 내보내줘요”

나는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어 그 녀석에게 재촉했다.

“잠깐만요. 평가를 해야겠죠. 우선, 재희씨는 두말할 거 없이 통과.

정말 훌륭하게 본인의 역할을 했어요.

본인을 쏘는 희생정신도 뛰어났고.

뛰어난 두뇌로 작전도 잘 세웠어요.

그나저나 여기에 남아야 하는 사람을 고르는 게 힘들군요.

박만도씨와 우소형씨가 박빙인데요? 하하하.”

지금 평가에 따라서 집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여기남아서 목숨을 건 역할놀이를 더할지가 결정된다.

너무 긴장이 되서 두 손에 땀이 흥건했다.

“우소형씨, 본인이 역할을 잘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박만도씨가 역할을 더 잘했다고 생각하나요?

각자의 대답에 의해서 결정을 내릴게요.”

갑작스런 질문에 숨이 턱 막혀왔다.

바로 옆에 만도 아저씨가 있었지만 쳐다볼 수가 없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용기를 내서, 만도 아저씨를 쳐다봤다.

나와 마찬가지로 많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만도 아저씨가 더 역할을 잘해냈습니다.

저는 시간이라든가, 이름같은 경우에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말해버렸다.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러면 박만도씨는 누가 더 잘했다고 생각하나요?”

박만도씨는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제가 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도 아저씨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거였는데,

별로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여기서 겪은 일들은 입도 뻥긋하지 말아주세요. 하하하”

 

푸쉬이이이.

순간 우리가 있던 방에 가스가 흘러들어왔다.

기분이 편안해지고 몸이 나른해졌다.

“끼이이이익”

갑자기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있는 곳은 아스팔트 도로였고

주변에는 논과 밭이 보였다.

그리고 내 바로 옆에 급브레이크를 밟은 택시도 보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끝까지 나쁜 녀석이군, 이런 곳에 내버려두다니’

“이봐요, 괜찮아요? 이런 피까지 나네. 차에 부딪혔나요?”

놀라서 택시에서 내린 택시기사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다친 거예요.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죠?”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겪은 일을 말하려다가

그 녀석의 마지막말이 떠올라 거짓말을 했다.

“예?”

“정말로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그래요”

“여기는 충남인데요?”

맙소사.

서울에서 충남까지 나를 끌고 오다니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여기에는 버스도 없는데 택시 안타실래요?

빈 차인데. 워낙 손님이 없어서 하하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택시를 탔다.

며칠 동안 감금되어서 그런지 바깥이라는 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어디까지 갈까요? 손님”

“그냥 가장 가까운 번화가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우선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손님 다 왔습니다, 일어나세요.

13800원인데, 13000원만 주십시오.”

“예?”

너무 편안해서인지 깜빡 잠든 모양이었다.

“손님 돈 주셔야죠. 설마 없는 건 아니겠죠?”

택시기사의 말에 잠이 확 달아났다.

‘맞다. 지갑이랑 핸드폰은 그 녀석이 다 가져갔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달랑 500원인데 어떡하지?’

“지갑을 잃어버려서, 500원밖에 없는데 어쩌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택시기사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손님, 장난치지 마시고요, 주머니 좀 뒤져보세요.

뭐 찾아보지도 않고 지갑을 잃어버렸다니, 참나! 어이가 없어서!”

나는 지갑을 찾는척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놀랍게도, 주머니에는 지갑과 핸드폰이 있었다.


나는 얼른 내 지갑인지 확인하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

주민등록증의 이름을 확인했다.

우상민.

맞다! 내 지갑이었다.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돈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택시기사에게 2만원을 주었다.

“잔돈은 필요 없습니다.”

택시기사는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며 말했다.

“아이고, 손님! 뻥도 잘 치시네.

밥 먹듯 거짓말하는 당신은 거짓말쟁이 우후훗! 하하하”

택시기사의 유머에 나는 기분 좋게 택시에서 내렸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밖에 있다는 것에 마음이 한없이 편안했다.

그 녀석의 마지막 질문에 거짓말쟁이 연기를 한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냥 그대로 말했더라면.

지금쯤 나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마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통화하기 힘드네? 야, 너 어디서 잠수타고 있었냐?”

친구는 반가움 반, 걱정 반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그냥 잠깐”

“지금 어디야?”

“어, 충남 쪽”

“야, 말을 하고 가야지, 얘들이 얼마나 걱정한줄 아냐?

술 취한 놈 데려다가 택시 태워서 보냈더니, 연락도 안하고.

그러고는 핸드폰 꺼놓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혼자 놀러가고 싶냐?

전화라도 해주지.”


그 다음부터는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아, 택시기사. 어쩐지 웃는 게(웃는 소리) 낯이 익더라.’

 

[출처] 아갈갤러리 - http://agal.co.kr/main/bbs/board.php?bo_table=horror&wr_id=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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