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성연쇄살인사건 [華城連鎖殺人事件] (1986.9.19 ~ 1991)
2004년 공소시효 종료.
요약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10명의 여성이 차례로 살해되었으나 범인이 잡히지 않은 미해결 살인사건.본문
1986년 9월 19일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安寧里, 현 안녕동)에서 71세 노인의 하의가 벗겨지고,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86년 2차례, 1987년 3차례, 1988년 2차례, 1990년과 1991년에 각각 1차례씩 총 10회에 걸쳐 불특정 다수의 여성 10명이 차례로 * 살해되었는데, 사건 모두 태안읍 반경 2㎞ 이내에서 일어났다.
사건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다. ② 피해자가 젊은 층에 한정되지 않고 52세(7차)·69세(10차)·71세(1차) 등 다양하다. ③ 피해자의 음부가 크게 훼손되었다(4·6·7·9차). ④ 사건현장이나 피해자의 음부 안에서 정액 또는 머리카락·담배꽁초 등이 발견되었다. ⑤ 피해자의 대부분이 목이 조여 살해되었다. ⑥ 피해자의 국부에서 9개의 복숭아 조각이 나오고, 가슴이 19차례나 칼로 도려질 정도로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대범하다.
한국에서 발생한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처음에는 일반적인 개별 살인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수사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잇따라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연쇄살인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경찰도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경찰력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총 180만 명의 경찰이 동원되고, 3,000여 명의 용의자가 조사를 받았음에도 8차 사건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건의 범인도 잡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단독범의 소행인지, 다수의 범인에 의한 개별사건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또 7·9·10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3명의 용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불상사가 거듭되면서 '화성괴담'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유일하게 해결된 8차 사건의 경우,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와 범인의 음모가 일치한다는 것이 증거로 채택되어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나, 다른 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8차 사건을 제외한 모든 사건들은 여전히 미해결 사건으로 남은 채 2004년 모든 사건은 살인 공소시효 15년이 끝났다.
◈1차〓86년 9월 15일 오전 6시20분쯤. 딸의 집에 다녀오던 이모
(71)씨 피살. 태안읍 풀밭에서 발견.
◈2차〓86년 10월 20일 오후 10시쯤. 결혼 상담차 인근 마을에
다녀오던 박모(25)씨 성폭행 피살. 태안읍 농수로에서 발견.
◈3차〓86년 12월 12일 오후 11시쯤. 주부 권모(24)씨 귀가중 피
살(시신은 87년 3월 발견). 태안읍 축대 위에서 발견.
◈4차〓86년 12월 14일 오후 11시쯤. 맞선보고 귀가하던 이모(23
)씨 성폭행 피살. 정남면 농수로에서 발견.
◈5차〓87년 1월 10일 오후 8시50분쯤.친구를 만나고 오던 여고
생 홍모(18)양 성폭행 피살. 태안읍 논바닥에서 발견.
◈6차〓87년 5월 2일 오후 11쯤. 남편 우산 마중 나갔던 박모(30
)씨 성폭행 피살. 태안읍 야산에서 발견.
◈7차〓88년 9월 7일 오후 9시30분쯤. 직장 마치고 귀가하던 안
모(52)씨 성폭행 피살. 팔탄면 농수로에서 발견.
◈8차〓88년 9월 16일 오전 2시쯤. 태안읍 안방에서 잠을 자던
여중생 박모(13)양 성폭행 피살. 89년 7월 범인 윤모(22)씨 검거
.
◈9차〓90년 11월 15일 오후 6시30분쯤. 하교후 귀가하던 여중생
김모(13)양 성폭행 피살. 태안읍 야산에서 발견.
◈10차〓91년 4월 3일 오후 9시쯤. 딸의 집에 다녀오던 권모(69)
씨 성폭행 피살. 동탄면 야산에서 발견.
2. 이형호 유괴 살해 사건 (1991.1.29 ~ 1991.3.13)
2006년 공소시효 종료.
이형호 유괴살해사건은 1991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에 살던 이형호(당시 9세) 군이 30대로 추정되는 남성에게 유괴되어 살해당한 사건이다.
사건 정리
1991년 1월 29일 오후 5시 20분경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형호 군은 사건 발생 44일 후인 그해 3월 13일에 잠실대교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배수로(일명 '토끼굴')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손이 스카프와 나일론 끈으로 묶여 있었고, 사인은 코와 입이 테이프로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부검 결과 위에서 나온 음식물이 유괴 당일 친구집에서 먹은 점심으로 판명되어 유괴 직후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범인의 협박전화에서 나온 목소리를 분석한 결과 서울 경기 출신의 30대 전후의 남자로 추정되었으며 44일 동안 60여 차례의 전화통화와 10차례의 메모지로 피해자의 부모를 협박했는데, 그 수법이 매우 치밀하고 지능적이었다. 범인은 피해자 부모에게 카폰을 사용하도록 하고, 김포공항과 대학로 등의 서울시내 곳곳을 약속 장소로 알려줘서 이형호의 아버지 이정진에게 돈을 준비하여 나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포공항에서는 국내선 주차구역 2구역에 차를 세워둔뒤 600번 공항버스를 타고 압구정 자택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차 뒷좌석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는 핑계를 대며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했고 이후 대학로에서는 차를 세우고 건너편 빵집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려놓고는 집에 있던 이형호의 계모에게 경찰을 불렀느냐고 집요하게 추궁하였다. 이에 이형호의 계모는 삼촌이 같이 나간 것이라고 둘러댔지만, 범인은 경찰 수사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당분간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후 다시 연락을 해온 범인은 지정장소에 메모지를 남기는 '무인 포스트' 방식을 활용했다. 장충동 태극당 인근의 조선일보 게시판에서 시작된 메모는 한일은행 명동지점앞의 쓰레기통에 붙어있는 입금지시 메모로 이어졌다. 우선 '윤현수'라는 명의로 한일은행에 개설된 보통예금 통장에 돈을 입금시키라는 지시를 하였다.
범인은 이렇게 입금된 돈을 찾기 위해 한일은행 모 지점에 갔지만 사고신고 계좌라는 문구가 단말기에 뜨자 은행원이 당황해했고, 낌새를 눈치챈 범인이 그대로 달아나 검거에 실패하였다. 이후 '김규선' 명의로 상업은행에 개설된 보통예금 통장에 입금하라는 지시를 한 후 돈을 찾으러 갔으나 이 때도 은행원이 머뭇거리는 사이 달아났다. 설상가상으로 범인이 찾아간 곳 모두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범인의 모습이 남지 않았으며, 앞서 언급된 메모지나 통장개설신청서에도 전혀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
이후 범인은 은행계좌로 돈을 받는 것이 어려워지자 이정진에게 올림픽대로 김포공항 방향으로 오다가 서울교에 내려서 다리 아래 정중앙에 돌로 눌러진 메모를 확인하고 지시사항대로 따르라는 말과 함께 이것이 마지막이니 신경쓰라는 경고를 덧붙였다. 메모를 따라간 곳은 양화대교 남단 한강둔치였고, 도로 바로 옆에 있는 철제박스 위에 돈뭉치를 올려놓으라는 것이 마지막 메모 내용이었다. 당시 철제박스 주변에는 강남경찰서 소속 형사들이 잠복하고 있었고, 이정진은 경찰과 의논한대로 진짜돈 10만원에다가 가짜돈 뭉치를 섞어서 신문지에 포장한 것을 철제박스 위에 올려놓고 돌아갔다.
그러나 형사들이 서로 무전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철제 박스 위치를 혼동했고, 그 사이에 범인이 돈을 가지고 사라져버렸다. 당시 수사에서는 성문분석 결과 범인이 1명으로 추정되었지만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자동차 전용도로인 올림픽대로에서 돈을 순식간에 가져가기 위해서는 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범인은 2명으로 추측되었고 이는 수사 난항의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2001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팀의 실험 결과 철제박스는 운전석과 반대방향에 있기 때문에 범인 2명중 1명이 운전을 하고 나머지 1명이 돈을 낚아채야만 당시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성문을 다시 한 번 정밀분석한 결과 미세하게 다른 점이 있었기에 범인은 사실상 2명으로 추측되었다.
돈을 가져간 범인은 이후 전화를 걸어 "가짜돈이 잔뜩 섞여있다. 아들을 되찾고 싶지 않은 것으로 알겠다. 다만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은 감사하다."라는 말을 남긴채 연락을 끊었으며, 이형호의 사체가 발견되기까지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후 이형호가 사체로 발견되면서 공개수사로 전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형호의 친척인 이상재를 유력한 용의자로 소환 조사하였다.
우선 전화상의 목소리와 일치하는데다 은행계좌 명의였던 김규선, 윤현수라는 이름이 실제로 이상재의 주변 인물이라는 점이 확인되어 그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상재는 서울의 공중전화를 통해 협박전화가 걸려온 날에 경주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당시 사용한 고속도로 통행 영수증을 증거물로 제시하였고, 실제 경찰 수사 결과 경주에 이상재가 머무른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경찰은 이상재가 경주에서 전화를 걸고 서울의 공범이 이를 이형호의 집에 연결하는 형태로 얼마든지 알리바이를 조작할 수 있다고 판단, 특히 이상재가 대학에서 전기통신을 전공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강도높은 보강수사를 진행하였다. 무엇보다도 성문분석 결과 전화상의 목소리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국과수의 보고서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재가 범인이라는 뚜렷한 물증을 찾지 못해 수사는 다시 난항에 빠졌다.
다행히 상업은행 통장을 개설해주면서 범인과 다소 길게 대화를 나눴던 은행원, 그리고 이형호의 사체가 발견된 곳 인근의 한강둔치 잠실지구에서 이형호를 목격했다는 매점 주인들의 진술에 따라 범인의 몽타쥬가 작성되어 전국에 지명수배되고, 한강둔치 잠실지구 바로 뒤편에 위치한 잠실주공1단지에서 이형호와 범인으로 추정되는 청년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잇따르면서 수사는 활기를 띠는듯 했다.
하지만 잠실주공1단지에 나타났던 어린이와 청년은 이형호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 주민이라는게 확인되었고,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채 2006년 1월 29일자로 공소 시효가 만료되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3. 개구리소년실종사건 (1991.3.26 ~ ?)
2006년 공소시효 종료.
요약 1991년 3월 26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에 살던 우철원(禹喆元, 당시 13세) 등 초등학교 학생 5명이 개구리를 잡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실종된 사건. 언제 1991년 3월 26일 어디서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 누가 성서초등학교 학생 5명 왜 개구리 잡으러 간다고 외출 본문
1991년 3월 26일 실종 당시 9~13세이던 5명의 소년들이 인근 와룡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나간 뒤 실종되었다. 그후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26일 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성산고등학교 신축 공사장에서 유골이 발견되었으나,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다. 2006년 3월 25일자로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남에 따라서 이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사건 당시 경찰은 그동안 연인원 약 50만 명을 동원, 이들의 행방을 찾았으나, 잘못된 제보와 소문만 무성할 뿐 지금까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였으며, 1993년에는 실종 어린이 부모들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사건 발생 후 5년이 지난 1996년에는 수사본부장이 대구경찰청 청장에서 달서경찰서장으로 바뀌고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수사요원들도 복귀하였다.
경찰은 11년 동안 국내 단일 실종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였으며, 제보도 잇따라 1991년 325건, 1992년 97건, 1993년 131건 등이 접수되었지만 모두 허위였다.
이 사건은 전국민적인 관심사로 등장하면서 어린이는 물론 우체부 등 온 국민이 개구리 소년 찾기 운동에 참여했으며, 1992년에는 이를 소재로 한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 제작되었다.
2002년 9월 26일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쪽의 와룡산 중턱에서 유골 4구와 신발 5켤레가 발견되었다. 유골을 감정한 경북대학교 법의학팀은 개구리소년이 타살로 결론내렸으며, 2004년 3월 26일 경북대학교 병원 영안실에서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셋다 영화화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