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15세기, 조선
세종대왕
세종대왕 영정 복원도
많은 이들이 소시적에 읽은 위인전과 만원짜리 지폐속의 초상을 토대로 세종대왕에 대해 일종의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젊어서는 학문에 힘쓰다 건강을 해쳤을 정도로 병약한 책벌레, 훗날엔 애민정신으로 똘똘 뭉친 희대의 성군. 옆에서 모리배들이 아무리 물고 뜯어도 KFC 영감님 같은 환한 미소로 허허허 웃어줄 것 같은 성인군자. 하지만 내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킹(KING) 세종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내가 세종이라는 인물을 다시 주목하게 된 계기는 세종실록 26년, 훈민정음 반포를 앞두고 올라온 최만리의 상소와 여기에 대한 세종의 대답을 알게되면서 부터다. 당시 최만리는 정3품 집현전 부제학으로 대제학 밑으로 10명만 있는 당대 "석학" 레베루에 오른 학자다. 그는 유명한 6개조문을 들어 훈민정음 창제의 부당함을 상소했는데 여기에 대한 세종의 코멘트가 참 대단한다.
"야이 존만아, 니가 사성칠음을 알면 얼마나알고 문자의 자모에 대해서 뭔 이해를 한다고 지금 본좌한테 먹어대냐? 뒤지고 싶냐?"
- 세종 26년, 1444년 2월 26일
훈민정음은 무엇보다도 학자로서 세종의 탄탄한 학문적 자신감을 바탕에 둔 발명이라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금으로 치면 KDI 상임 연구원 정도 되는 교수가 대통령에게 학문적 조언을 펼치자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앎' 하고 씹어버린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세종은 정조와 더불어 조선조의 대표적인 학자형 군주였고 거기에 대한 긍지 또한 집현전 부제학에게 'x도 모르는 새끼가 불알보고 탱자탱자 하고 자빠졌네' 라고 말할 수 있을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종의 지적인 모습, 그리고 광오하기까지한 학문적 자신감은 나를 매료시켰다. 위인전에서만 읽어온 먹물에 쩐 파리한 샌님이 아닌 노회하고 뱃심좋은 남자였다. 그러나 체(體), 이 부분이 바로 세종의 아킬레스 건이다. 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고기반찬이 없으면 '박상궁 이 씨박년이 빠져가지고는 밥 안먹어!' 라고 할만큼 땡기는대로 고량진미를 즐기는 스타일이셨으며 이로 인해 말년에는 당뇨, 비만, 고혈압등 각종 성인병으로 보이는 증상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땡기는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스타일' 이었다는 점이 또 하나의 멋이다. 주상께서는 땡기는 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셨던(?) 것으로 사료된다. 1부인 5후궁 하렘을 거느리고 살았던 세종대왕은 조선실록에서 최다수의 자녀를 남겼다. (18남 14녀). 재위기간이 길어서 재위 기간중 합궁횟수가 더 많았을 영조나 선조를 압도하는 수치다. 대체 이 양반은... 요약정리하자면
당대 석학들에게 꿀리지 않을 지능형 변태 + 킹왕짱 + 술도 잘먹고 고기도 잘먹고 여자도..으응?!
이러면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레전드요 성군이 되셨던 것이다. 모든걸 다 가졌던 오타쿠들의 궁극체, 그것이 바로 대왕세종의 진면모라고 나는 생각한다. 열등감 폭발을 부르는 폭풍같은 삶을 살다가신 문자 그대로 킹왕짱이셨다.
베오베에 세종대왕 관련 글이 있길래...
제가 자주 다니던 사이트에서 세종대왕 글을 본적이 있어서 퍼다 나릅니다.
0.
예전에 책으로 읽었던 기억이라 다소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사실.
1.
세종대왕은 지독한 고기 덕후였다고 합니다.
어렸을때부터 밥상머리에 고기가 올라오지 않으면 수저를 들지 않았다고 하죠.
그로인해서 지독한 당뇨병에 걸려서
말년에는 합병증으로 실명했다고 합니다.
광화문에 세종대왕 동상에는 대왕이 절대음감이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합병증으로 눈이 먼 이 후에 귀가 예민해진것 뿐이랍니다.
2.
조선 시대의 일식은 나라의 흉길을 점하는 징조로 왕이 직접 나서서 일식을 지켜보고는 그 현상을 풀이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조선은 달력과 시계가 없어 중국의 수시력이라는 책을 참고했었습니다.
헌데, 중국과 조선과의 공간적 차이 때문에 14분 정도의 오차가 생겼고,
'14분이면 내가 고기를 먹어도 2접시는 더 먹겠다!' 며 새로 만들어 오라고 했다고 하죠.
당시의 과학자들은 경상도 말로, 쎄가 빠졌다고 합니다.
3.
조선 최고의 과학자였던 장영실.
위인전의 마지막 스토리인 '이러이러해서 고향으로 간 누구는 말년에 후학을 기르며 행복하게 살다가 몇년에 몇살로 생을 마감했다.' 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장영실의 마지막은 그 어디에서도 밝혀지지 않지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세종대왕이 장영실에게 내가 가마를 제작하라고 지시했고
거구의 세종대왕을 위해서 대용량의 튼튼한 가마를 혼신의 힘을 다해 제작했습니다.
신 차(?)를 뽑은 세종대왕은 기뻐하며 한양 시내를 누비기 시작했는데.. 이게 왠걸.
너무 무거워서 가마 바닥이 부러지면서 대왕이 낙상하고 맙니다.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궁궐로 돌아온 대왕은
장영실을 불러 곤장을 죽도록 패고는 궐 밖으로 내쫓아버리지요.
그리고는 그 어떤 누구도 이후의 장영실을 본적이 없습니다.
낙상 사건 이 후 조선 실록을 비롯 다른 책에서 간접적으로라도 장영실은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분이 가라앉지않아서 죽여버렸는지, 어디 시골에서 조용히 살다 숨을 거두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4.
조선 중기 때 북방의 여진이 국경을 들락날락하며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헌데, 그 당시 북방에는 귀화정책으로 조선에 귀화해 살고있는 여진족들이 많았습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감싸주는 바람에 조선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할 뿐, 다른 방법이 없었지요.
그러다 한 마을이 여진족의 침략에 재로 변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대왕은 노하며 정벌을 명합니다.
최윤덕, 김종서 장군은
'그들은 말을 타고 들어와서 약탈한뒤 재빠르게 도망가는데, 귀화한 여진족들이 숨겨주어 누가 침략했었는지 찾기가 힘들다. 군대가 가봐야 허탕만 칠 것이다 ' 며
정벌은 무의미하다고 반대합니다.
이를 들은 대왕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반대하는걸 보니 장군들이 상황을 제일 잘 파악한거 같소.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국가는 존재의 이유가 없소.
실패의 원인을 잘 아는 사람은 성공의 가능성도 높지. 장군들이 가시오' 라며 강제어택 합니다.
그러고는 대왕은 궐의 모든 사람을 데리고 온양온천으로 휴가(를 가장한 고도의 훼이크)를 떠납니다.
휴가인척 온천으로 내려간 대왕은 전시용 군용 텐트를 쳐놓고는 작전을 지휘합니다.
낮으로 움직이는 대외용 소수 병력은 정보를 수집합니다. 피해를 입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놔. 지는 온천으로 놀러가면서 나보고는 여진 잡아오래. 고기덕후 자식. 근데 누가 쳐들어왔어?' 라고 정보를 수집합니다.
비밀용 다수 병력은 밤에만 움직이면서 그 소수 병력을 조용히 따라갑니다.
결국 침략했던 여진의 부족을 찾아낸 병력은 왕에게 공격 승인을 얻고 여진족을 쓸어버렸답니다.
5.
조선의 모든 왕들의 초상화가 원래는 존재했었습니다.
헌데,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당시 리승만 대통령이 조선 왕들의 초상화를 마대 자루에 담아서 부산의 한 창고에다가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지요.
잠궈놓은 창고에 누가 접근할 수 있을리도 만무했으니 그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창고에 불이 나면서 대부분의 초상화가 다 타버리고 남은 초상화는 3~4개 정도밖에 없습니다.
청계천 파면서 나온 문화재들 역시 마대자루로 쓸어담아서 어느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죠?
일본이 문화재를 돌려주는건 기쁜데, 고따구로 관리한다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합니다.
어떤 누리꾼의 댓글처럼, 목록만 받고 일본이 계속 관리하면 안되나는 말이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6.
세종대왕이 조세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신들에게 새로운 제도를 만들라 명합니다.
1차 보고서.
이건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신들을 위한 제도라며 돌려보냅니다.
2차 보고서.
달라진게 없다며 돌려보냅니다.
3차 보고서.
장난하냐며 조세를 담당하면 부서를 없애버리고 새로운 담당 부서를 만듭니다.
그리고는 여론조사를 시작합니다. 그것도 모든 백성들에게요.
이러한 노력으로 (백성에게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몇번의 반복끝에) 9,6등법을 만들어 실시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도 여론을 수렴하는데, 지금은 왜 안하는지 모르겠군요.
출처
http://pgr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page=1&sn1=&divpage=5&sn=off&ss=on&sc=on&keyword=세종대왕&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474
출처에서 몇가지 리플을 옮겨오자면...
(2010-08-22 22:19:15)
1번...
세종대왕이 박연에게 새로운 악기를 만들라고 지시를 했는데
악기를 만들어왔더니 "잘 만들었는데 여기서 반음정도 틀린 것 같다." 라고 했다더군요.
아 추가로 세종대왕님의 자식은 18남 4녀 입니다.
흥부네 가족의 두배가 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