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국기원 기술심의회 김병운 의장과 경희대 최영렬 교수가 감수한 ‘신편 태권도 대백과’(2001)에는 태권도의 가라테 유입설을 인정하는 문구가 들어 있다.
우선 공수도 당수도 수박도 등으로 혼용되던 명칭을 태권도로 통일하였다.’
또한 한국체육대학 태권도학과 안용규 교수는 ‘태권도 역사·철학·정신’(21세기교육사, 2000)에서 가라테 유입설을 이렇게 정리했다.
‘태권도가 가라테 품세를 활용했거나 도장의 명칭을 당수 또는 공수로 썼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일부분이지만 수용할 것은 수용한 후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단지 근대 이후에 태권도가 가라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태권도의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태권도 교본들이 태권도의 뿌리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잡고 있습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좀 무리가 따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책을 쓴 사람이에요. 솔직히 우리가 내세울 게 없었잖아요. 초창기에는 태권도를 해외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옛날부터 있었던 한국의 전통무술이라고 하면 명분도 서고 잘 먹혀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유사성이 있더라도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겁니다. 역사적 원류로 본다면 중국 것이 일본으로 들어갔고 일본 것이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죠. 일본 사람들이 중국 무술을 많이 개량해서 과학적으로 만들었어요. 한가지 문제가 뭐냐 하면 일본 사람들은 유연성보다 근육성에 바탕을 두고 운동을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의 움직임이 굳을 수밖에 없죠.
우리는 이걸 가지고 스포츠로 경기화하기 위해서 겨루기를 시킨 겁니다. 반면 일본 사람들은 겨루기를 안하고 혼자 하는 운동으로 놔두었고, 중국에서는 손 맞춰서 하는 유연한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태권도는 중간 입장에서 어느 쪽도 아니에요. 쉽게 얘기하면 우지좌지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거죠. 그런데 우리는 겨루기를 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발전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중국과 일본이 역으로 우리 걸 배우게 된 겁니다. 자기들 무술은 보급이 잘 안되는 데다 젊은 아이들이 자기와의 싸움보다 치고 받는 걸 좋아하잖아요.”
―광복이 되고 도장을 연 사람들은 모두 가라테를 했나요.
“기본기를 놓고 볼 때 이렇게 막는다 저렇게 때린다 하는 건 모두 가라테와 똑같아요.”
―그렇다면 우리 전통무예와의 유사성은 없다는 얘기입니까.
“언뜻 보기에는 있는 것 같지만, 기본기가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사실상 유사성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택견도 현대에 와서 많이 변질됐어요. 태권도 하던 사람들이 택견을 배우니까 발차기가 태권도 스타일로 나오는 거죠.”
―광복 이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끼친 무술은 가라테 뿐입니까. 다른 것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나요.
“그게 솔직한 대답입니다. 나도 별의별 것을 다 끌어들여서 책을 쓴 사람이지만, 이제는 밝힐 때가 됐어요. 가라테를 가르치는 관장들이 모여서 태권도의 형틀을 만들었고, 그 실무작업을 제가 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세계 정상에 있으니까 밝혀도 큰 문제가 없어요.”
기자는 대학 시절 한 학기 동안 택견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강의를 맡았던 사람은 한국 택견의 마지막 명인으로 꼽히는 고 송덕기 옹에게 직접 사사한 도기현(현 택견계승회)씨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택견은 한국 전통무예를 논할 때 1순위로 등장한다. 그래서 태권도의 역사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택견과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도씨는 당시 “태권도에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적 측면에서는 가라테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부원장에게 택견 수련자들이 태권도에 대해 품고 있는 의문점을 조심스럽게 던져보았다.
―우리 민족의 무예는 원래 3박자로 움직이는데 비해 태권도는 2박자 운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권도는 전통무예라기 보다 일본 무예에 가깝다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택견 입장에서 보자면 올바른 시각이죠. 나는 박자를 잘 몰라요. 하지만 태권도와 택견의 발차기 자세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 잘 알아요. 택견의 발차기는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고 곧은 발로 올라가는데 요즘은 그런 자세가 나오지 않아요.”
―택견은 시작할 때 손을 앞쪽으로 모으고 정중하게 인사하잖아요. 반면 태권도는 손을 허리에 대고 기마자세를 취하고. 그게 일본적 특성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건 한국적 기준으로 일본적인 것을 구분하는 방법일 뿐이죠. 일본 가라테에도 다양한 유파가 있고, 그 중에는 자세가 다른 것도 많아요. 중요한 건 손발을 움직여서 얼마나 강한 타력을 만드느냐 하는 점입니다. 제가 볼 때 택견에는 그런 타력이 없고, 가라테에는 있다는 거예요. 중국 무술에도 그런 타력은 힘들어요.”
―태권도는 직선적인데 택견은 곡선적이므로 택견이 전통무예를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세요.
“글쎄요. 힘은 거짓말을 못해요. 직선적이라야 강한 힘이 나오는 겁니다. 내가 주먹으로 때리는 데도 여기서부터 둥글게 돌아나가는 것보다 곧장 나가야 파괴력이 있거든요. 어떤 경우든 곡선은 직선의 힘에 미치지 못합니다.”
―한국 전통무예 중에 주먹을, 그것도 정권을 지르는 무예가 있었느냐?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맞는 얘기라고 봐요.”
―옛날 ‘무예도통지보’ 같은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동작은 직선보다 곡선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건 간단한 신체운동이나 보건체조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물론 투기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가미됐겠지만, 과학적으로 발전한 가라테에 비하면 전혀 다르다고 봐요.”
―결국 부원장님께서는 기술적인 수준으로 평가할 때 한국무술이 일본무술보다 뒤떨어진다고 보시는 겁니까.
“지금은 태권도가 경기화해서 앞서 있지만, 태권도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일본이 훨씬 앞섰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태권도는 가라테의 변형이니까요. 당시 한국무술은 송덕기 옹이 하는 택견뿐이었고요. 하지만 택견은 보건체조 수준이었어요. 그러니까 동작이 부드럽게 나가고 건강관리에 효과가 있는 거죠. 태권도도 강력한 힘을 가지려면 부드럽게 나가야 해요. 모든 펀치가 힘을 가지려면 미는 것이 아니라 탁 끊어줘야 하거든요. 그렇게 하려면 부드러운 자세가 필요한 거고.”
이부원장은 태권도의 경기화를 가장 먼저 추진한 사람이다. 모든 스포츠는 경기화해야만 상품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다른 도장들이 품세 수련에 매달릴 때 한발 앞서 겨루기를 도입한 것이다. 태권도에서 겨루기가 시작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겨루기에서는 주먹보다 발차기가 효과적인데, 발차기는 전통적인 일본 가라테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용인대 태권도학과 양진방 교수는 “가라테는 손 동작과 품세를 강조하며 겨루기가 없다. 따라서 발차기 겨루기 경기화 등은 현대 태권도와 가라테의 결정적 차이”라고 말했다. 즉 겨루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태권도가 가라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설명이다.
태권도의 역사
1950년대 말에도 우리나라에서 체계화된 우리무술이 존재하지 않았고,무술이라면 당수도(가라테).유도외에 소수의 중국권법등이 있었다. 당수도, 즉 공수도는
일제시대에 한반도의 일본도장에서 수련한 이들과 일본에서 귀국후 도장을 연 이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기록으로 보면 한국최초의 도장은
광복되기 두달전에 문을 연 '당수도 청도관'이다. 청도관은 초대 관장 이원국씨에 의해 세워졌고 6.25후 손덕성씨에 의해 재건되었다.손덕성씨는
그후 최홍희씨와의 마찰에 의해 도미하였고 엄운규씨가 그 뒤를 이어 청도관 관장이 되었다. 필자가 왜 태권도 역사를 다루면서 한국 공수도의 계보를
따라가는지 궁금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태권도의 역사를 다루자면 당수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기에 그렇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앞에서와 같이 2대 '당수도 청도관'의 관장이 된 손덕성씨는 도미하여 미국에 태권도를 널리 전파한 분이시고, 엄운규씨는 후에 WTF(세계
태권도 연맹)의 부총재를 연임하셨던 분이다.
청도관에 이어 용산에 '철도국 도장'이 생겼다.관장은 황기로 3년뒤에
당수도 도장인 '무덕관'을 개관하였고, 청도관과는 라이벌 관계였다고 한다. 황 기 관장은 1960에 홀로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사단법인 수박도회라는 협회를 만들었으나 1961년 5.16군사 정변이후,모든 관이 태수도 협회로 통합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광복 후의 한국 민간 도장은 청도관,무덕관.지도관.창무관.송무관등 5대 문파가 있었다.이 오대 문파의 관장
중 실종된 전장섭,윤병인을 제외하고,청도관의 초대 관장 이원국,2대 관장 손덕성.무덕관의 초대 관장 황기,창무관의 2대 관장 이남석,송무관의
초대 관장 노병직 등 이른 바 관의 '원조'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하였다.여기에다 한국 전쟁 후 만들어진 군대 도장 오도관의 초대 관장
최홍희와 역시 오도관 관장을 역임한 남태희도 포함된다. 한국 태권도의 뿌리들이 모두 미국에 옮겨져 있는 셈이다.'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이
호성]
광복후 민간의 5대 문파에 이어 1954년 강원도 용대리에 국군 사상 처음으로 '오도관'이란 군 무도관이
창설되었다. 관장은 보병 제29사단 사단장이었던 최홍희씨와 사범은 남태희 중위였다.이 최홍희 관장은 '국기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국군 태권도를 보급시켰고, 북한계 ITF 태권도를 설립한 인물로 초기 태권도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남한계
WTF태권도에서 최홍희씨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소외되는 이유는 그가 미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한 경력과 친북 활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오도관이 창설되었고, 그해 5월 용대리와 가까운 속초에서 제1군단 창설 기념식이 열렸다. 오도관 1.2기생 50여 명이 당수도
시범을 보인 것이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무술을 매우 좋하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30분 동안의 시범을 줄곧 서서 관람했으며,특히 남태희가 기왓장
13장을 겹쳐 놓고 일격에 박살 내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시범이 끝나자 이승만은 최홍희를 돌아보며 "저게 예로부터
전해 오던 우리 태껸이야 태껸! 앞으로 전군에 보급시켜야겠어."했다. 이 한마디로 태권도라는 말을 확정시키고,미래의 태권도 발전에
전기가 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 뒤 최홍희씨는 남태희와 함께 태권도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이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명칭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참석자는 손덕성 청도관 관장.이형근 합참 의장.조경규 국회 부의장.한창완 정치 신문사
사장등이었다. 이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태권도라는 말을 승인했다. 그런데 조경규 국회 부의장이 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경무대에
회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회신은 '태껸'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라는 것이었다. 그 후 2차 명칭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몇
달후 대통령이 친필로 '태권도'라는 휘호를 내림으로써 명칭은 확정되었다. 바로 이 날이 태권도의 탄생일로 '태권도의 날'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군대 태권도의 세력은 전쟁 이후의 안보 의식과 1960년대의 군사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강성해졌다.
5.16전까지만 해도 태권도는 무도로 간주되어 경기 중심의 대회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국가 최고 회의
의장은 모든 경기 단체를 대한 체육회 산하에 들어가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태권도도 역시 대한 체육회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62년 민간 무도의 주류였던 5대 문파 관장과 군대의 오도관 관장이 모여 태권도 단체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미 자유당
정권때 최홍희의 주장으로 태권도란 말이 확정되어 있었으나 그때 그는 해외에 나가 있었고 상황이 이미 달라져 있어서 태수도 협회로 결정을 보았고,
이때 모인 관장들은 모두 7단으로 높였다.이 태수도 협회는 대한 공수도 협회.대한 태권도 협회(회장 최홍희)에 이어 세 번째로 조직된 무도
협회였다. 이처럼 태수도라 이름을 바꾼 배경에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민간 도장과 군 도장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대사로 가있던
최홍희씨가 다시 돌아와 태수도 협회를 맡으면서 다시 대한 태권도 협회로 바꾸었고 이 명칭은 두 번다시 변하지 않게
되었다.
최홍희에게 있어서 5.16은 악연이었다. 군실세로서 잘나가던 그가 해외로 나돌기 시작한 것도 박정희와의 불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협회를 만들었고 태권도를 전파하는데 열성적이었다. 태권도 친선 사절단의 단장으로 유럽이나
중동을 돌고 온 그는 1966년 3월22일 태권도 협회가 구성된 9개국의 협회를 규합해 국제 태권도 연맹(ITF)를 만들었다. 그는 해외에
태권도를 더 널리 보급하기 위해 자주 여행을 했다. 1967년 그가 일본에 들렀을 때 ,일본 가라데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던 최영의(교쿠신
가라데의 창시자)를 만났다. 그가 일본 시민이 되기 위해 귀화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영의를 만나 귀화를 포기하도록 설득했으며
고국에서 다시 만나 비밀리에 태권도와 가라데를 태권도로 통합시키자고 합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복부터 통일하기로 하고 샘플까지 마련했는데,
귀국하기전 술자리에서 최홍희를 비판하는 모처의 의견을 듣고 심하게 동요한후 모든걸 백지화한채 일본으로 돌아가 귀화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 후 그는 1970년 최홍희는 태권도를 보급한다는 명분으로
오른팔인 남태희와 함께 24개국을 순방하며 해외를 떠돌았다. 이때 세계 각국에 태권도 협회를 만들었으며, 1972년 남태희와 함께 다시
32개국을 돌면서 귀국하지 않고 캐나다로 망명해 버린다. 1980년 그는 아들 중화와 15명의 시범단을 데리고 북한에 갔고 매년 한명씩 태권도
사범을 보낸다. 1983년 그는 다시 방북하였고 의형제였던 최덕신과 함께 다시 친북과 반정부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북한과 공산권국가들에게
태권도를 보급했으나 국내의 태권도 인들은 해외에서 반정부 발언을 서슴치 않으며 친북활동을 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는 현재
아직도 캐나다 토론토에서 자칭 ITF총재로 태권도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태권도는 4.19이후 문교부가 주도한 통합 회의를 통해 대한 태수도 협회의 창설로 이어졌고 이것이 다시 대한 태권도 협회로 바뀌었다고
하였다.그러나 비록 혁명 정부의 문교부가 무도 통합을 시도했고 전국 체전에 참가하는 등 경기 단체로서 계파가 사라지는 것 처럼 보였으나,계파는
존재했고 내부사정은 복잡했다. 그러던 것이 1967년 지도관의 이종우 관장이 계파 통합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통합 논의가 다시
제기되었다. 그리고 1971년 이르러 현재 WTF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운용씨가 대한 태권도협회 회장이 되면서 실질적 문파간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윽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태권도에서 계파를 찾기가 힘들어졌으며 오늘날에 이르는 태권도의 모습이 갖추어 졌다.
태권도 역사의 시초를 대략 정리하자면,
50년전, 공수도(=당수, 가라테) 등을 수련하던 분들이 모여서 태권도를 창설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태권도의 역사는 사실 꽤 짧죠)
그렇기에 태권도는 일본의 공수도(가라데)가 모체인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정도로, 공수도 못지 않게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무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