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인식을 한 차원 높인 작품
"Omaha Beach, Normandy, France" (프랑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
Robert Capa, 1944
전쟁 사진작가 Robert Capa는 "당신의 사진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 하다면, 충분히 다가가지 못 한 것이다." 라고 즐겨 말했다. 그의 사진중 가장 유명한 사진중 하나는 바로 Omaha 해변 작전의 D-day였던 1944년 6월 6일 오전에 첫 보병 연대의 상륙에 동행해 찍은 사진이다.
맹렬한 포격 속에서 Capa는 간신히 숨을 수 있는 곳을 찾고 사진을 찍은 뒤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촬영을 한 네 롤의 필름을 촬영했지만 그의 조수는 다음 Life 매거진의 마감에 맞추기 위해 서두르다가 실수를 저질러 버려서 필름이 대부분 못 쓰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실수가 사진들을 더욱 전장의 치열한 광격을 극적으로 묘사하게 되었다. (Life 매거진은 이 사진들의 인쇄에 "그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란 설명을 붙였다.) 50년이 더 지난 후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라는 영화에서 이러한 느낌을 그대로 옮겼다.
2. 깊은 슬픔을 가진 얼굴을 표현한 사진
"Migrant Mother" (이주자 어머니)
Dorothea Lange, 1936
최초의 전쟁 사진가 중 한명인 Mathew Brady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물과는 좀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성공적인 다게레오타입 연구가이자 저명한 신사였던 Brady는 아브라함 링컨이나 로버트 E. 리 장군 같은 유명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참호 속에서 사진을 찍던 포토 저널리스트로 보긴 힘들다는 것이다.
사실, Brady는 직업을 바꾸며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돈, 그의 사업, 그의 매우 성공적인 삶 등 모든 것을. 그럼에도, 그는 모든 것을 감수하며, 카메라를 들고 연방군을 따라 전장에 나서며, "내 영혼이 나의 발에게 가라고 한다" 고 말했다.
그는 전장에서 7,000장 이상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당시엔 말이 끄는 마차에 수많은 화학약품들을 싣고 다녀야 했으므로 이것은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point-and-shoot" 이라 부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4. 전쟁을 끝냈지만 한 인간의 인생을 망친 사진
"Murder of a Vietcong by Saigon Police Chief" "(사이공 경찰 서장의) 베트콩의 사형"
Eddie Adams, 1968
AP통신의 기자 Eddie adams는 "스틸 사진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다." 라고 적은 적이 있다. 이 말은 아담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왜냐면, 1968년 그가 찍은 손을 묶인 죄수의 머리에 정면으로 총을 쏘는 경찰관의 사진은 1969년 그에게 퓰리쳐 상을 안겨 줬을 뿐 아니라,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 사진이 불러 온 사회적 파장은 흑인 인종차별과는 다른 문제로 비춰졌다. 이 사진이 드러내지 않은 것은 총을 쓰는 사람이 베트콩 반군의 대장이며, 이 사람의 이전에도 여러명이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진은 곧 베트남전을 대표하는 사진이 되었고 이 사진에서 총을 쏜 사람은 평생동안 그 댓가를 치뤄야 했다. 전쟁후 그는 가는 곳마다 천대를 받았다. 호주의 재향군인 병원은 그를 받는 것을 거부해 미국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도 그를 내쫓으라는 캠페인이 발생가하기도 했다. 그는 버지니아로 가서 레스트랑을 열었지만 금방 문을 닫아야 했다. 누군가 그의 가게에 벽에 "우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라고 써 놓았고 사람들도 그것을 금방 알았기 때문이다.
아담스는 이 점에 대해 매우 미안하게 생각했으며 그후 사진에 "베트콩을 죽인 장군; 난 내 카메라로 장군을 죽였다." 라고 덧붙였다.
5.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로맨틱하지 못 한 사진
"V-J Day, Times Square, 1945", a.k.a. "The Kiss"
Alfred Eisenstaedt, 1945
6. 한 산업의 종말을 고한 사진
"Hindenburg",
Murray Becker, 1937
Titanic호, Lusitania호 의 침몰은 사진이 없다는 이유로 많이 잊혀졌다. 아마도 현대는 이미지의 힘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1937년 5월 6일에 발생한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폭발은 20세기에 가장 큰 재앙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일은 단지 폭발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엔 97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고 놀랍게도 62명이 살아 남았다. (사실, 규모에 비하자면 불과 4년전 발생한 Zeppelin 여객선 폭발 사고에 비할 바가 못 된다. U.S.S Akron, Atlantic에서 발생했던 그 사고에선 두배가 넘는 숫자의 사람의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경제적인 손실은 훨씬 엄청난 것이었다.
힌덴부르크호를 만든 회사는 당시 독일에서 대대적으로 대중 PR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이 사건은 22명 정도의 사진가, 기자, 카메라맨들에 의해 역사상 가장 잘 기록된 재앙이 된 것이다.
1920~30년대에 제펠린선은 미국, 독일간 항로를 정기적으로 비행하고 있었지만, 1937년에는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비행선의 황금 시대는 이렇게 조용히 막을 내렸지만, 끔찍한 폭발은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7. 자연을 보호한 사진
"The Tetons - Snake River"
Ansel Adams, 1942
사진은 두 종류다. 아담 이전과 이후의 사진. 예를 들면, 아담스 이전의 Times의 사진들은 대체로 예술의 범주로 포함되지 못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가들은 그들의 사진이 더욱 "예술적"(다시 말하면, 더욱 그림같은) 으로 보이게 되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 사진에 페트롤륨으로 코팅된 렌즈의 표면을 날카로운 가시로 긁는 다거나 하는 등 이것저것 많은 시도를 했다. 하지만, 안셀 아담스가 등장하며 그들의 그러한 지나친 열등감을 벗어나게 해 줬다.
브레슐리는 사진이 "현실의 찬란한 시" 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아담스는 사진과 다른 예술과의 비교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별다른 말이 없었고, 그저 "순수한 사진"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휴대용 point-and-shoot 카메라가 등장하며 사진은 대중적인 것으로 변화했지만, 아담스와 다른 풍경 사진가들은 커다란 구형 사진기를 고집했다. 무엇보다 아담스의 사진은 사진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린 업적을 인정받는다. 더 훌륭한 점은 미국의 자연 경관을 사진에 담을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것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담스의 이러한 자연에 대한 열정은 자연을 사진에 담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사진을 통해 1936년 워싱턴 의회에 캘리포니아 Kings Canyon을 보호해 달라며 로비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후에 국립 공원으로 지정이 됐다.
8. 체 게바라를 영원히 살게 해 준 사진
"The Corpse of Che Guevara", "체 게바라의 시체"
Freddy Alborta, 1967
反사회 폭력주의자? 저명한 사회운동가?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우리 세대에서 가장 완성된 인간" 이라 불렀다. 당신이 어떻게 믿던 간에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를 대표적인 혁명가라 부르는 건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신화같은 인물이라는 것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을 때보다 오히려 그가 죽은 뒤 더욱 높아졌다.
볼리비아에서의 혁명을 촉구하던 그의 열의에도 불구하고 반응은 냉담했으며, 오히려 볼리비아의 국군(미국 국방부와 CIA의 지원 및 원조를 받았다)은 1967년 그를 생포해서 사형을 집행했다. 하지만, 그의 시체를 비밀 무덤에 버리기 전에 그들은 그의 주위에 서서 전략적인 목적으로 이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체가 죽은 것을 세상에 증명하고, 그를 따르는 사회적 움직임이 그와 함께 죽기를 바랬다. 사실, 이 사진은 거짓일 수도 있다. 체를 생포한 군인들은 그의 손을 절단해서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궈 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리비아의 군인들은 그를 죽임으로써 전설이 생겨나는 것을 의식하지 못 했다. 이 사진은 세계로 퍼지게 되었고, 마치 예수같아 보이는 모습을 한 그의 사진이 전세계에 그려지게 되었다. 체를 죽인자들은 득의만만하게 흡족한 표정들을 하며 그를 에워싸고 있지만 (오른쪽에 있는 군인은 고의는 아니겠지만 손가락으로 체의 몸통에서 예수가 마지막으로 창에 찔린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체의 평화로운 표정은 마치 이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사진의 의미심장한 메시지는 전세계의 혁명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불을 붙였다. 그리고, 체는 영생을 얻고 사회주의의 위대한 순교자가 되었나니!
9. 위대한 천재에게 유머감각까지 부여한 사진
"Einstein with his Tongue Out", ("아인슈타인의 메롱")
Arthur Sasse, 1951
아마도 이 사진이 아인슈타인의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기묘한 조합이다. "그가 정말 역사를 바꿨는가?" 우리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이 역사를 확연히 바꾼 것은 핵연구와 양자 역학에 대한 그의 공헌인데, 이 사진은 아인슈타인 자신에 대한 역사를 바꾼 사진이다. 그는 뛰어난 두뇌 때문로 널리 알려 졌는데, 이 사진은 그에게 "천재" 라는 이미지에 "괴짜 천재" 라는 이미지까지 부여했기 때문이다.
왜 역사를 만든 혓바닥인가? 아인슈타인 교수는 그의 72번째 생일을 조촐하게 보내길 원했지만, 그를 쫓아 프린스턴 캠퍼스까지 온 Arthur Sasse에게 흔해 빠진 미소 대신 이렇게 유쾌한 장난을 친 것이다. 이 혀는 일반적인 혓바닥이 아니라, 노벨상을 받은 천재 과학자가 형식적인 것을 거부하는 괴짜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10. 초현실을 현실로 만든 사진
"Dali Atomicus"
Philippe Halsman, 1948
필립 할스먼은 순전히 사람들이 점프하는 사진을 찍는 것 하나로 유명해진 유일한 사진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점프를 하는 행위는 '피사체들의 진실한 모습을 표현하는 것' 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중 가장 유명한 점프는 "Dali Atomicus" 인것을 부인하긴 힘들 것이다.
이 사진은 새롭게 등장하던 원자력 시대 (물리학자들에 의해 시작됐으며, 최근 발표에는 모든 물질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 와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인 "Leda Stomica"(사진에 오른쪽 고양이 뒤에 보이는 그림. 이 당시는 미완성이었다) 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사진을 찍는 데는 여섯시간이 걸렸으며, 28번의 점프를 했고, 방을 가득 채운 어시스턴트들은 화가난 고양이와 물양동이를 화면으로 화면으로 쏟았다. 그리고, 이것을 완벽한 노출으로 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할스먼이 이 상태를 만들기 전에 수많은 사진의 컨셉들을 거부한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컨셉 아이디어 중 하는 물대신 우유를 붓는 것이었는데, 관람자들이 2차 대전중 우유가 부족하던 때를 상기시켜 우유의 낭비로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거절됐다. 양자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고양이를 폭발시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것은 고양이의 목숨을 낭비하는 일이라 하여 거절됐다.
할스먼의 방법은 효과적이면서도 독특했다. 그의 유명인사 "점프" 사진은 일곱번 이상 Life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했고, 포트레이트 사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1. 거짓말을 한 사진
"Loch Ness Monster" a.k.a. "The Surgeon’s Photo"
Ian Wetherell, 1934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어두침침한 네스호에 이상한 광경이 목격된 것은 565년으로 거슬러 올라 가는데 그 당시엔 네스호의 괴물에 대한 사진이 없었다. 그런데, 현재는 전설이 되어버린(전설만큼이나 흐릿해진) "surgeon’s photo" 의 1934년 4월 잡지에 포착이 됐다. 열광적인 기대와 함께 몇번의 대규모 수중탐사가 이루어졌고, 매년 이 호수의 관광수입도 덩달아 늘어났다.
하지만, 파티는 1994년 모형 제작자인 Christian Spurling이 이 사진이 조작이라고 발표를 함으로써 끝났다. Spurling의 말에 따르면 그의 의붓아버지 Marmaduke Wetherell가 큰 게임 사냥꾼이었으며 London의 Daily Mail지의 괴수를 찾는 일에 고용된 적이 있는데, 이것이 거짓이란 걸 알았다고 한다. Wetherell도 그의 아들과 함께 Spurling과 함께 탐사작업을 했는데, 이 사진을 찍었다는 Ian이 괴수 모양을 만들어 호수에 띄우고 장난감 잠수함으로 그것을 띄워 놓았더라는 것이다. Ian이 사진을 찍은 것은 맞다. 하지만, 좀 더 신빙성을 얻기 위해 그들은 사람들도 괴물을 본 것처럼 꾸민 모양이다. surgeon Robert Kenneth Wilson은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는 옛속담을 갖다 붙였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할 수 있다.
12. 거의 하지 않은 일을 보여주는 사진
"Gandhi at his Spinning Wheel", "물레질을 하는 간디"
Margaret Bourke-White, 1946
"물레질을 하는 간디" 는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사진 중 하나다. 하지만, 그는 거의 물레를 돌리지 않았고, 물레가 있는 것은 간디의 엄격한 요구 때문이었다. Life 매거진의 Margaret Bourke-White는 인도 독자들을 위한 귀한 기회를 얻었다. 간디의 비서는 그녀가 사진을 찍기 위한 준비를 마쳤지만 사진을 찍지 못 하게 했다. 물레(인도의 무폭력 자주 항쟁의 상징) 앞에 앉은 간디의 모습을 찍어야만 허용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다. 간디는 그때 말을 하지 않는 수행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고, 간디는 밝은 빛을 매우 싫어해서 Bourke-White는 딱 세번만 플래쉬를 켤 수 있게 허용됐다. 이렇게 난관을 간신히 넘어 섰지만, 한가지가 더 있었다. 눅눅한 인도의 날씨 때문에 장비들이 말썽을 부린 것이다. 마침내, 사진을 찍게 됐지만 첫번째는 플래쉬가 터지질 않았다. 두번째는 플래쉬가 터졌지만 그녀가 슬라이드 당기는 것을 까먹어서 검은 사진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완전히 글렀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마지막 세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간디의 가장 유명한 사진을 들고 돌아 올 수 있었다. 이 사진은 간디의 마지막 사진이었고, 그는 2년이 되기 전에 암살을 당했다.
13. 미래를 예상할 수 있게 해 준 사진
"Le Violon d’Ingres"
Man Ray, 1924
포토샵이 있기 전에 Man Ray가 있었다. 세상의 가장 개성있는 사진가 중 한명인 Ray는 지칠 줄 모르는 실험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어두운 방에서 사물의 뒤쪽에 카메라를 놔두고 신비로운 "RayoGraphs" 를 만들기도 하는 등 창조적인 사진을 많이 찍었다.
"Le Violon d"Ingres" 란 작품은 아마도 그의 작품중 가장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초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도 다다이즘의 다른 작품들처럼(Ray가 미국에 전파하며 더욱 널리 알려졌다) 시각적 재미를 준다. 모델의 등에 f-홀을 그려 넣음으로써 여체와 바이올린의 바이올린의 유사성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직관적인 요소이며, 모델의 옷과 포즈는 프랑스의 화가인 Jean-Auguste-Dominiqe Ingres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과 매우 비슷하다. 그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여성의 누드를 즐겨 그린 화가이다.
하지만, 그의 선구적인 면은 이 사진이 그림보다 앞선 것이라는 게 아니라, '현재는 낡아서 사용되지 않는 컨셉을 빌려와 사진을 통해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 낸 것' 이다. 그의 사진은 현재의 디지털 혁명을 예고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