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79년 1인당 GNP: 1,546 달러 2. 1988년 1인당 GNP: 3,728 달러 3. 1980년대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서 200여개 국가중 1위 4. 1979년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 경상수지 적자 41억5100만 달러. 5. 1988년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 138억 달러. 6. 1979년 국민저축률: 25% 7. 1988년 국민저축률: 34% 8.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 20%, 1980년은 44% 9. 1983-87년 도매 물가상승률: 연평균 2.7% 10. 1988년 채권과 채무: 외채 320억 달러, 대외자산 253억 달러. 1989년에 순채무국으로 전환. 11. 전화대수: 1982년 300만 대에서 1988년 1000만 대 돌파. 12. 소득격차: 1980년에 지니계수가 0.39, 88년엔 0.34로 축소(수치가 낮아지면 격차가 줄었다는 뜻임).
全斗煥 정권은 1980-88년 사이 세계 1위의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2.3배로 늘었고 무역적자 구조는 무역흑자로 바뀌었다. 두 자리 수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안정되었다. 외채도 크게 줄었고 국민저축률은 일본을 앞서는 세계최고 수준에 달했다. 1980년대 全斗煥 정부는 통신망 설치와 전자산업 육성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여 1990년대의 세계적 인터넷-전자산업 강국을 예비했다.
이 경제성장으로 해서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70%가 되었다. 이들이 민주화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이들의 온건성향이 6.29선언으로 나타난 타협적 평화적 민주화의 엔진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이 만든 쿳션이 한국사회의 바닥에 깔리는 바람에 민주화의 열풍을 견뎌냈다. 1985년 2.12 총선으로 시작된 민주화의 혼란기에 경제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경제호황기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은 행운의 타이밍이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경제를 이어받아 성공적으로 이를 수습한 뒤 물가를 잡고 고도 성장과 흑자를 이룩했다. 全斗煥 대통령이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정치는 상당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경제는 성공했는데 정치는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부는 잘했는데 시험은 잘못 쳤다는 말처럼 모순이다.
경제 성공의 공을 전두환 대통령이 아닌 金在益 경제수석한테 모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金在益씨를 잘 부린 사람이 全 전 대통령이었고, 金수석은 1983년10월에 아웅산 테러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全대통령의 단임실천을 가능케 했다. 동시에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뒷받침했다. 이런 호재로 安保면에서도 對北우위를 확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