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현역생활이 담긴 이야기

mashul 작성일 11.10.03 16:5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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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어떤 사람이 공익얘기를 썼길레 저도 한번 써보아요.

 

06년 병무청에서 신검을 받았다. 시력굴절 이상이긴 했지만 3급으로 현역판정 받았다.

당시 나는 재수를 하고있었고 06년11월로 나온 입대영장을 미루게되었다.

다음해 나는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말 학교생활에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내가 이렇게 사회성이 결여 된 놈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겉돌았다. 그러다가 4월 초쯤에 어머니가 유방암 2기 판정을 받으셨다. 참 암담했다. 당시 아버지와

누나는 직장생활을 하고있었기에 주로 내가 병원에 있게되었다. 그러다가 5월쯤부터는 학교도 잘 안 나갔다. 10월로 입대신

청을 해놓고 그때 상황이 많이 혼란스러울 때라 뒤늦은 사춘기를 겪었나 보다.

울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그때 학교 생활 열심히 한 줄 아신다. 정말 죄송스럽다. 수술도 잘 끝났고 난 입대전에 돈이나 모아

놓고 가자는 심산으로 마트에서 개같이 일했다. 시간은 잘만 가더라. 어느 덧 입대 한달 전쯤이 되었는데 항암치료중이던 어

머니가 급작스럽게 위독해 지셨다. 결국 의식을 잃으셨고 그렇게 인공호흡기에 의존한체 약 2~3주가량을 깨어나지 못하셨

다. 너무 서럽고 슬펐다.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주변에서는 입대를 미루라고 권유했다. 나도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어머니께서 깨어나셨고 난 예정대로 입대를 하기로 했다.

 10월 9일 전날 목소리가 안나오시던 어머니는 힘이없는 손으로 글을 써 주셨다. '아들아 배웅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몸 건강히 잘 다녀와'

 

 오지 않을 것 같던 10월9일은 왔고 난 같은 날 의정부로 가는 친구놈과 함께 의정부로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내가 부모님과 동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이 녀석은 자신도 혼자 터덜터덜 나왔다. 그렇게 친구놈과 보충대 밖에있는

짱개집에서 마지막으로 싸제밥을 먹고 마지막 담배를 태웠다. 그리고 한대 더 태웠다. 그렇게 난 그친구와 2년동안

볼 수 없었다. 첫날 밤의 믿을 수 없는 현실과 처음보는 사람들과의 잠자리...

 

'수도기계화보병사단'

한 사람이 서울에 있는 거라고 그런다. 나 저긴데..  운이 좋구나 난.

그렇게 사단 신교대로 향하면서 서울로 가는 버스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서울이라고는 믿기 힘든 주변 경치와

호랑이 마크가 새겨진 전투복을 입고있는 조교들을 보면서 이곳은 서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힘든 한주 한주와 동기들과의 이런저런 얘기들.. 친구들과의 즐거웠던 추억과 짝사랑하던 아이의 기억으로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다. 무엇보다 힘없는 글씨체로 써내려간 어머니의 편지와 화장실 1사로에 숨어 혼자 울먹이던 나 자신과

그 옆사로에서도 울던 한 동기의 기억..

 

 그렇게 배치받은 사단내의 한 대대..

생활관 고참들과의 첫 대면과 분대장의 첫 질문 "너 초반부터 빡세게 해서 엘리트될레 아니면 천천히 배울레?"

난 엘리트가 되겠다고 했고 힘든 여정이 시작되었다. 난 항상 분대장의 새끼손가락을 잡고 따라다니며 그렇게 천천히

장난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입대한지 5개월가량이 흘렀고 첫 휴가를 나가게 되었다. 당시 이등병 월급 6만원가량과 쓰지 않고 모아진

33만원. 내 5개월의 가치 33만원.. 일주일 알바하면 만질 수 있는 돈, 명품빽하나 사기 버거운 그돈..내 지나간 5개월과

첫 휴가. 집에가면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 세상은 나없이도 잘 돌아가는 구나 하는 허탈감과 집에간다는 설레임..

몇달만에 들어보는 어머니의 실제 목소리와 안도의 웃음. 하지만 머리털 하나없는 어머니를 보며 느껴지는 슬픔과

4.5초의 짧고 아쉬운 시간들. 이제는 다시 그곳에 가야 한다는 미칠듯한 심경.

 

 그렇게 꼬박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쓰레기를 치웠던 2번의 겨울과 일년 2번 무일푼 막노동 공사판 아저씨가 되는

진지공사와 귀와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거 같고 안면마스크를 끼면 내가 안경잡이인게 원망스럽고 텐트속에서

오전6시 침낭자크를 내리며 이건 꿈일거야 하는 쓸데없는 바램만 키우는 2번의 혹한기 훈련. 불타는 전우애로 냄새나는

CS복을 입고 피티팔번을 수없이 했던 2번의 유격훈련. 진돗개가 너무 싫어지는 수없이 했던 오대기와 빌어처먹을 검열과

지휘관의 보여주기에 놀아난 나의 선후임들과 중하사들..

 

 그렇게 달려오다 보니 채워진 내 어깨위의 녹색견장과 이제 막 전입온 초특급관심병사 뚱땡이 어깨위에 채워진

노란견장. 막내 사람만들자는 취지로 시작한 내 맞후임과 실행한 프로젝트와 이 뚱땡이 녀석의 잔꾀와 펜놀림에 저 하늘

높이높이 날아가 버린 내 3차정기 휴가증과 녹색견장.

 

 대학등록금을 벌기위해 지원한 전문하사 그리고 주변의 기대.

그 기대에 그래도 하사임관도 했는데 뭔가 보여줘야지 하는 맘에 얼떨결에 해버린 2주동안의 하사교육에서 차석.

투스타 표창.

우리 주임원사는 좋다고 뛰어 댕기더니 대대마다 전화해서 자랑질.

'전문하사는 초과근무수당 안나오니 6시에 무조건 퇴근시킨다' 라는 초반 윗대가리들의 회유책에 말려든 난

한달 5~6번의 위병조장 밤샘근무와 또 그놈의 빌어처먹을 검열덕에 야근을 밥먹듯이 했다. 초과근무수당따위가

있을리가 없다. 왜냐면 난 전문하사니깐.

그리고 또 한번의 꿈을 꾸는 듯한 이번엔 동창이 제대로 걸릴뻔한 혹한기 훈련과 태어나 처음으로 포반원 군장 매준다고

오바했다가 골로 갈 뻔한 혹한기 행군 그리고 또 한번의 대대전술훈련과 또 한번의 나이 +1.

전역을 앞두고 고민고민하는 병장 녀석들과의 담배 한대.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에게 남은건 한학기 등록금.

그리고나서 한방에 등록금결제로 훅간 나의 군생활.

 

밑에 공익분의 남은것 2000여만원 

솔직히 좀 부럽다. 그 돈이면 차 한대 뽑을 수 있을텐데.

 

하지만 그게 다인가?

하얀 추운 겨울날 달밤아래 초소에서 서럽게 울었던 기억과 그런 날 달레주던 맘씨좋은 선임, 나를 잘 따르던 내 귀여운

후임녀석들, 부모님이 면회를 못오시는 날 데리고 말없이 면회장으로 데리고 가 피자를 건네던 내 동기, 혹한기 훈련중

몰래 선후임들과 피우던 담배한모금, 점호시간이면 나의 개그에 웃고마는 반대편 침상 이등병 녀석, 내가 제일 못생긴

사람으로 지목한 아직도 미안한 그 맘씨좋은 선임, 항상 나에게 엘리트라며 추켜세워주었던 중하사 선임들과 좋은 말

아끼지 않았던 행보관님.

 

지극히 평범한 군생활 한 나도 말로 다 할수없는 중요한 것들을 얻었다. 나보다 더 힘들고 외진 곳에서 군생활을 하신

내 또레 20대 창창한 모든 예비역분들과 그 위의 선배님들과 지금 나같이 군생활을 하고있는 모든 현역분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우린 모두 공익들보다 면제자들보다 더 가치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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