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는 순간까지 쓸쓸함에 몸을 떤 김요지 할머니
미소 띤 영정 앞에 조문객은 단 한 명. 빈소에 마련된 테이블 다섯 개는 텅 비어 있었다.
꽃다운 청춘에 일본군의 성노리개가 됐던 할머니. 가슴 쓸어내린 긴 세월 외로움과 싸웠다. 평생을 한맺힌 삶에 시달렸던 할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쓸쓸함에 몸을 떨어야 했다.
위안부 피해자 김요지 할머니(87)가 13일 오전 8시쯤 2년여 간 요양생활 끝에 세상을 떴다. 김 할머니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영등포구 신화병원 장례식장 4호실은 조용했다. 김 할머니의 남동생 김상두씨 부부와 조카가 빈소를 지켰다.
전주 출생인 김 할머니는 1941년 열일곱 어린 나이에 또래 소녀 7명과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 광둥성 하이난다오 등으로 강제 연행돼 성노예 생활을 겪었다. 하이난다오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6년 부산으로 귀국했다.
김 할머니는 '몸을 버렸다'는 생각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렵게 생계를 꾸리며 살아왔다.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서울 서대문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 '우리집'에서 생활했다.
김 할머니의 첫 조문객은 평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심이 많던 김정환씨(33). 빈소가 차려진 지 반나절이 지났지만, 김씨가 첫 조문객이었다. 1인 미디어 '미디어 몽구'를 운영하며 6년전부터 꾸준히 할머니들의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제가 첫 조문객이라는데 속상하네요. 빈소가 텅 비어있어 트위터 등으로 사람들에게 문상을 권유하고 있어요. 트친(트위터상 연결된 친구)인 방송인 김제동씨와 배우 김여진씨도 문상을 오겠다고 했습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따르면 12일에는 최고령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박서운(94) 할머니가 중국에서 별세했다. 올해에만 세상을 등진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16명. 생존 피해자는 63명으로 줄었다.
14일 오후 7시에는 김 할머니 빈소에서 추모식이 열릴 계획이다. 발인은 15일 오전 9시. 김 할머니는 전북 임실군 오실면 고향마을에 안장된다.
한편 정대협 등은 14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1000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해결 촉구를 위한 정기 수요시위'를 열 예정이다.
오늘 13일 날짜로 돌아가신 할머니.....
.....그리고 같은날 일본군 '위안부 직접 관리' 증거 첫입수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종군 위안소와 위안부를 직접 관리했다는 증거를 MBC가 단독 입수했습니다.
그동안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정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물증이 없다며 정부 차원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MBC가 입수한 이 문서는 일본의 거짓말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도쿄 임영서 특파원입니다.
◀VCR▶
1942년부터 2년간 태평양 트루크 섬에서 일본 해군 군무원으로 일을 했던 마츠바라 마사루씨.
아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증명서 한 장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남국료 출입증'
우리 말로 번역하면 남쪽나라의 숙소 출입증 정도의 의미로, 위안소를 드나들 수 있는 허가증입니다.
발급일과 이름이 적힌 신분증같은 증서로, 발급자는 당시 트루쿠 섬 주둔 부대장입니다.
◀INT▶ 마츠바라 마사루/(88살)
"부대장의 도장, '하기하라 간이치'라는 당시 부대장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뒷면에는 타인에게 양도 금지 등 주의사항이 적혀있는데, 분실 시 부대 본부에 신고하라고 돼 있습니다.
◀INT▶ 마츠바라 마사루/(88살)
"부대 서무계의 관할 업무였던 것이죠. 군의 관리를 의심할 수 없습니다."
부대가 직접 나서 위안소 출입을 일본 군인과 군무원으로 제한하고, 위안부 여성은 한 달에 한 번씩 성병검진을 받을 때만 외출하도록 통제했습니다.
때문에 검진을 담당한 곳도 해군병원입니다.
◀INT▶ 마츠바라 마사루/(88살)
"여기가 '해군병원'입니다. 이 앞에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군과 정부의 조직적인 개입과 관리를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사회의 움직임에 대한 명백한 반대 증거입니다.
◀INT▶ 오모리 노리코/위안부 문제 해결 네트워크
"일본군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마츠바라 씨는 자신이 섬을 떠난 1944년까지 한국으로 돌아간 위안부는 한 명도 못 봤다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