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어느 날 밤 11시, 이명준(가명·당시 45·대기업 임원)씨의 집은 난리가 나 있었다. 그날도 학원에 빠지고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엄마에게 붙들려온 아들 동원(가명·당시 16)이는 "내가 뭘 하든 상관 좀 하지 마!"라고 고함쳤고, 엄마는 울고 있었다.
이씨는 작심한 듯 "좀 나가자"며 아들 손을 잡고 이끌었다. 동원이는 덜덜 떨며 따라나섰고, 동원이 엄마는 무슨 큰일이 날까 봐 겁에 질렸다. 이씨가 아들을 데리고 간 곳은 PC방이었다. 이씨는 뜻밖에도 미소를 지으며 동원이를 PC 앞에 앉혔다. 이씨도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3판 2승으로 아빠랑 한번 붙자. 지는 사람이 게임방비 내기다."
동원이는 기가 막혔다. "아빠, 스타(스타크래프트)가 뭔지 알기는 해?"라는 말이 절로 나왔고, 이씨는 "잔말 말고 시작이나 해, 짜샤"라며 마우스를 쥐었다. 동원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쉽게 끝내버리려고 자신의 주(主) 종족인 저그(스타크래프트의 3개 종족 중 하나)를 고른 후, 바로 '저글링(저그의 공격병력)'을 모아 공격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빠의 방어는 의외로 탄탄했고 방어한 후 곧 역습에 들어와 동원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동원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동원은 게임 채팅창에 "어쨌든 하실 줄은 아네요. 내가 방심했어"라고 쓰고 곧바로 둘째 판을 시작했다. 이번엔 초반 방어에 나선 동원에게 아빠가 물량 공세를 퍼부어 또 간단히 이겨버렸다. 2대0. 아빠는 "게임비 내고 와라. 가자"라고 했고, 동원은 5판 3승으로 하자며 버텼다.
세 번째 게임은 1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동원이의 눈빛은 비장했고 막상막하의 대결이었지만 이번에도 아빠에게 무릎을 꿇었다. 장·단기전 모든 상황에서, 3가지 종족을 바꿔가며 플레이한 아버지의 실력이 훨씬 낫다는 걸 동원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 1시를 넘긴 시각. 집으로 돌아가며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원이 너, 게임 좋아한다더니 실력은 형편없네."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동원이가 물었다. "아빠, 스타는 언제 배웠어? 매일 바쁘다면서…." 아빠는 빙긋이 미소만 지었다.
이씨는 아들과 매일 전쟁을 벌이는 아내를 보며 엉뚱하게도 게임으로 아들을 이기면 아들이 게임을 끊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길로 '스타'를 잘하는 회사의 젊은 직원들에게 '강의'를 듣고, 실습을 하고, 책을 사서 공부도 했다. 젊은 직원들과 PC방에서 '대회'도 열었다. 젊은 직원들과도 친하게 되고 실력도 팍팍 늘었지만 게임을 한번 시작하면 7~8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새벽 4시에 귀가하는 바람에 부부싸움도 여러 번 했다. 예상을 뒤엎는 전략으로 승리할 때의 쾌감을 뿌리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원이가 게임에 심하게 빠진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아내가 특목고에 진학시키려고 욕심을 부린 게 문제였다. 동원이는 매일 학원을 빼먹고 PC방에서 살았고 성적은 계속 떨어졌다. 늘 바깥일에 바빠 집안일에 무심했던 이씨는 모자(母子)간 갈등에서도 멀어져 있었다.
1년간 맹연습한 끝에 이씨는 마침내 회사 게임 최강자를 꺾었다. 이씨가 명준이를 이긴 날은 그 바로 다음 날이었다. PC방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한참 침묵하던 동원이가 말문을 열었다. "아이들에게 게임으로라도 인정받고 싶었어요." 이씨는 "네가 정말 소질이 있다면 게임 분야의 직업을 갖도록 도와주려고 했다"고 말하자 동원이는 "정말 하고 싶은 건 중국어 공부인데 말도 꺼내기 어려웠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씨는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을 알게 돼 너무 기뻤다.
아들은 '게임 은퇴'를 위한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 "아빠랑 나랑 편먹고 우리 반 최강 애들하고 한판 붙자." 부자(父子)는 1주일간 호흡을 맞춘 끝에 동원이 반 최강팀을 2대 1로 격파했다. 이씨는 아내를 설득해 동원이를 학원에 다니지 않도록 했다. 동원이와 엄마·아빠 사이를 막고 있던 벽이 아빠의 '분투'로 무너진 것이다.
동원이는 게임을 끊고 중국어 공부를 시작해 그해 6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중국 유명 대학에 합격했다. 지난해 최전방 부대에서 병역의무까지 마치고 지금은 2학년에 복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