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영국의 작은 마을 그랜덤에서 태어난 그녀의 결혼전의 이름은 마가렛 힐다 로버츠였다.
그녀의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는 식료품 점을 경영했기 때문에
대처가 정치계에 입문한 뒤에도 "식료품집 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알프레트는 마가렛이 두 살 때 시의원이 되었고, 시의 여러 직책을 거친 뒤에
마가렛이 옥스퍼드 화학과에 입학할 즈음 그랜덤의 시장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녀의 정치입문에 바탕을 마련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도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언제나 이런 말을 해주었고, 마가렛이 당당한 여성으로 살기 바랬다.
보수당원이었던 아버지와 집안 대대로 믿어온 감리교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보수적인 성향이 된 마가렛은
옥스퍼드 보수협회에 가입해서 활동하였고, 1948년 옥스퍼드를 졸업 한 뒤
보수당 클럽회장의 눈에 띄어 다트포드의 보수당 후보로 1950년 총선에 출마한다.
여성 후보로서는 전국 최연소였고, 보수당의 유일한 여성후보였다.
비록 선거에서는 떨어지지만, 이 때 만난 11살 연상의 비즈니스맨 데니스 대처와 결혼하여 마가렛 대처가 된다.
데니스 대처는 그녀의 의정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마가렛이 "나와의 결혼은 다른 여자들과의 결혼과 다를 것"이라고 하자
그는 "그래서 당신과 결혼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전폭적인 지지덕택이었을까?
1959년 대처는 국회의사당에 입성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 굉장히 보수적이었던 영국 의회는 여성의원이라고는 대처가 전무했고
보수당 내에서도 "집안 일이나 할 것이지.."하는 시선이 강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처는 굴하지 않고 과학도답게 연설에서 통계수치와 각종 지표들을 내세워
듣는 이를 신뢰케했고, 여성이면서도 당차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녀는 의원이 된지 2년만에 차관제의를 받았고, 6년만인 1965년 장관직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좌파 물결이 강력했던 1970년대 초반, 보수당 히스 내각은 경제 정책의 실패로 인기를 잃었고
74년 총선에서 노동당에게 패배하게 된다.
다음 총선에서 재집권을 노려야하는 보수당 입장에선 새로운 인물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고,
당수 히스의 대안으로 대처가 떠오른다.
당수가 되기위해서 대처는 외모를 더욱 꾸미는 것은 물론, 쇳소리가 많이 나던 목소리 톤까지 교정을 받는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75년 보수당의 당수가 된다.
이후 그녀는 야당의 당수로서 노동당 정부를 매섭게 몰아붙였고,
1979년 경제난과 총파업이 엎친 데 덮친 "불만의 겨울"속에 총선을 보수당의 승리로 이끈다.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서구사회 최초의 여자 수상이 되었지만
그녀가 이끌어 가야할 영국은 당시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쳐해있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거의 정권을 독식한 노동당은 사회복지국가이념을 내세웠다.
쉽게 말하면 고(高)복지 정책이었다. 이러한 고복지 정책이 유지되기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많은 세금이 필요했고
20여년간 고복지에 노출된 영국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어 생산력의 저하를 불러왔고
세금을 부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것을 가르켜 영국병이라고 한다.)
이런 와중에 오일쇼크 파동까지 겹치며 1976년 영국은 IMF에 손을 벌리게까지 된다
위처럼 노동당은 대처가 정권을 잡자마자 그것이 마치 보수당의 일방적 잘못인냥 쏘아붙인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위해서 대처는 강수를 꺼내든다.
세금을 줄이고 민영화를 확대하며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켜 노동의 유연성을 늘리고
각종 복지예산을 줄여나가는 것이 그것이다.
(고등 교육 복지예산도 줄여 그녀의 모교인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로 하던 것이 취소되기도 한다.)
그녀가 중요시 여겼던 것은 효율성이었다. 그래서 1차 산업으로 여겨지던 광업 분야에서 174개의 국영 탄광 중 일부를 폐업하고
2만명의 탄광노동자를 해고한다.
20여년간 성행해온 탄광을 없애고,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려하자
런던과 리버풀의 빈민가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노동계의 반발이 매우 거셌다.
하지만 그녀는 본인의 결정을 끝까지 굳힌다.
이렇게 영국이 국내적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을 당시
1982년 2월 아르헨티나 근해의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아르헨티나가 무력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혼란스럽던 국내 상황을 감안할 때, 전쟁을 일으켜서 다시 그 섬을 빼앗는 것은
경제성으로 볼 때 들어맞지않았다. (실제로 그 섬은 매우 작기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야당인 노동당은 물론
그녀의 측근들마저도 전쟁을 반대했으며, 미국 또한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굳은 모습을 보인다
국내외의 안 좋은 여론에도 불구하고 대처 수상은 군대를 파견한다.
결과적으로 아르헨티나가 2달 만에 두 손을 들게 된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나 국내외상황으로 볼 때나 얻을게 없을 것 같았던
이 전쟁에서 대처 수상과 영국은 큰 이득을 얻게 된다.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극심한 실업률과 경제적 고통속에 살아가던 영국인들은 자긍심을 얻었으며
단호하게 대처했던 대처 수상의 인기가 치솟는 것은 물론이며,
전쟁에 반대를 표했던 야당과 보수당 내부 견제 세력들을 압도할 수 있게 된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게되자 대처의 정책에 감히 반발할 수 없었던 야당은 정책운영의 주도권을 완전히 뺏기게 되고
대처는 본인의 생각대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쳐나간다.
강도높은 구조조정, 노동시장 개혁, 노조활동의 제한, 공기업 민영화, 정부기능축소, 투자유치, 금융개혁 등
당시 대처가 했던 정책들은 신자유주의의 대표격이 되며 대처리즘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강도높은 경제정책의 결과로 영국의 경기는 급속도로 활황을 띄기시작한다.
후 그녀의 인기는 최절정에 이르고 수상직을 3번 연임하게 된다.
그녀의 강철처럼 굳고 곧은 정책이 이끌어낸 쾌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권불십년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곧고 직선적인 정책은 물론 그녀의 지나친 권위적 통치는 야당은 물론, 보수당 내에서도
독단적이고 융통성이 없다는 비판을 많이 받게 된다.
그런 시선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 계기는 유럽통합 문제였다.
독일이 통일하면서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한 프랑스가
유럽통합책을 가지고 나오자, 보수당내에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이지만
대처는 완강한 반대 의사를 표시한다.
그리고 붐이 일던 경제분야도 80년대 말이 되자 주춤거리기 시작했고,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자
대처는 인두세 도입을 주장한다.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들이 같은 세금을 내는 제도를 대처가 주장한다.) 그러자 그에 반발하는 시위가 매우 거세게 일었고 민심은 빠른 속도로 대처를 떠나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독단적인 정책에 그녀의 측근들 마저 사임을 표하고
급격하게 민심이 떠나자 보수당 내에서는 다음 선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보수당 내 다른 파에서 당수에 도전하게 된다
1990년 11월 20일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그녀는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차 투표에서 과반수가 넘는 득표를 하였으나 1차 투표만으로 확정하기에는 4표가 모잘라 2차 투표에 돌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보수당 내 최고세력들이라 할 수 있는 내각이 갑작스럽게 그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그녀는 사임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그녀는 후계자격인 존 메이저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사임하게 된다.
(MT는 마가렛 대쳐의 줄임말)
그녀는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하원의원의 신분으로 돌아갔다가
그마저도 1992년 불출마로 정치생활을 끝냈고,
그 이후에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필립 모리스 사의 경영고문이 되었고, 미국 윌리엄 메리 대학교의 총장이 되기도 한다.
그녀는 현재 8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하다고 평가 받고 있지만
2002년 뇌졸증의 후유증으로 지금은 공식행사를 자제하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그녀는 얼마 전 영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좋아하지는 않지만 처칠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총리로 뽑히기도 했다.
이것이 그녀의 정책과 태도가 상당한 반발을 불러왔음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그녀의 곧은 태도에 대한
영국인들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