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해방된지 60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60년동안 대한민국의 발전을 다른 나라에서는'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선조들의 희생'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역사에 등장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습니다, 오늘은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폭탄 의거 8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독립운동가로써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전승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일으키신 분입니다
호는 매헌, 본관은 파평으로 충청남도 예산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6세 때부터 큰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의 식민지 교육이 시작되고,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자퇴하였습니다.
그 후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였습니다.
19세 때 길에서 글을 몰라 아버지의 무덤을 못 찾는 무식한 청년을 보고,
자기 집 사랑방에서 야학을 열어 농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야학을 세우고 22세 월진회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주고 근면과 협동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게 농민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을 전개했고, 교재로 <농민독본>을 직접 지었습니다.
농부의 아들이여서 인지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30년 3월에 망명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채포되어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다시 만주로 탈출하였습니다.
1931년에 상하이로 가서 직공 생활과 야채 장사를 하면서 노동 조합을 조직하였고,
영어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부모님과 작별하는 윤봉길)
그 해 겨울에,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김구를 찾아가게 되고,
1932년 4월 26일에는 한인애국단에 정식 가입하였다.
그리고 일본 국왕의 생일인 1932년 4월 29일에 홍커우 공원에서 거행하는
전승 축하식장 행사가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하자
,
윤봉길 의사는 김구선생께 독립 거사를 맡겨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독립 거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4월 29일에 윤봉길은 폭탄이 장치된 도시락과 물통을 가지고 삼엄한 경비를 뚫고 축하식장에 미리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자 단상 정면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렇게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라 대장,
상하이 거류 민단 겸 행정 위원장인 가와바타 데이지를 즉사시키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브로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시게미스 마모루 등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윤봉길은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오사카로 압송되었습니다.
6월 21일 군법 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19일에 총살당하셨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계기로 침체에 빠졌던 독립운동은 사기를 얻었고,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 제스는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위도 더욱 높아졌습니다.
유해는 1946년에 옮겨져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윤봉길의사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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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윤봉길의사의 그 당시 실제 사진
이 사진은 거사를 치르겠다는 마음을 먹고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잡힌뒤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 당하는 사진입니다.
머리에 선명한 혈흔이 보입니다.
이렇게 윤봉길 의사는 2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