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8월10일이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2시간 29분 19초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영국의 하퍼가 2시간31분23초로 2위로 골인했고 남승용이 그보다 19초가 뒤진 2시간31분42초로 동메달을 땄다. 세계 27개국에서 56명이 출전한 가운데 거둔 쾌거였다. (관련 영상 보기)
둘 모두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지만 유니폼에 그려진 국기는 일장기였다. 현재 공식기록도 일본인 이름으로 돼 있다. 손기정은 Son Kitei, 남승용은 Nan Shoryu다.
손기정은 시상식부터 일본 국적임을 부인했다.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월계수로 상의에 그려진 일장기를 가렸다.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똑같았다. 사인요청이 들어올 때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적었다. 옆에 한반도 모양까지 그렸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자격으로 독일 국빈 방명록에 이름을 적힌 이름도 ‘손긔졍’이다. 일본 취재진은 왜 한문으로 이름을 적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때 손기정은 "한문으로 쓰는 것보다 한글의 횟수가 적어서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손기정은 외국 기자들이 자신의 국적을 물을 때도 "Me Korean, not Japanese"라는 말로 한국인임을 분명히 했다. 당시 상황을 표현한 손기정의 말이다.
"1932년 LA올림픽에서 일본 대표로 참가한 김은배 선배가 현지에서 사인요청을 받으면 한글로 써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따라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글로 사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육상경기연맹은 마지막까지 일본인 혈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기권으로 탈락한 시오아쿠와 우승한 내 혈통이 뒤바뀌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이 열망하는 마라톤 우승자는 일장기를 가슴에 단 일본인 선수였지 조선인이 아니었다."
<나치올림픽>이라는 책을 쓴 리처드 만델은 "손기정은 조선인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베를린에 있는 동안 사인요청을 받으면 언제나 조선 이름으로 썼으며 그 옆에서 한반도 지도를 그려 넣었다.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에 언제나 코리아에서 왔습니다고 답했다. 마라톤 시상식 때 손기정과 남승용은 기자들에게 자기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고 적었다.
<올림픽 역사의 100가지 위대한 순간>이라는 책에서 버드 기린스팬은 “미국의 전설적인 마라토너로서 손기정과 친한 존 켈리는 손기정은 단호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밝혔다”고 적었다.
<일장기와 마라톤-베를린 올림픽 손기정>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가마다는 여러 기록과 베를린올림픽 전후 찍은 사진 30장을 살펴봤지만 손기정이 일장기를 단 옷을 입은 장면은 본선 레이스 이외에는 찾지 못했다. 이후 손기정은 가마다에게 “나는 조선 사람이지 일본 사람이 아니었으니 일장기 달린 옷을 입고 싶지 않았다.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는 본 경기 한차례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도 일장기를 지웠다.
동아일보는 시상대에 오른 사진을 쓰면서 손기정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웠다. 1936년 8월25일 사건이었다. 손기정이 우승한 지 16일이 지난 때였다. 그걸 발견한 조선 총동부는 동아일보에 들이닥쳤고 동대문경찰서와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동아일보 사원을 집어넣었다. 당시 주요 용의자로 꼽힌 사람이 체육부 주임기자 이길용, 사회부장 현진건, 잡지부장 최승만,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제판기술자 서영호 등 다섯 명이었다. 이들은 40일 동안 엄청난 고문에 시달렸다. 이길용 기자의 아내 정희선씨의 말이다.
"저희 바깥양반은 몸집이 작아 몸무게가 35~36kg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남달리 튼튼해 그때까지 병이라고는 한 번도 앓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도 모진 고문으로 몸이 완전히 상해버렸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물품을 유치장 안에 들여보내는 것 뿐이었습니다. 여름이었으니까 속옷과 와이셔츠를 여러 차례 들여보냈지요. 나오는 와이셔츠는 언제나 피투성이였습니다."
동아일보는 8월29일자로 무기한 간행 정지처분을 받았고 이길용 등 다섯 명은 언론계로부터 영구 추방당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그걸 기념하기 위해 지금도 체육기자연맹은 연말 체육기자연맹의 밤 행사에 이길용 체육 기자상을 수여하고 있다.
손기정, 남승용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냈을 때 심훈이 쓴 시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그대들의 첨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3백만의 한 사람이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 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精靈)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껴안고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다음은 조선일보가 1936년 8월11일 ‘조선 남아의 의기’라는 사설을 요약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손, 남 두선수의 승리로서 민족적 일대 영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 일대 자신을 얻게 됐다. 즉 조선의 모든 환경이 불리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민족적으로 타고난 자질은 어느 다른 민족보다 앞설지언정 뒤지지 않으며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스포츠에 있어서 세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얻었거니와 우리는 이번 승리를 계기로 문화적, 도덕적, 기타 온갖 분야에서도 세계 수준에 도달할 날이 올 것을 믿게 된다."
■손기정, 그리고 남승용
손기정과 남승용은 똑같이 1912년생이다. 손기정은 평북 신의주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아버지 슬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남승용은 전남 순천 농부 아버지에게서 낳다. 기록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기록으로 보면 손기정이 생일이 빠르다.
손기정은 그래도 남승용을 선배로 모셨다. 남승용이 1931년 서울로 올라와 협성실업학교에 다니다가 19세 때 양정고보(지금 중학교) 1학년으로 편입했다. 손기정은 이듬해 스무 살 나이로 양정고보에 입학했다. 손기정은 선배들이 쓴 교과서 등을 물려받고 육상부 선배 부잣집 아들 집에 가정교사고 들어가 숙식을 해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손기정은 이른 새벽 삼청동을 돌아 북악산 꼭대기를 오르며 훈련을 했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었고 기록을 줄이기 위해 팬티 등 속옷까지 달라냈다. 남승용은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 유우배달로 학비를 마련하며 생활했다.
둘은 1936년 5월21일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일본마라톤국가대표 선발전에 나섰다. 당시 일본은 상위 3위까지 올림픽에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조선인은 1명으로 국한시킨다는 규정도 마련했다. 그건 앞선 1932년 LA올림픽에서 일본대표로 출전한 츠다가 5위에 밀린 게 계기가 됐다. 당시 우리 민족인 김은배가 6위, 권태하가 9위를 각각 차지했는데 일본은 이들 두 명이 초반 레이스에서 츠다를 앞서 나가 츠다의 컨디션을 떨어뜨린 게 패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발전에 앞서 손기정은 선발전 결과와 크게 상관없이 올림픽 출전이 사실상 결정돼 있었다. 앞선 대회에서 세계기록을 세우는 등 워낙 기록과 페이스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승용 처지는 달랐다. 남승용이 올림픽에 나가려면 반드시 1위를 해야 했다. 대회를 치른 결과, 남승용이 1위를 차지했고 손기정이 2위를 했다. 3,4위는 일본선수였다. 손기정과 남승용이 서로 1,2위를 나눠갖자고 작전을 짰는지는 확실히 알려진 게 없다. 그러나 어쨌든 결과는 둘이 원한 대로 됐다. 손기정과 남승용 둘 다 베를린올림픽 출전권을 얻은 것이다.
이 후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다만 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손기정에 비해 관심도와 파급력이 떨어진 남승용이 함께 하기를 꺼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손기정 아내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남승용 아내에게 돈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한 게 둘 사이를 더 소원하게 만들었다는 전언도 있다. 어쨌든 손기정은 주로 한국에서 머물며 최고 영웅 대우를 받은 반면 남승용은 좀체 대중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손기정 딸의 전언에 따르면 손기정은 세상을 떠나기 전 산책을 다갔다가 넘어진 뒤에는 울고 집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 그 후 의사는 하루 500m 이상 걷지 말라고 했다. 손기정은 자서전 <손기정과 남승용 ‘빛과 그림자’>에서 죽음을 앞둔 심정을 아래와 같이 썼다.
"권태하 선배는 1971년 65세로 생애를 마감했고 김은배 선배도 1980년 70세로 인생을 마쳤다. 나는 때때로 42.195km 긴 마라톤 코스 위에 나 혼자만이 남은 것 같은 외로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골을 향해 초조해할 것도 없겠다. 나를 위해 아직 결승 테이프가 걸려 있다면 터벅터벅 걸어서라도 도달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제 새삼 늙은 몸에 더 이상 채찍질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손기정은 2002년 11월15일 90세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남승용은 그보다 앞선 2001년 2월20일 89세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