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폭동은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일주일간 로스앤젤레스 일대가 무법천지가 되어서 약탈과 살인,폭력이 난무한 흑인 폭동 이었다. PCP라는 마약을 복용한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고속도로에서 경찰의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자신의 집인 사우스캐롤라인 까지 추격전을 벌였고 집앞에서 경찰들은 로드니 킹을 검거 했고 검거과정에서 백인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현장이 촬영 되면서 촬영본을 입수한 방송사에서 인종차별을 내세우면서 TV로 공개하면서 폭력을 행사한 경찰들이 피소된 사건이다. 하지만 1992년 4월 29일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4명의 백인경찰관이 무죄 판결을 받자, 인종차별에 분노를 터트린 흑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폭력, 방화, 약탈, 살인을 자행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메이져 방송사들은 LA흑인폭동이 일어나자 91년도 한국인 슈퍼마켓 정당방위 사건인 '두순자'씨 사건을 방송하면서 흑백갈등인 아닌 한인과 흑인간의 분쟁으로 몰아가기 시작을 했다. 분명 로드니 킹 사건은 백인과 흑인의 인종차별사건 이었는데 미국의 메이져 방송사들은 '두순자'씨 사건이 LA폭동이 일어난것 처럼 계속적으로 내보내면서 흑인들은 한국인 상점들만을 골라서 폭력, 방화, 약탈, 살인을 자행하였다. LA 흑인 거주지 사우스 센트럴 지역을 포함해 LA에서 피해를 본 업소가 1만여개였으며 이중 2천800개가 한인업소였다.
한인들은 더 이상 흑인 폭도들에게 이민1세대,2세대인 자신들의 전재산을 날리고 싶지 않았다. 한인들은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그리고 한국 유학생들 그리고 인근 지역 그리고 원거리에 살고 있는 해병전우회 한인들은 12~24시간 운전을 하여 중무장하고 코리아 타운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슬픔도 있었다. 코리아 타운이 폭도의 공격을 받았던 둘째날(4월30일) 밤 한 한인상점을 지키기 위하여 중무장하고 한인타운으로 가던 한인학생이 약탈꾼으로 오인돼 코리아타운을 지키고 있던 방어대의 총을 맞고 숨진 이재승(당시 19세)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기도 했다.
"우리의 재산은 우리가 지킨다. 미국 경찰도 그리고 미국 방송사는 더더욱 믿을수 없다"
한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재산이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 그리고 약탈 당하여 텅텅빈 매장을 보면서도 아직 까지 약탈을 당하지 않은 한인가게들을 구하기 위하여 중무장하고 코리아타운으로 모여 방어대를 만들어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한인 해병전우회는 한인들에 대해서 총기사용에 대하여 집중 훈련 시켰고 옥상에는 모래자루를 쌓아서 진지를 구축하여 저격병들을 배치하였고 한인 코리아 타운 각 매장 앞에도 모래자루를 쌓아서 진지를 구축하고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폭도들의 진입을 차단했다.
한인 코리아타운에는 어느덧 해병전우회,특전사전우회,코리아타운 매장주, 그리고 유학생들 그리고 한인1세대인 할아버지들 까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모여들기 시작을 했고 이들은 해병전우회,특전사전우회들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을 했고 한인라디오방송 그리고 무전기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차량을 개조하여 흑인폭도들이 약탈을 하려고 하면 즉시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흑인폭도들에 대하여 대응사격을 하면서 한인상점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머니,아주머니들은 총탄이 날라다니는 과정에서도 방어대들의 식사를 위하여 음식 광주리를 머리에 올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김밥과 주먹밥 이었지만 할머니,아줌머니들에게는 총탄이 무섭지 않았다. 한인 매장은 그들의 모든것이었고 그것이 약탈과 방화에 사라지는것은 죽음 보다 싫었다.
그리고 이민1세대인 할아버지들 에게도 흑인폭도들의 총탄은 무섭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들에게는 한인매장 그것이 전부였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 같은 상황은 내 재산을 지키야 하기에 두려움이 없었다.
LA 폭동당시 코리아타운내 옥상의 중무장 방송 사진 LA 폭동이 끝난후 경찰들이 무기회수 과정에서 비비탄용으로 확인
LA폭동 3일째 미국 메이져 방송사들은 한인 코리아타운의 총격전을 집중 보도하면서 한인상가의 지붕에 설치된 M3자동화기,머신건들을 집중보도했다.메이져방송사들의 집중보도를 통해 한인코리아 타운에 잘못 들어 갔다가는 죽을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인타운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LA폭동 당시 가장 중추적 역활을 했던 LA해병전우회는 가장 존경받을만한 해병전우회 라고 할수 있다.흑인폭동으로 한인 코리아타운이 미국경찰 그리고 대사관의 아무런 도움을 받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상연락망을 통해 스스로 총탄이 날라다니는 현장에 한인들을 돕기 위하여 12~24시간씩 자동차를 몰고 자발적으로 모인 그들이었다.
LA해병대 전우회는 전세계 해병대 전우회중 가장 존경받는 전우회
물론 LA특전사전우회 그리고 유학생들 또한 중무장하고 생계를 포기하고 학업을 포기하고 한인들을 돕기위해 모인사람들이다. 분명 그들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동포들을 위하여 목숨도 아까워 하지않은 한국인이다.다시 한번 지면을 통해 LA해병대전우회,LA특전사전우회,유학생들, 한국인1~3세대의 한국인 동포를 위하여 목숨을 던진 모든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그리고 한인상가를 위하여 중무장하고 한인매장을 지키려다가 숨을 거둔 이재승군의 명복을 빈다.
LA코리아타운은 LA폭동이후 흑인들과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한국문화를 알리고 서로간에 돕고 살아가는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다.
[증언]
김창준 전 미 연방 하원의원이 미국 LA 폭동의 당시 해병대의 활약상에 대해 밝혔다.
김창준은 4월 22일 방송된 SBS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아침'(이하, 좋은아침)에서 지난 1992년 시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일어난 LA 폭동에 대해 털어놨다. LA 폭동은 1992년 4월 29일 시작돼 5월 4일까지 이어졌으며 흑인 청년들 상당수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약탈, 방화, 살인 등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됐다.
김창준은 "당시 시장으로 있을 때 경찰은 아웃소싱으로 하청을 줬다"며 "경찰서장은 1년씩 계약을 맺고 문제가 있으며 재계약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창준은 "경찰서장에게 폭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현장에 도착했다"며 "한국사람들이 대한민국 해병대 모자를 쓰고 공기총을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고 당시 현장 상황을 떠올렸다.
김창준은 "그 사람들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흑인들이 한국상점들을 털어간다'고 했다. 당시 LA 경찰은 백인들이 거주하는 타운에 있었다"며 "한인타운이 흑인과 백인을 갈라놓는 가운에 있어 샌드위치 상황으로 피해가 컸다"고 언급했다.
김창준은 해병대 출신의 한인들의 활약에 대해 "당시 감격했다. 자신의 동네를 지키겠다고 해병대 모자를 쓰고 다녔다"며 "미국 시장이었지만 한인들의 활약이 자랑스러웠다. 추후에 그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혔다.
김창준은 한인타운이 LA폭동으로 계속 뉴스에 나오는 것에 대해 "앞으로 정치 활동에 대해 걱정했다"면서 "오히려 한인타운을 지키려는 한국 사람들이 활약이 도움이 됐다. 당시 LA폭동에 관련된 질문의 답변으로 '우리도 한국사람처럼 우리 타운을 지켜야 한다'고 밝혔다. 오히려 몇 표 더 얻을 수 있었다"고 위기가 기회로 바뀐 순간에 대해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