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응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12월 21일(음력:순조 20년 11월 16일) ~ 1898년 2월 22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 정치가로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 대부인 민씨이다. 영조의 5대손이자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으며, 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7년 종친부의 유사당상에 임명되어 오랫동안 일을 하였으나, 큰 의미가 없는 직책이었으며, 왕족에 대한 견제를 피하기 위해 파락호 행세를 했다.
1863년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자 섭정[출처 필요]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점점 노골화되었으나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맞섰다. 1866년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면서 횡포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워 없앴고(제너럴 셔먼 호 사건), 그 직후 프랑스(1866년), 미국(1871년)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프랑스 - 병인양요, 미국 - 신미양요)이 일어났으나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척화비까지 세웠다. 이에 대해서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폐쇄정책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한 사건, 침략전쟁(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횡포와 문화재 약탈)등 서구열강의 횡포는 대원군으로 하여금 서구열강에 대해 경계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1869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과 왕정 복고를 알리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이 또한 거절하였다.
국내적으로 널리 전파되던 천주교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주교인 베르뇌와 친분을 갖는등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1866년 1만 명 가까운 신도를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전국 각지에서 대량 처형하는 강경정책으로 정책방향을 바꾸었다. 당시 천주교회의 교세 확산을 우려한 보수파들의 반발과 종교를 앞세운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경계를 위해서였다. 역시 널리 전파되던 동학에 대해서도 1864년 그 창도자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세도정치로 인해 약해진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재건하고, 비리의 온상 서원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겨 두었다.[1]그의 사이비서원정리는 착취로 고통받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당파(黨派)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으며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였다.
1873년 최익현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고종의 견제로 실각,아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계기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으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자신도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되어 억류되었다. 이후 1885년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의 정치적 계산으로 귀국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일본의 종용으로 3차 집권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시점을 전후하여 친일적 성향으로 변신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의 존호를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탄생과 성장배경
조선 왕조 고종 때의 왕족, 정치가, 이름은 이하응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며, 시호는 헌의이다.
흥선대원군의 주요 업적
. 세도정치 타파_안동김씨 세력 축출
· 서원정리_600여개를 47개소로 줄임
· 양전, 호포제, 사창제실시_ 삼정의 문란 시정노력
· 대정회통 편찬_통치질서 재확인
· 경복궁 중건_왕권회복
· 통상수교를 거부
시대적 배경
국내 상황-세도정치로 왕권약화, 정치기강 문란, 삼정의 문란으로 전국적인 농민봉기 동학과 천주교의 확산
국외상황- 이양선 출몰, 서양 세력의 베이징 함락,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됨
흥선대원군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
정책은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고 외세를 배척하고 민생을 안정 시킴으로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서원 철폐와 호초제로 양반들에게 반발을 사고 경복궁 중건으로 원성을 샀다. 그리고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우리나라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계기가 됬다.
후세의 역사에 미친 영향
경복궁 중건사업으로 국가의 수입을 늘리고 쇄국 정책을 펼쳐 우리나라에 근대화를 저지시켰다.
결론
·왕권 강화, 백성 생활 안정에 기여
·서원 철폐 등으로 인한 양반의 반발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 고조, 국가 경제곤란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 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우리 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그만큼 늦어지게 하여, 결국은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맞게 하였다.
대원군의 평가
사실 흥선대원군의 집권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이루어진 변화는 다른 어느 지도자가 집권했을 때보다도 훨씬 폭이 넓고 속도도 빨랐다. 대원군이 집권 후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인사개혁 (人事改革)'이었는데, 그는 60년 동안의 세도정치로 노론(老論) 계열의 안동 김씨가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던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안동 김씨의 집권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그 대신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의 기능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삼군부를 설치하여 통치 체제를 국왕 중심으로 재정비하였다. 왕실 종친의 지위를 높이고 경복궁을 재건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한 것도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원군과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쇄국정책 (鎖國政策)이다. 그는 청(淸)의 권고를 무시하고 서구 열강과 일본에 대해 극단적인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는데, 그 결과 그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조선은 미국,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과 무력충돌(武力衝突)을 피할 수 없었다. 또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일본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인 고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외국의 침략자와 내응한다는 이유로 국내 천주교도들을 철저히 탄압했고, 한편으로는 서해상에 외국 선박이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국경에 대한 감시를 강화시킴으로써 외국인의 출입은 물론 서양 물품의 수입도 철저히 봉쇄하였다.
대원군의 이러한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그를 긍정적이고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조차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세계가 자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우수한 문물을 서로 교류하고 있는데, 계속 문을 닫고 있다가는 시대의 흐름에 크게 뒤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곳곳에 척화비 (斥和碑) 를 세우고 외세에 대해 철저한 대결 자세를 유지했다. 대원군의 이러한 정책은 당시에도 많은 비판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다른 나라와의 교역이 일상화되어 있고 수시로 외국을 오가며 문화의 교류가 다반사로 이루어지는 때에는, 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