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서 과소평가된 인물

면죄자 작성일 13.01.24 23: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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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선 맨날 얻어터지고 패하는 동네북 이미지의 사람이지만 실제 역사속 이사람은 거의 백전백승..

사실은 관우장비급..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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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명으로 손권의 10만명을 벌벌 떨게한 장료조차 이 사람에 비교한다면 한수 접어준다고 하니 그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는 짐작이 가지요.

 

'고대의 용사 하육과 맹분조차 ○○의 용맹에 따르지못한다.'  -정사 제하후조전 주석

'위나라의 최고의 으뜸은 ○○이며, 그 다음이 장료다. '  -  제하후조전 주석

 

○○은 과연 누구일까요? 


나관중에 의해.. 제갈량을 멋있게 만들기 위해..관우의 포스를 위해 철저하게 동네북으로 만들어논 

위국최고의 장군의 실제 역사기록을 한번 열어봅니다.   


정사 조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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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의 자는 자효이며 조조의 사촌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 말타기, 창던지기, 사냥을 좋아했다. 훗날 호걸들이 일제히 일어났을때, 조인도 은밀히 젊은이들을 모아 천여 명을 이끌고 회수와 사수 일대를 두루 다녔다. 마침내 조조를 따라 서주를 정벌할 때, 조인은 항상 기병을 인솔하여 군대의 선봉이 되었다.

그는 별도의 군대로 도겸의 대장 여유를 공격하여 그를 격파시키고, 돌아와 팽성에서 대군과 합류하여 도겸의 군사들을 크게 무찔렀다. 후에 비,화 즉묵,개양현을 공격했다. 도겸은 다른 장수를 보내어 이들 여러현을 구하려고 했지만, 조인은 기병으로 이들을 격파시켰다.

 

조조가 여포를 토벌할 때, 조인은 기병으로 이들을 격파시켰다. 조조가 여포를 토벌할 때, 조인은 별도의 군대로 구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여포의 대장 유하를 사로잡았다.

조 조가 황건 무리를 평정하고, 천자를 맞이하여 허현에 수도를 세웠을때, 조인이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므로 광양태수로 임명하였다. 조조는 조인의 용기와 지략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광양군의 지방관이 되도록하지 않고, 의랑의 신분으로 기병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조조가 장수를 정벌할 때, 조인은 별도의 군대를 인솔하여 가까이 있는 현을 공략하고 그곳의 주민 남녀 3천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조조의 군대는 돌아오는 길에 장수에게 추격당했는데, 군사력이 불리하고 사기가 꺽여 있었다. 이때 조인은 장수와 병사들을 격려하여 떨쳐 일어나도록 하였고, 조조는 그의 용기에 감동했다. 마침내 조인의 부대는 장수를 무찔렀다.

조조가 원소와 오랜 기간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원소는 유비를 보내어 은강의 여러현을 공격하였고, 여러 현에서는 군대를 일으켜 유비에 대항했다. 이로 인해 허창 남쪽의 관리와 백성들은 불안해 했으며 조조는 이 점을 매우 걱정했다.

조인이 조조에게 말했다.

' 남방 각 현의 관리와 백성들은 우리 대군이 목전에서 마침 원소의 대군과 대치하고 있어 정세가 위급하므로, 이 형세로는 병사를 나누어 서로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굳센 병사들을 이끌고 성아래까지 왔으니, 그들이 반기를 든 것으로 실로 당연합니다. 유비는 원소의 군사들을 인솔하게 되었으므로 그 군사들을 제대로 다룰 수 없을 것입니다. 유비를 공격한다면 격파시킬 수 있을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의견이 좋다고 생각해 그에게 기병을 주어 유비를 공격했고, 자신은 유비의 군대를 격파시키러 달려갔다. 조인은 자주 반기를 들었던 여러 현을 전부 수복하고 돌아왔다.

 

원소가 별장 한순을 파견하여 조인의 군사와 후방이 연결되는 서쪽 길을 끊어 놓도록 하였는데, 조인은 계락산에서 한순을 공격하여 그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이로부터 원소는 감히 다시 군대를 나누어 출동시키지 못하였다. 또 조인은 사환등의 장수들과 원소군대의 식량을 운반하는 군대를 습격하여 그 식량을 불태웠다.

하북이 이미 평정된 후, 조인은 조조를 따라가서 후고나을 포위했다.

조조가 명령을 내렸다.

'성이 함락되면 성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매장시키시오'

성은 수개월이 지나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조인이 조조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살 수 있는 출구를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지금 공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고, 성안에서 장수들은 스스로를 시키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은 견고하고 식량이 많이 있으므로, 그들을 공격하면 우리 병사들은 부상을 입을 것이고, 그들을 포위하여 달아나지 못하게 지킨다면 매우 오랜 시일을 낭비해야 됩니다. 지금 병사들은 견고한 성 아래 머물고 있는데, 필사적으로 적군을 공격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조조가 그의 의견을 따르니, 성안 사람들이 항복했다. 그래서 조조는 조인이 세운 앞뒤의 공적을 기록하고 도정후에 봉했다.

 



형주를 평정하러 갔을 대, 조조는 조인을 정남장군으로 임명하여 강릉에 주둔하면서 오나라 장수 주유를 상대하도록 했다. 오래지 않아 주유는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공격했는데, 수천명의 선봉대가 막 도착했을때, 조인은 성으로 올아 그들을 바라보고 3백명의 병사들을 소집하여 부대장 우금을 보내 그들과 싸우도록 했다.

적군은 많고 우금의 병사는 적었으므로 적군에게 금방 포위되었다. 장사 진교등은 모두 성위에서 우금등이 삽시간에 소멸당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좌우의 장수들이 모두 얼굴빛을 잃고 안색이 변했다. 오직 조인만이 의기가 치솟고 분노가 절정에 이르러 좌우의 장수들에게 말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니, 진교 등이 함께 조인을 붙잡으며 말했다.

'적군이 너무 많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가령 저 수백명을 버린다한들 무슨 고통이겠습니까? 장군이 직접 가신다니오?'

 

조인이 이말을 듣지 않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그 휘하의 장수 수십명의 기병을 이끌고 성을 나갔다. 적군으로부터 백여 보쯤 떨어진 곳의 도랑에 다다랐는데, 진교등은 조인이 마땅히 도랑가에서 머물것으로 생각하고 우금을 원조하는 형세를 취하려고 했지만, 조인은 직접 도랑을 건너 똑바로 앞으로 가서 적의 포위군을 뚫고 들어가 우금을 곧 탈출시켰다.

남아있는 우금의 병사들이 아직 포위망을 뚫고 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조인은 또 다시 말머리를 돌려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우금의 병사들을 구출하였다. 그곳에서 죽은 병사는 몇명뿐이었고, 적군은 물러났다. 진교 등은 처음에 조인이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었는데, 조인이 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감탄하며 말했다.

'장군은 정말로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구나'

삼군이 그의 용맹에 탄복했다. 조조는 그의 의기에 감복하여 안평정후에 봉했다.

 

 

 

 

조조가 마초를토벌할 때, 조인에게 안서장군을 대행하도록 하여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고 동관을 막도록 하였으므로, 조인은 위수 남쪽에서 마초를 격파시켰다.

 

소백과 전은 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인을 효기장군으로 임명하고, 칠군을 통솔하여 전은을 토벌하도록 했는데, 그들을 격파시켰다.

조 인은 또 장남장군 가절에 임명되어 번에 주둔하며 형주를 진무했다. 후음이 완을 근거지호 하여 반란을 일으켜 부근에 있는 현을 황폐화시키고 수천 명의 백성들을 거부었을 때, 조인은 제군을 이끌고 후음을 공격하여 격파시켰으며, 그 머리를 베어 주둔하고 있는 번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을 즉시 정남장군으로 임명했다.

관우가 번성을공격했을때, 마침 한수가 범람하여 우금 등 칠군은 모두 물에 빠졌고,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다. 그 당시에는 오직 조인이 이글는 수천군사와 말만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성에서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은 몇판(1판은 높이가 2척이고, 폭이 1장쯤 됨)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관우는 배를 타고 성으로 와서 몇 겹으로 포위하여 안과 밖의 통로를 끊어 놓았다. 식량은 바닥이 나려고 하는데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조인은 장수와 병사들을 격려하며, 그들에게 자신은 이 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임을 보여주었고, 장수와 병사들은 그에게 감동되어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서황은 구원병이 도착하였고 성밖의 물도 점점 줄었들었다. 서황은 성밖에서 관우를공격하여 조인으로 하여금 포위망을 뚫고 나갈수 있게 하니 관우는 퇴각하였다. 

손권이 대장 진소를 보내 양양을 차지하도록 하자, 위나라 문제(조비)는 조인에게 칙명을 내려 그를 토벌하도록 했다.

조인은 서황과 힘을 합쳐 진소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양양으로 돌아왔다. 조인은 또 장군 고천등에게 새로 종속된 한수 남쪽의 백성들을 한수 북쪽으로 이주시키도록 했다. 문제는 사자를 보내 즉시 조인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또 다시 조서를 내려 조인의 진영을 임영으로 옮기도록 하고 대사마로 승진시켰다. 다시 여러 군사들을 통솔하여 오강을 점검하고 비로 돌와 주둔했다.

황초 4년(223)에 조인은 시호 충후라고 했으며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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