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합병후 일본은 조선귀족령을 내렸다
한마디로 귀족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충성을 맹세받는것..
그러나 저 돈과 기득권을 지켜주겠다는 일제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한 귀족들은 80명중 6명..
그 중 이회영 선생일가도 있다.
이회영의 집안은 경주이씨 상서공파로 백사 이항복 (우리가 잘 아는 오성과 한음의 오성) 이래
열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다.
이 집안에는 '상신록' 이라는 문집이 있는데
상신록은 재상을 지낸 선조들의 명단을 모은 책으로써
상신록은 한 가문에서 정승이 열명 이상 나와야 만들 수 있다.
당시에 사대부라는 것은 많지만 이렇게 상신록을 만들 수 있었던 가문은 조선에서 열손가락에 꼽힌다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은 고종 초기 이조판서를 지냈고
9촌종숙 이유원은 영의정을 지내기도 하였다.
당시 이회영 일가의 재산은..
전재산 600억(당시 40만원)을 순전히 독립운동하는데에만 바쳐,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
그러나 현실은 중국땅에서 객사하거나 행방불명
통일신라,고려,조선에서 최고의 벼슬을 한 집안
- 영의정 9명 배출, 오성과한음 주인공 이항복의 후손, 천년동안 양반인집안.
일본이 조선 양반들에게 타협하는 대신 주는
귀족지위와 수십억의 돈을 거절한 집안 - 대부분 양반들 일제에 타협.
급하게 처분했어도 600~800억원(현재가치)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6형제가 모두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 - 식솔60여명이 이동, 신분 해방된 노비들 일부도 주인들을
따라감.
※ 염가처분이어서 600~800억이지 실제 가치는 2조원 정도 되었다고
*신흥무관학교 설립 ,
공짜로 먹이고 가르쳐 수천명 독립군 배출 - 이밖에도 헤이그말사 파견지원, 고종황제 중국망명계획등 독립활동.
이회영선생의
집에 시집온 명문가 규수들이 삯바느질과 고생을 많이해서 반지가 안들어갈 정도. - 육형제 모두 강냉이와 풀죽으로
연명
단군이래 가장 덕망있는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의
최후
첫째
[첫째(이건영),이건영의 둘째아들(이규면)은 신흥학교 졸업 뒤 머나먼 중국땅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
이건영의 셋째아들(이규훈)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뒤 귀국, 국군 공군대위로 복무중 한국전쟁때
실종.]
둘째
[가장많은돈을 보탠 둘째(이석영)는 중국빈민가를 80의나이에 떠돌다
굶어죽음,
이석영의 장남(이규준)은 김원봉의 의열단원으로 이해명과 함께 밀정 김달하와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
셋째
[셋 째(이철영)는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
넷째
[모든계획에 중심에섰던 넷째(이회영)는 일흔이 다되어가는 나이에 독립활동하다 걸려 모진고문끝에
숨짐.
이회영의 둘째아들(이규학)은 사촌 이규준과 함꼐 밀정 암살가담.
이회영의 셋째아들(이규창)은 친일파 암살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고 광복뒤 석방.]
다섯째
[유일하게 살아남아 해방을 본 다섯째(이시영)는
독립후 김구선생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초대부통령이 됨.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국민방위군사건,거창양민
학살사건등
이해할수없는 1인 천하 독재만행에 항거 부통령직 사임.]
막내
[막내(이호영)는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33년 소식이 끊김.
이호영의아들 이규황,이규준도 함께 실종 ( 몰살당한걸로 추정
)]
-이회영선생은 나라를 지키기위해 임시정부를 만들면 또 그안에서 분열된다 하여 임시정부를
참여안하시는등 양반의 머리에서 이런 발상이 나온것자체가 엄청나게 진보적.
-세계적으로 육형제가 독립운동한건 유래가
없는일.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에 따르면“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