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 암 선고받은 아버지, 의사의 '오진'이 고마운 까닭

한두살머근애 작성일 13.02.15 17: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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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11월, 가을걷이를 모두 마친 고향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왔습니다. 저희 부부는 제가 헤이리로 이사한 다음 해인 2007년에 연세가 많은 부모님을 고향에서 저희 집이 가까운, 하지만 고향처럼 뒤에 산이 있고 앞에 들이 있는 금산리로 이사를 오시게 했습니다.

그랬지만, 부모님은 84년을 사셨던 향수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다시 이사가셨지요.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습니다. 이후 4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까이서 부모님을 모셔본 적이 없는 저는 기간의 아쉬움을 덜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 욕심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산됐습니다. 부모님께서 고향으로 되돌아가시고는 매년 농사일이 완전히 끝나는 겨울 초입에 서울로 다시 모셔서 겨울을 손자손녀들과 함께 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2010년 겨울의 어느 날, 서울로 오신 지 한참 된 아버지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시골에서 넘어진 적이 있다. 한 달 전쯤인데 지금도 헛배가 부르고 허리가 불편하구나."

즉시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의사는 허리보다 복부팽만에 주목하고 정밀검진을 위해 입원을 권했습니다. 외래검진을 위한 가벼운 병원 방문일 것이라 여겼던 아버지와 아내는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의사는 내시경으로 위와 장을 샅샅이 살폈습니다.

암 선고받은 아버지 "나는 괜찮아, 너나 조심해"

다음날 아침, 회진 의사가 아내를 따로 불러 아버지의 증세를 '위암'이라 통보했습니다. 어느 정도 진전된 상태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전날 찍은 내시경 사진을 정밀 판독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당황한 목소리로 제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저는 아내의 전화를 받는 동안 평생 처음으로 다리가 저절로 떨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내시경 검사 후 아버지의 배는 점점 더 불러왔습니다. 당황해하는 가족에게 의사는 복강에 복수가 찼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전화기를 아버지에게 넘겼습니다. 아무 말도 꺼낼 수 없는 제게 아버지가 먼저 말을 했습니다.

"안수야, 빨리 나가야 할 텐데 검사한다고 의사 선상님이 못 나가게 하는구나. 나는 괜찮으니 너나 조심해라."

의사와 간호원, 아들과 며느리는 다 아는데 본인만 아무 정황을 알지 못한 채 '나는 괜찮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전화기를 내려놨습니다. 그리고 서재의 문을 잠그고 '응응' 소리 내 울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후에 아내에게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담당 의사가 다시 병실을 방문했는데 예정됐던 골밀도 검사를 취소하고 위 내시경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해요. 그리고 의사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요."

다음 날 저는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두 번째의 위내시경 촬영을 막 마친 아버지의 모습은 불과 며칠 전에 뵜던 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불룩한 배 때문에 다른 부위의 뼈는 더욱 두드러지고 얼굴에는 핏기라곤 보이지 않았습니다. 며느리의 팔에 의지해 화장실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 어디에도 옛날 80kg의 쌀자루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시던 그 영웅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여의사께서 아들이 왔다는 간호사의 통보를 받고 다시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그분은 2년 차 전공의(레지던트)였습니다. 아버지가 여의사를 보자 더욱 기운을 차려 말했습니다.

"이 의사 선상님이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지. 내게 참 잘해주어."

아버지의 말씀에 의사는 겸연쩍은 웃음을 웃으면서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곧 건강해지실 겁니다."

그리고 곧 저를 병실 밖으로 불러냈습니다.

"제가 아드님을 뵙고자 한 것은 이 서류에 사인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 대한 병의 처지에 관한 책임에 사인할 권한이 없습니다."

제가 서명을 해야 할 서류는 아버지의 진료와 치료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결과에 대해 병원 측에서는 전혀 책임이 없다는 서류였습니다. 저는 그 서류에 묵묵히 사인을 했습니다. 수십 년 한 식구로 살아온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치료 결과를 보증할 서류에 사인조차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은 저의 상식에 반하는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그리고 부부 사이조차 남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게 슬펐습니다.

남은 시간은 6개월, 환자에게도 여생 정리할 시간을 드리세요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 여의사는 참 친절했습니다. 환자의 입장에서 또한 환자의 가족 입장을 고려한 의문들을 소상하게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버님에 해한 예후(豫後)를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검사 결과로는 빠르면 6개월, 길면 2년에서 5년 정도 생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세도 있으시기 때문에 수술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환자에게는 언제 알려드려야 할지에 대해 가족들과 상의해보세요. 당사자도 자연스럽게 현재의 상태를 아시고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시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아버님께서 가능하면 편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족의 할 일입니다."

병원 복도 창가에 서서 의사의 설명을 듣는 동안 병원 바깥의 한 나무를 줄곧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12월 그 나무는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놓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뼈마디들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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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후 한 나절 동안 아버지의 병실을 지켰습니다. 몇 시간 뒤에 담당 전문의가 오셨습니다. 몇 번 아버지의 배를 눌러보시고 제게 함께 나가자고 했습니다. 의사는 진료실로 가서 컴퓨터 모니터에 아버지의 위 내시경 사진과 단층 촬영사진을 띄우고 아버지의 뱃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위 내벽 곳곳에 혈종이 보입니다. 문제는 이 암조직들이 복벽으로 전이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정밀한 판단을 위해 월요일에 PET-CT(양전자 컴퓨터 단층촬영기)촬영을 할 예정입니다. 사실 넘어지신 것도, 허리가 아픈 것도, 배가 부른 것도 모두 복수가 원인일 수 있습니다. 일정한 시점이 지나면 식사를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식사를 위해 장을 뚫어서 식도를 만드는 수술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의사의 시선이 모니터에서 제게로 옮겨왔습니다. 저는 그 시선을 비키며 혼자말로 말했습니다.

"옆구리에 구멍을 뚫고 어찌 병실 밖을 나갈 수 있겠는가..."

이 담당의사의 자세하고도 친절한 설명은 6개월이 될지 혹은 5년이 될지 모를,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그 나날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될지에 대한 고민조차 할 필요가 없겠다는 절망을 안겨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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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둘째딸 주리가 어머니를 어버지 병실로 모셔갔습니다.

"벌떡 일어나 오지 않고 여기 누워서 뭣하고 있어? 야들이 귀찮게..."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몸을 일으키기도 어려운 남편을 보자마다 되레 타박만 했습니다. 입원 후 닷새 동안 집에서 했던 모든 걱정은 숨긴 채...

"그래 말이야. 의사 선상님이 안 보내주니 난들 어쩌겠나."

아버지가 손녀에게 미안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칼로 옆구리를 도려냈으면 좋겠구나"

월요일이 됐습니다. 다시 모든 검사실은 재가동되고, 아버지는 예정대로 PET-CT 촬영을 했습니다. 근무 중인 아내를 대신해 오전에는 조카 재윤이가 병실을 지켰습니다. 오후에는 등에 욕창이 생긴 아버지를 위해 오랫동안 침대생활을 한 남편을 몇 시간씩 문질러 욕창 없이 간병한 경험이 있는 아내의 지인에게 간병을 부탁했습니다. 늦은 오후, 여의사가 PET-CT 촬영의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위 부위에는 빨간 반점이 보이는데 다른 부위는 안 보입니다. 암세포 부위는 빨갛게 표시가 되는데..."

이것이 희소식인지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마 가족들이 불필요한 희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 듯했습니다. 그리고 칼슘제제와 비타민 제제를 투약하기 시작했고, 진통제도 함께 투약 중이라고 알려줬습니다.

다음날 오전, 복수천자(腹水穿刺)를 시행했고 내일은 위 세포를 채취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심한 옆구리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칼로 옆구리를 도려냈으면 좋겠구나."

웬만해서는 아프다는 말씀조차 꺼내지 않는 아버지셨습니다. 다음날, 체중은 훨씬 빠진 모습이 역력했고 진통제 투입량을 늘렸습니다. 아버지 병의 위중함과는 관계없이 여전히 제각기 바쁜 가족들이 속으로 야속했습니다. 당장 자신의 일들을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이 슬펐습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돼 정식으로 간병인을 고용했습니다.

아버지도 자신의 병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채신 듯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께 '복수검사'의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퇴원이 늦어지지만 검사결과만 나오면 곧 퇴원하게 될 것이라고 책임 없는 말을 하며 안도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미덥지 않았던 아버지는 가족이 없는 사이에 친절한 그 여의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내 병이 나쁜 병입니까? 자꾸 검사하는 것을 보니..."

여의사는 병실을 나오면서 환자 본인에게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를 고민해보라고 재차 귀띔했습니다.

"아버님, 병원의 한 끼 식사비는 500원이에요"

오후 3시 30분, 그 여의사가 상반된 결과를 전했습니다.

"영상의학과에서는 암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조직검사실에서는 암이 아니라 오래된 조직이 뭉친 궤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구의 여동생, 명숙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시어머니가 아버지와 연세가 같아요. 아버지의 병환을 시어머님께 알려드렸더니 계속 울기만하세요."

여동생에게는 아버지의 병세를 그대로 알려준 터였습니다.

여동생의 시어머님도 노환으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중이셨습니다. 늘 고된 농사일만 하시는 사돈에게 각별한 마음으로 수시로 고기와 반찬을 만들어 보내시던 분이셨고 아버지는 그런 사돈을 위해 생산한 농작물 중에 특별히 좋은 것을 골라 보내드리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병원의 식사비를 무척 부담스러워하셨습니다. 식사가 들어오자 며느리에게 병원식사의 한 끼가 얼마쯤인지를 물었습니다. 아내는 500원이라고 거짓으로 답했습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으로 수저를 들었습니다.

다음날 의사는 '간경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5일 뒤 병원 측은 '간경화로 인한 합병증'과 '식도정맥류'로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12월 1일에 외래로 들어가셨던 아버지는 바로 입원하셨고, 입원한 지 꼭 보름 만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병원 측 의료진 누구도 '오진(誤診)'이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우리 가족 누구도 '오진'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병실을 나오면서 아버지는 그 친절했던 여의사에게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병을 시원하게 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늙은이가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드렸습니다. "... 참 고맙습니다." 이 말 앞에는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이 있었습니다.

'오진해주셔서.'

3년 전 이 '오진'은 부모님에 대한 우리 가족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올 겨울에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장모님도 함께 모셔왔습니다. 서울의 좁은 전셋집에 아내와 아들과 딸 그리고 세 노인이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치매를 앓고 계신 장모님은 정신이 들 때마다 같은 소리를 반복하십니다.

"완전히 양로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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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매운 것을 통 못 드시는 시아버지를 위해 매생이 굴국을 끓이기도 하고 흑임자죽을 끓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일찍 퇴근한 아내는 집에만 계신 세 노인들을 모시고 지척인 남산으로 나들이를 했습니다. 세 분은 짧은 거리조차 힘겨워하셨습니다. 주저앉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남산자락에도 닿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큰 행복입니다. 병원에서 말하던 6개월을 넘긴 지는 이미 오래고 5년도 거뜬할 것입니다. 옆구리를 뚫어 장에 고무호스를 연결하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지... 생각할수록 그 '오진'이 고맙기만 합니다.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이 후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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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땅이고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하늘입니다. 그리고 제일 존경하는 직업은 농부입니다. 아버지가 농부이기 때문이고 그 농부인 아버지가 땅을 제일 귀하게 여기고 하늘을 제일 무서워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농부 아버지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땅의 원칙을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믿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 끼니마다 밥그릇에 밥 한 알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릴 적 아버지가 탈곡이 끝나고도 마당에서 벼 알곡 하나하나를 손바닥에 주워담는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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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빨라도 늦은 게 후회입니다. 특히 부모님에 관한 한은 그 후회를 만회할 길이 없습니다.

세상을 떠신 뒤의 구슬픈 곡(哭)보다 살아계실 때의 따뜻한 말 한마디, 상다리 휘어지는 제사상보다 살아계실 때의 더운밥 한 그릇이 더욱 효자라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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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게시판에 안어울리지만... 짱공식구들이 많이 보는곳이라 올립니다

 

이 게시글 읽고...한숨이 나오더군요;;

시골계신 부모님께 전화 했네요... 자주 전화하고... 한달에 한번씩 꼭! 내려가야겠네요

아래퍼온 링크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33137&CMPT_CD=P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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