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말
당시 미 10군단은 북진을 계속하여 백두산 일대 해산진과 개마고원 부근 장진호까지 진출해 있었다.
하지만 미 해병대는 가장 고통스러운 때를 장진호에서 맞고 있었다.
겹겹이 중국군에게 포위된 병사들은 개마고원 특유의 살인적인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미 공군이 고립된 병사들에게 군수품을 공급해주긴 했지만 혹한 속에선 그 조차 무용지물이었다.
장진호 일대에 고립된 2만여명의 해병대 병사들의 탈출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됬다.
그들은 혹한으로 싸우면서 겹겹으로 둘러싼 중국군의 포위망을 벗어나야 했다.
병사들이 후퇴하는 양쪽 산악지대에는 이들을 엄호하기 위해 공군의 폭격이 집중됬다.
미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미 해병사단은 60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 중 절반이 동상으로 인해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모든 장비를 버려둔 채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야 했다. 부상자 일부만을 헬기로 날랐을 뿐 험난한 산악지대를
통과해 후퇴를 해야만 했다.
중국군은 미 해병대를 섬멸하기 위해 7개 사단을 동원했다 ( 약 12~13만명)
하지만 추위로 인한 고통은 중국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전투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장진호에서 전투를 치르는 동안 중국군은 80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만여명이 동상으로 전투력을 상실했다.
장진호에서 흥남에 이르는 100km에 이르는 후퇴길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미 해병대는 겨우 전멸만을 모면했다.
혹심한 추위속에서 협곡을 빠져 나오는 동안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투로 인한 사상자도 많았지만 동상으로 인해 죽거나 팔, 다리를 잘라내야했던 병사들도 적지않았다.
미 해병대는 생과 사의 고비를 몇번이나 넘겨야 했다.
이로서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뼈저린 전투가 됬다.
미군3천명사망, 중국군 만2천명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