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
1886년 7월 4일, 인천 제물포항에 어느 한 미국인이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이름은 호머 헐버트.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습니다.
고종 황제께서 영어 및 서양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했던
육영공원 (Royal English School)의 교사로 우리나라를 찾은 호머 헐버트.
이 젊은 외국인 청년은 후에 호머 헐버트 박사라 불리며 우리 민족의 많은 존경을 얻게 됩니다.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매우 가치있게 여겼던 호머 헐버트 박사,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하여 한글 사용을 주장하였습니다.
박사의 제자인 주시경 선생과 함께 띄어쓰기를 강조하였고,
서재필 박사를 도와 우리나라 최초 한글신문인 ‘독립신문’ 창간을 도와 영문판 주필을 담당하였습니다.
한성사범학교와 관림중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우리나라의 한글 보급과 근대교육에 앞장섰습니다
헐버트박사는 한국인으로서는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당시 여순 감옥에서 일본 사까이 경시에게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헐버트 박사에 대하여 1909년 12월 2일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헐버트 박사에 대해 일본 경찰에 공술한 내용
“이토 히로부미가 혹독한 정략을 쓰고도 각국의 이목을 가리고 있을 때
헐버트는 한국을 위해 분개하고 각국을 향해 한국의 진정을 발표해 준 사람이다.
한국을 위해 진력한 공을 몰각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안중근 의사는 비록 미국인이지만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매우 높게 평하였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독립 운동에도 매진하였는데,
루즈벨트 미 대통령에게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기 위한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는 특사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헐버트 박사 소장 고종황제 탄신 50주년(1901년) 기념 은장
1907년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는 특사로 임명되었는데,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도와 일본의 부당성을 세계 각지에 고발하였습니다.
이 일 때문이었을까요? 박사는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추방된 이후에도 뉴욕타임스 지와의 회견에서
“한국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진행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
▲ 1949년 한국 방문 때 헐버트 박사가 지니고 있던 여권
미국으로 추방된 지 40여년 만인 1949년, 해방된 우리나라에 다시 찾아온 헐버트 박사는
국민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 86세의 노구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여독으로 박사는 우리나라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서거하였고,
서거 후 1949년 8월 11일 서울시청 옆 부민관에서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한국 땅에 묻힘으로써, 평소 소망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헐버트 박사,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주다.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호머 헐버트 1863년 1월 26일(미국 뉴헤이번) ~ 1949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