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가생이닷컴 , 번역기자 : 아놔짜증나
※ 중국 기자가 쓴 기사인데, 전쟁이후 남북관계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네요.
또, 글쓴님께서 6시간이나 걸쳐서 번역해주셨네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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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휴전 60주년:깨지지 않는 적대관계 -1편-
왕이 잡지 9호:60년전,한장의 휴전 조약서로 한반도의 남북 갈등은 잠잠해졌다.그러나 적대 관계는 그끝을 알 수 없이 계속 이어갔다.같은 뿌리에 같은 민족인 두 국가는 여전히 적대관계이다.헤아릴 수 없었던 광기와 비이성의 태도는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것만 같았다.통일을 목적을 두고있는 본인 그리고 상대방은 계속해서 싸울것이다,그리고 이들 중 한 나라는 미래,즉 어느 시점엔 사라지고 말것이다.
수백만년의 역사를 가진 전사들은 3천리 강산인 한반도를 두고 3년간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는 전쟁을 벌였다.1953년 7월 27일 한반도 판문점에서 드디어《한반도 휴전협정》을 체결했고,동시에 효력이 발생했다.그러나 이건 단지 하프타임이였다.곧바로 후반전이 시작되었다.남북은 외교,경제,군사,과학,민생 각 분야에서 치열한 대항과 경쟁을 하게 된것이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1954년 10월 1일,한국과 미국은 정식으로《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무기한으로 체결했다.1953년,종이 한장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한반도의 화염은 멈췄다.그러나 쌍방이 맺은 상호 방위 조약은 정전협정이 아닌 비 평화협정이다.물론 이론상으론,전쟁의 종결을 위해 체결한것이라 치지만 말이다.사진은 1963년 8월14일,서울(당시 한성)부근의 한 촌락에서 부녀자들이 총기를 어떻게 다루는지 배우는 모습이다.
1961년 7월 6일과 11일,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과 조소 우호협조 및 호상 원조가 체결됬다.그중 가장 중요한 사항은:양국이 협정을 맺은 상호 불가침 조약이다.이는 일방에 대한 어떠한 국가로부터의 침략이라도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취할 의무를 지니며 어느 일방이 무력침공을 당해 전쟁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해 지체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을 한다는 점이다.사진은 김일성과 조우언라이가 협약을 맺고 있는 모습이다.
전쟁후 한반도의 상황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온통 황폐해져 있었다.북한은 1957년을 기점으로 천리마 운동을 벌였다.북한 민중들에게 천리마 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경제는 급 속도로 재건되었으며,국력 역시 강해졌다.
사진은 김일성이 현장에 뛰어 든 모습이다.
1968년 1월 21일, 31명의 남파 공작원은 한국 서울에 침입해 당시 대통령이였던 박정희를 시해하려 했으나,청와대 부근에서 발각이되 실패했다.대부분 현장에서 사살 되었다.그러나 그중 남파 공작원인 김신조는 자살하는데 실패하고 생포 되었다.그 후 김신조는 목사가 되어 사방을 돌며 전도에 힘을 쏟고 있다.
사진의 오른쪽은 목사가 된 중년의 김신조다.(김흥구라고 불리기도 한다)
청와대 습격 사건중,68명의 한국인이 사망하였으며,66명이 부상을 당했다.북한은 31명의 부대원중 29명이 사망하였으며,1명은 생포되었고,다른 한명은 탈장이 되는 부상을 입었다.그는 한 손으로 부상 부위를 잡은체 남한의 포위망을 피했다.38선을 넘을 당시 3명의 미국 헌병을 사살했으며, 다른 3명의 헌병을 부상입혔다.북한에 돌아오자 영웅이 된 그는 바로 박재경이다.2004년 1월,북한 인민군 총정치국 책임을 지고 있는 선전 부총국장 직을 맡고 있다.
사진에 나와있는 사람이 박재경이다.
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은,한국 대통령 박정희를 분노케 했다.곧바로 '124부대'를 표방한 살인 부대를 창설했다.이 부대는 평양에 침입하여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것이 목적이다.1968년 4월,죽음을 불사하는 31명의 부대원을 기반으로 실미도에서 '684부대'가 창설 되었다.북한에 침투하기 위해 피비릿내가 진동하는 극한의 훈련을 받은 부대원의 입지는 점점더 작아지고 있었다. 혹여나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속에 1971년 8월 23일 새벽 684부대는 급기야 반란을 일으켰다.반란도 잠시 한국 군대에 포위를 당하자 버스안에서 자폭을 하고 만다.
왼쪽 사진은 일급 비밀이였던 684부대의 사진이다.오른쪽은 자폭한 부대원의 모습이다.
1968년 1월 23일,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하고 부터 3일째 되던날,미국의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 동해쪽 원산항 부근에서 활동하던 도중,북한은 잠수함을 보내,4발의 어뢰에 공격을 받았다.쌍방의 교전이 오고 가고 있을때,북에서 쏜 3발 어뢰에 푸에블로 호에 승원 한명이 숨졌고,3명이 부상을 입었다.북한 인민군은 푸에블로 호를 포획했다.
사진은 당시 생포된 미국 선원이다.
1976년 8월 18일 아침 9시경,38선 부근,미국 군인과 한국 노무자로 16명의 조직은 북한 인민군 소속 제 3초소 부근에 다달했었다.그때,미루나무 근방에서 사투가 벌어졌다.이 미루나무가 상대방을 감시하는 데에 지장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오전 10시경,수십명의 인민군은 태운 트럭들이 3초소 부근에 도달했고 한미 조직이 나무를 베는것을 저지하다가 사태가 벌어졌다.한미 조직은 작업을 멈추지 않으려 했고,결국 쌍방의 격렬한 싸움으로 번졌으며,미국 군인 2명이 사망,9명의 군인과 한국 노무자가 부상을 당했다.그리고 북한군 5명은 중상을 입었다.
패싸움으로 번진 현장을 찍은 사진이다.
사건 발생후,미국은 강경한 태도로 대응했다.주한,주일등 각 미군기지와 괌에서는 3등급 위기사태가 발령했다.인민군 최고 사령관인 김일성은,전국에 북풍1호를 발령했다.8월 21일 오전 미군은 64명을 태운 36형 공격헬기와 700명의 한국 지원부대를 재차 파병,미루나무와 북한군 2개의 초소를 공격했다.
사진에 왼쪽은 도끼 만행으로 2명의 미국을 죽인 군관이다.사진에 오른쪽은 숨진 미군이 미국에 송환 됬을때,오른쪽 하단은 미군의 목을 벤 도끼 사진이다.
1983년,한국에 대통령인 전두환이 버마(미얀마)에 방문 했을때,북한은 암살할 것을 도모 8명의 공작원을 투입 시켰다.전두환은 버마의 국부 아웅 산 장군 묘역에 방문 하던 도중,북한 공작원은 폭탄을 터트렸다.테러로 인해 부총리인 서석준,외교부 장관인 이범석등 17명의 한국 고위 관직자와 4명의 미얀마 정부 관직자를 포함 총 21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전두환 부부는 참석에 늦어져서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사진은 테러가 발생하기전,화답을 받고 있는 한국 고위 관직자들의 모습이다.
김현희,1964년 1월생 평양출신,아버지는 외교부 소속 직원,김일성 종합 대학과 평양 외국어 대학을 나왔으며:1980년 3월 조선 노동당 중앙 조사부로 부터 임무를 받았다.당시 한국은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지만,북한으로선 기분 나쁜 상황이였다.북한은 김현희를 일본 여행객으로 가장하여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KAL858를 폭파시켰다.KAL858는 인도양에서 실종됬다.
사진에 왼쪽은 김현희가 어린시절 김일성에게 꽃을 바치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은 바레인에서 긴급체포후 한국으로 이송되는 모습이다.사진에 왼쪽 하단은 김현희가 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 하단은 출소후 사죄하고 있는 모습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남북 국력은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한국의 국제적 지위는 해가 거듭 될 수록 높아갔지만,반대로 북한은 경제적 빈곤에 빠졌으며,하루가 다르게 국제적으로 고립 되고 있었다.중국,소련등 다수의 북한의 혈맹 국가들이 이번 서울 올림픽에 참여했다.
사진은 중국대표단이 올림픽 경기장에 입장하는 장면이다.
김일성은 장자 김일성이 32살이 되던해,조선 노동당 중앙 위원회 조직 지도부 부장 대권을 넘겨줬다.2대를 걸친 '하늘이 내려준 위인'이라고 선전했지만,하루가 다르게 몰락하고 있던 북한을 바꾸지는 못했다.70년대부터 한국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정치계에 뛰어 들면서 한국의 국력은 북한을 따라잡았고 급기야 북한을 앞도하기 시작했다.
이명박,집안 환경이 매우 어려웠으며,학창시절 일과 공부를 놓지 않았다.1964년,23살이 되던.해,이명박은 시위를 주도하여,2년간 옥 생활을 했다.1965년,이명박은 현대그룹의 모태가 되는 현대 건설에 입사했다.현대 그룹의 창시자인 정주영의 신의를 받았다고 한다.사진은 1981년 8월, 이명박과 정주영의 모습이다.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옥살이 등을 격은 이명박과 온갖 고난에도 포기 하지 않았던 노력파 출신인 정주영.한명은 대통령이 되었고,다른 한명은 기업의 창시자가 되었다.이는 뛰어난 지도자가 민중들의 지혜와 투지를 볻돋게 하여 한 나라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 하는것이다.
1974년 11월 11일,한국은 북한이 38선 부근에 땅굴 파낸 것을 발견했다.땅굴을 이용하여 38선을 통과해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공격하는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그후 한국은 북한의 소행인 각각의 땅굴들을 발견했다.그중 가장 긴 땅굴은 160m나 된다.
사진은 한국이 발견한 땅굴에 철조망을 설치된 상태,그리고 저 문뒤에는 아무래도 북한의 군인이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1991년 12월 25일 소련의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퇴임을 선포했다.북한은 또한번 깊은 고난의 시기에 들어가게 된다.북한의 최대 협조국이였던 소련은 북한 무역 시장의 70%을 차지 했었기 때문이다.뒤를 이어 북한의 지도자인 김일성도 죽게 된다.
사진은 1994년 북한의 평양 모습이다.민중들은 김일성 동상앞에서 애도하고 있다.
90년대 이후,북한에 대기근이 발생했다.북한의 기근 문제는 여러 원인이 만든 결과물이다.우선 군대의 인원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국민소득 기준에 군비의 비중이 초과된 상태이다.그리고 수도 시설의 문제와 화학 비료 산업의 제한성 등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소련과 맺었던 조소 우호협조 및 호상 원조를 잃게되자 오히려 군 키우기에 급급했다.또한 군비를 확충시켜 핵무장 하는데 열중했다.전 조선 노동당 서기 황장식은 탈북 후 말하기를 1995년에서 1998년 동안 250만명이 기근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그리고 지금까지도 북한은 기근 상태이다.
사진은 2011년 9월 29일,북한 황해남도 뼈가 앙상하게 보이는 농장 관리인의 모습이다.
1953년~1996년까지 한국의 수도,서울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세계에선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세계에서 제일 빈곤한 나라중에 한 나라 였던 곳이,순식간에 중상 개도국인 '아시아의 네마리 용'으로 떠올랐다.이 비약적인 발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핵심 역활을 했다.그는 혁명을 일으켜 바꿔온 결과,1972년 환화로 320불이였던 1인당 평균 소득이 30년간 급성장을 하면서 2만불을 넘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
반면 북한은 90년대가 되자 경제가 붕괴되면서 낭떠러지에 서게 됬다.탈북자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만든《우리가 제일 행복해요.》나온 한구절을 보면,상류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북한의 여의사였던 그녀는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중국으로 도망쳐 나왔다.중국에서 방황하던 그녀가 본 한 농가 앞 마당에 쌀밥과 고기가 널려져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그래서 먹으러 들자 떼를 이어 온 개들을 발견했다.그녀가 믿어왔던 신앙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고 고백했다.
사진은 청강에 있는 북한 공장이다.10년이 지났지만 많이 낡아졌다.
1996년 9월,특수 임무를 맡은 북한의 공작원들이 한국에 침입하는 도중 강원도 강릉시 부근에서 어망에 걸려 수면위에 떠오르게 됬다.두달동안 도망과 쫓는 도중,기습 공격을 받았다.이 사건은 26명의 공작원중,1명 생포,11명 자살,13명 전투중 사망,1명은 북으로 도망을 감으로서 종결됬다.
사진 왼쪽은 한국 군대가 포획한 북한 공작원이고,오른쪽은 덩굴밑을 조사하는 한국 군인의 모습,
왼쪽 하단은 헬기를 이용해 북한 군의 동태 범위를 추적하고 있다.오른쪽 하단은 어망에 걸린 북한의 잠수함이다.
2000년 6월 13일, 한국 대통령 김대중의 방북이 있었다.이 방북을 두고 '얼음을 깬 동행'이라고 한다.그와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일은 《남북공동선언》을 정식으로 발표 함으로서,화해와 화합이 시작된 새로운 시대가 온것을 알렸다.이 시점부터,남북 쌍방은 장관급 회담과 대표단 상호 방문 그리고 정부간의 연락망을 만들었으며,개성공단 건립이라는 성과를 냈다.'한국에 오면 꼭 여행가봐야 할 산' 금강산이 개방되었고,양국에 떨어져 있던 이산가족의 만남도 여러번 열리게 되었다.
사진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