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화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나딕사 작성일 13.10.02 21: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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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긴 축구역사에서 최고 중에 최고라고 인정받으며 가장 위대하고 존경받는 선수중 한명이자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of 레전드인 금빛화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이야기입니다. 그의 위대한 일생을 짧게나마 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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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아메리카 정복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1926년 7월 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생했다. 1943년 만17세에 나이에 리버 플레이트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디 스테파노는 1945년까지 단 1경기만을 뛰었음에도 프리메라 디비시온(아르헨티나 1부리그)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이 우승트로피는 그가 앞으로 얻을 명예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CA우라칸으로 임대를 떠나 재능을 꽃피운 그는 1947년 리버 플레이트로 돌아와 30경기에 나와 27골을 넣어 팀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에 큰 공헌을 했으며 국가대표 마크를 단 채 코파 아메리카에서 6경기 6골로 영웅적인 활약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후 그의 이러한 활약상이 리버 플레이트에서 꾸준히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디 스파테노는 이적을 결정한다. 아르헨티나 프로연맹의 파업으로 인한 여파로 여느 선수처럼 이적을 고려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콜롬비아의 로스 미요나리오스로 떠나갔고 그곳에서도 최고수준의 활약을 선보였다. 그리고 운명의 1953년, 마침내 디 스테파노는 스페인 무대로 진출하게 된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남미에서 이뤄낸 것들

프리메라 디비시온 아르헨티나: 1945, 1947 총 2회 우승
콜롬비아 챔피언쉽: 1949, 1951, 1952 총 3회 우승
코파 콜롬비아: 1953 우승
리버 플레이트 72경기 53골
CA 우라카 24경기 11골
로스 미요나리오스 102+경기(102경기 이상으로 정확한 경기수 측정불가) 100골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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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리그의 과거이름인 유로피언컵 5연패로 얻은 트로피들)

2. 레알 마드리드 CF의 황금기

1953년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이끌려 레알 마드리드 CF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디 스테파노의 전설도 막이 오른다. 그는 53-54 데뷔시즌부터 피치치(라리가 득점왕)과 프리메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석권했고 54-55, 56-57, 57-58 시즌까지 4번이나 프리메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거기에 55-56, 56-57, 57-58 유로피언컵을 들어올린 그는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칭송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은 커리어를 당시부터 이미 완성해버린다. 그럼에도 디 스테파노는 멈출 줄을 몰랐다. 1958년 레알 마드리드는 '질주하는 소령' 이라고 불리던 최강의 공격수, 페렌츠 푸스카스를 영입해왔고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의 조합은 레알을 단숨에 역사상 최강의 팀으로 만들어 버렸다. 60-61, 61-62, 62-63, 63-64 프리메라리가 4연속 우승과 1960년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그리고 58-59, 59-60 유로피언컵을 싹쓸한 것이다. 이것은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 챔피언을 가리는 유로피언컵에서 전인미답의 5연패를 이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뤄낸 것들을 보면

프리메라리가: 53-54, 54-55, 56-57, 57-58, 60-61, 61-62, 62-63, 63-64 총 8회 우승
코파 델 레이: 61-62 우승
유로피언컵(챔피언스리그): 55-56, 56-57, 57-58, 58-59, 59-60 5연패
인터컨티넨탈컵:1960년 우승
피치치(라리가 득점왕): 1954, 1956, 1957, 1958, 1959 총 5회 수상
스페인의 올해의 체육인:1957, 1959, 1960, 1964
발롱도르:1957, 1959 총 2회 수상
엘클라시코: 18경기 18골(엘클 역대 최다골 타이)
총 396경기 307골

등등등 으로 그가 진정한 커리어의 본좌임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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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수생활 은퇴 이후

1964년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잠깐 FC바르셀로나의 지역 라이벌, RCD 에스파뇰에서 두시즌 간 활약한 디 스테파노는 이후 선수생활에서 은퇴할 것을 선언한다. 그는 은퇴 이후 여러팀의 감독을 맡았다. 감독생활 중에 그는 리버 플레이트, 보카 주니어스를 리그우승에 성공시켰고 70년-71 시즌 발렌시아 감독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79-80 시즌에 발렌시아로 다시 돌아와 위너스컵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또한 82-83 시즌에는 자신이 전성 기를 보냈던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서 리그와 코파델레이를 전부 2위로 마치며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결국 다음시즌 도중 성적부진으로 레알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감독생활도 청산한 디 스테파노는 현재는 레알 마드리드의 명예회장으로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그는 때로는 팀을 향해 비난을 서슴치 않으며 반대로는 팀의 중요한 행사에 꼭 참여하며 애정을 들어내고 있다. 가장 최근에 디 스테파노는 5월 5일(한국시간) '문도 데포르티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식들에 반대를 무릅쓰고 50세 연하의 여비서 지나 곤잘레스(36)와 결혼을 선언하여 세간에 충격을 줬다. 문제는 결혼을 반대한 자식들이 그를 감금했다고 여비서가 주장하고 있는 사실...(쩐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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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플레이스타일

디 스테파노의 포지션은 포워드였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를 미드필더로 취급한다. 그러나 사실 그의 포지션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디 스테파노가 수비 진영, 미드필더 진영, 공격 진영, 중앙에서 측면까지 어느곳에서라도 자주 볼수 있을 정도로 위치에 구애받지 않는 독보적인인 활동량을 자랑하는 플레이어였으며 어떤 포지션에서라도 해당 포지션이 요구하는 최고 수준의 플레이를 펼치는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경기 내내 미 친듯한 스테미너로 위치에 제약없이 경기를 누비고 위치에 따른 모든 포지션에서 최고였던 그의 플레이스타일은 이제는 전설이다. 그는 또한 빠른 스피드로도 유명했다. 이런 그의 경이적인 능력에는 수많은 찬사가 따라왔으며 펠레나 마라도나의 천재성을 뛰어넘는다는 평가까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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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매우 눈물나는(?) 국가대표팀 경력

클럽 커리어는 역사상 어느선수와 비교해도 크게 밀릴 것이 없는 디 스테파노 이지만 그에게도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바로 월드컵 우승 경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디 스테파노 본인의 탓으로만 돌릴수는 없다. 그를 둘러싼 상황 자체가 매우 기형적이었고 그로인해 디 스테파노가 희생당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다. 디 스테파노의 첫 월드컵 출전 기회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이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정부가 출전을 거부하면서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디 스테파노는 콜롬비아 대표팀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단 4경기만을 뛰었을 뿐으로 1954년 월드컵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뛰기를 원했으나 그의 조국은 다시한번 월드컵 출전을 거부한다. 심지어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 두곳에서 뛰었다며 FIFA가 그의 출전 자체를 불허하면서 디 스테파노는 출전 자격조차 얻지 못한채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불운은 계속되었다. 1957년 스페인 국적을 취득하여 스페인 국대가 되었지만 1958년 스페인이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17세의 펠레가 새로운 영웅이 되는것을 TV를 통해 지켜봐야 했으며 마지막 기회였던 1962년에는 부상으로 인하여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결국 국가대표로서 디 스테파노의 커리어는 코파 아메리카 우승 정도가 전부이다. 어쩌면 평생 3개의 국가대표팀에서 뛴 결과.... 지금은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의 이중국적자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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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바르셀로나에서 뛰었던 경력

레알 마드리드의 전천후 레전드인 디 스테파노는 사실 FC바르셀로나에서 뛸뻔했다. 아니. 거의 확정까지 갔었으며 실제로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뛴적도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디 스테파노가 유럽클럽과의 교류전에 나섰을 당시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두팀 모두의 레이더에 그가 포착되었다. 그의 활약에 감탄한 것은 두팀 모두였지만 먼저 선수를 친 팀은 바르셀로나였다. 디 스테파노 영입에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원소속팀이었던 미요나리오스와 그전 소속팀이었던 리버 플레이트가 서로가 디 스테파노의 소유권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르셀로나는 리버 플레이트에 주목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답을 얻었다. 리버 플레이트는 원소속팀이었던 미요나리오스와의 합의를 전제로 이적을 허락했다. 디 스테파노는 계악이 성사되기도 전에 이미 바르셀로나로 건너가있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디 스테파노가 바르셀로나와의 계약서에 사인하면서 이제 캄프 누에서의 입단식 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수는 그제서야 등장했다. 스페인 축구협회는 원 소속클럽이었던 미요나리오스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계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원소속클럽과의 합의는 리버 플레이트가 디 스테파노의 이적을 허락해주는 대신 바랬던 부분이기도 했다.그리고 이런 혼란기에 레알 마드리드가 나타났다. 그들은 미요나리오스에게 이적료를 지불하여 1954년까지 디 스테파노를 소유할 권리를 가졌다. 한 마디로 디 스테파노는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두팀 모두가 디 스테파노에게 이적료를 지불하여 소유권을 얻은 이중계약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는 그를 유벤투스로 이적시키자고 합의를 보았다. 바로 이때 스페인 축구협회가 나타나 이를 만류하며 중재를 하였고 1년마다 번갈아가며 뛰게하자는 계약서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바르셀로나팬들은 계약서에 반발했고 디 스테파노가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가진 몇차례의 친선전에서 보여준 부진한 모습을 이유로 들며 그를 포기하자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런 주장이 대두됨에 따라 당시 바르셀로나의 회장이었던 카레토는 400만 페세타의 보상금을 받고 디 스테파노를 레알 마드리드로 보내주기로 결정하고 즉시 사임했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리버 플레이트에게 이적료를 지급하면서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디 스테파노의 영입과정을 두고 많은 주장들이 있다. 누군가는 독재자 프랑코가 디 스테파노를 영입하려는 바르셀로나의 노력에 방해공작을 펼쳤다고 주장하며 누군가는 바르셀로나 스카우터가 레알 마드리드측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쪽에서는 레알로 가기를 원한 디 스테파노가 평가전에서 일부로 부진한 플레이를 펼쳤다고 주장하며 가장 이상한 주장은 디 스테파노를 프랑코가 협박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모든게 음모론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확실한건 두팀이 그를 유벤투스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이때 스페인 축구협회가 끼어든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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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v=tnPDBLaWufA
마지막으로 이건 1959-1960 챔피언스리그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8강전 경기입니다.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 헨토 등 올드스타들을 한눈에 보실수 있습니다. 세 선수 모두가 골도 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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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알매니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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