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첫날
1999년 27살되던 해에 나는 회사일을 그만두고 한국행을 택했다. 중국조선족들에게 너무도 큰 유혹의 나라였던 한국,처음 타보는 비행기만큼 한국은 내게 신비롭고 낯선 나라였다.
처음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태여나서 생전처음으로 불법이라는 모험을 하게 된 나로서는 엄청 큰 불안감을 온몸으로 감수하여야 했다. 다행히 공항심사가 순조롭게 끝났고 거기를 벗어나기 바쁘게 나는 정신없이 종종걸음을 쳤다. 누가 마중나온다고 전해듣긴 했지만 머리속엔 온통 출입국관리소를 빠리 벗어나야 한다던 거간군의 말만 떠올라 언제 두리번거리면서 찾아볼 경황도 없이 무조건 공항출구를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와서야 안도의 숨을 휴 내쉬며 나는 잠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채 주춤거렸다. 환하게 넓고 잘 트인 도로를 건너 저앞에 줄지어 대기한 택시에 타야지 생각을 굴리면서 정신없이 도로를 가로건넜다. 막 택시에 오르려던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서 돌아보니 한국에 꽤 오래계셨던 셋째시누이남편이였다.
"아니 부르는데 왜 그렇게 정신없이 가오?"
그때 이국땅에서 아는 얼굴 하나 발견한것이 내게는 얼마나 큰 감동이였는지 모른다. 잠간 시누이남편인것도 잊은채 나는 친오빠를 만나기라도 한듯 좋아서 어쩔바라를 몰랐다.
몇번인가 지하철, 뻐스를 갈아타면서 셋째시누이네가 거주하고있는 마포동의 어느 한 자그마한 세집에 다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저녁이 되니 하나둘 한국에 계신 시댁식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중국에서보다는 훨씬 피곤한 모습들이였다. 젊고 이쁘고 날씬하기만 했던 막내시누이한테서 눈가의 잔주름을 발견한것은 그때가 처음이였다.
"올케가 사무실에서 컴퓨터만 만지다가 이제 식당일을 어떻게 할른지 몰라."그때까지만 해도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고 가냘파보였던 내가 은근히 걱정되는 눈치들이였다. 환영연회라도 해야겠지만 불법단속이 심한 상황이라서 간단히 식사나 하자고 말하는 그들의 모습들에서 불안감이 더한층 전해져왔다.
저녁식사후 중국에 있을때라면 한바탕 노래방이요 뭐요 줄지어다녔을 사람들이 보름후에 뒤따라나오는 남편이 도착한 다음에 다시 보자는 인사말만 남긴채 얌전히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첫번째 가게에서의 탈출
한국에 온지 며칠후 막내시누이가 벼룩시장을 뒤져가면서 나한테 일자리를 찾아주기 시작했다. 전화상으로 연락하여 여기다싶게 찾아들어가면 무엇때문인지 식당주인들의 얼굴들이 대체로 밝지 않았다. 불법체류인데다 경험도 없는 나같은 경우는 말을 건네보기도전에 퇴짜를 맞았고 몇군데를 거쳐서야 겨우나마 일자리 하나 구하게 되였다. 그것도 한달에 한번씩 쉬고 한화 80만원이였다.
그렇게 그 가게에서 먹고자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1.2층으로 된 가게는 가정분위기의 칼국수전문점인였다. 주인아줌마는 서글서글한 50대초반의 서울사람이엿다. 가게에서 같이 일해야 하는 언니벌 되여보이는 녀자 한명 있었는데 고향이 부산이라서 그런지 "사장님예", "이랬어예","그랬어예"그런 귀여운 사투리를 만이 썼다.
일을 시작한 첫날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뭐 좀 시키면 그대로 따라 할건데 다들 너절로 알아서 해야 한다며 말이 없으니 나로서는 참 미치는 일이였다. 점심시간이 다 되여오자 손님들이 우르르 밀려들고 여기저기서 주문을 해대는데 하나를 기억하면 또 하나가 잊혀지고 음식은 나왔는데 누가 시켰는지 몰라서 눈치만 보고있고 멍청하니 같이 일하는 언니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갑갑해하는 눈길들과 마주쳤다. 게다가 말투까지 이상한지 뭐라고 물어보면 그거 알아들을 시간이면 이거나 갖다주라는 식으로 언니는 등을 떠민다. 손님상에 음식그릇을 갖다놓은 손길이 부들부들 떨리고 바보같이 당황한 나를 손님들이 걱정스럽게 지켜보고있었다. 나는 정색하고있는 관중들앞에 나선 한마리의 연기못하는 미운오리와도 같았다.하찮게 여겼던 식당일도 대담성과 요령이 필요함을 그때에야 깨달은것이다.
전쟁치르듯이 한바탕 법석이던 손님들이 하나둘 식사자리에서 물러나고 남은 음식그릇을 주방으로 날라가는데 그것만은 쉬웠다. 헌데 이번엔 주인아줌마가 주방으로 부르는것이였다.물이 가득 담겨진 설것이통에 세척제며 표백제까지 부어놓고는 장갑도 없이 그릇을 씻으라는것이다. 표백제가 얼마나 독한것인지는 그때까진 잘 몰랐고 덤벙거리며 그릇을 씻어대기 시작햇다. 이왕이면 깨끗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그릇을 쳐들고 보는 사이에 옆으로 어마어마하게 그릇들이 쌓여지고있었다."얘얘,뭐하니 좀 빨리빠리 해야지."주인아줌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나는 또 속이 한줌이 돼서 손놀림을 다그쳤다. 쨍그랑! 끝내 접시 하나가 손에서 미끄러져 땅에서 깨져버렸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오후 세시기 되여버렸고 그제서야 식구들은 점심을 먹게 되였다.
밥값만큼도 일을 못한것 같아서 저으기 밥먹는것도 눈치보였다. 그래서 "일 못해서 죄송해요."
가끄스로 뱉은 한마디에 "처음엔 다 그래,이제 하다보면 요령이 생길거야."그렇게 너그럽게 받아넘기는 주인아줌마가 눈물나게 고마웠다. 중국에서 말로만 들었던 야박한 한국주인들 모습하곤 너무나 차이가 큰것 같았다. 아량이 넓다고 해야 하나?역시 선진국사람들이라서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헌데 좋은 이미지는 날이 갈수록 흐릿해지고 새로운 모습들이 눈앞에 비춰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잔뜩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였다. 그속에는 중국에서 배우고 살면서 중국의 모든것에 익숙해졌던 나의 사고방식과 한국사람들에 대한 이해부족의 차이에서 오는 모순도 있었다.중국에서 상급이 지시하면 차근차근 받아하던 그런 어느 한 굳어진 사고때문에 누군가 나한테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쳐주면 참 잘할것 같은데 여기서는 그런 방식이 안통했다.
나 스스로 눈치껏 일을 배워야 했고 요령을 장악해나가야 했다. 그런줄도 모르고순진한듯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따지고 묻고 그런 내가 참 많이 바보스러웠던것 같다.
그때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것은 1,2층 사이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무거운 쟁반을 나르는것뿐만이 아니였다.
세집을 따로 맡지 못한 상황에서 가게의 어느 한 방에 주숙하고있으려니 같이 일하는 언니가 열시에 번개같이 퇴근해버리고나면 나머지는 다 내몫이였다. 주인부부는 저녁이면 말로는 살뺀다고 안먹는 바람에 나 혼자서 챙겨먹기도 미안스럽고 해서 가끔은 저녁을 굶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뭐 찾으러 2층방에서 내려왔는데 주인내외가 보쌈을 시켜가지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때의 그 처량함을 어디에 비할가?내가 웬만큼 넉살좋은 사람이였더라도 같이 먹읍시다 하면서 달려들었겠지만 먹을것을 두고 참 치사하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그뒤로도 종종 그런 일은 목격했고 혹시라도 부딪치면 마지못해 지나가는 말로 나한테 먹어보라고 하는것이였다. 식당에서 일하며 굶을수도 있었다는것은 지금와서 생각할 때 너무 착한척 송구스러운척 했던 내 못난 성격탓이라 해야겠다.
그렇다고 맨날 흐린날만 있었던건 아니였다. 어느날인가는 일을 마치고 주인내외가 어쩌다가 서울구경시켜준다면서 자가용에 같이 태워주었다. 처음으로 돌아보는 서울야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왔다. 주인아줌마 후배인듯한 사람이 차린 노래방에서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고난 뒤 돌아온것은 새벽 두시가 다 되여서였다. 많이 늦었다고 부랴부랴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다섯시가 못돼서 가게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부시시 깨여 일어나 보니 주인내외가 그 시간에 새벽시장에 물건구입을 다녀온것이다.
잠이 덜 깬 상황에서 무우며 배 상자를 낑낑거리고 주방에 날라가고나니 온몸이 해나른해져서 정말 그대로 잠들고싶었다.헌데 주인아줌마는 잠도 없는지 그길로 열무를 손질한다면서 법석이고있었다.나보곤 그대로 올라가서 자라고 했지만 그냥 또 혼자 올라가긴 무엇하고해서 괜찮아요를 연발하면서 또 한번 착한 모습을 연출했다.그만큼 나는 아무것도 할줄 모르고 불법이기까지 한 사람을 받아주었다는것에 대한 고마움으로써 주인아줌마에게 더욱 이쁨받을거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만의 착각이였다.시간이 어찌됐든 나는 또 그날의 일들을 계속해야 했다. 주인아줌마는 점심 끝나고나서 아무때까지나 한숨자면 되였고 그래서 피곤한건 나뿐이였다. 장사와 좀 되였다싶으면 가끔은 또 새벽에 시장에 가야 하는데 어쩔수없이 나도 따라나서군 했다. 점차 나는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럴즈음 남편이 한국회사에 취직했고 시누이네가 우리가 있을 방 하나를 마련해주었다. 그때로부터 집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였는데 주인아줌마는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며칠뒤에 오래전에 이 가게에서 일한적이 있었다는 다른 한 언니가 등장했고 그로부터 나는 주인아줌마의 미움을 받게 되였다. 새로 나타난 언니는 손님한테 애교스럽게 봉사도 참 잘했고,일도 잽싸게 해재꼈다.무뚝뚝하고 어정쩡한 나하고 비교할 때 내가 주인입장이였더라도 뻔한 비교였다. 그러면 차라리 속편히 나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하면 될것인데 주인아줌마는 한사코 내 결점들만 꼬집어놓는다. 주인입장이라 할말도 많았겠지만 죽어라고 일한는데 잘 안되던 그때는 참으로 억울했었다.
결굴 어느날인가 아침부터 이어지는 스트레스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나는 그 가게를 뛰쳐나오고말았다.
등뒤에서 주인아줌마가 들으라는듯 소리질렀다."중국년들은 왜 다들 저 모양이야,맨날 개처럼 짐싸들고 이리갔다 저리같다..."
다시돌아서서 유리창에 돌멩이라도 뿌려던져야 속이 내려갈것 같은 심정이였지만 나는 또 그럴수 있는 입장도 신세도 못되였다.
이제는 6년 세월이나 흘러갔지만 그때 첫 가게에서의 탈출이 어쩌면 나머지 내 한국생활에 있어서 경험과 면영력으로 뒤받침되였는지도 모른다. 주인과 종업원 사이에도 일로서의 확실한 계산이 있어야 함과 한국인이 아님으로서의 부족함을 스스로가 채워가야 한다는것이 그때 내가 느꼈던 첫 감수였다.
"미친개 있어요?"
첫 가게에서 안좋은 모습으로 뛰쳐나온후 며칠동안 참 잘했다싶은 자아위안으로 마음을 달랬다. 허나 쏟아져나온 울분만큼이나 그 자리에 밀려든것은 앞으로에 대한 암담함과 현실에 대한 의문이였다.
중국에 있을 때와는 살던 방식과 신분이 완전히 달라져버린 시점에 와서 나의 사고방식이 바뀌여져야 하고 내 자신을 개변시켜야 하는것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였다.게다가 품에서 떼여놓고 나온 어린 내자식을 생각하면 피눈물을 속으로 삼키면서라도 난관을 극복해야 했고 둥글둥글게 현실에 어울러져야 했다.
그렇게 뾰족한 부분을 깍아버리고 모자란 부분은 채워가면서 살다보니 차츰차츰 한국사회에 적응된것 같았다. 내가 인식을 달리해서인지 아니면 첫번째 가게에서의 실패를 두번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를 보는 주위의 시선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우연찮게 내귀로 흘러들어오는 말들이 있었으니 "너는 연변사람 안같아,요사스럽지도 않고..." 나한테 기분 좋으라고 한 말들이겠지만 한편 사람들이 갖고있는 편견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였다.
진정 한국인다운것이 무엇이고 중국조선족다운것이 무엇인지?같은 민족이면서도 가지각색의 얼굴들속에 존재하고있는 이 부동한 사고방식과 부동한 표현형태들,그런것들이 오늘날 편견을 만들어버린것이 아닐가싶다.
한국에서 일한지 얼마 안되였을때 일도 서툴렀지만 한국말 역시 생소하며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이야기들도 많이 만들어내군 했었다.
일한지 겨우 하루밖에 안되는 어느 고기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저녁손님이 많이 밀리는 금요일이였던지라 일손은 적고 손님은 많아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가게마다 메뉴가 다르고 밑반찬도 다른지라 나는 더욱 헛갈리기만 했다. 여기저기서 불러대면 "네네"대답하기 바쁘게 뛰여갔다가 주문한 음식을 갖고가보면 몇번 밥상에 척 놓는순간 "이건 뭐예요?"라는 질문과 함께 못마땅한 눈길들이 마구 내몸에 집중됐다. 그러면 연신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는데 저쪽에서 또 한 사람이 "여기요"를 웨쳤다.황급히 뛰여가보니 30중반쯤 되여보이는 품위가 있어보이는 부부가 다섯살쯤 돼보이는 애를 하나 데리고 식사하고있었는데 뭐 하나 추가해달란다.
"뭘 드릴가요?"시끌법적한 소리속에 다시 한번 귀를 바짝 기울여서 물었더디 뭐 하나 더 달라고 하긴 하는데 도저히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한국인들은 우리 연변사람들처럼 억양이 세지 않았다. 몇번씩이나 다시 물었지만 아주 교양있어보이는 그 부인은 짜증내는 기색이 전혀 없이 마냥 상냥하게 웃으며 무슨 친개를 달라고 했다. 나는 초조해났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가 비는것 같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친개를 달라고 하는건 분명한데 식당에 와서 미친개를 찾을리는 없겠지만 귀에 들리는 소리나 발음하는 입모양을 보면 미친개를 달라고 하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내 입에서 "미친개 하나 더 달라구요?"라는 말이 튀여나가고말았다.
갑자기 웅성이든 주위가 조용해지고 음식을 주문하던 손님은 자기가 잘못들었나 해서 눈을 커다랗게 뜨는것이였다. 이때 대여섯살쯤 되는 남자애가 발딱 일어서더니 "아줌마 미친개는 무슨 미친개예요?부침개 달라잖아요!"라고 소리질렀다.순간 조용하던 식당은 끝내 폭발하고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짐 아니면 전 따위로만 알고있었지 부침개라고도 불리우는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를 보고 훈계하고 서있는 철없는 아이와 온 식당안의 손님들이 배를 끌어안고 눈물짜는 장면을 마주하니 정말이지 그자리에서 죽고싶었다. 죄송하다는 말도 잊은채 얼굴이 빨개져서 연신 부침개를 외우며 주방으로 뛰여간 나는 "부침개주새요"한다는것이 또한번 "미친개주세요"라고 말해버리고말았다. 떠들썩한통에 홀에서 있은 일을 자초지종 알고 있던 주방에서 또한번 웃음이 폭발하고말았다. 자지러질듯,기절할듯한 그 웃음에 나에게 벼락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였다.
나는 끝내 울고말았다. 화장실에 달려간 나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찬물에 씻으며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였다. 문득 이상하게도 그순간에 포근한 고향이 그리웠고 사랑하는 딸애가 사무치게 보고싶었다. 그리고 집에 가고싶었다.
식사가 끝나서 나갈 때 부침개를 주문했던 그 손님은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고향떠나 얼마나 고생많겠어요.그래도 힘내고 열심히 살아요."하고는 내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2만여원의 팁이였다. 싫다고 하는걸 억지로 쥐여주었다.
그일이 있은후 행복해보이는 이 가족은 나의 단골손님이 되였다. 특별히 그쪽으로 더 많이 신경이 쏠리고 잘 챙겨주는 나한테 두분은 고맙다면서 늘 팁까지 주고가군 하였다. 손님이 적을 때면 그 아저씨는 일부러 "오늘은 미친개 맛보러 왔습니다."하고 우스개를 하며 분위기를 띄우기도 하였다. 그만큼 우리는 가까와 졌다. 열심히 한만큼 팁을 주는것도 고마왔지만 그보다는 고향떠나 의지할데 없었던 나에게 항상 아무 거리감없이 인간적으로 대하는 그들이 나에게는 친오빠,친언니로 보였다.
장장 6년동안 힘들고 고된 일만 하면서도 힘든줄 모르고 버텨올수 있었던것은 아마도 이런 마음 따뜻한 한국분들의 격력의 말들과 마음씀씀이가 큰 도움이 되였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