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주작사건

허리케인죠스 작성일 13.12.19 00: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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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동아시아엔 '대표적인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에 '세계 학계'에선 '동아시아는 다른 국가들보다 미개한 석기 문화'를 지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번에 무너뜨린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1977년 우리나라의 연천  전곡리에서 '30만년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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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발견된 30만년전 구석기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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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리 선사 유적지의 최초발견자인 주한미군 상병 그렉보웬. 그의 발견으로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는 한단계 업그레이드 됬습니다-





이 발견은 당시 고고학 학계를 완전히 뒤엎은 대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는 아슐리안형 뗀석기(흔히 양면핵석기라 부른다)가 발견되지 않아 대표적으로 모비우스(Movius) 같은 학자들의 편견어린 유럽, 아프리카보다 아시아가 문명 발달이 늦었다는 '구석기 문화 이원론'이 주장되고 있었는데, 이게 한순간에 부정되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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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획기적인 유적의 최초발견자 그렉보웬은 오늘날 한국 고고학계의 은인으로 추앙받고있습니다-




한편이 구석기 유물의 발견으로 '열등감 폭발'한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옆나라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자신들 역시 '굉장히 오래된 신화가 전해져오는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정작 옆나라 한국보다 더 이전연대의 유물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으니 말이죠. 결국 1980년대, 일본학계는 엄청난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일본 고고학은 '한국에 30만년전 구석기 유물이 있는데 일본이 없을리는 없다'며 방방 소리를 질렸고, 일본 고고학자들은 무슨수를 써서라도 이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일본 고고학에 빛과 같은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라는 고고학자였습니다. 1950년 태어난 후지와라는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 독학으로 일본 고고학을 연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후지무라는 1980년대 '한국은 30만년전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 반면' 일본은 고작 '3만년전 구석기 유물밖에 발견안된'것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했고, 이를 어떻게 해서든 역전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이전 일본의 구석기 유물은 3만년전 이 최고 오래 된것이었습니다. 30만년전 한국 구석기 유물과 너무나도 차이가 많았죠. 이에 후지무라는 백방으로 노력하여 마침내 결실을 이룹니다. 처음엔 일본의 30만년전 구석기를 찾아내자 엄청난 언론의 관심을 받았으며, 이후 90년대는 무려 70만년전 일본 구석기 유물을 발굴해 내고야 맙니다!!





후지무라 신이치가 20여년간의 발굴에 무려 '70만년전 일본 구석기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세계 구석기 유적 역사는 다시 쓰여질 판이었습니다. 일본의 여러 언론들은 후지와라를 칭찬했고, 그를 '일본의 영웅' 구석기 유물을 족족히 찾아낸다는 뜻으로 


무려 '신의 손'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후지와라의 이러한 발굴은 무언가 의구심이 드는 점이 어느정도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점입니다.



- 뗀석기를 만든 수법이 수십만 년 전의 것과 너무 차이가 난다.
- 수십 킬로미터 간격으로 떨어진 석기들의 아귀가 우연치고는 너무 정확히 들어 맞는다.
- 발굴된 석기의 석재가 주변 석재와 차이가 난다.
- 방금 파낸 유물에 마른 흙이 묻어 있다.
- 결정적으로 해외 학자들의 공동 연구 제의를 죄다 거부했다!



후지와라가 70만년전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 고고학자들의 공동연구 제의를 거부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에 몇몇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은 이에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후지와라가 수상하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언론과 우익의 공세속에 '선량한 이들의 말'은 금세 뭍혀졌고, 심지어 후지와라를 욕하면 '매국노' 취급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일본 학계는 중국, 메소포타미아, 인도, 이집트 문명과 더불어 '일본을 세계 5대 문명에 껴야된다'고 주장하기에 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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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마이니치 신문의 몰카에서 들통난 후지무라의 주작질-





이를 수상하게 여긴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은 후지무라의 발굴을 아무도 몰래 몰래카메라식으로 촬영하였으며, 마침내 사건의 전말이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후지무라는 자신이 주작한 석기를 유적지에 파묻고는 다시 발굴해 가는 형식으로 '일본 구석기 역사를 70만년'까지 주작질하는데 성공한것이었습니다!




마이니치 신문이 후지무라의 주작질을 폭로하자 일본 고고학계는 엄청난 충격과 파장속에서 절망에 빠졌으며 급기야 후지무라는 자신에게 속은 일본국민들에게 직접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기 까지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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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질을 시인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후지무라-




후지무라의 20년간의 발견이 모두 주작질로 판정되면서, 일본 고고학은 암흑에 빠지게 되었으며, 세계 고고학계는 일본 고고학계를 아주 '주작학계'라며 무시하는 처사에 이르게 됩니다.  이후 일본 고고학계의 유물발견은 한국 고고학자나 다른 나라의 고고학자가 공동연구를 하지않으면 안될정도로 무시되는 처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한 인물의 욕심이 한 국가의 고고학계를 아주 처참하게 망칠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된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선량한 사람이 피해를 봤으니, 바로  가가와 미쓰오(賀川光夫)라는 벳푸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그 역시 후지무라와 같은 고고학자로써 평생 연구에 힘써왔던 사람이었으며, 1962년 하지리다케 구석기 유적을 발굴함으로 인해 신망높은 학자였습니다.


하지만, 후지무라의 주작이 밝혀지자 애꿏은 가가와 미쓰오까지 '주작질 파문'으로 휩싸이게 되었으며, 결국 가가와 미쓰오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면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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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작사건은 과학이 국가적인 자존심과 경쟁력 때문에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개인의 욕심과 시기심이 조국의 위상을 말아먹고 애꿏은 사람마저 희생될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주는 사건이라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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