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전선(2) - 롬멜의 등장.

케이즈 작성일 14.02.02 02:33:32
댓글 10조회 17,782추천 12

139127004496449.jpg

사설 접고 바로 들어갑니다.

자세한 썰이나 다른 부분은 댓글이나 새로운 글로 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뭇솔리니가 아프리카에서 뻘짓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의 반응은 이랬다.

"지들이 벌인 일, 지들이 해결하라고 냅둬!"

하지만 1940년 11월, 영국 해군이 지중해의 이탈리아 해군기지 '타란토'를 기습한 사건을 계기로

히틀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와 유럽대륙은 기본적으로 서로 떨어져있는 땅이지만,

그 사이에 있는 바다-지중해가 모두 영국해군의 차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중해에 인접해 있는 나라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등 수도없이 많다.

때문에 지중해를 장악하는 나라가 곧 유럽의 강국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게다가 이미 엔드류 커닝햄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지중해를 가리켜

'커닝햄의 연못'이라고 부르며 설치고 다녔고,

이 문제를 그대로 놔둔다면 이탈리아 본토와 프랑스 남부가 곧바로 위협받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본토와 수만km 떨어진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이 기세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모항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몰타섬이라는 근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빈약한 독일의 해군력으로 영국과 맞설수는 없다,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내버려둘수도 없던 히틀러가 내린 결정은

몰타섬은 공군력으로 철저하게 때려부수고, 이집트는 전차부대로 영국군을 몰아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독일군의 아프리카 파견이 결정되었다.

 

139127063730899.jpg
(이쯤에서 다시보는 아프리카 지도-출처 네이버쥬니어...)

 

토부룩을 점령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트리폴리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이탈리아 패잔병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득실거리던 트리폴리에 1941년 2월 12일,

에르빈 롬멜이 도착했다.

이 아프리카 전선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군이였고,

독일군은 영국군을 방어하며 이탈리아 군을 돕는 것이 주된 임무였지만

롬멜은 별로 그럴 뜻이 없어보였다.

 

그가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찰기를 타고 정찰을 나간 것이었다.

그렇게 정찰을 마친 롬멜은 결론을 내렸다.

"영국군은 현재 약체화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가 공격을 시작할 힘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다면 먼저 공격을 걸어 올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때마침 우리의 사고뭉치 이탈리아가 그리스에 건 전쟁 때문에 병력의 상당수가 그리스로 떠났고,

현재의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을 맹렬히 몰아붙이던 그 강력한 군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도착하기로 한 2개사단 중 제5경기계화 사단의 일부가 2월 14일에 도착하긴 했지만

완전한 편제를 갖춘 제15기갑사단은 5월 말이나 되어야 지중해를 건너올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형편도 아니었기에 한가지 명령이 떨어진다.

나무판자와 캔버스 따위를 사용해 '전차'를 만들라는 것.

그러자 퀴벨바겐 자동차 위에 판자를 뒤집어 씌워서 멀리서 봤을 때 '전차처럼 보이는' 물건을 만들어냈다.

139127164784073.jpg

(이거시 퀘벨바겐 자동차...인가?)

그리고는 진짜 전차와 이 가짜 전차를 섞어 공격명령을 내렸다.

최대한 먼지를 많이 내기 위하여 널판지 따위를 매달고 영국군 거점으로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를 멀리서 본 영국군이 전차부대라고 판단하고 거점에서 철수를 한다.

10대가 채 안되는 전차로 거점을 점령한 독일군의 블러핑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때 당시 영국군은 다른 문제를 하나 더 안고 있었다.

 

여태까지 대승리를 이끌어내고 사막을 잘 이해한다고 평가받은 오코너 중장이 이집트 주둔군 사령관으로 가고,

후임으로 공병출신의 필립 님 중장이 지휘를 맡고 있었다는 것이다.

책임감은 충실했지만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님 장군은 좋은 지휘관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했다.

 

3월 30일, 철수한 영국군을 향해 독일군은 다시 한번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다.

영국군은 지난번과는 다르게 치열하게 응전했지만, 점점 진짜 전차가 편성되고 있던 독일군에 비해

전력이 떨어졌던 영국군은 결국 퇴각을 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무질서하게 패주하고 있는 영국군을 향해 독일군이 매섭게 들이닥쳤다.

그들 자신이 이탈리아군에게 했던 그대로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139127321364340.jpg
(독일군 초반 공격을 성공으로 이끈 널빤지 전차.)

 

4월 2일, 영국 중동파견군 사령관 웨이벌 장군이 직접 전선을 시찰하고는

전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오코너 중장을 데려오려했지만 이미 전황이 기울대로 기운 싸움에서

패배의 책임을 맡고 싶지 않았던 오코너 중장은 이를 거부하고 조언자 역할로 남기로 한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사이, 독일군은 영국군을 대차게 몰아붙였고

여러 해안도시들이 속속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혼란 와중에 님 사령관과 오코너 중장이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헤매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버렸고

영국군은 안그래도 참담한 상황에서 지휘관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4월 8일, 영국군은 토부룩까지 물러났다.

토부룩이 무너지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까지 위협받게되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독일군을 저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독일군 또한 토부룩을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보급선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영국 공군의 공습을 받기 쉬웠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토부룩을 점령하여 수송선으로 곧바로 보급을 받아야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군이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던 것이,

토부룩에는 이전 이탈리아군이 사용하던 견고한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었고

영국군이 이를 더욱 견고하게 보강해놓고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39127340058358.jpg
(피투성이가 된채로 독일군을 기다리는 영국군)

 

4월 14일 새벽, 제5경기계화사단이 굉음을 울리며 토부룩으로 쳐들어갔다.

철조망을 짖밟고 들어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용하던 영국군이었지만

독일군 전차 뒤로 보병들이 나타나자 십자포화가 쏟아졌다.

후속보병이 없는 전차의 시계는 지극히 제한될 수 밖에 없었고

더욱이 대전차포에 의해 피해를 입으며 사방에 모래먼지가 뒤덮이는 상황이 오자

독일 전차의 조종수와 포수들은 제대로 된 조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영국군이 파놓은 함정에 걸린 독일군은 17대의 전차를 잃으며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수를 써서라도 토부룩을 함락시켜야하는 것을 알기에

롬멜은 전차연대장 오를 브리히 대령을 닦달했다.

"시체로 산을 쌓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탈취해야한다."

 

4월 16일, 이번에는 이탈리아군과 연계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활약상을 본 롬멜은 이렇게 표현했다.

"투사가 되기엔 글러먹은 놈들."

139127396984784.jpg

(여러가지 의미로 감동한 롬멜의 심경)

 

전투는 이틀간 계속 되었지만 영국군은 완강하게 방어했고, 롬멜은 결국 공격중지명령을 내렸다.

패전을 거듭하며 땅바닥까지 떨어졌던 영국군의 사기는 단숨에 회복되었고

롬멜도 결국 제15기갑사단이 올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토부룩을 포위당한채로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영국군은 게릴라전을 펼친다.

특히 인도사단 '라지푸트'족은 이런 게릴라전에 뛰어났는데,

구차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인간 귀가 들어찬 자루를 들이미는 것으로 보고를 대신했다.

 

4월 30일. 예정보다 일찍 제 15기갑사단이 도착했다.

전열을 재정비한 독일군은 토부룩에 세번째 공격을 감행한다.

이번에는 공군까지 가세하여 폭격을 하였고, 독일 전차들도 진지 외곽을 돌파하는 듯 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믿기지 않은 투혼으로 사납게 응전하여 독일군을 밀어내버린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100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고

결국 이 보고를 받고 분통에 찬 브라우치히 원수가 노기에 찬 명령을 내린다.

"토부룩에 대한 더이상의 공격과 이집트로의 진격을 금한다."

이렇게 영국군은 결국 독일군의 공세를 뿌리쳤고,

독일군은 그제서야 본래 임무인 방어체제로 태세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공격적인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의 기세가 한풀 꺾이자

이번에는 영국군에서 공격적인 지도자가 나선다.

바로 윈스터 처칠 수상이었는데, 독일군의 공세가 꺾이자 매일같이 전문을 보내 웨이벌 장군을 닦달했다.

웨이벌 장군은 정치가들이 전술문제에 간섭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했지만,

수송선단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중해를 건너와 300여대의 전차를 내려주자 결국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영국 본토는 매일같이 폭격을 받고 있었고, 새로 벌어진 그리스 전선에서 긴급전보를 울리고 있는 와중에도

이정도의 전차를 긁어모아준 처칠에게 그에 합당한 성의를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5월 15일, 급조된 작전으로 독일군을 향해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23대의 전차와 35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아무런 소득없이 반격에 실패하고 만다.

전황이 점점 더 안좋아지고 있었지만 웨이벌 장군은 다시 한번 계획을 작전계획을 세운다.

그리하여 1941년 6월 15일- 공격을 재개한다.

 

마틸다 보병전차를 앞세운 영국군이 밀어붙이려 했지만

독일군이 이때를 대비하여 준비한 88mm 고사포를 마틸다 전차를 향해 사용했다.

독일 전차가 한대도 참가하지 않은 이 전투는 개시된지 4분만에

영국군의 선도전차 12대 중 11대를 불사른다.

다른 공격루트인 '하피드'고개로 진출한 영국군 부대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비행기 잡는 고사포로 전차 잡는건 반칙'이라는 이야기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작전은 계속되어 3일간 이어졌지만

독일전차의 우수한 성능을 확인한 채 패전 보고를 받아야만 했다.

139127586020354.jpg

139127590999213.jpg
(독일군의 주력전차였던 3호, 4호전차.)

 

비보를 접한 런던의 전쟁지도부는 낙담했고,

누군가는 계속되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리고 6월 22일. 웨이벌 장군은 자신이 해임당했음을 통보받았고 선선히 이를 받아들였다.

"수상의 결정이 옳다. 이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 '유능한 사람'으로 클로드 오킨레크 대장이 천거되었지만

그라고 해서 이 난국을 속 시원하게 해결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쨌든 전선은 다시 예전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토부룩이 추축군 영토내에서 외로운 섬처럼 굳세게 버티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케이즈의 최근 게시물

엽기유머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