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전선(3) - 사막의 혈투.

케이즈 작성일 14.02.02 16:00:02
댓글 25조회 12,691추천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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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밌게 본 리갈하이로 시작)

 

 조금 길어진다하더라도

짱공식구들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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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아프리카에서 첫 총성이 울린지 어느덧 일년이 넘었고,

상황은 그만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웨이벌 장군의 후임으로 클로드 오킨레크 대장이 중동파견군 사령관에 부임하면서

'서부 사막군'은 12만명의 병력의 '사막의 쥐'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제8군'으로 개편되었고

'엘런.G.커닝엄' 중장을 제8군의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제8군은 이 무렵 800여대의 전차와 몰타섬에 기지를 둔 공군의 지원까지 받고 있었으니

이만하면 개전이래 어느때보다 충분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조직이 개편된 것은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는데

'제5경기계화사단'은 '제21기갑사단'으로 개칭되고, '제90경기계화사단'이 새로 창설되었다.

또한 이런 증편에 걸맞게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아프리카 장갑집단군'으로 개편되고

대장으로 진급한 롬멜은 이제 군단장이 아닌 집단군 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뛰어난 전략가인 동시에 전차전술의 달인이기도 한 '루드비히 크뤼벨' 중장이 롬멜을 보좌하고 있었다.

이런 외견상의 변화만 본다면 독일군의 전력도 상당히 강화된 듯 하였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지난 6월, 히틀러를 제외한 모두가 피하고 싶었던 소련 침공이 시작된 이후로 모든 전력이 그쪽으로 쏠려버렸고,

본국으로부터 소총한자루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독일군은 영국군과 거의 대등한 병력과 400여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탈리아군이 전체 병력의 절반을 넘고 있었고 이탈리아군의 구식전차는 거추장스럽기만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병력이 대등한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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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하자면 영국군과 독일군은 외견상으로만 대등한 병력이었고

실상은 영국군이 좀 더 좋은 전력이었다는 것.

 

상황이 이러하니 오킨레크 장군이 대규모 공세작전 '크루세이더'를 계획한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작전은 이름만큼이나 그 뜻이 분명했는데

외딴섬처럼 고립되어있는 토부룩을 구출하러가기위한 원정길이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일이 잘 풀린다면 트리폴리까지 진격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유동적인 작전이었다.

 

11월 18일 새벽, 크루세이더 작전을 개시한 영국군이 진격을 하기 시작했을 때

롬멜은 토부룩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전차를 토부룩 주위에 집결시켜두고 있었고,

덕분에 영국군은 그날 하루종일 적과 전혀 조우하지 않은채로 쾌속 전직을 할 수 있었다.

 

20일, 드디어 영국군의 의도를 파악한 독일군의 전차부대가 이를 '마중'하기 위해 쏟아져 나오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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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전차를 대하는 독일전차의 자세)

 

독일 제21기갑사단의 전차 70여대가 영국군 제7기갑사단 지휘소를 덮치고 곧 격렬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영국군이 이 전투에서 뼈저리게 느낀게 있다면 바로 전차의 성능과 전차병의 실력이었다.

난전과 육탄전을 거듭하며 치열하게 싸웠으나 독일군의 승세를 막을수는 없었고

이 전투에서 제7기갑사단의 '한니발 테일러'소위가 지위하는 '크루세이더'전차도

(어째 작전명과 이름이 같다?)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포탄을 세발이나 두들겨 맞고 그대로 전사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영국 제22기갑여단과 제4기갑여단이 급파되었지만

약간의 시차를 두고 따로따로 전선에 도착한 이들은 전황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날 하루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100대 이상의 전차와 300명 이상의 병사를 잃게 된다.

훗날 롬멜은 포로가 된 영국군 장교에게 이렇게 평함으로써 어이없는 참패의 원인을 정리해준다.

"당신들이 우리의 두배가 넘는 전차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차례차례 들이밀어 우리 전차와 1:1로 싸우게 한다면 숫적 우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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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전차와 연합군전차의 성능차이는 2차대전 내내 연합군을 괴롭힌 문제 중 하나였다)

 

이런 상황이 되니 오킨레크 장군은 기가 막혔다.

객관적으로 두배에 가까운 전력을 맞이하여 수비를 해야하는 적이 도리어 공세로 전환함으로써,

단 이틀만에 크루세이더 작전을 좌절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킨레크 장군은 이 문제를 상식선에서 냉정하게 판단해보기로 했다.

'공세로 나선 아군의 3개 기갑여단이 이만한 손실을 입었다면, 독일군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밀어부치는 쪽이 이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라. 처음 계획대로 밀고 나간다."

 

11월 24일. 복싱경기와도 흡사한 난타전을 벌인 일전일대의 격돌에서 독일군은 승자가 되었다.

독일군은 시디 레제흐 부근의 영국군을 모조리 쓸어버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날 밤 롬멜은 아내 루시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번 싸움은 아무래도 내가 이긴듯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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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빈 롬멜.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다고는 하나, 그가 내보인 전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승리를 예감한 독일군은 이 기회에 영국군을 모조리 쓸어버리기로 마음먹고 추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독일군이 처음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영국군을 밀어붙인 그것과 흡사한 양상이었다.

무질서한 패주 속에서 혼란스러운 적을 추격하는 것은 좋았지만,

예정에 없던 쾌진격을 감행한 독일군의 사정도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여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같이 달리던 롬멜이 어쩌다가 영국군의 철수대열 속에 휩쓸린 것은 작은 헤프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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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롬멜이 타고 있던 트럭. 본래 영국군에게서 노획한 트럭을 개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과감한 추격전에도 한계가 있었다.

근본적으로 영국군은 오랜 준비를 거쳐 트리폴리까지의 먼 거리를 이동할 계획을 하고 있었고,

독일군은 본래 방어를 해야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타나는 차이가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연료, 탄약, 식량과 같은 보급물자의 비축량이었다.

 

애초에 토부룩 공략을 위해서 나왔었던 독일전차들이었기에 이런 장기전에 대한 채비가 전혀 없었고

게다가 너무 멀리까지 진출해있었다.

오킨레크 장군은 이 점을 노리고 들어갔다.

직접 전선으로 달려와 시찰을 끝낸 오킨레크 장군이 평했다.

"롬멜은 승기가 포착되면 주저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는 타고난 싸움꾼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턱없이 무리를 하고 있고, 조만간 연료가 바닥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측은 정확한 것이었다.

 

독일전차들은 노획한 영국군의 연료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11월 26일, 독일군의 공세가 눈에 둔화되기 시작했고 일부 부대는 재보급을 위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보고를 듣자마자 오킨레크는 바로 반격을 가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전세는 다시 반전이 되었다.

 

11월 27일, 롬멜은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두번째로 이집트 국경을 넘었지만 다시 쫓겨나고 말았다.

오전에 진격한 길을 따라 오후에 후퇴를 하는 꼴이다.

우리를 추격해오는 영국군은 모래속에 파묻어 두었던 연료와 탄약을 파내어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 서두른 바람에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그리고 드디어, 추축군 한복판에서 굳세게 버틴 토부룩은 반년만에 아군 전선과 다시 연결되었다.

비록 엄청난 피해를 입긴 했지만1차적은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오킨레크 장군은 일단 카이로의 사령부로 되돌아가 커닝엄을 제8군 사령관에서 해임했다.

애초에 기갑부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없는 보병출신의 커닝엄에게

전차전으로 치루어지는 전투를 맡긴 것 부터가 문제였다.

후임자로는 중동파견군 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있던 '니일.M.리치'소장이 결정되었지만,

야전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오킨레크는 어차피 실질적인 지휘는 자신이 직접 할 것이었기에 이런 반대에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문책을 끝낸 오킨레크는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다.

크루세이더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번엔 적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써먹을 차례였다.

바로 승기를 잡았을 때 숨쉴틈도 주지 않고 밀어부치는 것.

이 시점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의 전차전력은 4:1로 기울어져 있었고,

전열을 정비한 영국군은 다시한번 몰아부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독일군의 사정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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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지중해입니다, 여러분.)

 

크게보면 이 아프리카의 싸움은 지중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연장선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영국군이나 독일군이나 양쪽 모두 유럽대륙에서 지중해를 건너오는 무기와 보급물자 없이는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지중해에서는 아군 수송선을 보호하고 적군 수송선을 격침시키려는 양측 공군과 해군의

필사적인 혈투가 계속되고 있었고,

1941년 하반기에는 마침내 그 승패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 지중해 함대와 몰타섬에 대한 독일공군의 집중폭격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 말은 곧 지중해가 영국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군이 아프리카 군단으로 보내는 수송선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토부룩으로부터 서쪽으로 64km 떨어진 작은 어촌에서 벌어진 전투가 그것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추축군이 건설해놓은 방어선을 공략하기 위해 영국군이 신무기를 들고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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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탱에서는 대표적인 지뢰탱이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달랐다.)

 

바로 미국제 M3 그란트전차가 그것이었다.

이 신형전차에 달려있는 75mm 주포는 독일군의 어떤 전차도 깨트릴 수 있었기에

그동안 질적 열세에 시달렸던 영국 전차병들은 이번에야말로 제 실력을 보여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12월 15일.

리치소장은 이번 기회에 독일군을 모두 해치울 심산으로 제1기갑여단을 남쪽으로 크게 우회시켰다.

그리고 이를 알아챈 롬멜은 곧바로 부대를 철수시켰고 아슬아슬하게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영국군은 맹렬한 추격을 시작하였고, 결국 독일군이 아프리카 전선에 개입하기 바로 이전 상태로

전선을 되돌리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3만명 이상의 추축군을 포로로 잡고 300대 이상의 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다.

비록 영국군의 전차손실이 비슷한 수진이긴 했지만 병력손실은 그보다 적었다.

이런 성공에 처칠 수상이 좋아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만하면 됐다. 아프리카 전선은 잠시 잊어버려도 좋을 때가 되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먼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군이 말레이, 싱가포르같은 영국 식민지에 침입했고

때문에 런던의 전시 지도부가 영국군을 위해 마련해 놓은 군수물자를 그쪽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아프리카 전쟁은 2선급 전쟁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해가 바뀐 1942년, 독일군은 모처럼 반가운 새해 선물을 받는다.

독일 해군의 U보트 잠수함들이 지중해로 진출함에 따라 '잠시 반짝' 기운을 회복한 수송선단이

신품 전차 54대를 실어다 주었던 것이다.

300대 이상의 전차가 격파된 마당에 54대의 전차가 얼마 안되는 양이긴 했지만,

영국군의 사정도 별반 다를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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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선물인 4호전차 F2형. 말 그대로 신품전차였다.)

 

더욱이 파괴력이 높은 75mm포를 장비한 4호전차 F2형은

M3 그란트 전차 덕분에 역전된 전차의 성능 격차를 다시 역전시키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 선물을 받아든 롬멜은 다시 한번 공세에 나선다.

일진일퇴가 반복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독일군이 밀어붙이는 양상이 되었으며

1942년 1월 29일, '벵가지'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독일군은 영국군이 버리고 간 1300여대의 차량과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를 노획하였고

이것은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의 목을 시원하게 축이기 충분한 양이었다.

 

노획한 영국군 군복을 입고 영국제 전차에 올라탄 독일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영국군을 밀어부쳤다.

영국군은 점점 한계를 드러내며 밀려나기 시작했고 독일군의 공세는 점점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영국군의 지휘부의 무능과 불화도 이런 패배에 한 몫을 했는데

특히 제8군 사령관 리치 소장과 13군단장 오스틴 소장의 불화는 심각했다.

결국 오킨레크 장군은 오스틴 소장을 경질시키고 고트 소장을 해당 직위로 보임시켰다.

주위에서는 쫓겨나야할 사람은 소심하고 겁이 많은 리치소장이라고 하였으나

오킨레크는 이렇게 정리하였다.

"내가 중동파견군 사령관을 맡은 이래 8군 사령관에서 쫓겨난 사람은 커닝엄 한사람으로 족하다.

이건 나와 롬멜의 싸움이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을 질 것이다."

 

가자라에서 전선이 교착된 채로 전투는 몇달간 소강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부지런히 진지강화에 돌입했는데 독일군도 마찬가지로 착실하게 공세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5월 26일, 독일군은 진격을 개시했다.

롬멜이 직접 최선두에서 지휘한 이 전투는 영국군의 제3인도여단과 3개의 기갑여단이 격파당하였다.

지뢰밭이 이탈리아 공병대에 의해 제거되는데 성공하며 바르하케임 진지가 위협당하는 순간까지도

제8군사령관 리치소장은 전혀 효과적은 대응을 하지 못했다.

뒤늦게 반격작전을 세운다며 하루를 허망하게 보낸 사이 독일군은 주 진지 정면에 큼지막한 돌파구를 뚫어버렸다.

그리고 이곳의 마지막으로 남은 부대는 자유프랑스군 외인부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대원 3600여명 대부분이 독일 출신으로 채워진 이 외인부대는

24시간이면 돌파가능하다고 예측했던 방어선을 일주일 이상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이에 롬멜이 참모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적군이 누구인가?"

"프랑스 군입니다."

"그럴리 없어. 다시 알아봐."

"틀림 없습니다. 프랑스 외인부대입니다."

"진작 외인부대로 이야기 했어야지..."

평소 이탈리아 군이나 프랑스 군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던 롬멜에게

이 외인부대는 프랑스부대와 전혀 별개의 존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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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너무 작다...)

 

6월 2일부터는 130여대의 독일 공군기까지 합세하여 폭격을 가했고

지상에서는 독일군의 폭격을 가했지만

이 프랑스 외인부대는 완강한 방어전을 펼치는 동시에 때때로 함성을 지르며 역습을 시도하기도 했다.

6월 10일, 드디어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자 철수명령이 떨어졌고

독일군이 진입했을 때는 쓰레기더미와 약간의 중상자들만 발견할 수 있었다.

2700여명의 외인부대 병력이 간반의 어둠을 틈타 독일군 포위망을 소리없이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진지를 내주었으므로 패배라고 볼 수도 있지만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외인부대는 이 비르하케임 전투를 패배로 인정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전력을 맞이하여 14일간 분전을 계속했고,

거의 손실없이 편제를 유지한 채로 감쪽같이 탈출에 성공한 비르하케임 전투는

150년에 걸친 외인부대의 역사와 자랑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자랑거리는 자랑거리이고 어쨌든 비르하케임은 함락되었고,

이는 가자라 방어선의 붕괴를 뜻했다.

독일 전차들은 북상을 계속하며 영국군 전차들을 차례로 격파시켰고,

어느덧 전차보유량에서 2:1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전장은 다시 토부룩으로 돌아오게 된다.

 

주위의 모든 지역이 추축군에게 떨어져도 토부룩이 굳세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이었다.

3면이 포위를 당하여도 바다를 통해 지속적인 보급을 받을 수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보급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이곳에서부터 영국군의 공격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였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롬멜이 이 항구도시를 지속적으로 공략하려던 이유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년반에 걸친 포위기간을 통해 토부룩의 수비는 눈에 띄게 약화되어 있었고,

오킨레크 장군도 최악의 경우에는 토부룩을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하게 된다.

처칠 수상조차 각료들에게

"토부룩을 포기해야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마지못해 내뱉었고 병사들 사이에서도 토부룩이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6월 20일. 독일군의 폭격기, 전투기 150여대가 600회 이상의 출격을 기록해가며

포탄과 기관총탄을 쏟아 붓는 것이 시작이었다.

과거의 실패를 경험삼아 보병부대가 먼저 돌격을 감행했고

제 20 이탈리아군단과 독일군은 지뢰밭을 돌파하여 진지 내부로 쇄도해 들어갔다.

치열한 백병전이 멀어졌다.

이런 육박전에서는 영연방 남아프리카 공화국 병사들이 좀 더 우세했지만,

의미없는 우세였다.

독일군 전차가 몰려들었지만 이를 격파할 대전차포는 이미 폭격에 날아가고 없었다.

이날밤 9시, 클로퍼 준장은 단 하나 남아있던 전화선을 이용해 리치소장에게 보고를 한다.

"전차는 모두 잃었고 화포도 대부분 파괴 되었습니다.

혹시 그쪽에서 반격을 계획하고 있다면 좀 더 버텨보겠습니다만..."

이틑날 아침 6시경에 도착한 리치 소장의 답신은 한심했다.

"이쪽에서는 상황을 알 수 없으므로 항복 여부는 전적으로 귀관이 판단하기 바람."

 

결국 6월 21일 오전 10시.

영국군 토부룩 수비대는 항복했다.

롬멜이 그토록 염원했던 토부룩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막대한 양의 비축물자까지 얻게 된다.

독일군의 폭격에 의하여 통신선이 절단되는 바람에

모든 물자를 파괴하라는 클로퍼 준장의 명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이것은 고스란히 독일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롬멜은 포로가 된 영국군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정말 잘 싸웠소. 마치 사자처럼. 그런데 문제는 당신들이 당나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는거요."

이튿날 히틀로에게서부터 승리를 치하하는 전문과 롬멜을 육군 원수로 진급 시킨다는 통고를 받게 된다.

"원수 계급장 보다는 차라리 1개 사단을 보내주는 편이 훨씬 좋을텐데 말이야."

비록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포상이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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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토부룩은 함락되었다.)

 

토부룩을 점령한 독일군은 하룻밤동안 재정비를 거친 후 숨돌릴 틈도 없이 이집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일년반이 넘는 혈전속에서도 카이로는 한번도 전화를 입은 적이 없었다.

일선에서 포화과 교환되고 있는 밤에도 선남선녀들이 흥청거린 곳이었고,

아름다운 이집트 무희들이 고혹적인 배꼽춤으로 부상병과 휴가병들을 기쁘게 해주던 카이로였다.

그러나 독일군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고, 카이로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러나 오킨레크 장군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제8군을 이끌고 엘 알라메인으로 철수하여 롬멜의 독일군을 맞이하였다.

7월 한달 내내 롬멜은 이 엘 알라메인에 대해 집중 공격을 퍼부었지만,

영국군은 방어와 소규모 반격을 구사하며 실로 굳세게 버텼다.

그 결과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가 휩쓸려버리는 사태는 피했지만,

이집트 영내 깊숙히 독일군이 쳐들어온 사태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했다.

그 첫번째 책임자는 오킨레크 자신이 될 것이며,

리치소장의 무능함 또한 자신이 져야할 책임이었다.

 

8월 초, 오킨레크 장군은 중동 파견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새로운 두사람의 인물이 등장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지휘했던 '헤롤드 알렉산더'대장과 '버나드 로우 몽고메리'중장이 그 사람이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평민출신인데다가 수다스러운 다혈질, 때로는 괴팍하고 매사에 파격적이던 몽고메리는

그다지 주목을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몽고메리를 제8군 사령관에 임명한 알렉산더 대장은 간단히 말했다.

"사막으로 가서, 롬멜을 쳐부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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