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전선(5) - 미군의 참전.

케이즈 작성일 14.02.04 00: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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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이채영 사진으로 시작.)

 

이 글은 세계2차대전사에 대한 흥미위주의 글이기 때문에

별로 흥미가 없으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전에도 말했지만 '알기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를 보고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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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독일의 발 앞에 무릎 꿇고 영국만이 홀로 남아

혈혈단신으로 독일과 맞서싸우고 있을때도 느긋하게 구경하던 소련이었지만

1941년, 독일군이 바바롯사 작전을 개시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서로 다른 정치 체제만큼이나 뿌리깊은 불신으로 얽힌 소련과 영국이었지만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 두 나라는 '동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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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기 전에 소련을 점령하려했던 독일. 그러나 소련의 저력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자 스탈린은 특유의 뻔뻔함으로 연합군에게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찾는 양

온갖 무기와 군수물자등의 지원을 요구해왔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스탈린의 행태에 비판여론이 일자, 처칠은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나치를 잡기 위해서라면 난 소련이 아니라 악마와도 결탁할 용의가 있다."

 

그리고 이런 물자만큼이나 강도높게 요구해왔던 것은 '제 2전선'의 개전이었다.

바바롯사 작전 개시 후, 소련을 끊임없이 압박해오는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키 위해

유럽 어딘가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시켜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본토가 불타고 있고 아프리카에서 고전을 거듭하는 영국군과

일본군과의 전쟁을 시작한 미국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이런 요구는 무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1942년 11월, 스탈린이 그토록 요구하던 '제 2전선'이 개전되려 하고 있었다.

비록 스탈린의 요청대로 '독일군의 뒤통수'가 아닌 아프리카에서였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은 영국군이 벌이던 '사막 식민지 전쟁'의 연장선이라 볼 수도 있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미군의 참전이었다.

미군의 개입으로 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이 일찍 종결된다면, 그 다음 목표는 유럽대륙이 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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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일본에게 뜻밖에 고전했던 이유....?)

 

아프리카 전선을 처음 이야기할 때 언급한 적이 있지만 북아프리카는 유럽 강대국들이 이미 '나눠먹고 있'었다.

그 중 알제리와 모로코, 튀니지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프랑스면 당연히 연합군 편 아니야?'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조금 복잡했다.

종주국인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함에 따라

페탕'원수를 국가 수반으로 하는 친독 '비시'정부가 프랑스 본토에 성립되었고,

독일은 이 정권이 자신들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조건으로 과거 식민지들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인정해준 상태였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프랑스의 땅이었지만, 그들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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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지도입니다. 싸움의 주 무대이지요.)

지도를 보면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지중해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계속가면

튀니지와 알제리, 모로코에 닿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전 편에서 대패를 한 후 서쪽으로 달아나고 있는 독일 아프리카 장갑군의 잔존병력을

영국 제8군이 추격해 올 것이므로, 트리폴리가 함락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면 독일군은 그대로 프랑스령 튀니지와 알제리로 밀려들어올 것이고,

연합군이 이곳에다 올가미를 쳐놓는다면 고스란히 소탕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연합군이 프랑스령인 이 땅에 마음대로 병력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의사를 무시하고 진입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프랑스에 대한 침략행위가 되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은 연합군과 싸워야 할 의무가 생기기 때문이다.

비록 프랑스 육군은 독일군에 의해 와해되었다지만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해군은 상당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을 지휘하는 '장 프랑소와 달랑'제독은 비시정부의 2인자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볼 때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프랑스 관리들과 군인, 시민들이 꼭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경험이 있거나 독일군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맛보았던 프랑스군 장병들에게

독일은 여전히 침략자일 뿐이며, 페탕원수의 비시정부는 '비겁한 배신자들'일 뿐이었다.

게다가 런던에 임시정부를 구성한 '드골'장군의 '자유 프랑스' 정부는

자신들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합법적인 정부이며, 알제리에 거주하는 프랑스들에게 궐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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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당시의 상황을 잘 묘사한 영화가 '카사블랑카'이다.)

 

연합군의 가장 곤혹스러운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알제리, 튀니지 해안을 지키고 있는 프랑스군을 적으로 봐야할 것인가, 아군으로 봐야할 것인가?

게다가 참전에게 미군에게 이번이 데뷔전일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를 연고로 싸워본 적이 없다는 점도 큰 문제 중 하나였다.

 

가능한 한 많은 프랑스군 장교들을 설득하려고 애썼으나, 그들의 심경도 조금 복잡했다.

연합군과 힘을 합치겠다는 장병들이 있는가하면

자신은 군인이므로 명령이 떨어진다면 연합군과 싸울 수 밖에 없다는 장병들도 있었다.

혹은 미군이 들어온다면 환영하겠지만 영국군이 들어온다면 싸우겠다는 장병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데, 과거 수백년에 걸친 라이벌 의식도 있겠지만

자신들을 버리고 본국으로 철수한 영국군을 배신자라고 생각한 프랑스군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할 때,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함대를 격침시켜버린 일도 있었기 때문)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독일 정보기관이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전혀 눈치채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또한 프랑스군의 반영감정을 고려해, 이번 상륙작전을 미군의 단독작전으로 발표하는게 낫겠다는 결론을 얻은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영-미 합동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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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기다렸던 미군이 참전했다.)

 

1942년 11월 8일 새벽 1시.

알제리 해안 6마일 해상에는 500여척의 함정과 10만7천명의 대병력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이날은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격파당한지 4일째 되는 날이며,

멀리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독일 제6군의 숨통을 끊어놓을 소련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전혀 연계성이 없어보이는 이 두 사건이 이번 상륙작전을 결정적으로 돕게 되었다.

왜냐하면 미군과 영국군의 대선단이 이동하던 도중 독일군의 첩보망에 여러번 노출 되었지만,

히틀러는 아프리카전선과 동부전선의 패배에 신경이 쏠린 나머지 그대로 흘려버렸던 것이다.

"걱정마라. 그건 몰타섬으로 가는 수송선단일 것이다. 아니면 벵가지나 트리폴리로 가는 증원병력이거나..."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의 이런 판단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

롬멜의 남은 병력을 섬멸하기 위해 트리폴리 정도에 증원병력이 상륙한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알제리나 카사블랑카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선과는 너무 동떨어져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예상하기에는 현실감이 떨어졌던 것이다.

 

곧 실전을 치뤄야할 미군에게 그들의 입장만큼이나 애매한 훈시가 나왔다.

"비버처럼 민첩하게. 퓨마처럼 용감하게 싸워라.

...하지만 저쪽에서 사격을 멈추면 제군들도 즉시 사격을 멈춰야한다."

게다가 그들이 타고왔던 구축함의 스피커에서는 프랑스말이 나오고 있었다.

"명예로운 프랑스군 전우 여러분. 우리는 미군입니다. 여러분과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병사들 입에서 실소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세상에 이 따위 상륙작전이 어디있어?"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폭음과 함께 눈 앞의 해안선이 밝아졌다.

프랑스군의 해안포대가 일제히 불을 뿜었던 것이다.

"싸움을 걸어오고 있다!"

결국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600여명 이상을 태우고 있던 영국 구축함 '말콤'과 '브로크'호는 집중포격을 맞았다.

대파된 말콤은 먼 난바다로 물러났고, 브로크는 간신히 250명의 병사들을 내려놓고 침몰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해안에 발을 디딘 병사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독일군이나 프랑스군이 주요 부두시설을 파괴하기 전에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행해보기도 전에 치열한 기관총의 탄막을 뒤집어쓰고 고스란히 포로가 되고 말았다.

"젠장, 독일군이랑 진작 이렇게 싸웠으면 우리가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거 아냐..."

그것은 나름 일리가 있는 불평이었다.

 

같은 시각, 조금 떨어진 오랑과 카사블랑카의 해안에서도 똑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랑의 상황은 특히 심각했다.

미해군 구축함 '윈니'와 '하트랜드'는 해안에 접근하기도 전에 해안포대와 프랑스 구축함의 맹포격을 받아 침몰했고,

그 바람에 안에 타고있던 승무원 전원과 상륙병 400명 이상이 전사했다.

개전 전과 비슷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던 프랑스 해군은 정말 치열하게 응전해왔던 것이다.

카사블랑카에서는 프랑스 해군 순양함 '프리모게'를 비롯한 7척의 구축함과 8척의 잠수함이

상륙부대를 내려놓고 있던 미군함대를 덮쳤다.

미 해군 순양함 '오거스타'를 비롯한 호위함들이 즉각 반격을 가했고

곧이어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

특히 프랑스 해군의 신형 전함 '장 바르'호는 매우 위협적이었는데,

35000톤의 이 거함은 미완성인채로 도크안에 묶여있었지만 4문의 38cm함포를 쏘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장 바르'호의 포격에 미 해군 전함 '메사추세스'가 함포로 응전했고,

항모 '레인저'에서 발진한 뇌격기들이 가세하여 어뢰공격을 가한 후에야 간신히 이 거함을 침묵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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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월드워쉽도 개발중이라고 합니다. 완전 기대중.)

 

프랑스의 거센 저항이 있긴 했지만,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연합군은 훈련부족과 시행착오에 따른 실수를 스스로 하고 있었다.

상륙부대의 진공에 앞서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은 전술상의 상식이었지만

이를 위해 출발한 39대의 수송기는 폭우와 안개를 만나 뿔뿔히 흩어졌고,

그 중 7대는 항법미숙으로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간신히 알제리에 도착한 수송기도 전혀 엉뚱한 지점에다 기체를 착륙시켰고,

이들 중 상당수는 곧바로 프랑스군에게 생포되었다.

 

후에 롬멜 이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될 '조지 S.패튼' 소장도 바로 이곳에 있었는데,

겁에 질려 쩔쩔매고 있는 미군들의 모습과 침착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영국군 병사들의 모습은

패튼 소장의 자존심을 긁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는 직접 해안에서 병사들과 함께 장비를 밀어올리는가 하면

지휘봉을 휘두르며 특유의 걸쭉한 입담과 욕설로 부하들을 독려했다.

 

이런 해안의 사정과 마찬가지도 내륙의 사정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적전반란을 일으키기로 되어있었던 반 비시파 장교들이 포성과 동시에 행동을 개시해

방송국과 주요시설을 장악했지만, 날이 밝을 때까지도 미군은 도착하지 않았고

날이 밝자 몰려운 비시파 부대에 간단히 제압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 적전반란의 주모자였던 마스트 장군은 체포되기는 커녕

동분서주 뛰어다니며 예상외로 너무 잘싸우고 있는 부하들을 뜯어말리기 바빴다.

"사격중지! 쏘지마라! 미군은 우리의 친구다! 우리의 적은 미군이 아니라 독일군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시간이 갈수록 프랑스군의 저항이 점점 약해져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세가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변해가자, 그때까지 애매한 입장을 취하던 '달랑'제독이 결정을 내렸다.

휘하의 장교들에게 자발적으로 연합군에 대한 전투를 중지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전선에서는 프랑스군의 항복이 잇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전선은 혼란상황으로,

미군을 향해 사격을 계속하는 포대가 있는가하면,

물에 빠진 미군을 구하기 위해 총탄이 빗발치는 바다로 뛰어드는 프랑스 병사도 있었다.

미군을 환영하는 꽃다발과 포도주를 몰려나온 시민들이 있는가하면,

그 다음 블럭에서는 고립되어있던 프랑스군의 총격을 받는 등,

혼란상태가 한참동안이나 계속되었다.

 

11월 11일 오전 6시 48분.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프랑스군의 총소리가 카사블랑카 해안에서 멈췄다.

최후의 순간까지 추축군과 연합군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달랑 제독은 협상 테이블에 나섰고,

달랑제독의 휘하에 있던 20만 프랑스군이 절실히 필요했던 연합군은 협상에 응한다.

위기를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했던 달랑제독은 한달 뒤, 그 댓가를 치룬다.

어느 프랑스 청년이 이 해군 제독의 뒤통수에 총을 쏘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협상과는 별개로 독일군의 새로운 10개사단과 이탈리아군 6개사단이 리비아-알제리 국경을 넘어

연합군이 미처 점령하지 못한 알제리와 튀니지 내륙의 대부분 지역을 선점해버린다.

연합군으로서는 이벤트경기를 마치고 진짜 적과 메인매치를 치뤄야하는 순간이 그만큼 빨리 닥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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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에게 상륙작전은 딱 이 표현대로였다.)

 

히틀러는 그제서야 눈앞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영, 미 연합군이 알제리와 모로코 해안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을 때 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알제리를 장악한 연합군이 튜니스와 비제르테 항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튜니스는 튀니지의 수도이며 리비아의 트리폴리로부터는 '다음 정거장'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만일 이곳이 점령된다면 다음 시나리오는 뻔했다.

패퇴하고 있던 롬멜의 아프리카 장갑군이 제 8군과 이 사이에 포위되어버린다면

추축군은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모든 거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튜니스 항구는 아프리카 전역을 통털어 가장 크고 훌륭한 항구이며,

유럽대륙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튜니스로부터 이탈리아 반도의 최남단 시실리 섬까지 거리는 불과 120km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연합군은 유럽대륙을 향한 발진기지로 아프리카를 선택한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프리카 전선의 중요성이 새삼 히틀러의 뇌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11월 9일. 히틀러는 부랴부랴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를 비롯한 공군 전투비행대를

튜니스의 '엘 아오이나'비행장으로 급파했다.

연합군이 아직도 오랑과 카사블랑카 해안에서 허우적거리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이 새로 파견된 항공기중에는 신형전투기 'FW-190 포케불프'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와 함께 지상군도 수일만에 15000명 이상으로 급속히 불어났다.

이만한 장비와 병력이 보름만 일찍 롬멜에게 보내어졌다면 엘 알라메인의 전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아프리카 전선은 모래바람과 끝없는 모래의 대양으로 상징되는 서부사막을 무대로 한 제 1라운드를 끝내고

맑은 물과 종려나무가 우거진 '그린 아프리카'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튀니지에서 제 2라운드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새로 파견한 독일군의 주력은 '위르겐 폰 아르님'대장의 제 5장갑군으로,

롬멜은 이 새로운 부대와 아프리카장갑군을 통합한 '아프리카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서열이나 직책상으로는 당연히 폰 아르님 대장이 롬멜의 지휘를 받아야하지만,

롬멜의 부대는 사실상 괴멸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고, 자신은 러시아 전선에서 이제 막 전출 온 입장이었다.

게다가 프로이센의 명문 귀족출신이었던 폰 아르님은 평민출신에 대패를 당한 롬멜을 은근히 백안시하였고,

이는 얼마 뒤에 두 장군 사이에 불화를 조성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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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끼리 불화가 생기면, 고달파지는건 부하직원이다.)

 

독일군이 속속 증강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연합군도 튜니스를 향한 진격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 작전을 위해 새로 개편된 영국 제 1군은 그 이름과는 달리 절반 이상이 미군 기갑부대로 구성된

영-미 혼성부대로, 그들의 주력전차는 M3 스튜어트 경전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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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빈약한 장갑에 고티어방에 끌려다닌다는 바로 그 경전차입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군 사령관 '케네스 엔더슨'중장은 튀니지의 험한 지형을 가리켜

"이런 땅을 싸움터로 골라잡은 우리도, 독일놈들도 똑같이 미쳤다."

라고 툴툴거리며 부대를 이끌었고, 11월 16일에는 튜니스 남서쪽 130km지점인 철도 종착역 '엘 아르바'에 도착했다.

바로 여기서부터 모래밭대신 푸른 초원과 거친 바위산이 끝도없이 이어진 산악지대가 시작된다.

포도밭과 굽이진 협곡은 독일군이 대전차포를 설치하고 기다리기 더없이 좋은 지형일 뿐만 아니라,

절벽 위에서 쌍안경 하나만 있으면 아군의 동향을 한눈에 관측할 수 있는 곳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튜니스를 상륙지점으로 삼지 않았나'라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발길을 재촉하던 영국 제 1군은

2차 세계대전사를 통털어 가장 희귀한 에피소드로 기록될 전과를 올리게 된다.

 

11월 25일, 패튼 장군의 사위이며 미군의 최선두 전차대장인 '존 K.워터스'중령은 좀 기묘한 상황에 직면한다.

'지네이다'라고 부르는 작은 언덕위로 올라가자, 독일군이 새로 건설해놓은 비행장과 함께

메사슈미트, 포케볼프 전투기들이 활주로에 줄지어 서있었다.

17대의 미군전차들이 그자리에 멈춰서서 주변을 관찰했지만, 대전차포 따위는 없는 것이 분명했고

경비조차 허술했다.

결국 30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에 이 비행기들은 전차포에 격추당했고,

2차 대전기간을 통털어 전차부대가 공군 전투비행대를 궤멸시키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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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행운이 됩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이 전차부대는 처음으로 독일군 전차부대와 조우한다.

워터스 중령은 독일전차들을 보고 그것이 일종의 구난전차

(퍼지거나 고장난 전차를 정비소까지 끌고오는 전차)라고 생각했다.

포탑 앞쪽에 길다랗게 돌출된 강철제 붐(Boom)은 그가 알고있는 M3구난전차에 설치된 크레인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미군의 M3경전차들이 전투에 유리한 위치를 찾던 도중 그 '구난전차'로부터 제 1탄이 날아왔다.

워터스가 구난전차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긴 포신의 75mm주포를 갖춘 독일군의 4호 전차였고,

미군 전차는 순식간에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좀 더 덩치가 큰 'M3 리' 중형전차가 달려왔지만,

이들 역시 독일전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황급히 퇴각하는 미군의 등뒤에는 12대의 전차가 불타고 있었고,

독일군은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을 뿐 대파된 전차는 한대도 없었다.

미군은 첫 실전에서부터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있었고,

"우리는 앞으로 독일놈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던 패튼의 생각은 옳았다.

 

계절은 어느덧 12월로 접어들며 우기로 접어들게 되었고

포장도로처럼 단단하게 굳어져있던 황토길과 자갈밭은 깊은 수렁으로 변했다.

전차의 기동이 불가능해진데다 보급품의 추진마저 어려워지자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개이면 어김없이 접전이 일어났지만, 그나마도 대부분은 소규모 보병전투였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오전 10시,

미군 제 18보병연대와 영국군 콜트스트림 근위연대는 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뒤로하고

제벨아메라 언덕에서 철수한다.

전날 현지를 방문하여 병사들의 악전고투를 직접 시찰한 아이젠하워 사령관이 후퇴를 명령했던 것이다.

"괴로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똑같이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공격하는 우리에겐 시련이지만 방어하는 추축군에겐 더없이 좋은 현상이 아니겠는가.

그런 폭우와 진창속에서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전혀 무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합군의 튜니스 진공계획은 결국 연기되었다.

그리고 유럽을 향한 아프리카의 전초기지를 확보하고 독일놈들을 아프리카에서 쓸어버리는 일은

아무래도 해를 넘긴 1943년에야 다시 시작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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