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항공전 (1) - 다가오는 위협.

케이즈 작성일 14.02.15 20: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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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계2차대전사에 대한 흥미위주의 글이기 때문에

별로 흥미가 없으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알기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를 보면서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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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 절판되었다는건 함정. 남은 재고로 팔고있다는건 안함정)

 

오늘부터 올릴 이야기는 연합군과 독일군간의 항공전.

이야기는 '덩케르크 철수작전'직후로 시작됩니다.

몇번이나 언급되는 '덩케르크 철수'가 뭐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까봐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독일이 한창 기세를 올리며 유럽을 정복해나가고 프랑스까지 집어삼키려할 때

영국이 뒤늦게 파견군을 보냈지만, 전력/장비의 열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본국으로 철수한 작전입니다.

워낙 긴박한 작전이었고, 변변한 장비조차 없었기 때문에 일촉즉발의 철수작전이었고,

때문에 그만큼 굴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독일군이 유럽에서 득세하는 과정을 다 써야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이정도로만 요약하고 시작하겠습니다.

 

---

 

1940년 6월 5일의 이른 아침.

두 사람의 독일 공군 장성이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을 거닐고 있었다.

해안에는 철수하는 영국군이 버리고 간 온갖 잡동사니들로 뒤덮여 있었다.

철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타고 온 자전거로부터 무전기, 야포, 소총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바다로 뛰어들기 위해 병사들이 벗어던진 수천 켤레의 군화와 군복, 장비들이 바닷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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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했고 처절했던 철수작전의 이면에는 이해할 수 없던 히틀러의 공격중지 명령이 있었다.)

 

두 장군중의 한 사람 '호프만 폰발다우' 공군 참모 총장이 쓰레기장처럼 변해버린 해안을 보며

경멸이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이 곳은 영국이 이 전쟁에 걸고 있던 희망의 무덤이다!"

그리고 발 아래 걸리적거리던 것을 걷어차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 묘비인 셈이지."

그러자 또 한사람, 공군 감찰 총감 '에르하르트 밀히' 상급대장이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을 모두 땅속에 묻어버린 건 아니지요."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철수작전이 끝난 후 해변에서 발견된 영국군의 시체가 채 50구도 되지 않았다.

그 말은 22만 4천여명의 영국군이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은 채로 무사히 철수했고,

약 12만의 프랑스군까지 고스란히 데리고 철수한 그들이 지금 자기네 나라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두 장군은 아침 안개가 자욱한 영불해협 저쪽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아직 어떠한 전쟁에도 져본 일이 없는 나라, 사자의 나라...

영국이 있었다.

 

1940년 4월부터 6월까지 독일군은 서유럽 6개국을 휩쓸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가 바로 그 대상이며

이 전쟁이 시작된 1939년부터 따진다면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가 여기에 더해져

독일에 의한 희생자는 모두 9개국에 이른다.

특히 그 중에서도 모두가 '위험한 야수'를 길들일 수 있다고 믿었던 프랑스의 항복은 믿을 수 없는 충격이었고,

이제 유럽에서 독일과 맞서 싸울 나라는 단 하나, 영국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물론 영국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중립국 스웨덴의 구스타프 5세 국왕은 처칠 수상에게

'아무래도 독일과 강화를 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뜻을 전해왔고,

그때까지도 중립주의를 표방하던 미국 의회에서조차

장차 영국이 함락되면 영국 난민들을 미국과 캐나다에 이주시켜 살게해줘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프랑크 총통은 마드리드 주재 영국대사에게 이런 모욕적인 권고를 던지기도 했다.

"당신네들은 어쩌자고 독일에게 항복하지 않는거요?

당신들이 히틀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질질 시간을 끌면 결국 유럽문명의 파괴만을 불러올 뿐이고,

그 책임은 독일이 아니라 당신네들에게 있어요."

 

하지만 의외로 독일군은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히틀러는 원래 전사로서의 프랑스인의 재능을 지독히도 경멸했던 반면에

영국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후한 점수를 매기고 있을 뿐 아니라,

내심 그들을 약간 두려워하고 있던 사람이다.

크게 보면 같은 게르만 민족의 범주에 속하는 영국인들은 독일인과 유사한 특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강인할 뿐 아니라 합리적이고, 또 무엇보다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히틀러는 이런 영국인들이 조만간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라 믿었고,

그 때문에 영국에 대한 공세를 계속해야 한다는 장군들의 주장을 억누르고 있었다.

"기다려봐. 영국인은 합리적인 민족이야. 전면적인 파멸이 예정된 선택을 하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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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눈에 영국은 사자가 아닌 고양이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 수상은 덩케르크 철수가 끝나던 1940년 6월 18일의 대국민 성명을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유럽 대륙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또한 전시 내각의 지휘소로 사용되고 있던 런던 '화이트 홀'의 지하 회의실 의자 앞에서

각료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이 방에서 이제부터 내가 전쟁을 지휘하겠소."

그리고 의자에 앉으며 덧붙였다.

"만일 런던이 점령된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여기서 끌어내려야 할거요."

 

처칠의 이런 선언은 단순히 선언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본토 결전을 앞두고 영국 국민들이 일치단결 했다.

해안지방의 주민들은 1차대전에 참전했던 퇴역 장교들의 지휘아래

구식 소총, 엽총, 혹은 낫과 같은 농기구를 들고 나와 해안선을 경계했다.

'영국의 정원'으로 불리던 아름다운 전원지대 '켄트'와 '서섹스'주의 해안선에는

날마다 지뢰가 묻히고, 참호가 패이고, 철조망이 솟아 올라갔다.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는 밤마다 엄격한 등화관제가 실시되었다.

가로등이 모두 꺼진 밤이 계속되자 교통사고율이 치솟았다.

또한 독일군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도로표지판도 모두 떼어버린 곳이 많아졌다.

 

게다가 징집된 성인남자들을 대신하여 여성들이 나섰다.

우편 배달을 비롯한 전신, 전화, 앰블런스 운전같은 일에서부터

소총과 포탄을 만드는 군수 공장들의 생산까지 여성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부족한 무기재료를 보충하기 위해 대대적인 고철수집운동이 벌어졌고,

주부들은 앞다투어 스푼이나 냄비같은 주방기구까지 헌납함으로써 모두가 위기에 발벗고 나섰다.

그런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단 하나 - 바로 시간이었다.

지금 유럽 본토에서 독일군이 미적대며 허비하는 하루는

영국에게 있어서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24시간이었고,

그들은 독일군과의 간극을 메꾸기 위해 밤새도록, 혹은 탈진할 때까지 일하고 또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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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중순이 되자 히틀러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기대와 달리 영국군들은 항복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대신 굳건히 일치단결하여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마침내 7월 16일, 히틀러가 결단을 내렸다.

베를린의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히틀러는 운집한 군중과 외교사절들을 향해 엄숙히 선언했다.

"영국인들에게 명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했던 본인의 노력은 끝났다.

영국은 자신들이 선택한 어리석은 결정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향해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하기에 앞서

그 의지를 이처럼 명백하게 천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 넘쳐흐르는 독일군의 힘을 온세계에 과시하는 것이었으며,

더할 수 없이 확고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9월 15일을 기해 70만의 독일군병력을 테임즈강 하구에서부터 브라이튼에 이르는

320km의 영국 남부해안에 상륙시킨다는 작전이 세워졌고,

이 작전에는 '라이온:사자'라는 암호명이 붙여졌다.

하지만 사자는 너무나도 유명한 왕국왕실의 상징이므로 작전의 의도가 너무 뻔히 드러난다고 하여

곧 작전 명칭이 '시 라이온:바다사자'로 변경되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독일이 영국에 대해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감행하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뻔히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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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도 그게 그거...근데 이건 무슨 만화일까.)

 

독일 공군은 제 2 항공군과 제 3 항공군을 베네룩스 제국과 북프랑스로부터

프랑스 해안지대의 각 기지로 이동시켰다.

런던 상공까지 불과 한시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기지였다.

또한 얼마 전까지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병영의 빈 막사는 건장한 독일군 병사들이 내뿜는 땀냄새로 가득찼고,

해변에는 상륙용 주정들이 산더미처럼 야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북새통 속에서도 그 모든 것에 대해 불안한 눈길을 던지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독일 해군 참모총장 '에리히 레더' 제독은 이 작전에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서 순식간에 바다위를 건너갈 수 있다고 해도,

한 나라를 집어삼키는 데 필요한 70만 이상의 병력들을 모두 비행기로 실어날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궁극적으로 영국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해상봉쇄를 통해 전세계에서 영국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모든 전쟁물자의 유입을 차단해야하는데,

독일 해군은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멋지게 죽는 것 밖에 없다'고 할만큼

빈약한 전력으로 시작했고, 그나마도 얼마전의 노르웨이 해전에서 거의 회복이 불가능할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그에 반해 여전히 세계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해군을 가지고 있는 영국은 본토결전이 시작되는 순간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그 강력한 함대를 영불해협으로 불러모을 것이고,

독일 해군은 도저히 그들과 정면으로 맞설만한 힘이 없었다.

게다가 독일 육군의 지휘관들 사이에는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본토로 상륙하는 일을

좀 규모가 큰 도하작전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안일한 분위기가 넘치고 있었다.

내륙의 육군강국인 독일의 지휘관들은 바다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으며,

독일군은 본격적인 상륙작전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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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도 똑같이 안일한 생각으로 디에프 상륙작전을 펼쳤다가 치명타를 입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레더 제독의 고민은 허영심 강하고 욕심많은 어느 사내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되게 된다.

바로 독일 공군 총 사령관 '헤르만 빌헬름 괴링'원수였다.

그는 1차대전 당시에 전투기 조종사로 22대의 적기를 격추하여 명성을 떨친 에이스였다.

게다가 이 무렵에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독일의 2인자로 부상해 있었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우선 영국공군을 완전히 일소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열렬하게 설득했고,

상식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의견이었다.

그는 대대적인 공습작전과 함께 육군 10개 사단과 해군에서 차출된 함대를 자신의 휘하로 배속시켜주면

그것으로 영국 본토를 점령해보이겠다며 호언장담했다.

이 말은 해군참모총장인 레더 제독과 육군총사령관인 '발터 폰 브라우치히'원수의 자존심을 긁었지만

그 대신 이 작전의 책임도 모두 괴링이 지게 될 것이고,

만약 영국 공군을 일소하는데 실패하게 된다면 상륙작전은 전면적으로 취소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레더제독 입장에서는 꽤나 괜찮은 의견이었다.

 

또한 이 당시의 독일과 영국의 항공전력을 비교해보면 괴링이 이처럼 큰소리를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서부전선 개전 당시 프랑스에 파견되어있던 영국 공군기는 최초 3일간의 격전 속에서 232대가 격추된 것이었다.

게다가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지원하다가 106대의 비행기와 75명의 조종사를 추가로 잃게 되면서

'시라이온' 작전이 계획되던 6월 초순 무렵 영국 공군에는 단지 466대의 실전기와

36대의 예비기체가 남아있을 것이라는 것이 괴링의 계산이었다.

또한 이에 반해 독일 전투기 군단에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조종사들이 즐비했으므로

이 싸움의 결말은 누가 보더라도 뻔한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히틀러의 입에서 영국 해군과 공군을 '소멸시켜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작전의 명칭은 '아들러 안 그라프', 독수리 작전으로 정해졌고,

날짜는 8월 5일 이후 라고만 명시되어 있었다.

날짜가 명확하지 않았던 이유는 날씨에 영향을 받는 공군의 특성 때문이리라.

물론 여기에는 '가능한 48시간 이내에'라는 단서 또한 달려 있었고,

이런 정보는 당연히 영국 정보기관에도 포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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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해군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력이 영국군을 압도하고 있었고, 공군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괴링은 소원대로 전쟁을 도맡게 되었고, 자신의 예하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바다사자 작전이 개시되는 9월 15일까지 영불해협과 영국 상공에서

단 한대의 적기도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바야흐로 인류사상 최초, 최대 규모의 '공군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신만만한 괴링이 놓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군을 향한 포문을 열기까지 두달이 지나가버렸고,

그 두달동안 모든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영국에는 괴링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충분할만큼 유능한 두 사람이 있었다.

새로 군수성 장관에 취임한 '비버브룩'경이 그 한사람으로, 그는 조만간 영국 전토를 휩쓸게 될 폭풍이

하늘로부터 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공습을 저지하는 것에 조국의 존망이 달렸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한 그는

영국이 가진 모든 생산 능력을 전투기 생산에 집중시켰다.

특히 신예 전투기 '스핏 파이어'에 걸고 있는 기대가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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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전투기에 대항하기 위해 개발된 신예기, 스핏 파이어.)

 

게다가 여성노동자들로 구성된 생산 능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들은 매일 24시간, 주 7일간 꼬박 생산한 결과

덩케르크 철수 이후 한달동안 무려 446대의 전투기를 생산해 내었던 것이다.

이것은 같은 기간동안 독일 노동자들이 생산해 낸 전투기의 숫자보다 최소 100대가 많은 것으로,

이후 종전할 때까지 영국의 항공기 생산능력은 독일을 꾸준히 능가하게 된다.

 

영국이 가진 또 다른 능력자는 전투기 전대 사령관 '휴 카스웰 다우딩'대장이었다.

1차 대전 조종사 출신으로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고집쟁이 영감'이라고 불리던 다우닝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다.

프랑스 전선이 위험에 빠졌을 때, 영국이 가지고 있는 전투기를 모두 프랑스 전선으로 보내어

우방국에 대한 신의를 과시해야한다는 처칠의 주장을 꺾은 것도 그였다.

"쓸모없는 낭비입니다. 지금은 조만간 우리 앞마당에서 벌어질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전투기를 아껴 두어야 할 때입니다."

 

고집이 세기로 말한다면 처칠도 못지않은 사람이었지만 다우닝의 주장은 결국 관철되었고,

영국공군이 지금의 전력을 이만큼이라도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순전히 다우닝의 공로였다.

또한 그는 공군의 근대화와 '미래 전쟁'에 대비한 전술을 개발하는데도 열심히였다.

일례로 스핏 파이어 전투기의 캐노피 전면에 방탄유리를 달아달라는 그의 요구에

정부 각료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들며 난색을 표하자, 이렇게 일갈했다.

"시카고의 갱들도 방탄유리가 달린 차를 끌고다는 판인데, 우리 조종사들이 그놈들보다 못하다는 말입니까?"

 

이처럼 괴링의 계산과 달리 독일 공군과 영국 공군의 격차는 빠르게 메워지고 있었고,

게다가 영국군은 독일군보다 더 우수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바로 레이더였다.

영국을 한바퀴 둘러싸는 거대한 레이더 경보망은 개전 이전인 1936년부터 건설 시작되었고,

이 무렵에는 이미 240km밖에서 다가오는 독일 항공기 편대의 규모와 기종을

거의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한편 독일은 레이더를 해군 함정에 설치하여 적 함대를 조기 경보하는 시스템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노르웨이 해전으로 독일 함대가 사실상 소멸해버렸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별로 쓸모없는 노력이었다.

 

덩케르크 철수 이후의 두달동안 독일공군이 얌전히 있었냐,고 한다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작전개시 명령이 떨어지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있던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은

영불 해협을 오가는 모든 선박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에서 작은 조각배 한 척이 발견되었다는 정보만 입수되어도 벌떼처럼 출격했다.

그러면 영국 남해안의 '호킹'이나 '텡미어'기지로부터 영국 전투기가 날아오기 마련이었고,

독일 공군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연습게임을 통해 영국 전투기의 성능과 조종사들의 기량을 테스트하는 한편으로

자신들의 신참 조종사들에게 실전 경험을 주는 기회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영국 조종사들은 본토 결전을 대비하여 가능한한 전력을 온존하게 보존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고,

때문에 이런 싸움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폭격기를 미끼로 영국 전투기를 유인해내기도 했다.

He-111 폭격기는 속력이 느리고 민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이 눈에 띄면

영국군의 '허리케인'전투기가 달려나올게 뻔했고,

그러면 구름 속이나 태양을 등진 채로 강력한 태양빛 속에 은신하고 있던 Me-109가 덮쳐든다는 계략이었다.

이처럼 독일 공군은 영국 조종사들을 지속적으로 유인해내었고,

다우닝 장군은 이런 일선 조종사들에게 쉴새없이 다그쳤다.

"살아 남아라! 죽어버린 영웅은 필요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서 비행기를 띄울 수 있는 조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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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과 맞붙었던 Me-109)

 

영국 남부해안의 주민들에게는 양군의 전투기가 바다 위에서 으르릉대며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장면이 낯익게 되었다.

런던 '킹즈크로스'역 광장의 신문팔이 소년들은 마치 축구시합의 스코어처럼

그 날의 전적을 큰소리로 외치며 신문을 팔았다.

"오늘의 전적은 12 대 0 입니다."

독일 전투기 12대를 격추시키고 영국 전투기는 한 대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지만,

진실은 조금 달랐다. 이 무렵의 전과는 평균 10 : 6 정도로 독일군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다만 이런 연습 게임을 통하여 발견한 사실이 있다면

신예기인 스핏파이어가 Me-109에 전혀 뒤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능가할 만큼 우수한 기체라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었다.

'햄프셔'고원 상공을 비행하던 독일 공군의 에이스 '아돌프 갈란트'소령은

발 아래쪽을 날고있는 스핏파이어 한대를 발견하고

그 만만한 먹이를 향해 급강하했다.

하지만 그를 발견한 스핏파이어는 갑자기 우측으로 90도 이상 급선회했고,

갈란트는 결국 목표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Me-109의 설계자들이 소형, 경량에서 오는 높은 운동성을 추구한 결과

기체의 구조적 강도를 상당히 희생시켰기 때문에,

Me-109로 그런 급선회를 시도하다가는 당장 주익이 꺾여버릴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지로 돌아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동료 에이스 '베르너 뮐더스'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구석에 몰려있던 뱀장어가 몸을 꿈틀하면서 손아귀를 벗어나버리는 것 같았다.

영국 공군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이고, 스핏파이어는 특히 무서운 전투기다."

 

이런 난전 속에서도 영국의 전투기 생산량은 꾸준한 증가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정작 조종사는 부족한 상태였다.

보통 80~90시간의 비행훈련을 받으면 조종사 자격을 얻게 되지만,

이런 조종사들이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기량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었다.

적어도 200시간 이상의 훈련을 쌓아야만 실전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할수 있다는

공군 장관 '아치볼드 싱클레어'경의 설명에 처칠 수상의 기술 고문 '프레드릭 린드만'교수가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가 너무 높은 훈련 수준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전투 기술은 실전 전투부대에서 쌓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착륙과 수평비행을 겨우 익힌 신참들에게 독일군의 쟁쟁한 에이스를 상대하라는 이야기였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안은 그대로 통과되어 조종사 훈련기간이 3개월에서 1개월로 단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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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담보로 실전에서 교육하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통과될 정도로 영국은 절박했다.)

 

1940년 7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영불해협 상공의 공중전은 점점 규모가 커져갔다.

7월 10일에는 '헬파이어 코너의 대회전'이라고 알려지게 되는 대규모의 접전이 벌어졌고,

이 전투는 장차 다가올 숙명적인 일전을 앞둔 양군 모두에게 나름대로 의미있는 교훈을 남겨주게 된다.

 

이날 영국 남부 해상에는 강풍과 함께 잿빛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정기적인 해협상공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독일 정찰기가

영국 수송선단이 6대의 허리케인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서쪽으로 항해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실은 즉시 깔레 해안에 자리잡은 무선 송신소를 거쳐 독일 공군 총사령부로 보고되었고,

수 분후에는 깔레마르크 전투기 기지로 명령이 하달되었다.

"해치워버려라."

오후 한시가 조금 지났을 부렵,

도버해안의 바위절벽 위에 설치된 영국군의 레이더에는 수많은 흑점들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숫자를 세던 레이더 조작병 '피터 페이지'하사의 입이 벌어졌다. 무려 70대였다.

영국 전투기전대 사령부로부터 급전이 날았다.

"부근 상공을 비행 중인 모든 전투기는 즉시 전투지역으로 합류하라."

4개 중대의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가 현장으로 달려갔고,

70대의 독일 전투기와 54대의 영국 전투기가 도버 해협 상공에서 뒤엉켰다.

 

많아야 1~2개 편대규모의 가벼운 조우전은 흔히 있었지만, 이런 대규모 공중전은 처음이었고

이 전투에서 독일군 4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그에 반해 영국군은 3대가 격추되었지만, 이 날의 전투결과는 양측에게 만족할만한 교훈을 남겼다.

영국군은 독일군의 전투기가 프랑스의 기지를 출발할 때부터 그 댓수까지 정확히 포착해낼 만큼

레이더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고,

또한 각기 다른 기지에서 출격한 비행대가 신속하게 한 지점에 집결하여

공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반면 독일군은 적기가 50대나 몰려나왔다는 자체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영국 전투기를 많이 유인해 낼 수 있다면 그만큼 더 빨리 섬멸할 기회가 오기 때문이었다.

 

이날 이후 도버 해협 상공의 공중전은 점점 더 규모가 커져갔고,

테임즈강 항구를 빠져나오는 수송선의 왕래가 빈번한 이 해역 일대에는 '헬파이어 코너'라는 별명이 붙었다.

약 열흘간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50대의 전투기를 잃었지만, 대신 92대의 독일기를 격추시켰다.

숫자상으로는 영국군의 압승이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독일기의 손실은 주로 급강하 폭격기 JU-87 슈투카에 집중되어 있었고,

Me-109 전투기의 손실은 28대에 불과했다.

요컨데 급강하 폭격기를 미끼로 쓴 것이었다.

이 힘겨운 싸움을 치루는 동안 영국 조종사들은

독일 조종사들이 자신들보다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자신들의 영국 공군의 전술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발견해내었고,

영국 공군의 거듭된 실패는 그들의 낡은 편대 전술에 원인이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결국 의족을 단 장애자 에이스로 유명한 제 242 전투비행대장 '더글라스 베이더'같은 장교들의 주장으로

이 낡은 전법에 손질이 가해지기 시작했고,

영국 공군의 손실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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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가 기존에 사용하던 전술, 위에가 손질된 전술인 '핑거 포')

 

도버 해협의 상공에서는 거의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공중전이 벌어졌고,

격추된 양군의 조종사들이 바다위로 떨어졌다.

이 조종사들을 구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는데,

독일군은 적십자마크를 그려넣은 수상비행기로 자국 조종사들을 구해내었다.

그러나 영국군 조종사도 구조하여 포로로 잡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결국 이들도 영국기의 표적이 되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주로 작은 조각배나 모터보트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아군 조종사는 구해내고 독일 조종사는 익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교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벌어지는 교신 내용은 기지의 관제탑에서 수신할 수 있고,

공군부인 보조부대의 여성대원들이 있는 상황실에도 중계된다.

상황실 안은 항상 조종사들이 내지르는 쌍스러운 욕설과 비명으로 가득찼지만,

그녀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일을 수행해 내었다.

"이 전쟁이 끝날 때 쯤이면 우리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저런 말들이 나오게 될거야."

 

자주 벌어지는 교전만큼 조종사들에게 가해지는 부담도 커져갔다.

영국 조종사들의 평균 수명은 비행시간으로 따져 87시간에 불과했고,

살아있는 대부분의 조종사들도 피로로 인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기지로 생환한 조종사들이 완전히 탈진하여 조종간을 손에 쥔채로 깊은 잠속에 빠지는 것도

흔한 일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긴박하게 흘러가는 와중에도 괴링이 선언한 그날-

8월 10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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