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항공전 (2) - 격전의 상공.

케이즈 작성일 14.02.16 23: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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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괴링에게 하달한 '작전명령 제17호'는 다음과 같다.

1. 영국공군과 영국의 방공체제를 최단 시일내에 완전히 파괴할 것.

여기에는 항공기만이 아니라 비행장 및 항공관련 보급설비,

그리고 항공기와 기타 방공장비를 생간하는 공업시설까지 포함된다.

2. 영국의 전 항만시설을 파괴하라.

단, 상륙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우리 독일군이 사용하게 될 시설은 잘 선별하여 파괴대상에서 제외하던가,

혹은 단기간에 복구, 수리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공격을 제한하라.

3. 모든 독일공군 장병은 시 라이온 작전의 성패가 귀관들의 어깨에 달려있다는 사명을 명심하여

열과 성을 다해 가능한한 신속하게 이 임무를 완수하라.

4. 적국의 수도 런던은 이상의 명령에서 제외한다.

 

그러나 괴링으로부터 이 명령서를 받아든 독일 제2항공군 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원수는

네번째 단서조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의 전력을 집중해서 런던을 두들겨패야

견디다 못한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항복해 올게 아닙니까?"

히틀러는 아직도 영국인들이 '품위있게 항복할 기회를 주자'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게 분명했다.

하지만 괴링을 상대로 히틀러의 판단착오를 지적하는 것은 주먹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를게 없었고,

결국 툴툴거리며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8월 8일 아침, 영국의 다우닝 대장도 부하들에게 훈시를 했다.

"조국의 운명을 건 결전이 시작된다.

이 싸움은 헤이즈팅스의 전투보다도 격렬하고, 트라팔가의 해전보다도 더욱 장렬한 것이 될 것이다.

영국의 운명은 오직 이 자리에 있는 제군들의 어깨에 걸려있다."

그리고 이 말을 보증하기라도 하듯, 전투가 개시된 이래 가장 대규모의 공중전이 이날에 벌어진다.

햄프셔와 서섹.스, 켄트주에 산재한 모든 영국군 기지에는 하루종일 적기의 내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고,

이날 양군은 1000회 이상의 출격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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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케셀링)

 

원래 항공기의 전력을 평가하는 방식은 지상군과는 좀 달라서,

단순히 비행기의 숫자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총 출격횟수를 따진다.

100대의 비행기가 10번 출격했다고 하면 통산 1000회 출격이 되는 것이고,

이것은 사실상 500대의 비행기가 2번 출격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된다.

이런점에서 볼때,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영불해협을 건너와야하는 독일공군에 비해,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영국기들은 훨씬 더 빈번하게 출격할 수 있고,

양군이 비슷한 출격횟수를 기록했다면 그것은 사실상 독일군이 최소한 두배이상의 항공기를 동원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영국공군에게는 이른바 '홈그라운드'의 이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우위는 이날의 전투에서도 보여졌는데,

독일기 31대 격추, 영국기 19대 상실이라는 전과가 그것이었다.

다우닝 장군은 이날의 대접전을 두고 독일군의 독수리 작전이 개시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8월 10일. 아들러 안 그라프 작전의 개시일이 되자 고약한 악천후가 시작되었다.

하루종일 소나기가 내리고, 두터운 비구름이 잉글랜드 남부를 뒤덮은데다가,

영불해협에서는 사나운 폭풍마저 일어났다.

이런 나쁜 날씨가 몇일동안 계속되었고 이미 작전개시 명령을 하달받고 있던 독일군 조종사들은

몸이 달아 안전부절하고 있었다.

작전개시가 자꾸 연기되자 부하들의 사기를 염려한 괴링이 13일 아침에 작전을 개시한다고 수정했지만

이날까지도 영불해협과 영국 남해안의 짙은 비구름과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그러다 때마침 독일공군 기상정보부가 오후부터는 날씨가 좋아질거라 예보했고,

괴링이 급히 이 사실을 예하부대에 통보했지만

이미 독일군의 폭격비행대는 13일 아침 날이 밝자마자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출격한 후였다.

케셀링 원수는 급히 폭격비행대에 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어쩐일인지 '요한네스 핀크'대령이 직접 지휘하는 폭격기들은 그대로 영불해협을 건너버렸다.

그래도 비교적 운이 좋았던 터라, 호위 전투기들이 모두 철수해버렸지만 두터운 구름이 그들을 가려준 덕분에

영국군의 '이스트 처치'비행장에 폭탄을 떨어뜨려 사용불능으로 만든 대신,

Do-17 폭격기 4대가 격추되고 4대가 손상되는 경미한 피해만 입고 대부분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영국 최대의 항구 '사우스 댐프턴'을 향해 Me-109의 호위를 받는 150대의 폭격기가 쇄도해 들어갔고,

영국공군은 4개 전투기 중대로 이들을 맞이하였다.

이번 폭격에는 독일군이 새로 전선에 투입한 신형 Ju-88폭격기도 가세했지만,

운이 나쁘게도 영국군의 전투기는 최신기인 스핏파이어 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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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88. 누가봐도 폭격기처럼 보인다. ...아닌가?)

태양을 등지고 달려드는 스핏파이어의 집중요격을 받고 10여대의 폭격기가 격추되자,

나머지 폭격기들은 폭탄을 바다에 내던지고 뿔뿔히 흩어졌다.

영국공군은 이날을 두고 '즐거운 13일'이라고 하여 두고두고 기념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괴링도 나름대로 매우 흡족해 있었다.

이날 하루 전투에서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블레님 등 영국 전투기를 도합 90대 이상 격추시켰다는 보고를 받은 괴링은

술창고를 열어 애지중지하던 고급 샴페인을 조종사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그들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러나 그 전과는 터무니 없이 과장된 것으로,

실제 이날 격추된 영국기는 13대에 불과했고, 독일군은 23대의 폭격기와 11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산술적으로 봐도 독일군의 판정패였지만, 사실 이런 집계 착오는 흔한 것이어서

이후로도 영국과 독일 양측의 전과기록이 일치한 적은 한번도 없다.

실제로도 이튿날의 공중전에서 영국군은 182대의 적기를 격추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기록은 75대였다.

 

8월 15일을 넘기면서 양측 공군의 사력을 쥐어짠 일대 회전은 점점 더 불을 뿜기 시작했다.

날씨마저 쾌청한 전형적인 여름날이 계속되었고,

1000m이상의 상공에서 전투기들이 으르렁거리는 소음은 지상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엔진 스로틀을 최대한 열어 기체를 급상승 시키거나 급강하할 때 프로펠러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금속성,

그리고 단속적인 기관총의 발사음이 들리고 나면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하는 폭음이 들렸다.

그리고는 불붙은 기체의 파편이 우박처럼 지면을 향해 쏟아져 내려오는데,

그 중에는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비행기와 함께 산산조각이 난 조종사의 신체잔해가 섞여 있을 때도 많았다.

이처럼 연일 계속되는 혈투의 스코어를 잘 살펴보면 영국측이 약간 우세했는데,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공격군은 항상 방어군에 비해 3배이상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지상전투의 원리가

이 하늘의 전투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공중전이 목적이 아니라 영국의 주요 군수공장이나 군사시설을 폭격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므로

공습편대는 으례 폭격기를 중심으로 짜여지기 마련이었다.

레이더로 이들의 내습을 사전에 포착하고 있던 영국 전투기 앞에서 이 폭격기들은

그야말로 먹음직스러운 칠면조나 다름 없었다.

이 폭격기를 호위하기 위해 Me-109, Me-110이 함께 날아온다고는 하지만,

이 독일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싸우고 있는 영국 조종사들에 비해 불리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똑같이 낙하산으로 탈출하더라도 곧바로 전열에 복귀할 수 있는 영국군에 비해

독일군은 적지 한복판에 떨어지게 되므로 그 심리적인 부담이 그대로 더해진데다,

이미 영국까지 한시간 이상의 비행에 시달린 끝에 곧바로 공중전을 펼쳐야한다는 불리함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독일전투기의 가장 큰 약점은 전투지역에서 체공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10여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급강하, 급상승으로 인해 연료소모가 급격히 늘어나는 공중전을 치르고 난 독일 전투기들이

프랑스나 벨기에의 기지까지 귀환하는데 필요한 연료가 모자라 도버해협의 바다 위에 떨어져버리는 일이 속출했다.

또한 영국 전투기들이 대부분 1인승인데 비해 독일 전투기는 Me-109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2인승인 대형기라는 점도

인명손실을 강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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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사의 손실이 더 클 수 밖에 없는 2인승 전투기. Me-110)

 

한편 노르웨이와 덴마크에 주둔하고 있던 '한스 유르겐 시툼프' 대장의 독일 제 5항공군은

한발 늦게 독수리 작전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노르웨이에서 출격하여 영국으로 최단거리 코스로 날아가 영국 북동부해안을 덮치게 된다면

영국공군으로서는 완벽하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꼴이 된다.

따지고보면 이것이 히틀러가 그토록 힘을 쏟아 노르웨이를 자기것으로 만든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협동작전은 생각만큼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Me-110 쌍발전투기에 의해 호위되는 제 5항공군 소속의 폭격기 115대가

잉글랜드 북동부해안에 모습을 나타내기 한시간 전부터 영국공군에게 이미 완벽하게 포착되었던 것이다.

태양을 등진 채로 고공에서 맴돌며 먹이를 기다리던 영국공군의 전투기들은 He-111과 Ju-88폭격기 편대가

그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마치 굶주린 매처럼 달려들었다.

진작부터 영불해협 지대에서 영국공군과의 크고작은 전투를 경험해온 제2, 제3항공군과는 달리

노르웨이에서 놀고먹던 이 폭격기들은 한순간에 박살나고 만다.

이날 독일군은 22대의 폭격기와 7대의 Me-110을 잃었지만, 영국기는 단 한대도 격추되지 않았다.

더욱이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같은 1선급 전투기들이 모두 남해안으로 집중배치되는 바람에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영국전투기는 대부분 구식의 '데파이언트'나 블레님' 폭격기를 개조한

고물들이었다는 사실은 시툼프 대장을 더욱 경악시켰다.

"놀라운 일이었다. 놈들은 우리가 접근하는 길목을 미리 알고 일부러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 무렵, 영국은 레이더 외에도 또 한가지의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울트라'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는 암호해독기였다.

종전까지도 그 존재가 극비에 부쳐진 이 신무기는 적기들이 비행장을 출발할 때부터

관제탑과 항공기, 항공기와 항공기 사이에 오가는 모든 통신을 도청하여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놀라운 기계였다.

그리고 독일군은 이 울트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영국군의 우수한 레이더 때문이라고 믿었기에

이미 들통나버린 암호체계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공중전이 가열되어 가면서 수많은 영웅들이 태어났다.

영웅은 따로 없었다.

한번 출격에 평균 10분 정도가 걸리는 공중전에서 살아남아 활주로의 잔디밭 위에 무사히 내려앉는

조종사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영웅이었다.

최소한 1일 2회, 많으면 8회까지도 출격해야하는 이 치열한 격전의 하루를 넘겼다는 것은 곧바로 위대한 업적이 되었고,

갓 전입 온 신출내기 조종사가 중대 최고의 베테랑이 되는데는 일주일이면 족했다.

"그건 갓 면허를 딴 초보 운전사가 자동차 경주에 나서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첫 교전에서 살아남기만 하면 두번째부터는 숙련된 선수가 되는거죠."

이처럼 살아남는 것 자체가 위대한 전공이 되는 최악의 혈투 속에서도 빛나는 에이스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사슴 사냥꾼 출신의 '스탠포트 턱'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덩케르크에서 철수 선단을 호위하기 위해 출격했던 4일동안 8대의 독일기를 격추시켜

이미 에이스가 되어있던 그는 연일 계속되는 항공전 속에서 격추 스코어를 착실히 쌓아나갔다.

그는 본토 항공전이 끝나던 1940년 11월까지 총 25대의 적기를 격추하여 톱클래스의 에이스가 되지만,

그의 진가는 탁월한 공중전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연일 계속되는 격전속에서도 끊임없이 부하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북돋워주는 유능한 지휘관이었을 뿐 아니라,

효과적인 전투기술을 계속하여 개발하고 그것을 널리 전파시키는 뛰어난 지도자이기도 했다.

물론 독일쪽에도 초인적인 에이스들이 많았는데,

'베르너 묄더스'소령은 스페인 내전부터 활약한 조종사로

45대라는 격추기록과 함께 뛰어난 지도자적 기질을 발휘했다.

'아돌프 갈란트'소령은 일찌감치 일선을 떠나 전투항공대 총감이라는 자리에 앉았음에도 40여대의 격추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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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전 일러스트)

 

8월 15일부터 4일간에 걸친 격전에서 영국공군은 194대의 독일기를 격추시켰고,

그 희생물은 대부분 슈투카와 쌍발호위전투기 Me-110에 집중되어 있었다.

괴링은 예상밖의 큰 손실에 놀랐지만, 그의 계산에 의하면 영국군의 전투기도 300여대 정도로 줄어있을거라 판단했다.

이런 공세를 계속한다면 8월말까지 영국군의 전투기는 100대 이하로 줄어들 것이고,

그렇다면 시 라이온 작전이 시작되는 9월달까지는 영국 공군을 모두 일소시킨다는 목표가

완전히 불가능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영국공군은 8월 8일 이래 270여대가 격추되거나 수리불능의 대파를 당했음에도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새 전투기들이 꾸준히 늘고 있었고,

그 시점에도 약 700여대의 전투기가 건재했던 것이다.

정작 영국이 부족했던 것은 전투기가 아닌 조종사였다.

1940년 8월말이 되자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조종사가 94명, 부상으로 입원해 있던 사람이 60명이나 되었고

격전지에서 가까운 영국 남부지방의 모든 병원은 이미 만원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한 상황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전투의 긴장과 혹사로 인해 그야말로 뼛속까지 지쳐있었고,

다우닝 대장은 부족한 조종사를 외국 출신의 조종사들로 메우는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체코나 폴란드, 네덜란드 등지에서 영국으로 망명 온 사람들 중 비행기를 조종해본 사람이 꽤 있었고,

이들은 곧 영국군에 투입되어 공중전을 치뤘다.

부작용도 있었다.

독일에게 조국이 점령당한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지나치게 무모하고 저돌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다급한 순간에는 자기도 모르게 모국어로 말하기 일쑤였고,

이것은 긴밀한 팀웍이 중요한 공중전에 적잖은 장해가 되었다.

관제탑 요원들은 하늘에 떠있는 조종사가 그의 외국인 동료들에게 외치는 교신내용을 들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침착해. 그리고 영어로 말해. 폴란드 어로 떠들지 말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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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만 알아듣는 바보...)

 

그리고 그때까지 런던은 독일군의 폭격으로부터 무사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독수리 작전이 시작된 이래 자신들의 수도인 런던이 폭격당하기를 바란 사람이 은근히 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 영불해협에 가까운 남부지방 상공에서 연일 공중전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영국의 공군력도 바닥날 것이었다.

그러면 런던의 하늘은 훤히 뚫리게 되고, 마침내는 파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민간인 밀집지역인 런던이 폭격당하는 참상이 일어나 준다면

전세계의 여론이 히틀러를 규탄하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미국이 참전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혹은 참전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사 원조 정도는 기대해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런던 폭격이 시작된다면 집중공격의 목표가 되고있는 영국공군이

조금이라도 그 압박에서 해방되어 한숨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런던에 폭격이 떨어지기를 바라고 바라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히틀러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이런 계산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히틀러는 괴링에게 어떤 도시, 어떤 시설도 퍼부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지만,

단 한 곳-런던만은 빠져있었다.

한시바삐 런던에다 집중폭격을 가해 영국인들의 전의를 꺾어야한다는 지휘관들의 의견을 괴링을 이렇게 일축했다.

"자네같으면 베를린이 폭격당했다고 항복하겠나? 부질없는 짓이야.

아무말 말고 영국 공군이나 철저히 때려부숴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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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말이라면 껌뻑죽었던 괴링이 그 말을 거역할리 없었다.)

 

하지만 이런 폭격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아주 우연히 그 막이 열리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8월 24일 밤.

170여대의 독일군 폭격편대가 북프랑스의 기지로부터 발진했다.

그들은 로체스터와 킹스턴의 군수공장, 그리고 테임즈강 연안의 연료 저장탱크를 폭격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두대의 폭격기가 선도기를 놓쳐버렸다.

대열에서 낙오된 폭격기들을 향해 지상으로부터 고사포 사격이 쏟아졌고,

당황한 폭격기 승무원들은 싣고 있던 폭탄을 아무 곳에나 던져버리고 기지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아무 곳에나' 던진 폭탄이 공교롭게도 런던 시내 한복판에 떨어졌다.

마침 저녁시간이어서 술집과 영화관에서 몰려나오던 수많은 시민들이 죽었다.

 

조금만 군사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폭격이 실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처칠은 그 사실을 무시한채로 독일군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집된 3군 지휘관 회의에서도 이 런던폭격에 대한 보복작전으로

베를린에 똑같이 보복폭격한다는 안이 채택된다.

8월 25일, 영국 폭격기 편대가 베를린에 가한 야간공습은 독일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우리 공군의 폭격앞에 이미 빈사상태라고 하던 영국 놈들이 어떻게 감히 여기까지 날아와 반격을 한단 말인가?"

오래전부터 괴링이 베를린의 철벽같은 방공망을 자랑하며

'만약 적기가 한대라도 베를린 상공에 나타나면 나를 개.자식이라고 불러도 좋다'

고 할만큼 호언장담했기에 그 놀라움은 더더욱 컸다.

여하튼 괴링은 개.자식이 되어버렸고, 이 공습은 2~3일 간격으로 수일간 계속 되었다.

피해가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군중을 모아놓고 열변을 토한다.

"놈들은 좀도둑처럼 한밤 중에 기어들어왔다.

그건 놈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대낮에는 독일 상공에 얼씬도 못하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이 우리 도시 하나에다 폭격을 가한다면 우리는 두개의 영국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그들이 하나의 폭탄을 투하하면 우리는 열개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것을 우리 독일 국민들 앞에서 맹세한다."

 

1940년 9월 7일 토요일.

괴링은 부하들에게 큰 선물을 갖고 돌아온다.

"귀관들이 고대하던 좋은 소식 하나를 전해주려한다."

몇몇 부하들은 이미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이사간 이후로 런던에 대한 폭격금지를 해제한다. 이것은 총통의 명령이다."

일제히 환성이 터져나왔다.

독일 폭격기들은 이제 까다로운 제한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영국 전투기들과 아웅다웅 싸울 것이 아니라 적의 군수 공업지대와

군사시설을 초토화 시키는 대대적인 폭격이 시작된 것이며,

런던은 폭격 금지라는 제한도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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