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ch] 이런 인연 (스압)

리처드파인만 작성일 14.02.17 08: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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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생 때 이야기다.
나는 조그만 아파트에 살았는데 그 옆집에 일가족이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방 하나에 와병 생활중인 어머니, 나이 많은 할머니, 여자 중학생 그녀 이렇게 세명.

그녀는 너무나도 작고 여위어서 평소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굉장히 밝고 활달한 성격 덕분일까, 어두운 내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예의도 발라서 나를 보면 인사도 곧잘 했다.
그렇게 두어번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그녀와 친해졌다.

그녀는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신변을 돌봤다.
수입이라곤 생활보호 대상자 지원금 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계 사정은 상당히 어려운 듯 했다.

일단 TV나 기본적인 가전 제품은 있는 것 같았지만, 냉난방을 위한 가전 제품은 없었다.
거기다 전화기도 없었다.
옷이라곤 교복 말고 단 두벌 뿐이라서, 평소에도 교복 치마를 입고 다녔다.

머리카락을 씻는데도 샴푸가 아니라 비누를 쓰는 것 같았다.
물론 머리카락은 집에서 잘랐다.
그녀의 가정 사정을 알게 되자 동정심이 생겼지만, 어떻게든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섯부르게 동정하는 건 상처만 줄 뿐이니까.

휴일에는 우리 집에 놀러오기도 했다.
숙제하는 걸 봐주거나 같이 게임을 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면 활짝 웃었고, 게임으로 완벽하게 눌러주면 살짝 화를 내기도 했다.
그녀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여자애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돌아오니 그녀가 문앞에 서있었다.

그녀 [며칠안에 꼭 돌려드릴 테니까, 천엔만 빌려 주세요.]

나는 그녀가 어째선지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것이 이상해 이유를 물었다.

나 [왜? 무슨 일 있어?]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띄엄 띄엄 입을 열었다.

그녀 [...생리...가 시작 됐는데...생리대...없어서...에헤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나 자신을 후려 패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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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엔만 빌려달라고 했지만, 굳이 천엔권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5천엔을 손에 쥐어주었다.
저녁 8시 쯤 됐을까, 그녀가 우리 집에 왔다.

그녀 [나머지는 며칠 안에 꼭 갚겠습니다.]

그녀는 거스름돈 4천엔을 돌려주려 왔다.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나 할머니에겐 비밀로 해달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어머니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다음날, 컨디션이 괜찮았던지 혼자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온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녀의 어머니 [...신세를 졌네요. 정말 미안합니다.]

그 분은 몇번이나, 몇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나같이 어린 녀석한테 말야.

나 [저도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는 걸요. 유념치 마세요.]

실제 쓰레기 분리 수거 방법을 가르쳐 주거나 관공서, 은행, 슈퍼마켓 위치를 알려주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나 친구가 한명도 안 사는 곳인지라 상당히 도움이 됐다.
나는 허둥지둥 그런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내 말에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어머니 [딸아이랑 놀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교복 차림의 그녀가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 [안녕하세요!]

평소처럼 활발하고 건강해보였다.

나 [오늘은 빨리 나가네?]

그녀 [오늘 당번이거든요.]

;은 대화를 나눈 뒤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의 어머니 [...저 아이, 요즘 웃는 얼굴을 자주 보이게 됐어요.]

그녀의 어머니는 다시금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정말 기쁜듯이 말했다.

빌려 줬던 돈은 그녀가 말한 그 날 돌려받았다.

그녀 [에헤헤,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요.]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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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게 되었다.

나 [학교에서 친구 많이 사겼어?]

그녀 [에헤헤...그게, 친한 애가 별로 없어요.]

내 조심성 없는 질문에 그녀는 별 것 아닌 듯이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실수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그녀가 지금 사는 곳에 이사온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때.
반 애들이랑 친해 지기도 전에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교를 다니던 중 학기 초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는 바람에 한동안 학교를 쉬게 되었다.
그렇게 친구를 사귈 타이밍을 완전히 벗어나는 바람에 반에서 고립되었다고 한다.

그 말에 나는 한층 더 가슴이 찢어졌다.

아마 나한테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것도 학교에 친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집안 일을 했다.
그리고 조금 한가해지면 우리 집에 왔다.

나는 책이라면 장르를 따지지 않고 읽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책을 꽤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가진 책 중 특히 소설책을 자주 읽었다.
빌려 줄 테니까 집에 가져가서 여유 있게 읽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책을 더럽힐 수도 있다면서 굳이 내방에서 책을 읽었다.

음료수나 과자를 주려고 해도, 캔음료나 커다란 봉지 과자는 사양하곤 했다.
음료수는 뚜껑을 연 것, 과자는 이미 개봉된 것만 먹었다.
그 마저도 네가 안 먹으면 버릴 수밖에 없다면서 억지로 먹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과자나 음료수를 먹은 이야기를 할머니나 어머니한테 꼭 보고 하기 때문에
다음에 그 분들을 뵐 때마다 인사를 듣곤 했다.

답례로 그녀의 어머니한테 음식을 대접받기도 했다.
태국쌀로 만든 볶음밥이 특히 맛있었다.
뭔가 특별한 비법 소스라도 쓴 건가 싶어서 물어봤지만 특별한 재료는 없었다.
태국쌀을 사와서 볶음밥을 만들어 봤지만, 어떻게도 그 맛을 재현하지 못했다.
그걸 그녀의 어머니한테 말하니,

그녀의 어머니 [그러면 제가 만들어 드릴테니 저희 집에 와서 드시고 가세요.]

미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맛있어서 몇 번이나 신세를 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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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조금 건강해 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랑 그녀가 각각 학교에 가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쓰려졌다.

내 연락처를 기억하고 있던 할머니가 나한테 연락을 준 덕분에 바로 병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머리속이 새하얗게 변해 허둥지둥 대는 바람에 구급차를 부르는 게 늦었다면서.
울면서 미안하다고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사과를 반복했다.

다발성 장기 부전.

환자 상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분명 징후가 있었을 텐데 왜 방치했냐.

의사가 그렇게 소리쳤다.
나는 울컥 해서 의사의 멱살 부여 잡고 욕설을 퍼부을 뻔 했다.

그녀 [죄송합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사죄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는 바로 입원 시키고 집중 치료실에 들어가야 된다고 말했다.
나는 머릿속이 엉망진창 뒤섞여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도저히 내 손으론 감당이 되질 않아서 우리 아버지한테 전화를 했다.

아버지 [지금 당장 가마.]

사정을 들은 아버지는 딱 한마디만 하고 바로 달려와줬다.
아버지는 평일인데도 조퇴를 해서 1시간 만에 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랑 그녀의 어머니는 내가 아파트에 입주할 때 인사만 나눈 사이였다.

아버지 [네가 그간 신세를 진 분이다. 그럼 나도 신세를 진 거나 마찬가지야.]

아버지는 아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녀의 어머니랑 대화를 나눈 뒤.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
할머니가 이래 저래 한계 상황인지라 아버지가 집에 바래다 주기로 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병원에 남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를 혼자 둘 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약기운 때문인지 금새 잠들었다. 
우리 둘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가만히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 보는 사이 나는 필사적으로 울고 싶은 걸 참았다.
그녀가 울지 않는데 내가 우는 건 이상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참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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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어머니는 입원하고 3일 뒤 죽었다.
마치 잠들 듯이 고요하게.

향년 34세.

나이를 알고 나서 깜짝 놀랐다.
그렇게나 젊었던 걸까.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장례식 준비나 관공서에 제출할 서류 준비 같은 걸 해야 되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혼란에 빠져 있었고, 나와 그녀는 그런 걸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결국 또 아버지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달려와주셨다.
내가 울상이 되서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따귀를 얻어 맞았다.

아버지 [너, 그 아이 앞에선 그딴 얼간이 같은 얼굴 하지 마라.]

아버지는 여러가지 일을 처리해주셨다.
금새 장례식 준비를 마치고 장례를 시작했다.
도저히 현실이라 느껴지지 않는데 상황만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화장하는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빨개진 눈매를 숨기지 않은 채 서있었다.
그녀는 울지 않았지만 무표정했다.

대신 내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잡고 있었다.

나는 가끔 그녀의 안색을 살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고 나서 아버지의 차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일이 있다며 곧장 돌아가셨다.

나는 내 방에 혼자 주저 앉아 멍하니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밤중에 그녀가 내 방에 찾아 왔다.
그녀는 활짝 웃으려 했지만 내가 보기엔 어떻게 봐도 힘들어 보였다.

그녀 [에헤헤...어머니...앞에서는 웃으려고...울면 안돼는데...]

그녀는 결국 웃는 얼굴로 눈물을 쏟았다.

그녀 [오빠...라면 용서해...줄 거라고...]

간신히 울었다. 이제야 간신히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나도 울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그녀를 껴안고 함께 울었다.
정말 한심한 일이지만 그것밖에 해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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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그녀는 나를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성에 씨 라는 존칭을 꼬박 꼬박 붙여서 불렀는데.

나는 형제가 없는지라 여자애한테 오빠라는 소리를 들으니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만 두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짓는지라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할머니는 장레식 이후 부지런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헌데 다른 사람의 도움은 일절 거절했다.

집안 일이나 부업 일에 그녀나 내가 손을 대면 불 같이 화를 냈다.
마치 우리에게 약점을 내비치고 싶지 않다는 것 처럼.
지금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으로 슬픔을 잊으려 한 것이라 생각된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틀어 박혀 있으면 언제나 그녀가 찾아 왔다.
이야기는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거나.
예전과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어느 순간 부턴가 나와 그녀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와 내가 묘하게 가까워서 당황한 적도 많다.
간혹 내 팔이나 옷을 잡거나 품에 안기는 등 응석을 부리는 때도 있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갑자기 내 무릎 위에 올라탔다.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 놀랐던 건 그녀가 너무나 가벼웠다는 점이다.
나한테 등을 맡긴 채 앉아 있던 그녀가 툭 하니 말을 건냈다.

그녀 [...아버지 같네요...]

나 [그거 무슨 의미야?]

그녀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하다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 [아버지가 있으면...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어서. 에헤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나는 그녀를 꼭 끌어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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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에 접어 들고 나서 나는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녀는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 부업 심부름을 했다.

친구나 어머니가 고향에 들렀다가 가라며 연락을 보냈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
그녀와 할머니랑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한참 더운 여름 날. 그녀의 어머니 49재날이 되었다.
유골은 아파트에서 자동차로 몇시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절 묘지에 납골하기로 했다.

묘지에 갈 때 또 다시 아버지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나랑 그녀, 할머니는 아버지 차에 타고 절에 갔다.
절에 도착해 그녀의 어머니를 그녀의 아버지 옆에 안치했다.

그녀 [어머니, 이제 외롭지 않을 거에요.]

그녀는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염불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장례식 때 처럼 세게 잡진 않았다.
묘를 보니까 그제서야 이것이 현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집에 데려다 준 뒤 바로 돌아갔다.
내가 방에 돌아와 쉬고 있던 중 그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방에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고 큰절을 했다.

그녀 [여러가지로 정말 감사합니다.]

나 [...여러가지라니...전부 아버지가 다 해줬는걸.]

무심코 그런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말실수 했다는 걸 깨닫고 아차 싶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허둥대며 말했다.

그녀 [어, 어. 그러면, 저기, 어라? 계속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요?]

다시 말을 꺼냈지만 조금 움츠러 드는 내색이었다.

그녀 [할머니 앞에서는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울지 못했어요.]
그녀 [하지만 오빠가 옆에 있어줘서 힘낼 수 있었어요. 에헤헤, 응석 부린 것도 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굉장히 쑥쓰러운 것 같았다.
잠시 빨간 얼굴로 나를 힐끔 힐끔 쳐다보던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 [...또... 응석 부려도 될까요?]

나는 즉답했다.

나 [당연히 되지. 얼마든지 응석부려도 돼.]

그녀 [진짜...루요?]

나 [그럼.]

그녀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그녀는 오랫만에 정말 해맑게 웃었다.
이 아이가 웃을 수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다.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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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머니가 없는 생활에도 점차 익숙해진 듯 보였다.
덕분에 그녀가 우울한 표정을 짓는 일도 줄어 들었다.
추워지기 시작할 무렵, 그렇게 다시금 일상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생활 보호 대상자로 지정된 만큼 할머니의 부업으론 수입을 확 늘리거나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할머니에게 있어선 상당히 큰 액수였다.
덕분에 생활비 만큼은 빠듯이 어떻게든 충당할 수 있었다.

그 해 처음으로 기온이 10도 이하로 내려가기 시작할 쯤이었다.

나는 그녀의 집에 난방기구가 없다는 걸 생각해냈다.
학교에서 돌아와 곧바로 그녀의 집에 가니 할머니가 부업을 하고 있었다.
얇은 옷을 몇겹으로 겹쳐 입은 듯 했지만 천이 얇아 추워 보였다,

할머니는 익숙해졌다고 말하셨지만 나는 바로 집에 가서 이제 입지 않는 두꺼운 옷을 가져다 드렸다.
준다고 하면 분명 거절하실 테니까 빌려드리겠다고 하며 억지로 손에 안겨 드렸다.
할머니는 작게 웃으면서 받아 주셨다.
하지만 곧,

할머니 [그 아이가 샘을 낼 것 같은데.]

그렇게 걱정하셨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는 평소처럼 내 방에 놀러왔다.
그녀는 곧바로 내 옆에 앉더니 조용히 내 얼굴만 쳐다봤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던 그녀는 내 팔을 잡고 말했다.

그녀 [저한테는 옷 안 빌려주실 건가요?]

그녀는 입을 비쭉 내민 채 그렇게 말했다.
평소와는 달리 묘하게 아이 같은 느낌이었다.

나 [어떤 거 빌려줄까?]

그녀 [이거]

그녀는 내가 입고 있던 스웨터를 가리켰다.

나 [이거?]

그녀 [응.]

나 [이거면 돼?]

그녀 [그거면 돼요.]

나 [오늘 씻어서 내일 빌려줄께.]

그녀 [지금 바로.]

그녀는 아이가 칭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못이기는 척 결국 스웨터를 벗어서 그녀에게 건네줬다.
오래 입어서 후줄근 한데다, 내 몸에도 제법 큰 스웨터였다.

몸집이 작은 그녀가 입자 마치 원피스처럼 보일 정도였다.
일어서니 옷자락이 무릎까지 내려왔다.
그녀 바닥에 앉아 스웨터 옷자락으로 다리를 푹 가린 채 말했다.

그녀 [에헤헤, 역시.]

나 [응?]

그녀 [따뜻해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녀가 웃을 때마다 나 역시 기뻐진다는 걸 깨달았다.






131

그녀 [겨울 방학에는 고향에 갈 건 가요?]

12월에 들어서고 얼마 뒤 그녀는 나한테 그렇게 물었다.

나 [아니. 그냥 아르바이트 할 거야.]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결국 연말임에도 집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내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 떡이나 명절 음식, 전골 요리 재료를 잔뜩 보내주셨다.
나눠 먹으라는 뜻일 것이다.

나는 그녀와 함께 전골요리를 할 때 쓸 냄비랑 가스 버너를 사러 함께 마트에 갔다.
거기서 같은 과 여자 친구랑 우연히 만났다.

친구 [어서오세요. 어라? xx 잖아.]

나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구나.]

친구 [응. 그런데... 뭐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해.]

내 옆에 서있던 그녀를 슬며시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귀찮아 질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진 않고 그대로 냄비랑 가스 버너를 사서 돌아왔다.
그 날 저녁은 그녀랑 할머니와 같이 전골 요리를 해먹었다.

몸이 뜨거워질 정도로 따뜻한 전골 요리에 그녀와 할머니는 크게 기뻐했다.
그릇을 정리하기 위해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스웨터를 입은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묘하게 나한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향기가 코끝을 맴돈다.

그녀 [저기...오늘 만난 그 사람은...]

나 [학교 친구야.]

그녀 [단순한 친구?]

나 [단순한 친구.]

그녀 [그러면 자세한 이야기라는 건 뭔가요?]

나 [너랑 내 관계를 묻고 싶은 걸 테지.]

그녀 [저, 저 말인가요?]

나 [흐음, 설명하기 어려울 거 같은데.]

그녀 [그렇네요.]

나 [뭐라고 말해두지.]

그녀 [애인...은 안되나요?]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 [그렇게 말해도 될까?]

애써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 [어? 그렇게 말하실 건가요?]

그녀는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나 [응, 그렇게 말하려구.]

그녀 [그, 그런가요. 으, 응. 그렇지요?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갑작스레 이런 상황이 된지라 그녀는 물론 나도 당황했다.
그녀는 꽤 흥분했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두서 없이 말을 꺼냈다.

그녀 [아, 하지만. 저기, 그게. 애인 같은 행동 한번도 안했는데. 괜찮나요?]

나 [애인 같은 행동은 뭐야?]

내 질문에 그녀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린 채 돌아 앉았다.

그녀 [할머니한테는 비밀이에요.]

나 [비밀이네.]

그녀 [절대로...알았죠?]

나 [알았어.]

결국 그 날은 상대 얼굴이 더 빨갛다며 서로를 조롱하느라 귀가가 늦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정말 한가한 녀석들.
내가 그냥 애인이라고 말하니 너무 당당해서 재미없다며 투덜거렸다.
나는 네 녀석들 장난감이 아니야.






133

그렇게 나는 그녀와 사귀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가 특별히 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며 같은 시간을 보낸다.
이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숙제를 가져오면 함께 봐주기도 했다.
나는 형제가 없기 때문에 그런 일 하나 하나가 신선하고 즐거웠다.

하루 하루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중 크리스마스날이 가까이 다가 왔다.  
여름철, 그녀의 생일날 선물을 못 줬던 것이 생각난지라 이번엔 꼭 선물을 하고 싶었다.

할머니에게 그녀가 갖고 싶어하는 게 뭐 없을까 물어보니 옷가지를 갖고 싶어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옷을 선물해 주고 싶다는 말을 하니 할머니가 너무 미안하다면서
그렇게까지 도움을 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빙긋 웃으면서,

나 [괜찮아요. 크리스마스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무슨 의미로 저런 소리를 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여자 옷가게에 남자가 혼자 들어가려니 여러가지 의미로 고역이었다. 
결국 같은 과 여자애들한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애들한테 사정을 설명하면서 당황하는 바람에 할말 안할말 마구 늘어 놓은 결과.
평소 무뚝뚝해보인다거나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평가를 받던 내 케릭터가 완전 붕괴했다.

결국 여자애들의 도움을 받아 가볍게 입고 다닐 수 있는 옷 몇가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152

선물 포장을 한 뒤 옷을 벽장에 숨겨두었다.
그녀가 벽장을 열거나 하는 일을 없었지만 근처에 갈 때마다 전전긍긍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할머니가 케이크를 사와 셋이서 함께 나눠 먹었다.

타이밍같은 걸 생각하는 게 귀찮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건네줬다.

그녀 [받아도 괜찮습니까?]

나 [응.]

그녀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시원스럽게 받아들였다.
내 방에 돌아와 한동안 시간이 지난 뒤 그녀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흩날리는 눈송이 사이로 상기된 표정의 그녀가 서있었다.
그녀는 내가 선물한 옷을 입고 있었다.

키는 대충 맞았지만 사이즈가 맞지 않아 조금 헐렁했다.
하지만 그게 이상하게 귀여워 보여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머리카락 위에 올라탄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그녀 [정말 마음에 들어요.]

나는 그 말에 정말 기뻤다.
그녀는 방에 들어와 코트를 벗고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쑥쓰러운 듯 그녀는 이곳 저곳 옷 매무새를 어루만졌다.

나 [왜 그래?]

그녀 [이런 거, 처음이라, 뭐라고 해야 될지, 그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그녀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낸 거, 오랜만이라.]

점차 그녀의 목소리가 습기로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나 [울지마.]

하지만 어느 샌가 그녀의 눈매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그것을 엄지로 닦아내며,

나 [우는 것 금지.]

그녀 [기뻐서 우는 걸요.]

나 [그래도 금지.]

그녀 [...예.]

그렇게 계속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중, 그녀가 나한테 달려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쓰러질 듯 휘청댔지만 어떻게든 받아낼 수 있었다.

그녀 [에헤헤, 조금만 더.]

그녀가 날 꼭 껴안은 채 떨어지질 않아서 조금 당황했던 건 비밀.
나중에 할머니한테도 블라우스와 무릎 담요를 선물해드렸다.
자기 선물도 있다는 걸 모르셨던 지라 깜짝 놀라셨지만, 이내 기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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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초부터 정말 필사적이었다.
현장 실습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나는 간호 복지과 전공이었기 때문에 자원 봉사 겸 현장 실습을 하지 않으면 학점을 얻을 수 없었다.
1월 중순부터 2주일에 걸친 현장 실습 그리고 2월 초순 부터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에서 모르는 것 투성이였고, 시험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내가 현장 실습을 한 곳은 정신과 전문 병원이었다.
격리 병동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낄 만한 일도 몇 번 마주쳤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이니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에 귀가할 때까진 어떻게든 표정을 정돈하곤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방문했다.
그리고 한마디,

그녀 [수고하셨어요.]

이 한마디에 모든 노고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실습 기록을 정리하는 사이 그녀는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대개의 경우 벽에 기대 앉아 소설을 읽곤 했다.
내가 그녀쪽을 쳐다볼 때마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마도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던 것 같다.
실습 기록 정리와 시험 공부를 마치고 나면 그제서야 내 곁에 와 앉았다.

이야기를 나누거나 TV를 보거나 혹은 서로 몸은 기댄 채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이 평범한 일상은 나에게 있어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내 옆에 있어준 덕분에 괴로운 실습과 시험 공부를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었다.
실습 성적과 시험 성적, 둘 다 나름 괜찮은 결과를 냈다.

결과를 알고 나서 간신히 끝났다는 생각에 한숨과 함께 몸에서 맥이 쭉 빠져 나갔다.
그때 내가 얼마나 맥이 빠져보였는지 그녀가 불안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일단 괜찮다면서 그녀를 위로했지만, 결국 쓸데없는 걱정을 끼쳤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큰 고비가 무사히 지나가고 평소와 같은 생활이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평소라면 저녁 10시쯤 해서 귀가했다.

헌데 그 날은 늦은 시간임에도 독서를 계속 하고 있었다.
조금 졸려 보였지만 책을 읽으면서 힐끔 힐끔 시계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다 12시 정각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응? 이제 가게?]

그녀 [아뇨, 아직.]

그녀는 벽걸이에 걸어뒀던 코트에서 뭔가를 꺼내오더니 나한테 내밀었다.

그녀 [이거요.]

나 [이게 뭔데?]

그녀 [초콜렛.]

나 [뭐?]

그녀 [14일 됐으니까요.]

나 [어?! 진짜?]

나는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녀에게서 푸른 포장지로 랩핑된 작은 상자를 건네 받았지만 실감이 안났다.
그러다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서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 수 있었다.

나 [2월 14일.]

그녀 [예.]

간신히 이해했다.
하지만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상쾌감도 잠시, 내 손에 들린 상자의 의미를 깨닫고 한층 놀랐다.

그녀 [이제...애인인 걸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살풋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녀 [이걸로 제가 제일 처음이에요.]

나 [제일 처음?]

그녀 [오빠라면 다른 사람한테 또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나 [다른 사람한테 초콜렛 받을 일 없으니까, 내일 줘도 되는데.]

그녀 [그래도, 혹시나 다른 사람보다 늦게 주면, 왠지 싫어서. 에헤헤.]

그녀는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나 [화이트 데이때 확실히 답례할께.]

그녀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그대신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나 [뭔데?]

그녀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나 [그러니까, 뭘?]

그녀 [대답해주신다고 하면 말할거에요.]

나 [좋아, 대답할께.]

그녀 [그럼, 묻겠습니다.]

그녀는 몇번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 [당신은 저를 좋아하나요?]

내가 할 말은 하나 뿐이었다.

나 [응, 좋아해. 넌 나에게 있어 이 세상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야.]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그녀랑 사귀고 나서도 부끄러워 차마 하지 못했던 말.
언제나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던 말.
그 ;은 말을 하는데 얼마나 긴장했던지 목이 바짝 마르고 어느새 꽉 쥐고 손아귀에 땀이 흔건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보다 살며시 내 품안에 들어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와 그녀는 서로 아무 말 없이 상대를 껴안고 있었다.
그러다 새벽녘에 그녀를 집까지 보냈다.

방에 돌아와 초콜렛이 담긴 상자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도저히 포장을 열 수가 없었다.
결국 상자를 냉장고 깊은 곳에 넣어두기로 했다.

생전 처음 연인에게 초콜렛한테 받았다는 사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갔지만 같은 과 여자애들은 나한테 애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초콜렛을 주거나 하진 않았다.






167

그 때 받은 초콜렛은 먹기 아까웠기 때문에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보관해뒀다.
냉장고 안 한 가운데 마치 부처님상을 모셔둔 것 마냥 소중히 보관해뒀는데,
어느 날인가,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가 그걸 발견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화를 냈다. 그녀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였다.
나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초콜렛을 그 자리에서 먹어 치웠다.
그래도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내 말에 대꾸하기는 커녕 시선도 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녀의 기분을 풀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다. 
그 덕분에 그녀가 귀가할 시간이 됐을 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 [진짜 뭐든지 할 테니까 용서해 줘.]

그녀 [...뭐든지요?]

나 [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께.]

그녀 [진짜루요?]

나 [할께. 꼭 할께.]

그녀 [그러면 또 한번 물을 테니까 대답해주세요.]

나 [뭐?]

그녀 [정말로 저를 좋아하나요?]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그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 표정에 조금 주춤했지만, 의지를 담아 말했다.

나 [좋아해. 정말로.]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간신히 굳은 표정을 풀었다.

그녀 [에헤헤, 안심했어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정말 나쁜 놈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녀 [이제 용서했어요.]

그녀는 눈앞에 와서 내 손을 잡았다.

그녀 [다음에 또 물어볼 거에요.]

나 [응?]

그녀 [몇번 들어도 기쁘니까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재차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바보짓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녀는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화이트 데이 날 쿠키를 선물했다.

그녀 [내가 이거 안 먹고 장식해두면 오빠 화낼거지요?]

나 [뭐든지 한다고 맹세할 때까지 용서 안 할 거야.]

그녀 [에헤헤, 그거 무섭네요.]

뭐가 무서운지 물어보니 그녀는 볼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결국 무서운 게 뭔지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199

2학년이 된 그녀는 매일 할머니랑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고등학교 정도는 졸업해야 나중에 일자리 잡기 쉽다며 진학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녀는 의무 교육인 중학교만 졸업하면 일자리를 얻을 거라고 말했다.
결국 자기 대신 설득해 달라며 할머니가 나한테 부탁했다.

내가 말하는 거라면 들어줄 지도 모른단 생각에 나는 그 부탁을 가볍게 승낙했다.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은근히 여러가지 이야기를 털어놨다.
하지만 그녀는 내 제안을 완고하게 거절했다. 

고등학교를 나오는 게 보통.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입밖으로 내놓진 않았지만, 그녀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다.

굳이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던가, 좀 더 확실히 생각하고 나서 정하는 게 좋다던가.
내가 그런 주제 넘은 말을 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물론 그 이외에도 거슬렸던 게 있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방아쇠는 내 무신경한 한마디였다.

나 [왜 그렇게 빨리 일을 하고 싶어하는 거야?]






202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 [...돈이...없으니까요.]

아무 억양도 없었지만 너무나 차갑고 바늘로 찌르듯 매서운 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말문이 막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다만 시간만 흘러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가 방문을 나섰지만 나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이후 나는 할머니한테 가서 결국 도움이 못됐다고 사과했다.
내가 그녀에게 들은 말을 할머니에게 해드리니 아무 말 없이 소매로 눈물만 훔치셨다.

결국 그녀가 후일 다시 마음을 바꿀 지도 모르기 때문에 진학에 대한 건 재고해두기로 했다.
아무 힘도 없는 내가 손을 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애인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들떠있던 게 한심스러웠다.

그녀는 이후에도 매일 내 방에 찾아왔지만, 대화를 나누지 않고 시간만 때우다 가는 일이 잦았다.
예전이라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았지만, 지금은 둘 다 괴로웠다.

그러길 며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해맑은 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이렇게나 힘든데 어찌 저리도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다시금 그녀가 참으로 강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위해 애써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 이후로 우리 사이에 내려 앉았던 무게감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203

애써 눈을 돌리려 해도 집안 사정은 그녀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래 저래 다감한 시기에 그녀에게 있어 집안 사정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타인이었다.
그런 타인이 자신의 치부 깊숙이 관여 하려 드는 건 아무래도 싫었을 테지.
이후로 그녀는 그 화제에 대해선 명확하게 선을 긋고 더 이상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지만 나 역시 아르바이트와 부모님의 송금으로 근근히 연명하는 처지였다.

일단 자격증을 따자.
그리고 졸업한 뒤 취직하자.

나는 생각하는 건 접어두고 우선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취직을 한다고 뭔가 특별이 바뀌는 건 없었지만, 우선 거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현실 도피를 하고 싶었던 거라 생각된다.

보름 정도 지나자 그녀와 나는 예전처럼 친근한 사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단 표면적으론 그렇게 느껴졌다.

내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언제나 내 옆에 와 앉았다.
여러가지 이야기도 나눴다.

그녀는 내 말에 웃거나, 화를 내기도 했다.
간혹 응석을 부리고 싶은 건지 가벼운 장난을 걸어오기도 했다.

내가 그걸 받아 주지 않으면 토라져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용서를 받기 위해 온갖 변명을 늘어 놓곤 했다.

하지만 그 행위들 조차도 단순한 구실,
1시간이라도 더 함께 있고, 더 응석 부리고, 더 온기를 나누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다.

학교, 실습, 아르바이트.
언제나 동일한 사이클로 흘러가는 시간이었지만 그녀와 함께 해서 행복했다.

취업 준비를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 그녀의 생일이 다가왔다.
그녀의 생일날 뭘 해줄까 고민하는 중 그녀가 말했다.

그녀 [부탁할 게 있어요.]

그녀가 나한테 부탁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드문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 [무슨 일인데?]

그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나 [어딘데?]

그녀 [어머니가 있는 곳이요.]

기일에 가고 싶지만 할머니가 자신이 가면 분명 울거라면서 가길 꺼려한다고 했다.
일단 전철비는 받았지만 혼자 가는 게 불안해서 같이 가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르바이트 쉬는 날을 택해 그녀와 함께 성묘를 하기로 했다.






204

6월 중순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씻었다.
평소보다 더 깨끗이 해야 된다는 생각에 온몸 구석 구석 씻었다.

약속 시간, 그녀가 내 방을 방문 했다.
어째서일까, 그녀가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평소에는 묶고 다니는 머리카락도 푼 상태였다.
어깻죽지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그 탓도 있어서인지 그녀는 평소보다 더 어려보였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출발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그녀는 조금 멀미를 했다.
그래서 나는 가는 동안 잠이나 자두라고 말했다.
실제 머릿속이 복잡할 테니까, 그 이상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전철을 타고 가다 기차로 갈아탔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대략 2시간 반 정도 시간이 지났다.

가는 동안 창밖 경치가 어느새 산골로 변해 있어서 놀랐다.
이전에 갔을 때는 자동차를 타고 간데다 경치를 볼 여유도 없어 이렇게 외진 곳이라고 생각 못했다.

경관은 확실히 좋았지만 민가는 선로 옆으로 드물게 보였다.
우리가 내린 역 또한 무인 역이었다.
역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지만, 버스 운행은 하루에 불과 4번 밖에 없었다.

지나 다니는 사람은 우리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이래서야 혼자 오는 게 불안한 것도 이해 된다.

절까지 가는 길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었다.
이내 절에 도착해 절 뒤편 묘지에 갔다.

나는 묘 앞에서 가볍게 인사를 한 뒤, 그녀 뒤에 서있었다.
그녀는 묘비에 물을 뿌리고 꽃을 두었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묘비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러던 중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 [돌아가요.]

나 [응? 벌써 가게?]

그녀 [울 것 같아서요.]

나 [울어도 괜찮아.]

그녀 [안돼요.]

내가 다시 말을 걸기 전에 그녀는 발을 돌려 나갔다.
역으로 가는 도중 그녀는 몇 번이나 발을 멈췄지만 등을 돌리진 않았다.

우리가 타고 갈 기차가 올 때까진 1시간이나 남았다.
무인 역에는 지붕이 있긴 했지만 그 아래 있기에는 너무 더웠다.
그래서 더위도 피하고 시간도 때울 겸해서 시원한 곳을 찾아 산책을 하기로 했다.

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걷다 벤치를 발견했다.
그곳에 앉아 잠시 쉬는데 그녀가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207

그녀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어머니가 묻힌 마을이 자신과 어머니, 할머니가 원래 살던 마을이었다는 것.
그녀의 할아버지도 젊은 나이에 죽어 할머니 혼자 힘으로 자식이 키웠다는 것.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이웃에 살던 사이로 각각 21살, 17살에 결혼했다는 것.
어머니가 20살때 그녀가 태어났다는 것.
그녀의 이름을 아버지가 지어줬다는 것.

아버지가 운송업을 했었다는 것.
27살 때 사고로 죽었다는 것.
차량 할부금이나 어음을 감당하지 못해 자기파산했다는 것.
그리고 가족 세명이서 마을을 떠났다는 것.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쪽 친척들과는 연락이 끊겼다는 것.

어머니가 건강했을 때는 비정규직으로 공장에서 일했다는 것.
공장 기숙사에서 어머니, 할머니, 자신 이렇게 셋이서 살았다는 것.
계약 기간이 끝날 때마다 이사를 했다는 것.
어머니가 쓰러지는 바람에 더이상 공장 기숙사에서 살 수 없게 됐다는 것.
그리고 이사한 곳이 지금 사는 마을이라는 것.

아파트를 빌리고 나서 어머니가 저금해둔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
할머니도 일을 했지만 결국 건강을 해쳐 일을 그만 두게 됐다는 것.
저금 해둔 돈도 바닥나 결국 생활 보호를 받게 됐고, 지금 아파트로 이사했다는 것.
복지과 사람이 노력해준 덕분에 지금 아파트에 보증금 없이 들어 올 수 있었다는 것.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어머니는 끝내 병원에 가지 않으려 했다는 것.

누군가 그녀를 일시적으로 보육 시설에 맡기자고 했지만 어머니가 거절했다는 것.
어머니가 가끔 앨범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해줬다는 것.
그 때의 어머니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는 것.
어머니가 늘 정말 즐거운 추억이 많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것.
그러면서 자신을 꼭 껴안아 줬던 것.
어머니랑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 나한테 꼭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던 것.




그녀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은 이야기를 조금씩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어째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일까.
나는 어떤 얼굴로 이야기를 들으면 되지?

여러가지 심정이 섞여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211

그러다 이야기가 멈췄다.

그녀 [전...어머니가 부러웠어요.]
그녀 [저는 지금까지 한번도 즐거웠던 기억이 없으니까요.]
그녀 [세상에 정말 즐거운 일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건지 믿을 수 없었어요.]

나는 무심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내 손을 가볍게 마주 잡았다.

그녀 [그런데 세상에는 정말 즐거운 일이라는 게 있었어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비추어진 웃는 얼굴이, 눈부셔서.

그녀 [상냥하게 대해줘서 기뻤어요. 처음이라.]

나 [...처음?]

그녀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저를 엄마의 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다시 표정이 흐려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확실히 미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속셈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되면 친철한 사람처럼 다가와서 돈으로 유혹하려 든 경우도 있다고.

그녀에 한테도 과자를 사주거나 용돈을 주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교제를 거절하면 그 이후부턴 찾아 오지도 않았고, 심지어 화를 내거나 일자리에서 쫓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일이 몇번이나 반복되자 그녀는 어른 남성에게 혐오감을 갖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때 상냥했던 선생님도 어머니 앞에선 이상하게 느물거리며 웃었다.
그 이상한 느낌이 싫어서 그때부터 남성이 다가오는 것 자체를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런 경계심을 느낀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게 이상해서 이유를 물어봤다.
그녀는 내 말에 방긋이 웃었다.

그녀 [계속 지켜봤지만, 오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거든요.]

나 [그래?]

그녀가 날 믿어준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부끄러웠다.

그녀 [저기, 오빠는 왜 그렇게 상냥한 거죠?]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다.

그녀 [어째서죠?]
그녀 [네?]
그녀 [어째서 그렇게 잘해주는 거에요?]
그녀 [말해줘요.]

점차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팔을 쥐며 어째서 라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동안 돌리고 있던 시선을 그녀에게 맞추며 그녀의 어깨를 마주 잡았다.

나 [너를 사랑하니까.]

그녀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 내 목을 끌어 안았다.






217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판기를 찾았기에 음료수를 사 마시기로 했다.
한심하게도 돈이 모자라서 음료수를 하나만 뽑았다.

그녀 [절반만 주세요.]

그녀는 우선 내가 먼저 마시게 한 뒤 남은 반절을 마셨다.

그녀 [에헤헤, 간접 키스네요.]

나 [아, 미안.]

그녀 [괜찮아요.]

기차를 타고 돌아가는 동안 그녀가 묘하게 내 품으로 파고 들려했다.
나는 돌아가는 내내 주위 시선이 쓰여 전전긍긍했다.
주위에 사람이 있는데도 내 몸에 딱 달라붙어서 응석을 부렸다.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다가 가끔 내 얼굴을 올려다 보기도 했다.
그녀의 체취로 가슴이 설레여 애써 평정을 가장하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그녀가 굉장히 기분 좋아보이는 것 같아 안심했다.

나 [생일날,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지금이면 물어볼 수 있겠다 싶어 질문했다.
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내가 차고 있던 손목 시계를 가리켰다.

그녀 [이거 주세요.]

당시 내가 차고 있던 시계는 크고 낡은 전자시계였다.
제 아무리 봐도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걸 갖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팔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그녀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가장 가늘게 채워도 그녀의 손목에는 헐렁 헐렁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보다 기쁜 것 같았다.

나 [그게 좋아?]

그녀 [예.]

나 [중고인데.]

그녀 [오빠 시계인걸요.]

그건 대답이 되질 않지만, 일단 기뻐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랜 이동에 지쳤는지 전철로 갈아 탄 이후 바로 잠들었다.

처음으로 보는 그녀의 잠자는 얼굴, 정말 귀여웠다.






219

여름 방학 전 실습이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재개했다.
예전부터 계속 일했던 목재상 일이었다.
나는 체력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일하는 곳 사람들도 자주 칭찬을 들었다.

아침 8시부터 시작해 오후 5시에 끝난다.
일하고 있다는 실감도 드는데다 점심 도시락이 나온다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일거리를 대량으로 해치운 뒤 사무실로 들어오니 사무원이 나한테 메모 용지를 하나 건네줬다.
여자애가 나보고 연락을 남겼다는 것이다.

안좋은 예감에 바로 메모 용지에 쓰여진 전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 전화 번호는 시내 종합 병원 내과 병동 것이었다.

일단 그녀와 할머니 이름을 꺼내자 얼마 안 있어 그녀가 전화를 바꿨다.

나 [무슨 일이야?]

그녀 [할머니가 입원, 했어요.]

미묘하게 평소랑 목소리가 달랐다.
아침부터 몸상태가 안좋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래서 일단 병원에 가보시라고 했는데 결국 그대로 입원하게 됐다고.

나는 일단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사장한테 사정을 설명한 뒤 조퇴 허락을 받았다.
옷 갈아 입을 시간도 아까워 작업복 그대로 병원에 갔다.






249

할머니는 응급실 한켠 침대에 링겔을 꽂은 채 누워있었다.
침대 옆에는 그녀가 앉아 있었다. 
나는 얼른 그녀 옆에 갔다.

그녀 [미안해요. 그게.]

나 [괜찮아.]

그녀 [탈수 증상이래요.]

나 [응, 의사한테 들었어.]

그녀 [아르바이트...]

나 [걱정하지마.]

그녀는 동요하고 있어선지 목소리가 떨렸다.
나까지 혼란에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침착한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나 [입원하나요?]

할머니 [모두들 너무 과장이 심하다니까. 이정도는 괜찮은데.]

탈수 증상 자체는 심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예방 삼아 우선 링겔을 맞고 며칠 입원하며 건강 진단을 받기로 했다.
복지과 사람이 금방 달려와서 의사랑 협의한 결과, 병원비는 일체 생활 보호 비용으로 처리했다.

딱 좋은 기회니까 일단 입원해서 하루 경과를 지켜보고 이상이 없으면 검사.
그리고 하루 더 입원해서 이상이 없으면 퇴원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그 동안 그녀가 혼자 집을 봐야 하는 걸 걱정하셨다.

할머니 [저 아이를 부탁해도 될까?]

나 [예, 저한테 맡겨 주세요.]

그녀는 아이 취급한다고 싫어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군소리 없이 받아 들였다.
역시나 평상시랑 뭔가가 달랐다.

그녀 [할머니...어쩌면 좋을지...]

나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어.]

나는 아무 근거도 없지만, 그렇게 위로해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없으니까 식사는 함께 하기로 했다.
태국쌀을 사용한 볶음밥과 양파 수프.
처음으로 그녀가 만들어준 밥을 먹었다.

내가 맛있다며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는 그제서야 간신히 기쁜듯이 웃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내 방에서 시간을 함께 했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 안절 부절 못한 것이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그녀 [...여기 있어도 되나요?]

나 [응?]

그녀 [...오늘 혼자서는 못 잘 거 같아서...]

지금껏 혼자서 자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무섭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함께 자기로 했다.

밤 10시 쯤해서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일단 목욕을 하기 위해 그녀는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나도 샤워를 마쳤다.

그녀는 11시쯤 되서 돌아왔다. 잠옷은 체육복에 티셔츠.
흥분할 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비누 냄새에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 [이불 가져왔어?]

그녀 [여기.]

그녀가 가져온 건 베게 하나뿐이었다.
설마 같은 이불 안에서 자자는 걸까?
농담일테지.

나는 그때까지도 그렇게만 생각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긴 하지만 아직도 보호자와 같은 심정이었다.

나 [좁을 텐데.]

그녀 [...에헤헤, 괜찮아요.]

그녀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자포자기 같은 심정으로 함께 자기로 했다.
그녀가 불을 완전히 끄는 걸 무서워 했기 때문에 스탠드를 가져다 켜기로 했다.
낡은 스탠드라 별로 밝지 않지만 서로의 표정이 보일 정도는 됐다.

누워 있자니 그녀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방에서 함께 앉아 있을 때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내 가슴 위에 손을 올리더니 내 몸을 감싸 안듯 몸을 밀착했다.

몸의 오른쪽 절반에 그녀의 온기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그녀의 체온에 심장 박동이 조금씩 올라갔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조금 떨어지려고 하니 그녀가 손에 힘을 줘 버텼다.

그녀 [...떨어지지 마세요. 무서워.]

나 [무서워?]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내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 안았다.
그녀는 얼마 안 있어 잠들었다.
하지만 나는 심장 뛰는 소리에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251

새벽녘 간신히 쪽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 나절 그녀가 먼저 일어나 날 깨워주었다.

일단 그녀에게 예비 열쇠를 건네줬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할머니가 없는 동안 내 방에 와 있어도 된다는 것 이외에는.

하지만 그녀는 그게 굉장히 기뻤던 것 같다.
내가 준 열쇠를 양손으로 쥐고 방긋이 웃었다.
그녀는 학교, 나는 아르바이트.
어느 쪽이나 끝나고 나면 병원에 가기로 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 잠시 빠져 나와 할머니의 상태를 보러갔다.
할머니는 식사를 하고 휴게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여러가지 검사가 많아 귀찮기도 하고 소독약 냄새 때문에 코가 망가질 것 같다는 말도 했다.

할머니 [그 아이가 함께 자자고 하지 않든?]

나는 깜짝 놀랐지만 정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나 [예, 그랬습니다. 미안합니다.]

할머니 [아니, 내가 사과해야 될 일이지. 어릴 때부터 응석만 받아주며 키워온 터라 버릇이 없어.]

할머니는 잠시 말을 끊고 내 손을 잡으셨다.

할머니 [자네가 있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할머니 [혹여 내가 가게 되면, 그 아이를 부탁하네.]

나 [맡겨 주세요. 꼭 행복하게 만들겠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할머니 [고마우이.]

여러가지로 할 말은 많았지만, 결국 거기서 끝내기로 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가니 그녀가 마중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준 예비 열쇠를 건네 받아 그걸 열쇠 고리에 걸어서 다시 건네줬다.

그녀 [이거 받아도 되나요?]

나 [받아주면 고맙겠어.]

평소 그녀는 장식품 같은 걸 가지고 다니지 않는 편이라 꽤 기뻐보였다.
그 날은 더운 데다 배달 일이 많아서 빨리 씻고 자기로 했다.

그녀는 전날처럼 누워서 내 몸에 딱 달라 붙었다.
그리곤 어느새인가, 안심한 듯 깊게 잠들었다.

창문 너머로 내리 쬐는 달빛에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그녀가 아직 아이 같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보호자, 나는 그녀의 보호자.

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 자신을 추스렸다.






294

입원 검사까지 한 결과 알게 된 건, 할머니가 아주 아주 건강하다는 것 뿐이었다.
탈수증상은 부업을 시간도 잊고 너무 열심히 하는 바람에 생긴 거라고 했다.
할머니는 병원 밥이 너무 많아서 전부 먹느라 고생했다며 농담을 하셨다.

할머니는 집에 돌아오시자 마자 부업 일을 다시 시작하셨다.
그것 때문에 할머니가 그녀가 조금 다퉜다.

그녀는 한동안 맥이 쭉 빠진 것처럼 보였다.
평소 병원 가기를 싫어하던 할머니가 병원에 갔다가 바로 입원.
그 사실 만으로도 그녀는 굉장히 긴장했던 것 같다.
내 방에 엎으려 푹하니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 [괜찮아?]

그녀 [예,]

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 [별일 없어서 다행이야.]

그녀 [걱정해서 손해봤어요.]

나 [그래, 손해봤네.]

그녀 [에헤헤.]

그동안 조금 무리해서 웃는 것 같았는데, 간신히 평소와 같은 웃음 보였다.
나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 [오빠가 있어주는 거, 정말 고마워요.]

할머니랑 똑같은 소리를 했다.

그녀 [믿고 있어도 될까요?]

나 [뭐?]

그녀 [병원에서 할머니한테 했던 말.]

할머니가 이야기 해준 걸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응.]

그녀는 바로 앉아 양손을 뺨에 갔다 댔다.

그녀 [...에헤헤, 그럼 믿을게요.]

나 [그래.]

그녀 [약속이에요.]

나 [응.]

그녀는 이제야 나를 타인이 아닌 의지할만한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런 걸 생각하니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뭐라 표현할 길 없는 무게감을 느꼈지만, 그것까지 포함해 그녀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날은 평소처럼 저녁 10시에 돌아갔다. 그녀는 돌아가진 전,

그녀 [또 묵어도 되나요?]

대답하기 곤란했지만, 거절할 수도 없어서 결국 좋다고 말했다.

그녀 [에헤헤, 역시 아버지 같아요.]

아무 것도 아닌 말이지만, 우리 둘은 서로 서로 쑥쓰러워 했다.






300

7월말, 그녀와 할머니가 이사하는 걸 도왔다.
복지과 사람의 권유로 시립 주택에 입주하기로 한 것이다.
생활보호대상자 중 고령자와 의무 교육 대상자는 우선 순위가 높기 때문에 금새 차례가 돌아왔다.

입주할 수 있는 걸 알게 되자 그녀보다 할머니가 먼저 나한테 말을 해줬다. 
시립 주택 집세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집세 절반 이하였다.
그러니까 현재 사는 아파트 집세에 전기세나 수도세까지 포함하면 거의 몇만엔이나 아낄 수 있다.

나 [그럼 이사하는 게 좋겠네요. 이사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할머니 [그런데 그 아이가 뭐라고 할지.]

나랑 만나고 나서 그녀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이제서야 평범한 여느 여자애와 같아졌다고 할 수 있다.
헌데 나랑 떨어져서 살게 되면 또 다시 옛날처럼 잘 웃지 않게 될 수도 있다.

할머니가 걱정하시는 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래서 이사하고 나서도 자주 만나 달라며 부탁을 받았다.
딱히 부탁 받지 않아도 자주 만날테니 걱정 하실 필요 없다고 말해드렸다.

이사하는 곳은 현재 아파트에서 걸어서 20분 거리.
놀러가고 싶다면 부담없이 오고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할머니 [자네가 그렇게 말해준다면 말 꺼내기가 쉽지.]

할머니는 우선 사정 이야기를 한 뒤 그래도 이사하는 게 싫다고 한다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장을 보고 돌아와 할머니랑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내 방에 있었다.
잠시 뒤 그녀가 내 방에 왔다.
그녀는 바로 옆에 앉아 내 얼굴을 올려다 봤다.

그녀 [가끔 놀러와도 되나요?]

나 [언제라도 와.]

그녀 [매일 와도 되요?]

나 [당연하지.]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이사할래요.]

나 [그렇게 할래?]

그녀 [에헤헤,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편해지신다면야.]

이렇게 마음을 맞추고 나니 다음 일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나는 입주 준비와 이사를 도왔다.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트럭을 빌린 덕분에 가재도구를 쉽게 옮길 수 있었다.

작은 TV랑 냉장고, 세탁기, 가스레인지, 장롱 3개, 테이블, 책이랑 학용품 조금.
부업 일하는데 쓰이는 재료. 상자 하나 분량의 식기와 생활 용품, 앨범 3권.

짐은 그것 뿐이었다.






306

그녀와 할머니가 살게된 시립 주택은 단층 연립주택이었다.
거주자는 5세대 정도로 전부 고령자 뿐이었다.

나와 그녀 사이는 이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집에 있는 휴일이나 퇴근 시간 대에는 그녀가 내 방에 왔다.
여름 방학이 되자 내가 아르바이트를 나가 있는 동안 거의 하루 종일 내 방에서 보내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나 실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그녀가 나를 마중 나와 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저녁 7시쯤되면 그녀를 바래다 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 받았다.
그러다 그녀가 내 방에 있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어느 순간 부턴가 그녀가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너무 늦는 바람에 허둥지둥 그녀를 바래다 준 것도 한 두번이 아니다.

내 방에서 그녀가 사는 시립 주택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
거기까지 가는 동안 근처에 사는 학교 친구나 강사랑 마주치는 경우도 잦았다.

나는 당당하게 그녀를 애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그저 쑥쓰러운 건지 그때마다 내 등뒤에 숨곤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로리콘이라는 소리를 들을 각오도 했었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가 또래보다 어려보인다는 것만 지적했을 뿐.
아직 중학생이라는 걸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와 함께 다니다 경찰한테 불려가기도 했다.
밤 10시 쯤이었다.
젊은 순경이 우리를 불러 세워 그녀의 나이나 내 입장 같은 걸 물었다.

일단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는 중이라고 말하니, 좀 더 빨리 데려다주는 게 좋다며 충고를 해줬다.
순경이 불러 세우긴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한 어조였기에 딱히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친구한테 했더니.

친구 [역시...그 사람 눈에도 범죄로 보이는 구나. 나도 그런데.]

그 말에 꽤 가슴이 쓰렸다.






310

우리 학교도 여름 방학이 됐지만, 나는 쉴 수 없었다.
실습과 보충 강의, 쉬는 날에는 아르바이트가 이어졌다.

실습에도 나름 익숙해졌다. 그래도 조심하려고 노력했다.
실습이 끝난 날, 쫑 파티를 한 뒤 집에 가 쉬고 있는데 배가 엄청 나게 아팠다.
결국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다.

간단한 검사를 받은 뒤 병명이 밝혀졌다.
급성 췌장염이었다.
바로 입원하기로 결정됐다.
나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비어 있는 큰방이 없는 지라 일단 2인실에서 링겔을 맞았다.
그녀한테 연락을 취한 건 오후 들어서 였다.
일단 지금 내 방에 있을 거라 생각해 집에 전화를 하니 역시나 그녀가 받았다.

입원하게 됐다고 말하니 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믿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 이름이랑 병실 호수를 말하니 곧장 와주겠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병원까진 자전거로 30분 거리.
일단 그녀에게 내 자전거를 타고 오라고 말했다.
이내 병원에 온 그녀는 내가 링겔을 3개나 맞고 있는 걸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그녀 [오빠한테 이런 건 안 어울려요.]

그녀는 할머니때처럼 동요한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나 그녀가 동요하면 멀쩡하다는 퍼포먼스라도 보일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내가 갈아 입을 옷이나 속옷을 적당히 챙겨왔다.
너무 갑작스런 일에 그런 건 생각도 못했는데 그걸 칭찬하니까.

그녀 [간병하는 건 익숙하거든요.]

그리고 어떤 병으로 언제까지 입원하는지 그녀가 물었다.
일단 가벼운 췌장염이기 때문에 1주일 정도 입원했다가 별 이상이 없으면 퇴원한다는 걸 전했다.
그러니까 할머니한테는 별로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공중 전화로 학교랑 아르바이트 장소에 전화해 사정을 설명했다.
학교는 실습도 끝났고, 학점이랑 출석 일자도 충분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장소에는 지금 일손이 딸리는 데다, 나 역시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쉬는 게 걱정됐다.
일단 저금해둔 돈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병실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녀 [부모님한테 전화 안해도 되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전화를 거니 우리 할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알았어, 알았어 하더니 곧 전화를 끊었다.

아무튼 전달은 해줄 테니까 이후 병실에 돌아가서 그녀의 명령에 따라 잤다.






311

그녀는 내 옷가지를 가져다 세탁을 한 다음 가져다 줬다.
그리고 저녁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말벗이 되주기도 했다.
세탁은 병원에서 내가 할 수도 있는데, 굳이 거기까지 해주는 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아버지는 일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퇴원할 때까지 내 방에 묵으면서 병수발을 들어주시려 했지만
그녀랑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다음날 바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랑 그녀의 할머니가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는 건 한참 뒤에 알았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직도 신경 쓰인다.

오후에 문병을 온 그녀가 나를 보자 마자 사과부터 시작했다.

그녀 [에헤헤, 미안해요.]

나 [응? 무슨 일 있었어?]

그녀 [들켰어요. 애인이라는 거.]

나 [뭐? 누구한테?]

그녀 [오빠네 어머니.]

그녀가 쑥쓰러워 하는 모습은 굉장히 귀여웠다.
헌데 그보다 우리 가족들이 알게 됐단 것에 조금 당황했다.
아직 이야기 하기에는 조금 이른 단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 [그래서, 뭐래?]

그녀 [그게...잘 부탁한데요.]

뭘 부탁했는지는 딱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나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어?]

그녀 [에헤헤, 그게...어떻게 오빠가 평소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시길래...]

더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다음에 가족들을 볼 것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지만, 그녀가 기뻐보였기 때문에 무시하기로 했다.
결국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테니까.

나는 기본적으로 무뚝뚝한데다 덩치도 커서 주위 사람들은 나를 튼튼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인지 문병하러 오는 학교 친구들은 하나 같이 겉보기랑 달리 비실이라며 나를 놀려댔다.

일단 간호학과에 다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문병오는 사람들은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남자도 섞여 있지만 대략 4분의 1 정도다.

그녀는 그게 꽤나 신경 쓰였던 것 같다.
여자애들이 문병을 하고 가면 이상하게 응석을 부려댔다.

사실 여자애들이 나를 문병오는 이유는 거의 9할 이상 나의 어린 애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부담스러워할 게 뻔하기에 일부러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르바이트 장소 사람들도 문병을 와줬고, 실습 지도를 해줬던 사람들도 문병을 와줬다.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아서 정말 큰 힘이 됐다.






323

4일동안 일체 음식을 먹지 않고 링겔로 때웠다.
5일째 이후부터 유동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기간 동안 천천히 몸을 길들여 퇴원할 수 있을 정도로 몸상태가 호전되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체중이 몇 킬로그램이나 빠졌다.

퇴원 하기 전에 영양사의 지도를 받았다.
한동안 단백질이나 지방이 들어간 음식을 삼가해라 말도 들었다.
병원 식사가 너무 무미 건조해서 먹고 싶은 게 잔뜩 있었는데...

그녀는 이 삼가해라라는 말을 절대 금지로 받아들였는지 이후 눈에 불을 켜고 내 행동을 감시했다.
장을 보러 가서도 내가 과자 같은 걸 손에 들면,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강하게 제지하곤 했다.
몇 번 저항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감시 아래 가석방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스킨쉽을 자제하고 있었다.
헌데 퇴원하고 난 그 날 저녁부터 내 손을 잡거나, 팔을 껴안거나, 몸을 기대거나, 품에 파고들거나.
예전보다 응석이 섞인 스킨쉽이 늘어났다.

나 역시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몰래 머리카락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의 온기, 체취에 젖어 있던 중 그녀가 내 배를 어루 만졌다.
조금 간지러워서 몸을 비틀었다.

그녀 [야위었네요.]

나 [괜찮아. 금새 다시 원래대로 될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그런데 고기 먹어도 돼?]

그녀 [에헤헤, 다 나으면요.]

가벼운 말투지만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나 반대되면 조금 반발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나 [하지만 너무 힘든걸. 조금만 먹으면 안돼? 응?]

내가 불쌍한 척 하는 연기를 하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마치 목 안쪽에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녀 [아, 안돼요. 의사가 말하는 건 들어야 해요. 어머니처럼 되면...안돼.]

그 순간 투정을 부리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나는 또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만 것이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는 반찬 투정같은 거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354

퇴원하고 5일이 지났다.
마침 휴일이었던 지라 아버지가 내 상태를 보러 우리 집을 방문했다.
물론 그녀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는 건 그녀의 어머니 49재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도 가벼운 인사 이외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이후 내 현재 상태나 입원 비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보험 적용이 된다는 말에 안심했다.

크게 무리는 하지말라거나, 취업 준비는 잘 되고 있냐.
그렇게 전화로 해도 충분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랑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내 근처에 정좌를 한 채 앉아 있었다.
이후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면 아버지가 집을 나서자 그녀에게 왜 정좌를 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녀 [에헤헤, 역시나 바른 모습을 보여야 된다고 생각해서요.]

너무 의식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할머니랑 아버지가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지 신경이 쓰이던 차, 그 날 저녁 전화가 왔다.

아버지 [그 아이, 굉장히 밝은 표정이 됐어. 그 아이 할머니가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더구나.]
아버지 [잘 했다.]

아버지는 이후 나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 마지막에,

아버지 [울리지 마라.]

나는 아버지의 말에 섞인 의미를 깨닫고 조금 가슴을 쓸어내렸다.
퇴원하고 1주일 뒤, 채혈 검사를 한 결과 완쾌 판정을 받았다.

이제 간신히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녀는 검사 결과서를 보고 나서야 내가 고기를 먹는 걸 허락해줬다.

우리는 함께 소고기 덮밥을 먹으러 갔다.
식사에 기름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생활 탓인지 위가 줄어들어 평소 먹던 양의 절반도 먹질 못했다.
그녀는 소고기 덮밥을 처음 먹는다고 했지만 맛있다면서 어떻게든 한그릇을 먹었다.

그녀보다 위장이 작아진 것 같아서 조금 충격 받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하지 않았다면 분명 고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1주일 동안 식단 조절을 도와준 그녀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이 답례, 꼭 할께.]

그녀 [아뇨. 벌써 돌려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받았는 걸요.]

그러니까 답례는 필요 없다고 했다.
이 후에도 어떻게든 답레를 하려 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입원 이후 우리 관계는 가족들 공인 상태가 되었다.
우리 어머니랑 그녀는 특히나 사이가 좋아져서 자주 전화 통화를 하곤 했다.






357

한달 뒤, 체중 역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미 졸업 논문도 끝냈고, 출석 일자나 학점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향후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취업 준비에 몰두하기로 했다.

일단 어디서 취업할지 결정하기 위해 부모님이랑 상의를 했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지금 사는 아파트 근처에서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굉장히 적당 적당 생각하고 행동했다고 본다.
물론 체격이 큰데다 힘이 세고 실무 경험이 있는 남자 간호사는 드무니까, 어디서나 환영 받았다.

이력서랑 건강 진단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받았다.
면접 결과도 꽤 좋았던 덕분에 결국 합격 했다.
해당 병원은 요양 시설도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일하고 싶은 장소 두곳 중 한곳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일단 나는 실무 현장에서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병원 일을 선택했다.
학교가 끝나 우리 집에 온 그녀에게 취직이 결정된 걸 보고했다.
그녀는 자기 일처럼 기뻐해줬다. 축하한다며 박수를 치던 중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았다.

나 [응?! 어?! 왜, 왜, 왜?! 왜 그래?!]

그녀 [아니 그게 저기...]

내가 당황해서 말을 건네도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그녀의 모습을 보았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 봤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취직해서 멀리 떠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합격해도 떠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긴장의 끈이 풀린 것이다.
그녀가 자리에 들어 앉아 움직이질 않기에 저녁 식사는 내가 만들었다.
식사를 하도록 억지로 부추기니 간신히 한숟가락, 두숟가락 식사를 하기 시작했ㄷ가.

나 [이제 괜찮아?]

그녀 [예...]

나 [나 정말 깜짝 놀랐어.]

그녀 [...미안해요.]

그녀는 힐끔 힐끔 내 안색을 살피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녀 [...앞으로도 제 옆에 있어 주실 건가요?]

아직도 눈에 띄게 불안함이 남은 음색이었다.

나 [응. 네가 날 지겨워할 때까지 있을 거야.]

그녀 [...지겨워 할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그제서야 활짝 웃었다.






359

졸업하기 전에 취직처가 정해져서 일단 안심했다.
하지만 연수를 시작하는 게 내년 2월, 그리고 현장이 투입되는 게 3월부터였다.
1달 안에 현장에서 쓸만한 녀석이 안 되면 짜른다.
그런 의미라고 생각했다.

졸업 시험과 자격증 시험은 절대 빠뜨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이상하게 위기감이 들질 않았다.
덕분에 평소에는 공부보단 아르바이트에 힘썼다.

일하고 돌아가면 그녀와 문앞까지 마중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해준 저녁 식사를 먹고, 잠시 시간을 보내다 그녀를 바래다 준다.

언제나 할머니가 이제 그냥 같이 살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는 법.

그녀는 확실히 집에 돌려 보내는 것이 내 의무라고 여겼다.
반드시 지켜야 될 마지노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단 부모님한테도 취직처가 정해졌다는 걸 알렸다.
그런데 칭찬이라곤 잘했다. 한마디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일단 취직하면 한동안 집에 못 올 테니까 얼굴 좀 내비치는 말도 했다.
꽤 오랫동안 친가에도 가지 않았고, 앞으로 자유롭게 쉴 수도 없으테니 연말에 집에 들르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어머니 [그럴 거라면 그 애도 같이 데려와.]

이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랑 그녀의 할머니한테 이야기를 해둔 상태라고 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어느 새 그런 이야기가 진행 중이었다는 걸 알고 놀랐다.
그녀와 함께 고향에 내려갈 걸 기대하며 얼른 연말이 되도록 기다리길 며칠.

갑자기 친척 아주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 아주머니 전화는 정말 오랫만에 ;았다.
내 취직 이야기며, 주위 친척 이야기로 한동안 환담을 나누나
아주머니가 그녀에 대해서 언급했다.

아주머니 [귀여운 아이래지? 너희 어머니한테 들었어.]

나 [아니 뭐...]

아주머니 [하지만 그러면 안돼. 노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나 [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주머니 [부모도 없는 애랑 깊이 사귀어 봤자, 손해 보는 건 너뿐이야.]
아주머니 [기회를 봐서 얼른 얼른 내버려.]
아주머니 [그런 애들은 언제고 꼭 나쁜 짓을 하게 되있다니깐.]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주머니 [안되겠네, 안되겠네. 신부감은 내가 찾아줄 테니까,]
아주머니 [밖에서 그렇게 헤프게 지내지 말고 우리 후계자나 되렴.]

나 [죄송합니다만, 이제 그만 끊겠습니다.]

아주머니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더니 사정을 설명해주셨다.

그 친척 아주머니는 아버지쪽 친척으로 직계 자식은 물론 손자까지 전부 여자뿐인지라 
본가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다.
그러다 내가 태어난 걸 알고는 초등학교때부터 끈질기게 양자로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계속 거절했지만 그쪽에선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그녀에 대해 알게 되고선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그녀 때문이라 생각한 것 같다.
나에게 그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충격을 받았다.
나에게 굉장히 잘해주던 분이라 더더욱.






367

우리 고향에선 장례식때 본가 남자 후계자가 분향을 도맡곤 했다.
내 또래 친척들은 전부 여자뿐이라 결국 내가 이 역활을 쭉 맡았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언제나 본가 아주머니가 이게 예법이라며 나에게 맡기곤 했다.
이게 다툼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아버지랑 아주머니는 계속 그 문제를 두고 싸웠던 것이다.

아버지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 날 이후 매일 저녁 마다 전화가 걸려왔다.
아주머니는 차를 사준다거나, 용돈을 많이 주겠다거나 하며 나는 설득하려 했다.
그러다 결국은

아주머니 [그 여자랑 헤어지고 고향에 내려와 본가를 잇도록 해.]

나는 단호하게 그녀랑 헤어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아주머니 [설마 그 애한테 씨라도 뿌린 거니?]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주머니는 나랑 그녀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확신한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아주머니 [뭐야, 그 애한테 약점을 잡혔나 보구나.]
아주머니 [내가 그 애랑 직접 이야기해볼께. 돈 몇푼 쥐어 주면 분명 떨어질 거야.]

중학생 여자애를 상대로 어른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건가.
나는 귀가 썩는 것 같았지만 다시 한번 더 돌아가지도 않고 본가를 잇지도 않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그녀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 그녀에게 해꼬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써는 아주머니를 멈출 방도가 없었기에 별 수없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며 이 문제를 아주머니에게 따지러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본가에서 의절 당했다.

아줌마는 본가에서 의절 당하면 분명 당황하며 용서를 구할 거라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에 아주머니는 일이 생각처럼 되질 않자 친척들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내가 이상한 여자한테 홀려서 집안이 엉망진창이 됐다고 친척 전부에게 선전하고 다녔다.
이에 다른 친척들이 나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사정을 찬찬히 설명하니 대부분의 경우 이해 해줬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이후 본가 아주머니는 친척들 사이에서 고립되었다.
같이 살고 있던 딸 부부도 자식들을 데리고 따로 분가해 나갔다.
이후로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는 일은 없었다.

이것이 불과 6일 동안에 일어난 사건이다.
솔직히 상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369

그녀와 그녀의 할머니를 데리고 우리 고향에 가는 것은 중지되었다.
우리 할머니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본가 아주머니에게 했던 것 때문에
마음에 부담이 되셨던지 몸상태가 나빠지셨기 때문이다.

일단 표면적인 이유는 그거지만, 사실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녀가 친가에 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본가 아주머니가 무슨 해꼬지를 할 지도 몰랐다.
결국 우리 어머니가 할머니 건강이 나빠져서 초대할 수 없게 됐다며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그녀 [아뇨, 괜찮아요. 할머니에게 몸조리 잘 하시라고 전해주세요.]

우리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계속 울었다고 했다.
본가 아주머니랑 나이도 가깝고 해서 친하게 지내셨던 만큼 이번 일로 마음 고생이 크셨을 것이다.
내가 아주머니를 설득할 수 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아주머니가 친척들 사이에서 고립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나는 재차 자신의 한심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한테는 비밀로 새벽녘 나 혼자 전철을 타 귀성했다.
나는 우리 할머니에게 이번 일 때문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할머니는 되려 자신때문에 이렇게 됐다면서 계속 사과했다. 
나는 괜찬다면서 할머니를 위로했다.

아버지랑 어머니한테도 미안하다고 했지만, 네가 사과하면 안된다고 혼났다.

아버지 [네가 해야 될 건 사과가 아니라, 그 아이를 지키는 거야.]

지금 아주머니도 저렇게 반응하지만, 언제고 이해해줄 날이 올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당분간 그녀를 이곳에 데려오는 건 자제하라는 말을 하셨다.
일단 내키진 않지만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부모님과 할머니에게 인사를 한 뒤 다시 집에 돌아왔다.
그녀가 우리 집을 방문 하기 돌아오긴 했지만 일단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 [어서와.]

그녀는 인사에 반응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오더니 바닥에 앉아 있던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왜 그래?]

그녀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 [...이거 평소랑 반대네.]

그녀 [가끔 씩은 괜찮잔아요.]

아마 할머니가 편찮으신 것 말고 다른 일이 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어떤 생각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은 건진 몰라도 그녀의 손길에 느끼고 있으니
그동안 있었던 마음 고생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상냥한 손길에 어느 샌가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울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그녀의 다정함이 가슴이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다.
언제 까지나 응석만 부려선 안된다고.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간신히 시험 공부에도 착수할 수 있었다.






408

연말은 그녀와 그녀의 할머니랑 함께 보냈다.
따뜻하게 데워진 코타츠 안에서 귤을 까먹으며 보내는 평범한 연말.
그리고 그녀와 근처 신사에 가서 첫 참배를 했다.
중간에 친구들을 만나 신년파티에도 참가했다.
물론 그녀도 함께.

내가 입원했을 때 그녀는 문병와준 여자애중 몇명이랑 사이가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번 신년 파티에도 함께 참가할 수 있었다.

같은 과 여자들은 나랑 동갑이거나 조금 연상들 뿐이다.
그래서 그녀를 여동생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 관계가 학교 이외에 나랑 할머니 뿐이라는 건 문제가 있었다.
사람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늘어난 것은 그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남자 두명이랑 냄비 요리 뒷처리를 하고 있던 중, 그녀가 여자들 몇명이랑 함께 방을 나섰다.
한동안 나가 있다 들어온 그녀는 묘하게 빨간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물어보면 위험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아무 말 없이 내버려 뒀다.

그러다 새벽 4시쯤 되서 그녀가 졸린지 꾸벅 꾸벅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먼저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택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녀는 돈이 아깝다며 그대로 걷기로 하였다.
그녀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바깥에서 이런 행동을 별로 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나 [좀 전에 무슨 이야기 했어?]

그녀 [예?]

나 [방에서 나갔을 때.]

그녀 [아...그게...]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나 [응?]

그녀 [오빠랑...진도, 어디까지 나갔냐고...]

그 바보들, 애한테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그녀 [하, 하지만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확실히 말해뒀어요.]

그녀는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 말 역시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어.
지금쯤이면 내가 애인한테 아무 것도 못하는 겁쟁이라는 이야기를 술안주 삼아 떠들고 있겠지.

나한테도 나름대로 평균적인 욕구는 있다.
하지만 그녀를 상대로 그런 욕구를 드러내는 건 해서 안될 짓이라고 생각했다.
무섭게 꺼려지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오빠라는 역할에 안주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있어선 그게 불만이었겠지만.






416

졸업 시험, 취업 연수, 자격 취득.
너무 숨가쁘게 흘러가서 고생했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추억이 없다.

아버지에게 보고 겸 안부 전화를 하던 중 지금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이사해야 된다는 말을 들었다.
아파트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토지를 팔 거니까 퇴거 해달라고 아버지측으로 연락이 왔다고 했다.
저쪽에서 보증금 반환과 이사 비용 및 일정량의 보상금을 제시한 것 같다.

아버지나 나, 둘 다 이 일로 골치 썩이는 건 싫었기에 제안을 받아 들였다.
정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 그 아파트에서 이사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니,

그녀 [...그럼 멀리 떨어져 사는 건가요?]

아니나 다를까, 또 불안한 표정이 됐다.

나 [아니, 이 근처에서 알아볼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고 말해주니 그제서야 안심했다.
휴일에 그녀와 함께 부동산 사무소를 돌아다녔다.
일단 입지 조건도 문제지만 내 월급으로도 집세를 낼 수 있을 만한 곳이 우선이었다.

나 [아, 모르겠다. 미안한데 내 대신 선택해주지 않을래?]

그녀 [제가요?]

나 [응, 나보다는 정확할 거 같거든.]

나는 쇼핑이든 뭐든 결정하는 걸 잘 못했다.
그때까지 살던 아파트도 학교 근처에 적당히 싼 곳을 찾다가 선택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적당히 행동한 덕분에 그녀와 만날 수 있게 됐지만.
정말 이상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시간을 들인 끝에 선택한 것은 작은 맨션이었다.
평소 학교에 가면서 자주 봤던 건물이었다.
방은 아담하고 남향이라 밝았다.
집세는 조금 비싸긴 했지만, 바로 결정했다.

또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트럭을 빌려 가재 도구를 옮겼다.
그녀가 사는 시립 주택이 한층 가까워졌다.
걸어서 몇분 거리.
할머니도 가까이 사니까 든든하다고 말했다.
여러모로 좋은 선택을 한 것 같다.

왕래가 편해지자 그녀와 밤늦게까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본격적으로 동거하는 게 좋겠다며 농담을 하셨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던 지라 나는 이미 반동거 상태라고 생각했다.






419

신년이 시작되고 얼마 후 정식으로 직장에 근무하게 되었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고령자 병동이었다.
근무를 시작할 때까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장소에선 빠뜻이 까지 일을 해줬다.
마지막 날, 아르바이트 장소 사람들이 송별회를 해줬다.
사장이 나한테 직접 술을 따라주며 그간 고생했다고 말했다.

병원 근무가 시작됐지만, 일의 종류만 달라졌을 뿐 힘쓰는 건 똑같았다.
일단 직장 특성 상 여성들이 대부분인지라 거의 인간 리프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나르던 물건보단 가벼웠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별 문제없었다.

휴일은 비정기적으로 바뀌었지만, 야근이 있는 만큼 쉬는 날은 보다 많았다.
그렇게 되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학생때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경험이 거의 없었던 지라 나는 짬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중학교 3학년.
진로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나나 할머니는 이미 그녀를 설득하는 걸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녀가 취직하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도와주자.
이제 그 정도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상담했더니 크게 혼났다.

아버지 [네가 그 아이를 포기하면 어쩌자는 거냐. 너만은 그 아이를 포기하면 안되잖아.]

우리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9살 때 돌아가셨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큰형의 뒷바라지를 받아 국립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자신과 닮은 처지의 그녀에게 동질감 같은 걸 느끼셨던 것 같다.

일단 어머니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눠 설득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직업 알선소에 데리고 갔다.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적다.
이 마저도 노동 강도에 비해 받을 수 있는 임금은 한정되있다.
그 임금으론 가족 두사람의 생활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는 현실을 깨닫고 그대로 절망했다.

그녀 [평범한 생활은...어렵네요.]

일하고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것.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평범한 생활.
그 무렵의 그녀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생활보호를 받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빨리 생활 보호 대상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취직을 서둘렀던 것이다.

생활보호 = 가난.
가난 = 어머니의 죽음.

그녀 마음속에는 이런 방정식이 성립되있었다.
보통 생활을 하고 싶다.
그 소원를 이루고 싶어 초조해하고 있었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함께 있을 때 그녀는 내 무릎 위에 올라 앉아 혼자 고민에 빠지곤 했다.
뭔가 말을 걸고 싶어도 그녀가 골똘히 생각하는 걸 보고 있자니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저,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불안한 감정을 애써 달래면서.






422

며칠 뒤 그녀가 학교에 가기 전 우리 집에 들렀다.

그녀 [앞으로 4년만 더 생활 보호를 받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결심을 알았다.

나 [응, 힘내자.]

그녀 [예.]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녀가 학교에 가는 모습을 배웅했다.
그 때는 무엇보다 그녀가 더이상 고민하지 않게 된 게 기뻤다.

그날은 쉬는 날 이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그녀의 할머니를 보러갔다.
할머니는 굉장히 안도한 것 같았다.
나한테 고맙다며 인사를 했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니 나는 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저 아버지의 힘을 빌리기만 했다.
내가 한 거라곤 고민하는 그녀 옆에서 우왕좌왕 거리기만 한 것 뿐이다.

이런 내가 감사 인사를 받아도 되는 것일까.
물론 할머니에게 그런 말을 하면 분명 쓸데없는 걱정을 끼칠 게 뻔하니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의 실책은 역시 내 마음속 깊이 남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는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으로 왔다.
며칠 전과 비교해 확실히 마음의 부담이 줄어든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뻤다.

그녀 [조금이라도 좋은 직장을 찾고 싶으니까, 고등학교에 가겠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낸 결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집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평소랑 달리 기분이 좋은지 할머니는 말이 많이 하셨다.

할머니 [네 엄마도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결혼했단다.]
할머니 [그래서 너희도 그럴 생각인 게 아닌가 생각했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나 역시 걱정의 원인 중 하나였다는 걸 알고 할머니에게 사과했다.

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결혼이라거나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을 거에요. 그렇지?]

나는 무심코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식사를 멈춘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귀끝까지 빨개진 걸 보니 얼굴 상태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할머니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렴. 늙은이 농담이니까.]

이 후 식사가 끝나고 나와 그녀는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가 앉자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 [결혼...조금은 생각해본 적 없나요?]

나는 아직 그렇게 구체적인 건 생각해본 적 없었던 지라 말을 흐렸다.

나 [...으음...그게, 아직.]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셨다.

그녀 [...저는 조금 생각해본 적 있어요.]

그녀의 중학교 3학년.
이제 조금만 있으면 16살이 된다.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이.

그녀 [하지만 역시 직장을 구해 스스로 돈을 벌 수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 [그래, 그때까지 함께 힘내자.]


그녀 [예, 열심히 해요.]

그녀의 말에 나도 지금처럼 적당히 있어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445

진학이 결정된 이상 그녀도 수험생이 된다.
보호자 면담이라든지 진로 지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진로로 선택한 고등학교는 그녀의 성적이라면 일단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학비에 대한 것도 복지과 사람과 상담하니 생활 보호 자금으로 융통이 된다고 말했다.
덕분에 진학에 관련된 금전적인 부분이 전부 해결되었다.

그녀 가족은 항상 뭔가 불안이나 걱정을 껴안고 생활했었다.
그로 인해 생활하는데도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헌데 바로 그런 걱정거리나 불안이 일절 없는 일상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녀나 할머니도 조금이지만 여유를 갖게 되었다.

할머니가 성묘를 함께 가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또한 그녀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목소리에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할머니가 여유있는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나도 일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아버지가 취직하면 1년은 금방 지나간다고 말했는데, 그건 확실히 옳은 말 이었다.

일단 연수중이었지만 보너스 만큼은 확실히 나왔다.
그 보너스와 학생때 모아둔 저금을 모아 자동차를 샀다.
물론 중고였다.

차를 선택해준 건 역시 그녀.
황색 자동차,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에 든 것 같기에 사기로 했다.

일단 활동 범위가 넒어지긴 했지만 나는 일로 바쁘고, 그녀는 수험 준비로 바빴다.
결국 장거리 운행을 처음 한 건 연말에 그녀랑 그녀의 할머니를 우리 친가에 데려갔을 때 뿐이다.

어머니가 몇달 전부터 꼭 데려오라고 성화기도 하고, 작년에는 데려가지 못했기에
이번 만큼은 어떻게든 함께 가기로 했다.

간호부장한테 사정 사정 연말부터 정월까지 이틀 연속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가기를 꺼려했지만,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그녀 [걱정이네요.]

나 [어째서?]

그녀 [오빠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거잖아요.]

나 [그래서?]

그녀 [애인의 부모님을 만나는 건데, 당연히 걱정이 되죠.]

그녀는 나랑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 [실수하면 안되는데.]

생각보다 훨씬 진지해보였던 지라, 뭘 실수하면 안되는 거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446

출발하는 날 오후 그녀와 할머니를 데리러 갔다.
그녀는 척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는 도중 대체 왜 그렇게 긴장했냐고 물어보니 우리 할머니랑 만나는 것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별로 신경쓸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잔뜩 긴장해서인지 납득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 아버지랑 어머니가 문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그녀를 우리 할머니에게 소개했다.

할머니랑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그녀는 등골을 쭉 편 채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가 긴장한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올 거 같아서 굉장히 고생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우스갯소리를 몇 번 하자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는지,
마지막에 나를 잘 부탁한다는 할머니의 말에 웃는 얼굴로 대답할 수 있었다.
함께 방에 짐을 가져다 놓는 중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 [...하아, 다행이다.]

나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니까.]

그녀 [...하지만 이걸로 확실하게 가족 전체 공인을 받은 거 잖아요.]

기쁜 말이기도 했지만 묘하게 부끄럽기도 했다.
귀성 하긴 했지만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이틀동안 놀기로 했다.
자정이 지나 나는 그녀와 단둘이서 새해 첫 참배를 하러 갔다.

거기서 고향 친구들이랑 우연히 마주쳤다.
우리는 친구 무리에 합류해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거기서 친구들한테 그녀를 소개했다.
이쪽 친구들한테서도 범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친구들은 따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녀에게 내 옛날 이야기를 마구 늘어놨다.
그녀는 내 옛날 이야기을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나는 친구 녀석들이 언제 내 치부를 드러낼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하도 오랜만이라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새벽 4시가 지났다
친구들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던 그녀도 어느샌가 까무룩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를 들쳐 업고 가게를 나섰다.

친구 [나중에 결혼식하면 초청장 보내라!!]

친구들 중 한명이 등너머로 그렇게 소리쳤다.
 
나 [알았어! 축의금이나 두둑하게 준비해둬!]

한동안 걷던 중 그녀가 내 볼을 콕콕 찔렀다.

그녀 [언제 하나요?]

나 [...]

그녀 [언제?]

나 [...조금만 더 기다려.]

그녀 [에헤헤.]

그녀는 내 목에 팔을 돌린 채 다시 잠들었다.
목덜미에 닿는 그녀의 한숨이 너무나 따뜻해서 조그만 우회해서 귀가했다.






447

연휴를 끝내고 돌아가기 전 아버지랑 할머니가 그녀에게 세배돈을 건네줬다.

그녀 [세배돈 받은 거 처음이에요.]

단둘이 있을 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한번도 체험한 적 없는 일에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다면 작년에 건네주는 건데.

그녀 [그건 좀 이상한데요.]

그녀는 가볍게 웃더니,

그녀 [애인한테서 세배돈을 받는 건 좀 이상해요.]

이렇게 단정된 이상 앞으론 세배돈을 줄 수 없다.
할머니나 아버지는 줬는데 나만 줄 수 없다니, 조금 분했다.

아버지랑 할머니가 준 세배돈은 합쳐서 무려 3만엔.
그녀는 이렇게 큰돈을 가진 건 생전 처음이라고 했다.

뭔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함께 사러 가자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데리고 함께 은행에 갔다.
그녀는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어 돈을 저금했다.

그녀 [이걸로 OK에요.]

나 [뭐가 OK 인거야?]

고등학교 들어가면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건데, 그때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저금하는 거라고 했다.

그녀 [아르바이트를 하는 쪽이 취직하는데 유리한 것 같아요.]

그녀는 굉장히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한테 있어서 고등학생 시절은 그저 친구들이랑 바보같이 놀았던 기억 밖에 없다.
허나 그녀에게 고등학교 생활은 취직 하기 위해 발판을 마련하는 기간이었다.

외형은 또래보다 어린 중학생이자만 생각하는 건 20살 넘은 나보다도 어른스러웠다.
그 갭이 너무 커서 한때는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나 [그런데 수험 공부는 잘 하고 있어?]

그녀 [예,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나 [걱정 안 해도 돼?]

그녀 [예.]

나 [정말로?]

그녀 [...일단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몇번 물어보고 나서야 조금 본심을 털어놨다.
일단 선택한 고등학교는 그녀의 성적이라면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만 응시자 인원수나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 그 점이 불안한 것 같았다.

그녀 [그래도 열심히 해야죠. 모두들 응원해 주고 계신데.]

확실히 응원하고 있긴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할 필요는 없다고 전했다.

그녀 [거기다 그 학교, 교복이 예쁜걸요.]

나 [어? 설마 그거 때문에 선택한 거야?]

그녀 [에헤헤, 조금은 그래요.]

진학을 선택할 때까지 과정이 힘겨웠던 만큼 학교를 선택하는 기준 정도는
그렇게 가벼운 이유로도 괜찬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471

그녀는 2월 초순부터 같은 고등학교에 시험을 치기로 여자애를 집으로 불러 공부를 하곤 했다.
예전에 그녀에게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 봤을 때는 대충 말을 돌리며 대답을 회피했었다. 

하지만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부터 학교 생활도 즐거워진 것 같았다.
일단 공부하기 위해 아이들을 불러 모으지만, 결국 잡담으로 빠지는 일도 많았다.
그녀의 할머니는 종종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나는 너무 무리해서 공부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충고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는 간혹 친구들을 데리고 내 방에 오기도 했다.
친구들이 나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날보고 난 뒤 덩치가 크다던가, 무뚝뚝해서 무서워보인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시험 치기 전날 뭐가 갖고 싶냐고 물었다.

그녀 [교복이 갖고 싶어요.]

그녀는 중학교 교복을 매만지면서 추억에 잠기곤 했다.

그녀 [이 옷, 이제 더이상 입을 수 없겠네요.]

그녀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사준 옷.
여러가지로 많은 추억이 담긴 옷이지만 이제 졸업하는 이상 더이상 입고 다닐 순 없었다.

그녀 [제가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정말 괜찮나요? 교복은 비싼데.]

나 [괜찮아. 그 정도는 사줄 수 있어.]

그녀가 나에게 물건을 사달라고 한 건 그게 처음이었다.
교복이라면 굳이 사이즈를 맞출 필요가 없으니까 선택하기 쉬웠다.

합격 발표 당일.
우연히 쉬는 날이었기에 그녀와 그녀의 친구랑 함께 발표를 보러 가기로 했다.
여자애 4명을 인솔한 채 걸어서 고등학교까지 갔다.
그녀와 친구들은 긴장하거나 하지 않고 화기애애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녀 [올해는 모집 인원수랑 응시자 수가 거의 맞아 떨어져서, 불합격하는 사람이 3명뿐이래요.]

우리들에게 있어선 희소식이지만, 떨어지는 사람에게 있어선 정말 억울한 소식이기도 했다.
발표 게시판에는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 이름이 게재 되있었다.
우리들이 합격 확정에 기뻐하는 사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남학생이 한명 엉엉 울고 있었다.
정말 안됐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 남학생이 그녀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남학생 [야! 생활보호나 받는 거지주제에! 너 때문이야! 너 같은 게 있으니까 내가 떨어진 거야!]

남학생은 머리에 피가 올랐는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그걸 주위에 있던 남자들이 말리는 사이,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발표장을 뒤로 했다.
나는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나는 딱히 해줄 말이 없어 그저 그녀를 꼭 끌어 안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는데 그녀의 친구가,

친구 [다음은 내가 껴안을래요~]

나 [안돼.]

친구 [에에~ 쫌팽이~]

나 [내 애인이니까, 넌 다른 사람 알아봐.]

친구 [예, 예. 잘 알았어요~]

우리가 만담을 벌이는 걸 보고 간신히 그녀가 웃었다.
그녀가 합격한 것 그리고 그녀에게 좋은 친구가 생겼다는 것.
나는 두가지 의미에서 기뻤다.






473

그녀에게 욕을 퍼부었던 남학생은 학교에서도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생활 보호 대상자 주제에 세금 낭비할 생각말고 직장이나 구해라.
이번에 합격한 것도 생활 보호 대상자 우대를 받은 걸 테지.
너 같은 게 있으니까, 나 같은 일반인이 피해를 입는 거다.

아마 그녀가 입학을 취소하면 자신에게 자리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나한테 그런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괴롭힘을 당한다는 걸 알게 된 건 함께 합격 발표를 보러갔던 그녀의 친구 제보 덕분이었다.

반 아이중에서도 그 남학생의 언동을 위험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그녀 주위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고.
담임 교사도 이걸 큰일로 보고 남학생을 따로 불러 주의를 주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 담임이 아닌 다른 반 선생님이 반 아이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면박을 줬다고 했다.

선생님 [저 아이는 자기 힘으로 합격한 거야!]
선생님 [자기 실력도 모르는 얼간이 주제에 어딜 남탓을 하려 들어!]

그렇게 호통을 치자 결국 남학생은 아무 말도 못했고, 이 후 조용해졌다고 한다.

그녀는 참을성이 강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괴로운 일을 당했는데도 나한테 내색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걸 눌러 참고 있었다니.
나는 그렇게나 의지할만한 녀석이 못되는가 싶어 굉장히 슬펐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게 분했던지라 그녀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마자 교복을 맞추러갔다.
치수를 재고 시착을 하면서 그녀는 굉장히 즐거워보였다.
그녀가 넥타이 묶는 방법을 모르다고 하기에 가르쳐 주기로 했다.

방에 돌아와 그녀에게 넥타이 묶는 방법을 가르쳐 주던 중 은연중 물었다.

나 [그 외에 또 필요한 거 있어?]

그녀 [그 외에?]

나 [진학 축하 선물.]

넥타이를 이리 저리 매만지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그녀 [뭐든지 괜찮아요?]

나 [그래.]

그녀 [에헤헤, 그럼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좀 더 애인답게 대해주세요.]

그녀는 친구한테, 3년 이나 사귀었는데 아무 일도 없다니 이상하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내가 반론을 늘어 놓기도 전에, 단언했다.

그녀 [꼭 들어주셔야 해요?]

나 [...뭐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애매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다만 웃었다.






478

그녀 할머니의 부탁을 받아 중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직장 동료에게 부탁해 어떻게든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애인의 졸업식에 참가한다는 건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졸업식은 담담하게 진행됐다.
끝난 뒤에도 사진을 찍거나 하면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녀, 그녀의 할머니랑 함께 사진을 찍기로 했다.
카메라 든 그녀의 친구가 히죽 거리며 말했다.

친구 [좀 더 들러 붙어 주세요~]

이미 충분히 가까웠지만 좀 더 가까이 붙기 위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둘러 껴안았다.

친구 [얼굴 좀 더 내려 주세요~]

무릎을 조금 굽혀 내 얼굴을 그녀의 얼굴과 같은 위치에 두었다.

친구 [자~ 거기서 볼에 키스~]

그녀가 굉장히 기대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지만 물론 키스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

친구 [다음에 몰래할 거 다 아는데~]

어느 샌가 그녀의 친구들은 물론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있었다.
졸업식 특유의 분위기에 감화되어서 인가, 사람들은 떠들썩하니 웃으며 우리를 쳐다봤다.
구겅거리 취급이었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우리는 오후 늦게 학교를 나섰다. 특별한 날이니까 저녁 식사는 회전 초밥집에서 먹기로 했다.
그녀는 와사비처럼 매운걸 잘 못 먹기 때문에 점원에게 와사비 양을 줄여 달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나와 그녀를 쳐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할머니 [정말 자네한테는 하나 하나 감사해도 모자를 정도야. 정말 고마우이.]

나 [아뇨.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 [너도 받기만 하지말고...음, 그렇지. 뽀뽀라도 해주는 게 어떠니?]

할머니의 농담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 [으, 응!]

그 자리는 그렇게 끝났다.
그 후 내 방에서 함께 쉬고 있던 중 그녀가 말했다. 

그녀 [저기...에헤헤, 키스, 하는 방법 가르쳐, 주실래요?]

나 [가르쳐 달라니.]

그녀 [해본 적 없는 걸요.]

나 [뭐...나중에 가르쳐 줄께.]

나는 그때까지도 여동생을 어르는 오빠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 어깨를 가볍게 톡 밀었다.
입이 삐죽 나온 걸 보니 내 대답이 불만스러웠던 것 같다.

결국 그녀의 화를 풀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480

고등학교 입학 당일, 안타깝게도 나는 야근이 잡혀 있었다.
그녀가 실망할 게 뻔했지만 결국 참석할 수 없었다.
다음날 집에 돌아와 한숨 눈을 붙였다.
그러다 그녀가 내 얼굴을 쓰다듬는 감촉에 눈을 떴다.
한숨만 잔다고 생각한 게 어느새 저녁 6시가 되있었다.
그녀는 내 얼굴에 삐죽 삐죽 불거나온 수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녀 [안녕하세요.]

나 [안녕.]

아직도 졸렸지만 그대로 일어나기로 했다.
그녀는 아직도 교복을 입고 있었다.
교복 맞추러 갈 때 같이 가긴 했지만 실제로 입은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옷만 바꼈을 뿐인데, 중학생 교복을 입었을 때보다 어른스럽게 보였다.
청색 윗도리에 붉은 체크무늬 스커트
붉은 바탕에 하얀 빗금이 그려진 넥타이.
공립학교 교복치고는 꽤 세련된 교복이었다.
그녀가 예뻐서 선택했다고 할 만했다.

중학때보다 덜 엄격해서인지 지금껏 묶고 다녔던 머리카락을 풀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견갑골 아래까지 내려왔다.
자신이 교복을 입은 모습을 나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 [오늘부터 고등학생이에요.]

나 [응, 축하해.]

물론 그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굳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저녁식사를 먹으러 그녀의 집으로 갔다.
가는 도중 그녀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

교실에 같은 학교 출신이 많아서 지내기 편하다는 것.
그때 합격 발표를 함께 보러온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
등등등.

그녀 [둘러대기 난감해서 그냥 애인이라고 했는데...괜찮을까요?]

고등학생이랑 사회인, 굉장히 큰 벽이다.
나쁘게 보려 하면 얼마든지 나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걸 계기로 그녀가 친구를 사귈 수 있다면 오명쯤이야 얼마든지 뒤집어 쓸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누워 있는데 그녀가 내 팔을 베고 같이 누웠다.

그녀 [에헤헤, 오늘 부터네요.]

나 [응?]

그녀 [잘 부탁할게요.]

나 [뭘?]

그녀 [진짜 애인 대접.]

나는 지금까지 애인으로써 대접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받아 들이지 않은 듯 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눈을 들여다봤다.
다만 조용히.
그 큰 눈망울에 내 얼굴이 잡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499

...키스...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도 겁쟁이 같은 결론이었지만, 그게 내 최선이었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 쓸어 내리며 물었다.

나 [키스, 해도 될까?]

그녀 [예.]

그녀는 머뭇대지도 않고 바로 답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게 조금 웃겨서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톡 찔렀다.

나 [수줍지도 않아?]

그녀 [지금껏 계속 기다렸는 걸요.]

나 [...그렇구나.]

그녀는 내 무릎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한쪽 뺨을 내 가슴에 대고 눈을 감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키가 컸지만 아직도 내 품에 쏙 들어왔다.

그녀 [키스, 해주세요.]

품안에서 체온이 점점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하얀 피부가 점차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평소 부끄러운 말이나 행동을 하면 언제나 시선을 돌리곤 했지만,
그 날 만큼은 그저 내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나는 나대로 너무 긴장해서 호흡하는 것도 힘들었다.
어떻게든 침착해 보이려고 애썼다. 
내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접촉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눈이 감고, 몸에서 힘을 뺐다.

가능한 천천히, 입술만 가져다 대는 키스.
그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몇 초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입술을 떼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에헤헤.]

그녀는 내 셔츠 자락으로 얼굴을 숨긴 채 쑥쓰러운 듯이 웃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평소처럼 응석부리는 그녀를 토닥이던 중 그녀가 말했다.

그녀 [...혀, 입에 넣는다고 생각했는데.]

나 [그런 키스, 하고 싶었어?]

그녀 [예.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그러니까!]

나 [하고 싶다면 다음에 해줄께.]

그녀 [해주세요.]

나 [어?]

그녀 [꼭이에요?]

나 [...아, 그래.]

이런 이야기는 농담으로라도 입에 꺼냈다간 취소하기 힘들다.
앞으로는 향후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기로 했다.






501

그녀는 고등학생 생활이 시작되자 마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잡았다.
월수금 3일 동안은 학교 끝나고 나서 2시간 정도.
토요일, 일요일에는 6시간 일해서 한달에 4만엔을 받는다.

사전에 복지과 사람과 협의를 했는데, 이걸 할머니 부업 수입과 합치면 지원금액과 거의 같았다.
결국 두 사람의 수입이 일부 공제에서 전액 공제로 바뀌게 되었다.
일을 하는데도 수입이 줄어들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서 투덜투덜 거리고 있으니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 [지금껏 도움을 받았는걸요. 이제 줄일 때도 됐어요.]

아르바이트 장소는 지역 특산품을 사는 가게였다.
그녀가 맡은 일은 계산대를 지키는 것과 상품 포장이었다.

첫날에는 꽤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앞으로 잘 해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둘째날부턴 다리가 아프다면서 칭얼거렸다.
힘쓰는 일을 경험해본적 없는 그녀에게 6시간동안 계속 서서 하는 일은 꽤 힘들었던 것 같다.
드물게 약한 소리를 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게 기뻤다.
그녀는 괴로운 일, 슬픈 일을 될 수 있는 한 숨긴 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헌데 투정이라고 해도 이렇게 나를 의지해주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니 꽤 기뻤다.

나 [그럼 내가 마사지 해줄께. 일단 목욕하고 와.]

일단 그녀를 집에 보내 탕에서 몸을 풀게 했다.
간호학을 배우긴 했지만 마사지하는 방법은 거의 모른다.
실습하러 갔을 때 조금 배운 게 다 였다.
그러니까 일반인이랑 다를 게 없었다.

막상 말은 했지만 그녀에게 마사지를 하려니 조금 어떻게 해야 될 지 짐작도 안 갔다.
일단 아프지 않도록 천천히 장딴지를 비볐다.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 전체를 사용해서 응어리를 풀도록 비볐다.
처음에는 조금 아파하는 것 같았지만 점차 근육의 긴장이 풀렸는지 기분 좋다는 말을 했다.

꺼림직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일단 외간 남자가 다리를 어루만진 거니까.
다음날, 할머니에게 마사지를 했다는 보고를 했다.

할머니 [그래도 다행이네. 애인한테는 제대로 응석부리는 것 같으니까.]

내 앞에서는 내색도 안한다면서 할머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507

힘든긴 했지만 열심히 노력하길 1달.
그녀는 마침내 첫월급을 타게 되었다.
자랑스러운 듯 월급 명세서를 나에게 보여줬다.
자신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증표라는 듯이.

그녀 [내가 일해서 번 돈이에요.]

나 [그래. 네가 번 돈이야.]

그녀 [에헤헤, 이제야 간신히 이뤄졌어요.]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월급 전액을 할머니에게 건네줬다.
할머니는 전부 받을 수는 없다면서 그 중 1만엔을 용돈으로 다시 그녀에게 건네줬다.
그녀는 그때까지 그렇게 큰 돈을 용돈으로 받은 적이 없었다.
당황하긴 했지만 결국 할머니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도 지갑에 만엔짜리를 들고 다니다 흘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걸 전부 동전으로 바꿨다고 했다.

그 날 저녁, 그녀가 나한테 소고기 덮밥을 사줬다.
지금껏 먹었던 어떤 소고기 덮밥보다 맛있었다.

이후 아르바이트 일에 익숙해졌는지 힘들다고 칭얼거리는 일은 사라졌다.
하지만 종종 다리나 등을 마사지 해달라고 조를 때가 있었다.
처음 마사지를 받은 날 기분 좋게 잘 수 있었기 때문에 버릇이 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마사지 하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로 결심했다.
마사지 하는 방법이 실린 책자를 구입하거나 하는 방법을 아는 동료에게 부탁해 배우기도 했다.

노력한 보람이 있었던지 그녀는 내 마사지 받으면 몸이 굉장히 편해진다고 말했다.
그녀가 언제나 기뻐해줬기 때문에 마사지는 내 취미 겸 특기가 되었다.
 
이때쯤해서 그녀가 자기 집에서 자는 것보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날이 점차 늘어났다.
집에 돌아갈 때는 식사를 하러 갈 때 정도.
할머니는 점차 독립할 준비를 갖춘 것 같다면서 오히려 기뻐했다.

너무 경계를 안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만큼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일단 애인보다는 보호자.
최소한 그녀가 교복을 입고 있는 동안은 내가 그녀의 보호자라는 걸 잊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가끔씩 그녀가 응석부리며 스킨쉽을 할 때는 이성의 끈이 끊어져 나갈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의 오빠, 나는 그녀의 오빠, 나는 그녀의 오빠.
이렇게 자신을 세뇌하며 버텼다.






509

일에 익숙해지니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나는 게 빨라졌다.
편하지만 변화가 없는 매일 매일, 눈치챘을 때는 어느샌가 1달이 부쩍 지나가 있었다.
허나 그런 일상이 너무나 즐거웠다.

일을 끝내고 그녀의 집에 가면 할머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맞이해주셨다.
조금 있다 그녀가 집에 오면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를 끝내고 목욕을 마치면 할머니는 잠자리에 드셨다.
그리고 그녀는 내 방에 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사지를 받지 않는 날은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기도 했다.

서로 보고 싶은 채널을 보기 위해 티격태격하는 것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둘 다 형제가 없기 때문에 꽤 신선한 체험이었다.
나는 뉴스랑 스포츠 중계 밖에 보지 않는다.
반면 그녀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싶어 했다.
사실 나랑 그녀가 보는 방송은 시간대가 겹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실 티격거리는 것도 그녀의 응석 중 하나 였다.
그만큼 나한테 마음을 열어준 증거일까, 그녀는 응석꾸러기가 되었다.

확실하게 진짜 애인 대접, 어른 대접해달라고 말하면서 하는 짓은 어린애 같았다.
중학생 때보다 어리광을 부렸다.
물론 평상시 그녀는 이렇게 응석도 부리지 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든 일이 있으면 속내에 숨기고 꾹꾹 참는 편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렇게 응석을 부리는 건 나에게 있어선 되려 기쁜 일이었다.

내 무릎 위에 앉는 건 익숙해졌지만, 내가 누워 있을 때 올라타는 건 아무래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내가 졸릴 때 내 몸 위에 올라타서 딱 들러 붙는다.
일단 입으로는 무겁다. 덥다 하면서 떼어 내려고 하지만, 나름 꽤 부끄럽기도 했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그녀 나름대로 나를 유혹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키가 작다는 것을 꽤 신경 쓰곤 했다.
허나 가끔씩은 나와 체격 차이가 꽤 난다는 걸 이용해 품안에 파고들거나 
팔베개를 조르거나 해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513

그녀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대학 시절 같은 과 여자 친구에게서 초청장이 왔다.
나는 물론 이거니와 그녀하고도 친한 사이였다.
친구의 남편은 상당히 연상인 사람으로 한번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나랑 그녀는 지금껏 한번도 결혼식에 참석한 적 없었기 때문에 흔쾌히 참가하기로 했다.
일단 꽤 먼 곳에서 결혼식을 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숙소를 정하는 건 그녀에게 맡겼다.
그녀가 입고 갈 옷을 산 뒤 준비 끝.

결혼식 당일 식장 앞에서 같은 과 동기 여자들이랑 합류했다. 
합류 하자마자 여자애들이 그녀를 화장실에 데리고 갔다.
조금 있다 돌아온 그녀는 엷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가볍게 루즈를 바른 그녀의 모습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그녀는 내 손을 잡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때는 호화로운 결혼식이 부러웠던 걸까,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 자리에서 친구가 임신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그것이 부러웠던 것이다.
친구는 그녀의 내색을 깨닫고,

친구 [두 사람도 어서 빨리 결혼해서 애 낳아. 축하해줄 사람 많으니까.]

피로연 분위기 때문일까, 주위 사람들이 합창 하듯 내 결단을 촉구했다.
4년이나 사귀었으면서 지금껏 그런 내색 한번 보이지 않은 댓가가 돌아왔다.
나는 술기운을 빌어 소리쳤다.

나 [일단 약혼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술이 굉장히 약한 편인데도 주위 사람들 권유로 주는 대로 퍼마셨다.
그녀도 한잔 마셨는지 눈이 빨개졌다.

2차가 끝나고 풀려났을 때는 다리가 취청거려 걷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숙소에 도착한 건 12시가 지났을 때였다.
평범한 비지니스 호텔방이었다.
우리는 둘 다 자리에 앉아 서로를 쳐다봤다.

그녀 [이제 와서 농담이었다고 하는 건 없기 에요?]

술에 취하긴 했지만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나 [걱정하지마.]

그녀 [에헤헤.]

나 [대답해줘.]

그녀 [예? 대답?]

나 [난 대답을 듣지 못했어.]

그냥 맹숭맹숭하게 말하는 건 재미없어서 심술을 부렸다.

그녀 [아! 할게요! 꼭 하고 싶어요!]

일단 가족들한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적당한 시기에 가족들을 전부 모아 발표하기로 약속했다.
오는 길에 싸구려지만 반지를 두개 샀다.
그녀와 나의 약혼 반지.
누가 보면 들킬지도 모르니까 내 방에 있을 때만 하기로 했다.

식도 올리지 않은 초라한 약혼이지만 행복했다.






517

약혼을 하고 며칠 뒤, 그녀는 갑자기 머리카락을 잘랐다.
등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을 귀가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잘랐다.

나름대로 어른스러워 보일까 싶어서 이미지를 바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꽤 인상이 바뀌었다.
예전보다 훨씬 밝고 활기찬 인상이 되었다.

그녀는 바람이 귓전을 스칠 때마다 간지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귓볼을 가볍게 만져주니 몸을 움찔 움찔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한동안 그녀의 반응을 보며 즐기던 중 그녀가 발끈했다.
그녀도 내 귓볼을 어루만졌지만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 있어선 단순한 이미지 체인지 였을 뿐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여자가 머리카락을 자른 다는 건 꽤 일이었던 것 같다.

분명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한 그녀의 친구들이 질문 공세를 퍼부었지만,
그녀는 결국 비밀을 지켜냈다.

누구도 모르는 두 사람만의 비밀.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묘하게 기분이 들떴다.

그 해 연말, 어떻게든 두 사람의 스케줄을 맞춰 귀성하기로 했다.
역시 그 날이 다가오니 긴장됐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다.






518

귀성 하자 마자 중요한 말이 있다면서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아버지, 어버니, 우리 할머니, 그녀의 할머니.
이렇게 네분이 앉아 있는 앞에 우리 두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 [저희, 약혼했습니다. 허락해주세요.]

아버지 [음, 두 사람이 좋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 없어.]

아버지의 한마디에 가족들 전부 우리의 약혼을 허락해줬다.
사실 예전에 귀성했을 때 우리 가족이랑 그녀의 할머니가 우리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우리가 약혼한다고 해서 반대할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친척들이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친척들도 나랑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사이를 축하해줬다.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게 기뻤던 걸까, 그녀의 얼굴에서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 떠나질 않았다.
떠들석한 술자리를 벗어나 화장실에 가던 중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 [난 또 너희들이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길래 애가 들어섰나 했다.]

아버지는 너털 웃음을 털어 놓았다.

아버지 [아직 손자볼 일은 없겠지?]

나 [...아직이야.]

아버지 [너무 앞서 나가지 마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되니까.]

아버지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520

딱히 알리지도 않았는데 내가 약혼했다는 소문은 동네 전체에 퍼진 것 같았다.
어디선지 모르게 친척들이 모여와 축하 인사를 하러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축하해준 건 아니었다.

친척들한테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했다간 친척들한테서 고립된다.
의절까지 당해놓고 아직까지 반성도 안 한 거냐.
등등등.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내가 못마땅해서라기 보단 아버지가 싫어서 하는 소리였다.

우리 아버지는 이 근처에서는 드물게 국립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다.
거기다 나름 고위 공무원이라 집안 살림도 넉넉했다.

주위 시골 친척들한테 있어서 그걸 질투해서 아버지를 싫어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결국 그 원망이 이번엔 내 약혼이 표출된 것이다.

주위 분위기도 있어서 시비가 붙거나 하진 않았지만, 
아버지를 좋아하는 친척들은 꽤 불편했던 것 같다.






521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덕분에 졸업하고 나면 정사원으로 일하는 게 확정되었다.
아르바이터를 섞어도 고작 10명 남짓 일하는 곳이었지만, 보너스도 나온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껏 성실하게 일한 것이 인정받은 것 같아 굉장히 기뻐했다.

그녀 [...저 아이를 갖고 싶어요.]

그녀는 쭈뼛 거리며 말했다.

나[...지금?]

그렇게 물어보자,
그녀 [졸업하고 1년 정도 돈 모으면요.]

일단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무리라며 말을 이었다.

그녀 [어머니가 20살에 저를 낳았으니까, 저도 20살에 엄마가 되고 싶어요.]

엄마가 되어 남편과 함께 아이를 기른다.
그녀는 정말 큰 꿈을 표방하는 것처럼 말했다.






522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정사원이 되어 첫 월급을 받은 날.
그녀의 가족은 생활 보호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그녀 [이제 간신히 평범한 생활이 시작됐어요.]

그녀는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생활비로 절반을 할머니에게 드리고 자신의 용돈은 1만엔.
나머지는 전부 저금했다.

그녀 [우리 아이를 위해서 하는 저금이에요.]

그 말에 공연히 쑥쓰러웠지만, 나도 함께 저금하기로 했다.
나와 그녀의 취미는 독서였다.
때문에 데이트를 할 때도 도서관이나 만화 카페에 가는 정도였기 때문에
돈을 낭비하거나 하는 경우도 없었다.
매달 조금씩 돈이 모이는 게 기뻤다.

평소처럼 집에 온 그녀에게 마사지를 해주던 중 이었다.

그녀 [...저금 아직 모자라지만...아이...만들까요?]

난 그녀의 갑작스런 말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 [저 이제 취직해서 돈도 벌고 있으니까, 아이가 아니에요. ...그렇죠?]

난 뭔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이제 그녀는 아이가 아니다.
그녀는 아직니까 나는 보호자.
이런 대전제가 단번에 날아갔다.

나는 결국 그녀를 아이나 동생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한명의 여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533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가 진정한 남녀 사이가 됐다는 것 외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결혼도 아직 안 했다.
다만 할머니가 혼자 살고 싶다고 해서 그녀의 거주지가 내 방으로 바꼈다.

나는 아직도 간호사로써 일하고 있으면, 그녀는 지금 가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할머니도 부업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거야 말로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고민이 있다면 최근 그녀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아이 만들기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내 직장 동료인 여자 간호사들이 그녀한테 여러가지 이야기를 불어 넣어서 꽤 곤란하다.



가까운 시일에 그녀 어머니 기일이 돌아온다.
매년 마다 그렇지만, 그때 그녀랑 함께 또 성묘를 하러갈 생각이다.

지금은 둘이서 가지만 언젠가 세 명이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현재 가장 큰 소망은 그것이다.





여기까지 내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그때도 이야기를 늘어 놓고 싶은데...괜찮으려나?


아무튼 난 이만 갈게.
모두 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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