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仁宗, 1515년 3월 10일 ~ 1545년 8월 7일 [재위 1544년 ~ 1545년] 조선의 제12대 임금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선조 宣祖, 1552년 11월 26일 ~ 1608년 3월 16일 [재위 1567년~1608년] 조선의 제14대 임금
일찍부터 여색을 탐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특히 후궁들의 횡포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몽진 도중 인빈의 가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어오는 바람에 의주로 도망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명에 혼자 도망가기 위해 망명을 요청하였다. 명은 일국의 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거절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명에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시위를 했다. 결국 명은 그렇게 오고싶으면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북경까지 건너오라고 무안을 줬고 선조는 그제서야 망명을 포기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 지원군이 선조앞에 도착했고 이여송은 선조가 보는 앞에서 조선의 대신들의 뺨을 후려치면서 어찌 나라를 이지경까지 만들었냐며 타박을 주었으나 선조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하다시피 궤멸된 수군, 고작 13척의 패잔선으로 왜군 대함대 133척을 격퇴시켜 서해로 북상하려는 왜적을 저지한 명량해전 전쟁의 물길을 돌려 자신의 왕위를 포함하여 왕실의 안전은 물론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위대한 승전(勝戰)을 두고 선조는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데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직분을 수행한 것일 뿐 큰 전공(戰功)을 세운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또 선조는 이듬해 4월에는 "이순신에게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상을 주는 방법을 강구해보라."는 괴상한 소리도 늘어놓았다. 반면 비변사에서 "원균은 수군의 주장으로서 수군을 전멸당하게 했으므로 그 죄는 모두 원균에게 있습니다. 그 부하들에게도 죄가 있으면 벌을 주고, 공이 있으면 상을 주어 군기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이런 말로 원균을 두둔했다. "원균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 이산해와 윤두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선조 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 임금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깜짝 놀라며 슬퍼했을까? ‘선조실록’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지 닷새 뒤인 11월 24일 밤, 이 정보를 명나라 군대 쪽에서 입수한 승정원이 급히 왕에게 보고했다고 기록한다. 소식을 들은 왕은 “오늘은 밤이 깊었다”며 “내일 승정원이 알아서 하라”고만 한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어딘가 귀찮아하는 기색까지 보인다. 며칠 뒤 명나라 장수 형개가 왕 앞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애석해 할 때도 선조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의 은덕이 고맙다’며 세 번 머리를 조아리더니 명나라 등자룡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조정에서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이순신이 재능을 한껏 펴보지 못했다”며 애통해 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이었다. 선조가 그렇게 감싸고 돌면서 원균의 패전 책임을 묻지 않자 사초(史草)를 담당하는 사관(史官)조차 "머리가 터질 것 같고 뼈가 녹아버리는 것 같다."면서 이렇게 선조의 어처구니 없는 처사를 비판했다. 조선시대 인물중 가장 용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조선왕조 타도를 기치로 봉기한 이몽학(李夢鶴)과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김덕령이 가담했다’는 이몽학의 일방적 선전 외에는 아무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김덕령에 대해 선조는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면서 직접 김덕령에게 따져 묻는다.
김덕령은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졌지만 스스로 변론하는데 말씨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신에게는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모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삼 년 상을 치르지 않고 칼을 집고 분연히 일어나 왜군과 여러 해 동안 싸웠지만 작은 공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충성도 못하고 불효만 했으니 만 번 죽어도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제가 모집한 용사들이 지금 감옥에 있는 데 그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마시고 쓰도록 하십시오.” 김덕령의 그 말을 전해들은 선조는 노하여, “저놈이 형벌을 가벼이 여겨 오히려 태연하니 참으로 역적이다. 쳐 죽여라!”고 명령했다. 김덕령은 선조 29년(1596) 8월 6차에 걸친 혹독한 형장(刑杖)을 당하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비정상적인 성격의 주인공이었다. 자신이 적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이었다는 사실에 콤플렉스도 있었다. 의심과 시기심이 많고 독선적이었다. 심지어는 아들인 광해군에 의해 왕좌에서 밀려날까봐 의심하다 못해 죽이려고까지 했던 참으로 엽기적인 임금이었다. 조선의 장수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 거기에 백성들에게 인기까지 높았던 이순신을 자신의 왕좌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이는 일종의 피해망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선조는 김덕령처럼 이순신도 죽여 없애려고 했을것이다. 선조가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살펴보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이순신이 실각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요시라의 반간계 때문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밀명을 받은 요시라의 공작에 김응서와 권율이 놀아나고, 조정도 넘어갔다. 이에 따라 1597년 1월 23일부터 조정에서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2월 4일 사헌부의 주청에 따라 이순신의 체포가 결정됐던 것이다. 아니, 사헌부의 주청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선조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군 수뇌부의 음모에 발맞추어 이순신을 실각시키고 조선 수군의 전멸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선조는 훗날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자 제문(祭文)에 이런 구절을 써 넣었다.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충무(忠武)라는 무관(武官) 최고의 시호도 순국한지 45년 후인 1643년(인조 21년)에 받게 되었다.
인조 仁祖, 1595년 12월 17일 ~ 1649년 6월 17일 [재위 기간: 1623년 ~ 1649년] 조선의 제16대 임금
반청 사상을 고수하던 아버지 인조와 갈등하던 중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던 소현세자는 손톱밑이 시커멓게 변하고 얼굴은 검게 변하며 죽었다. 전혀 확인되지 않은 병이었다. 독살이라는 소문은 퍼져나갔지만 인조는 이것에 대한 조사를 피하려 했으며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몸과 봉림대군(효종)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효종 孝宗, 1619년 7월 3일 ~ 1659년 6월 23일 [재위: 1649년 ~ 1659년] 조선의 제17대 임금
나르시즘에 빠져서 항상 거울을 보고 웃고 계셨다고 한다. 한마디로 왕자병. 인조를 닮아 얼굴이 곱상하고, 예뻤는데 본인도 그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거울을 끼고 자기 얼굴보며 만족하며 웃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효종의 무덤은 영릉으로, 건원릉 서쪽 능선으로 정해진 후 계획대로 안장되었다. 한창 추울 때 능이 조성되어 왕릉조성 작업은 처음부터 부실하게 이뤄져 다음해 장마 때 석물에 균열이 온다. 곧바로 석물을 고치긴 했으나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 다시 석물이 무너져 이듬해 능을 다시 대대적으로 고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아들 현종은 재위 15년 내내 거의 매년 아버지 무덤 수리를 해야 했다. 결국 현종은 사망하기 일 년 전인 1673년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여주 땅으로 이장을 한다.
현종 (조선의 제18대 임금) 顯宗, 1641년 3월 14일 ~ 1674년 9월 17일 [재위: 1659년 ~ 1674년]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숙종 肅宗, 1661년 10월 7일 ~ 1720년 7월 12일 [재위 1674년 ~ 1720년] 조선의 제19대 임금
따뜻한 온돌방에서 신하들이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려서 얼음장에서 일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 관우의 팬이였다고 한다. 숙종은 개인적으로도 관우가 보여준 충의로운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중에 들어왔지만 별 관심을 못받던 관우신앙을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관우에 대한 제사를 국가 주관 제사로 격상시켰고 자신이 직접 제사에 참석해서 제삿상에 술을 따르고 네 번이나 절을 올릴 정도로 열렬히 관우를 숭배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서종태가 항의했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이순신에 대해서도 평가를 높였는데 사후에 현충이라 호를 내리고, 현충사의 제문을 직접 지었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에서 처음 보네.'< 현충사 제문> 숙종
숙종 14년(1688)에 장희빈이 아들을 출산하자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한 적이 있다. 이 때 사헌부의 말단 직책인(심부름꾼) 소유들이 장희빈 어머니의 가마를 보고는 이를 적발해 가마를 부쉈다. 그 가마는 옥교라는 지붕이 달린 여성용 가마로, 당시 법에 의하면 정 3품 이상 관리의 여자 가족이나 탈 수 있었다. 즉, 소유들이 원칙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들은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유를 전부 때려 죽이라고 명했다. 신하들이 뒤늦게 말려 중단되기는 했지만, 결국 소유 중 2명은 맞아 죽었다.
영조 英祖, 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 [재위 1724년 ~ 1776년] 조선의 제21대 임금
손자 정조 못지 않게 대단히 학업에 열중한 군주로 경연*에서 태종, 세종, 정조와 같이 경연관들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몇 안 되는 군주 중 한 명. 왕권이 매우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학업에 열중한 군주이기도 하다. 태종이나 세조도 똑똑한 축에 속했지만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냐면서 경연을 때려쳤고 연산군은 말할 것도 없으며 광해군도 여러 옥사 이후로 왕권이 강해지자 경연을 매우 게을리했다. (*경연(經筵)은 왕에게 유학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진강(進講)해 드리고 논의를 받는 학술제도) 반면 성격은 급하고 감정적이고 눈물이 많은 타입이었다. 욕도 잘해서 면전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신료들에게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냉혹할 때는 냉혹함을 보여주기도 잘했다. 아버지 숙종처럼 신하들을 거의 노예수준으로 취급하는 타입이기도 했는데,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 신하들은 밥도 안 먹고 쫄쫄 굶는데, 자기 혼자서 식사때가 되면 바로 밥을 먹으러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조 正祖,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재위 1776년 ~ 1800년] 조선의 제22대 임금
할아버지인 영조와 함께 조선 최후의 부흥기를 이끈 임금, 정조대왕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저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했으나 오래도록 계속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밤마다 시험 ㄷㄷ) 학식, 인품, 외모 딸리는건 건강이 약했다..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규장각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이 다시 열렸다.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정조는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끊임 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는 끊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안에 술을 한가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것과 맞먹는다고 한다. 정조 20년, 이정용이라는 유생이 술에 취해 늦은밤 궁궐 담장아래에서 잠에 들었다 잡혀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했던 정조는 요즘 유생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데 술을 좋아한다고 칭찬을 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생들이 숙박하던 잡촌과 집춘영은 벽을 맞대고 있으니 이정용은 잡촌에서 잤던거라는 궤변을 펼쳐서 오히려 상까지 주어서 보냈다.
헌종 憲宗, 1827년 9월 8일 ~ 1849년 7월 25일 [재위 1834년 - 1849년] 조선의 제24대 임금
엄청난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고,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상당히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고종 高宗, 1852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 [재위: 1897년 ~ 1907년] 조선의 제26대 국왕, 대한제국의 건국조, 초대 황제 광무제
고종 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전신(전보총국)의 등장과 함께 최초 궁궐에 가설된 전화를 경험한 고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 이 생각에 고종은 상당한 고액의 전화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 홍릉에 설치한다. 그 곳은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씨)의 무덤. 전화의 설치가 끝난 직후 고종은 아침마다 그 곳으로 통화를 걸어 말을했다.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 죽은 민씨에게 안부를 전했고 매일아침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멀리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까지는 못 하는구나." (고종의 말) 그럼에도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는 그 날에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