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태로 간간히 관심을 보이시는 분들이 계셔서 배경지식을 조금 공유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중동 무슬림들이 서구사회를 증오하는 원인인 나라입니다.
무슬림과 서구사회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연표방식으로 정리해보죠
11세기말~13세기 : 십자군전쟁 (서구사회와 이슬람사회의 첫 갈등으로 여겨집니다)
17세기~19세기 : 식민지시대
-17세기중반까지 이슬람사회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던 서구사회가 처음으로 문명적으로 앞서게 됩니다. 이슬람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게 된 시점이 이쯤으로 보고 있죠.
1862년 :
a.모지스 헤스(유태인) 『로마와 예루살렘(Rome and Jerusalem)』발간,
- “유태인들은 조국의 재탄생과 함께 종교적 재능에 새로운 힘을 부여받고 예언적 영감의 감화를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
다른 유태인 및 일부 기독교도들에게 열광적인 지지을 받음
b. 시오니즘 운동 시작
- (영국 국교회 지도자중 한명인 샤프테스베리 백작이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복귀는 신약 성서의 예언들이 실현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지함)
1894년 : 드레퓌스 사건 발생
-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A.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 의해 종신유형의 판결을 받았다.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혐의를 짙게 하였던 것
1896년 : 시어도어 헤르츨(유태인) 『유태인 국가(The Jewish State)』를 발간
-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유태국가를 세울 것을 제안함.(성경에서 주님이 주신 산지가 팔레스타인이라고 믿음. 조상이 살았던 곳, 모세 등등 종교적인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1890년대~1900년대 : 시오니즘운동으로 대대적인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 시작유태인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민족주의자들의 반감이 높아지면서 자신들만의 국가가 필요하다는 욕구가 강해지고, 헤르츨이 주장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오니즘 운동이 불붙기 시작. (1914년 약9만 명이 이주)
1917년 : 벨푸어 선언- 영국 정부(1차대전 이후 당시 팔레스타인을 관리하던)가 영국 외무장관 A.J. 벨푸어를 통해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는 것을 공개적으로 지지함.
- 밸푸어 선언에는 ‘비유태계 사람들(아랍인)이 유태인들에게 종교적 민족적 침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 시오니즘 운동의 재정적 후원자는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문입니다. 그들이 영국정부를 움직였죠.
1920년 : 산레모 국제회의(1차대전 이후 오스만투르크와의 강화조약을 확정하는 국제회의)- 벨푸어 선언을 정식으로 채택
1922년 : 국제연맹이 팔레스타인지역을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결정- 이후 유태인들의 이주를 영국이 관리했고, 영국은 아랍인들의 분노와 경제를 쥐고 있는 유태인들 사이에 끼어서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분노를 받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유태국가가 세워지면 자신들의 입지가 유태인들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우려했죠.
1929년 : 팔레스타인인들의 폭동이 수차례 발생 -유태인 이주민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두려워해서 이를 관리하는 영국을 대상으로 일으킨 폭동들이 발생합니다.
1939년 : 영국정부 유태인의 연간 이민자 수 15,000명으로 제한-팔레스타인인들의 폭동에 영국이 조금 양보하자 이번에는 유태인들이 불만을 폭발합니다.
1946년 : 예루살렘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 사건-이민자 수 제한에 불만을 가진 과격파 유태인들이 영국 주요 인사들이 묵고 있던 호텔을 폭파해 수 십명이 사망합니다.
1946년~1947년 : 영국 철수 및 UN의 팔레스타인 지역 분할 결의안 채택
-양쪽 등쌀에 못버티고 영국은 UN에 중재를 부탁하고 팔레스타인 지역 관리를 포기하고 떠납니다.-UN은 두 민족에 반반 나눠살도록 영토를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지만, 전체 영토중 곡창지대의 80%, 공장지대 40%를 포함한 전체 영토의 65%를 유태인에게 할당하는 불공정한 분할이라 팔레스타인 민족은 이 결의안을 거부합니다.
1948년 :a.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선언
- UN결의안이 합의되지 않았지만, 유태인들은 결의안을 받아들이면서 일방적으로 건국을 선언합니다.
- 이 날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나라를 잃은 날이기도 해서 ‘알 나크바(재앙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b. 제1차 중동전쟁
- 유태인의 일방적인 건국선언은 이슬람국가들을 자극했고, 주변국인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레바논 등 아랍국가 연합군이 이스라엘에 선제공격을 가합니다. 이집트의 폭격으로 시작한 이 전쟁은 20여 일간 공격에서 이스라엘인들인 예루살렘을 지켜냈고,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준비하던 중에 이스라엘 군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수도를 동시에 폭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납니다.
-제1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전쟁보상으로 이집트의 영토 일부까지 받아내면서 원래 UN의 결의안보다 50%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합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점령지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 90만 명이 집단 탈출을 시도하면서 난민의 역사가 시작되고, 총 35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국가를 잃고 주변국가들을 떠도는 난민신세가 됩니다.
1956년 ~ 1973년 : 제2,3,4차 중동전쟁
- 1차 중동전쟁 이후 아랍의 강국인 이집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영토, 경제권, 정치 등의 이유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입니다. 각 전쟁의 자세한 사정은 팔레스타인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생략하지만, 전부 아랍쪽이 대패하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과 어린아이들의 피해가 발생하고, 현재의 영토모습이 만들어집니다.
1987년 ~ 1993년 : 제1차 인티파다- 인티파다(Intifada)는 아랍어로 ‘항쟁’을 뜻하는 말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규모 항쟁을 뜻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1차 인티파다는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한 사건을 개기로 시위가 벌어졌고, 이 시위가 서안지구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들의 시위방식은 ‘노동자 파업’, ‘세금 납부거부’, ‘피켓행진’ 등 평화적인 방법이었으며,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무기가 없어 유일한 무기는 ‘돌멩이’를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에 정규군과 탱크를 보냈죠.- 1차 인티파다는 2000년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에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시위자
2000년 : 제 2차 인티파다-오슬로 협정이후 사실상 점령상황이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라엘 총리가 이슬람의 주요 성지인 ‘알 아크사’에 군대를 대동하고 방문하는 사건을 개기로 다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2004년 11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대통령이 죽으면서 이 시위는 흐지부지 끝나버립니다.-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은 약 400만명인데,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약 6천여 명이 이스라엘에 의해 살해 되었습니다.
좀 길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실거라 믿고 씁니다. 이 연표 이후로도 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3차 인티파다가 일어날뻔 한 사건도 있었고, 가자지구에 구호품을 전달하려는 봉사자들이 이스라엘의 거부로 못들어가자,
바다를 통해 직접 들어가려고 했고, 이스라엘은 적십자 깃발까지 달고 있는 봉사자들의 선박에 전투기로 폭격을 가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적십자 마크가 붙은 물자트럭에 바주카같은 무기로 공격한 사진도 인터넷에 떴었죠(물론 이런 사건은 국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오바마대통령이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이스라엘에 욕먹고 발언을 철회하기도 했죠
e토렌트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