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가 의심된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어르신을 모시고 오는 경우는 숱하게 보았지만, 김 할머니처럼 혼자서 오셔서 당신이 치매라고 하는 경우는, 특히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더 드물었다.
새카맣게 염색한 머리에 마치 소녀처럼 생글생글 웃고 계셨지만, 뿌리에는 백발이 고르게 솟아 나 있었고, 얼굴살이 없고 주름진 까닭에 차트에 적힌 일흔보다는 조금 나이 들어 보였다. 총기 있고 촉촉한 눈동자만은 충분히 젊어 보였으나 그마저도 처져있는 눈꺼풀이 대부분을 덮고 있었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시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치매라는 진단명을 갖고 오시다니, 요즘 중요한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답답해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치매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단다.
고흥에서 장녀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막내 동생을 낳고, 이틀만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열 다섯 살 때부터 광주 솜틀집에서 일하며 남동생 학비를 보냈다.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스물 셋에 시집가서 자녀 넷을 키우면서 악착같이 모아 십 년쯤 일한 후 마침내 자기 이불집을 차렸다. 광주 어딘가 지금도 있다는 그 이불집 덕분에 자녀들 시집 장가 가는 데 조금은 도와줄 수 있었다. 몇 년 전, 아들이 사업을 한다고 해서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사업 자금을 보태 줬는데, 결국 평생 모은 그 돈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모르고, 삼 년 전부터 서울 아들 집에 살게 됐다. 할아버지는 계시는지 여쭙자 “저기” 하며 그냥 웃을 뿐이다.
“침해, 그거 안 걸리는 약만 주면 되지 그라고 물어본다요? 그거 걸리면 사람도 못 알아보고 똥오줌 못 가리고 그런다며? 난 아직 그라지는 않는디 기억력이….”
침. 해. 라고 똑 부러지게 발음하시는 것을 보니 어디서든 읽은 것이 아니라 듣고 기억하신 것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치매라는 글자를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학교를 다니셨는지 궁금했지만 검사 하기 전에 여쭤볼 경우 주눅이 들 수도 있어서 검사 후에 여쭙기로 했다.
사실 기억력도 전에 잘 알던 사람 이름이 금방 생각나지 않고 몇 초 있다가 생각난다거나, 장을 보러 가서 사오려 했던 것을 잊고 사오지 못할 때가 있다 정도였다. 그래서 일단 간이 정신상태 검사(K-MMSE)1부터 했다. 김 할머니는 시간과 장소에 대한 인식이 분명했고, 말씀과는 달리 기억력도 좋았다. 자신 없어하시면서도 100에서 7을 차례로 빼는 계산마저 그 연세의 다른 어르신들보다 훨씬 잘 하셨다.
끝으로 읽기 능력을 보는 검사 차례였다. 문제지에 크게 써 있는 ‘눈을 감으세요’를 읽어보라고 했더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역시 김 할머니는 글을 못 읽으시는 것이다.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고, 글을 가르쳐준 사람도 없지만 어떻게 숫자는 배워서 돈도 세고 가게도 하셨다고. 다만 단 세 글자 당신 이름만 쓸 줄 아셨던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감으세요’라는 그 쉬운 글자를 못 읽었다며 당황하시기에 내가 오히려 진땀을 빼며 그 시절에는 형편이 어려워 딸은 공부 시키지 않는 집이 부지기수 아니었냐고 되물어야 했다. 할머니 얘기로는 치매 증상도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가 보기에는 치매 같으니까 자꾸 치매 약을 달라고 하신다. 그런데, 치매에서는 대부분 최근 기억을 집어넣고 꺼내는 과정에 먼저 문제가 생기고 옛날 기억으로 그걸 메우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김 할머니는 오히려 옛날 기억이 안 나서 답답하다고 하시니 좀 이상할 노릇이었다. 정말 다른 불편한 것이 없느냐고 했더니 뒤숭숭한 꿈이 너무 많은데 옛날에 알던 남자가 나와서 같이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몸도 섞는다고 한다. 그 얘기를 털어놓고선 창피하다며 진료실을 나간 김 할머니는 금세 다시 들어 와 불쑥 이런 말씀을 하신다.
“선생님 이름이 뭐라 하던데, 뭐시기 선생님 이름 좀 써주시오.”
메모지에 내 이름을 써 드렸더니 게다가 한 글자씩 읽어달라고 하신다. 전에도 환자 분들께 내 이름을 써 드린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다른 의사를 만나서 속 사정 얘기를 하기 싫어서 꼭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거나 아니면 치료를 통해 좋아져서 내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는 경우였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내 질문도 귀찮아 하시고,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입장도 아니기에 마음에 걸렸다. 나는 애써 웃으며 내 이름 어디다 쓸 건지 여쭤봤으나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한 달 뒤 다시 나타나신 김 할머니는 전보다 더 수척해지고, 지난 달에 봤을 때보다 흰 머리가 더 길게 나 있었다. 그 사이 주름이 더 깊어져서 삼 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고 툰드라 같은 곳에서 지내다 온 사람처럼 뭔가 고생한 흔적이 짙었다. 잠도 못 주무시고 밥도 못 드신다기에 약을 처방했다. 간이 정신상태 검사를 다시 해보려 하자 “침해 검사 종이 이거 저번에 내가 했던 거랑 같은 것인가? 그럼 내가 가져 갈라요.”
갑자기 긴장이 됐다. 글 모르신다는 할머니가 저번에 내 이름도 써달라고 한 것도 모자라 기록지도 가져 가시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어디 가서 항의라도 하려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혹시 저번에 글을 못 읽는 상황에 대해서 자존심이 상하셨던 것은 아닌지 갖가지 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스물 두 살의 김 할머니가 일하던 솜틀집 처마의 일부가 무너져 고치러 온 노총각 목수가 있었다.
김 할머니는 그 당시 피부가 검고 눈이 작고 몸이 말라서 예쁜 편이 아니었으나 목수는 그런 모습을 예쁘다고 해 줬다. 할머니는 목수와 산으로 들로 잘도 놀러 다녔고 그 몇 달 간은 고향집이 하나도 그립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국민학교를 나온 목수는 김 할머니에게 숫자와 이름 석 자 쓰는 법을 가르쳐 줬다. 전에도 아버지가 자기 이름 김.한.신. 석자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무엇이 기역이고 무엇이 히읗인지 몰랐던 김 할머니는 저 글자가 돌아다니며 수 백 가지 말을 만든다는 말에 그 사실이 참 신기했다. 다음 번 만날 때는 목수의 이름 쓰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나이가 찼는데 결혼을 하지 않는 김 할머니를 안됐다 여긴 당숙이 선을 보게 했다. 김 할머니도 그 시절 ‘나 연애하니 싫소’ 할 수 없었고 부모님은 당연히 환영했다. 김 할머니는 선 보러 한 번 나간다고 별 일 생기겠냐 싶어 나갔고, 무뚝뚝하고 우락부락한 그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만나자는 바람에,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진짜 마지막이다 싶어 그이를 만났다가 힘에 부쳐 억지로 잠자리를 갖고, 곧 식을 올렸다. 네 명의 아이를 낳고, 병든 시아버지를 모시고, 이불집을 하면서 남편과 오가는 정도 없어 가끔 목수 생각이 났지만 늘 그 생각은 꿀꺽 삼켰다. 나중에 목수가 김 할머니의 결혼 소식에 충격을 받았고 서울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더 이상 궁금해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세 글자의 이름을 쓸 일이 있을 때는 생각이 났다.
남편은 뇌출혈로 세상을 뜨고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와서 아들 내외와 같이 살게 됐을 때, 아무런 연고 없는 이 노인이 발길 닿았던 곳이 교회였다. 예수만 믿으면 영원히 행복한 천국을 간다니 세상에 그런 횡재가 어디 있겠나. 김 할머니는 예배 때마다 성경을 펴놓고 읽는 척을 했다. 똑 부러지는 김 할머니가 글을 못 읽는다는 것은 다들 상상도 못했고, 심지어 건강한 어르신들이 요양원에 가서 치매 어르신과 함께 밥 먹고 종이접기 하며 시간을 보내는 봉사활동을 같이 하자고 했다. 휑한 집이 싫었던 김 할머니가 목요일마다 요양원에 간 지 일년쯤 되었을 때 어디선가 본 듯한 따뜻한 얼굴과 마주했다. 그는 목수였다. 오십 년이 지났지만 그 선한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김 할머니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기의 이름을 써 주던 모습, 솜틀집에서 여공이 묵는 기숙사까지 함께 걸어갈 때 봤던 표정이 모두 떠올랐다. 그 날 이후로 그 옛날의 목수는 전에 없이 매일 꿈에 나왔다. 김 할머니는 평생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목수와 함께 하던 때였는데 그게 착각인지 아닌지 가물가물 했다.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싶었는데 그냥 띄엄띄엄 떠오를 뿐이었다. 그리움을 꽉 깨물어 삼켰던 것도 신기했고, 그런 아름다운 시절을 갑자기 앗아간 남편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리움도 원망도 다 조금씩은 늦은 것 같았다.
세 번째 주에 찾아갔을 때, 김 할머니는 식판을 들고 목수 곁으로 갔다. 하지만 목수는 김 할머니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모한테 물으니 뇌출혈이고 그 뒤에 치매다 뭐라 뭐라 설명을 자세히 해줬는데 복잡해서 이해할 수 없다. 아무튼 목수는 많이 아픈 상태였고 그 옛날 고왔던 피부에서는 부스럼이 떨어지고 있었다. 말도 못하고 하지만 다른 봉사자를 손짓으로 불러서 왼손으로 힘겹게 뭐라고 글씨도 쓰는 것을 보니, 말이 안 나오는 것일 뿐 그래도 아예 의사 표현을 아예 못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싶었다.
이 사람 이름이 뭐냐고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도 뭔가 자기 마음을 들킬까 봐 묻지도 못했다. 팔찌의 이름표를 보니 김가가 맞기는 한데 이름을 들은 적은 있어도 읽은 줄을 모르니 잘 알 수가 없었다. 김 할머니는 그 할아버지에게 자기 이름을 써서 줬다. 기억력이 아예 없는 것 같지도 않던데 그 이름을 보더니 화를 내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무심하게 TV로 눈을 돌리는 할아버지.
“난 그래서 모냥만 닮은 사람인가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꼭 같은 사람이 또 있을 리가 없소.”
그렇게 맨날 예쁘다 예쁘다 했던 솜틀집 김한신이를 기억 못하다니 이건 침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약이 있다더라, 뉴스에서 듣고 김 할머니는 집에서 제일 가까운 종합병원에 갔다. 큰 병원에서 기억 잘 나는 약을 타서 목수에게 좀 먹일 셈이었다. 김 할머니도 그 좋은 기억이 희미하기도 하니 약을 나눠 먹으면 서로 좀 좋지 않을까 싶었다.
김 할머니는 “침해약은 어디로 가요?” 해서 3층에 의사를 만나러 갔다. 침해약도 안 주는 야속한 저 젊은 의사! 그런데 “으사 이름이 뭐라고?” 성은 다르지만 신기하게도 이름이 목수랑 같았다. 김 할머니는 집에 가서 ‘김’자를 쓰고 그 뒤에다가 의사 이름을 붙여 보았다. 그랬더니 오 십 년 전 배우지 못했던 목수의 이름이 완성됐다. 다음에는 팔찌도 확인해보고 자기 이름을 써 줘야 싶었다.
지금에 와서 그 때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서로 부여잡고 눈물 흘리겠는가, 그저 목수 김주원이가 솜틀집 김한신이를 한 번 알아봐주면 그만이다.
김 할머니는 세 글자 이름을 쓴 종이를 쥐고 이제 이번 주에 팔찌를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목수는 지난 금요일 밤 자다가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 폐렴으로 입원했고,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불과 일 주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 할머니는 자신에게 아무 관심 없던 그 할아버지가 목수의 이름이 맞는지 그제서야 사모에게 물어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어르신, 만약 그 목수 아저씨가 맞다는 걸 한 달 전에 아셨으면 뭐가 달랐을까요?”
“그야 안 가고 거기 같이 있지 않았겠소.”
김 할머니는 목수 얘기를 하며 내내 부끄러워했다. 그런 얘기 앞에서 이제 약을 타서 남 줄 생각을 하지 마시라는 의무적인 경고를 하는 자신도 왠지 부끄러웠다. 김 할머니는 목수의 납골당에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정신건강의학과인가 뭔가 거기를 다녀왔다. 대충 옛 얘기를 털어놓은 사모에게마저도 원래 글 못 읽는다, 성경도 읽는 척 했다 이 말은 차마 못해서 사모가 목수의 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렸고 그제서야 김씨에 이름은 쪽지에 쓰인 이름이 맞구나 싶었다. 그리고 간이 정신상태 검사 뒷면에서 오려 온 “눈을 감으세요”를 목수의 자리에다 놓고 왔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아무래도 의사가 오진을 내렸고 침.해.가 맞는 것만 같다. 억지로 마음에 두지도 않은 남자랑 결혼하던 그 날, 펑펑 울었는지 그냥 울음을 삼켰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