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된 이후부터 동네친구들과 주로 시간을 보내던 곳은 술집이었다. 틈만나면 모여서 어디 괜찮은 술집이 없나 찾아 돌아다니는게 일이였을 정도로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술집마다 이제 좀 단골이 되려 하면 금새 문을 닫는다는 점이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게 우리가 주로 찾아다니던 술집은 후미지고 손님이 없는 술집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할 만도 한데 우리는 시끄러운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주로 찾아다니던 술집은 동네 한구석에 있는 작은 술집이나 손님이 없어 파리가 날리는 술집들이 대부분 이었다. 처음 우리가 단골로 삼았던 가게는 지하의 작은 라이브카페였다. 몇 달 정도를 다니면서 우리외의 손님이 있는걸 본 적이 손에 꼽을수 있을 정도로 장사가 안되는 술집이었고 아마 그 가게의 대부분의 수입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었을게 분명했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사장님이 우리를 손님으로 인식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리를 잡고 앉아 안주를 시키고는 우리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 안주를 만들어 먹었다. 가끔씩 사장님이 자리를 비울때면 우리가 대신 가게를 봐주기도 했다. 당연히 가게는 망했고 우리는 다시 술집을 찾아 떠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 씩 단골을 만들고 가게가 망하기를 반복했다. 물론 우리가 가는 가게가 항상 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 잘 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에 우리가 자주가던 술집은 부부가 운영하던 작은 일본식선술집 이었다. 그곳 여사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우리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느새 그곳 사장님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곳은 망하지 않고 번창해 오히려 더 큰 장소로 가게를 옮기게 되었다. 어느 주말, 다 같이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 오고나서 어김없이 술집을 찾았다. 그 때 우리들의 대화의 주제는 이성에 관해서였다. 얼마 전 친구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그 이후부터 우리가 만나면 주로 하는 얘기는 이성에 관한 얘기였다. 그 중에서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은 '왜 우리는 여자를 만나지 못하는가?' 였다. 물론 저번 만남에서 그 원인은 우리의 못생김 때문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좀 더 자세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에따른 해결책을 제시할 방법을 강구해야했다. 사실 다른 원인들을 찾아내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일단 가장 큰 문제점중의 하나는 평소의 행색이었다. 매일같이 같은 동네에서 같은 얼굴들만 보다보니 당연히 차려입고 만날일이 없었다. 우리 넷 중에 그나마 평소에 밖에 나설 때 꾸미고 나서는 친구는 두 명 뿐이었다. 나 같은 경우는 워낙에 편한걸 좋아해 평소에 집 안에 굴러다니는 아무 옷이나 집어입고 나오는 편이었다. 다른 친구는 좀 더 상황이 심각했다. 사시사철 언제나 같은 차림이었다. 하절기엔 반바지에 목 늘어난 티셔츠와 낡은 나이키 쓰레빠. 동절기엔 아디다스 삼선 트레이닝복.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은 낡은 나이키 쓰레빠였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이미 발과 하나가 된건 아닐가 싶을 정도로 나이키쓰레빠만을 고집했다. 저거 저러다 동상한번 걸려서 도라에몽 발이 되봐야 정신을 차리지 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친구의 나이키쓰레빠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한 명은 패션에 관심도 많고 꾸미는 걸 좋아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나머지 하나였다. 스스로 패션피플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개성이 너무 강했다. 우리같은 범인들은 이해 할 수 없는 센스의 소유자였다. 뭐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 올인하는 스타일이었다. 저번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엄청 두꺼운 줄무늬의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고나왔다. 자기는 그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때부터 그 옷만 주구장창 입고 나오기 시작했다. 색깔도 한줄은 그냥 노란색도 아닌 완전 쌧노란색이었고 다른 한줄은 파랗다 못해 푸르딩딩한 빛이 돌 정도로 파란 색이었다. 내가 패션에 감각이 없다지만 아무리봐도 그건 아니었다. 결국 참다참다 못해 말을 꺼냈다. "너 그 옷좀 그만 입으면 안되냐?""왜? 이쁘잖아. 이 옷 입으니까 완전 어려보이지 않냐?""지랄.. 무슨 참치냐? 한번만 더 입고나오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찢어버린다. 이 등푸른새끼야." 비단 행색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래도 평소에 친구들 사이에서 재밌다는 얘기를 곧잘 듣는 편이지만 친구들사이에 있을 때였고 낯가림이 엄청 심해 처음보는 사람 앞에선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나는 양반이었다. 내 친구들은 그래도 말을 잘 하는 편이다. 다만 한 명이 문제였다.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여자 앞에서만 서면 이성이 마비되는지 말도안되는 애드립을 마구 날려버리는 친구였다. 예를 들자면 재미 없어요? 우리집 냉장고에 잼 있는데. 라는 천인공노할 애드립을 서슴치 않게 날리고는 했다. 시대가 조선시대였고 내가 왕이었다면 당장 외딴섬으로 귀양을 보내도 시원치 않을 드립이었다. 평소엔 재밌다가도 여자만 앞에 있으면 90년대 깔깔깔 유모어에나 나올법한 얘기들을 자꾸 꺼내니 여자를 만나도 잘 될리가 없었다. 가장 슬픈건 그 친구가 그나마 우리중에서 가장 멀쩡하게 생겼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술집 여사장이 우리자리로 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무슨일이냐고 물으니 매 주 남자넷이서 궁상떨고 앉아있는 꼴을 못 봐주겠다며 건너편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 쪽을 보니 여자 네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저쪽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도 자기랑 친한데 남자친구 있는사람 없으니까 가서 말이라도 걸어보라는 것이었다. 평소같았으면 이런 얘기 하지도 않을텐데오늘은 웬일로 다들 멀쩡하게 입고 나와서 알려주는 거라며 비록 자리세를 받으러 온 조폭 무리처럼 보이긴 하지만 평소보단 낫다는 칭찬아닌 칭찬을 건넸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동정하는거냐며 가장 비싼 안주를 시키고 여 사장의 손을 꼭 잡았다. 그때부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가서 말을 걸긴 걸어야 할텐테 섯불리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친구 하나가 어쩔수 없이 내가 가야하나. 라며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고 우리는 황급히 그 친구를 만류했다. "앉아!""헌팅이 그 헌팅이 아니라고. 넌 인간사냥꾼같이 생겨서 안돼. 앉아 이 프레데터 새끼야." 한참을 욱신각신하다 결국 우리중 가장 멀쩡하게 생긴 친구를 보냈다. 친구는 쭈뼛쭈뼛거리며 다가가 한참동안을 얘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옮기자." 여자분들이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를 뻔 했다. 우리는 다같이 세레머니라도 하고 싶었지만 애써 쿨 한척 자리를 옮겼다. 앉아서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돌렸지만 한참동안의 뻘쭘한 시간이 이어졌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친구 하나가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입들이 터지더니 사는 곳 얘기부터 취미 얘기까지 대화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나도 술을 먹어서인지 웬일로 낯선사람들 앞에서 입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쪽도 영화를 좋아해서 자기들끼리 영화를 자주 보러간다며 영화얘기로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법 테이블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져 갈 때 쯤이었다. 처음 합석을 제안하고나서부터는 아무말도 못하고 앉아있던 친구가 위기감을 느꼈는지 굳게 다물어져있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 크리스토퍼 놀란이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는 볼때마다 참.."그 순간 우리 모두의 시선이 친구에게 모아졌다. 아뿔싸. 낭패였다. 친구가 그 다음에 무슨말을 할지 뻔히 보이기 시작했다. 아.. 그. 그말만은 제발.. 안돼.. 친구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난 너무 멀었다. 죽빵을 날려서라도 녀석을 멈춰야 했지만 야속하게도 닿지 않을 거리였다. 내 주먹이 시공간을 가를 수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한탄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내 눈에는 슬로우 모션처럼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크으리으스으토오풔어 노오올라아안 가암도오옥의 여엉화아아아느으은.."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두눈을 질끈 감았다. 끝났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는 볼때마다 참 놀라요."
우리 테이블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화기애애했던 테이블에 빙하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들의 마음에도 빙하기가 찾아왔다.친구들의 뒤늦게 수습해 보려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그 친구는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하고 내 기억에서 제발 삭제해버리고 싶은 드립을 몇 차례 더 날린 후에야 제정신을 차렸다. 합석했던 여성분들은 갑자기 오만가지 생각에 빠진듯 했다. 내가 집에서 가스불을 끄고 나왔던가. 혹시 새벽기도에 갈 시간은 아닌가. 집에 급한 우환이 생긴건 아닐까? 그러더니 시간이 늦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다며 일사분란하게 술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텅빈 테이블에 홀로남은 우리들은 멍하니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결정했다. 친구를 때리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