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장의 스파르타 선생과 날 심쿵하게 만든 아이 이야기

메밀밭파수꾼 작성일 14.11.14 18:4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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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낙엽을 만끽할 새도 없이 눈깜빡 할 사이에 겨울이 찾아왔다. 
그때도 역시나 나는 하릴없이 친구들과 술잔만 비우고 있었다. 특별한 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염증이 느껴졌고 술을 마셔도 무료할 뿐이었다. 우리에겐 무언가 색다른 경험이 필요했다. 매일 죽치고 앉아서 술만 마시면서 시간을 죽이다 보니 좀 더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일이 절실했다. 친구들에게 매일 술만 마시는 것도 지겹고 우리도 밖으로 나가서 운동같은 걸 좀 하면어떨까 하고 물었다. 다른 친구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모두 동의했다. 그렇게 뭘 할까 고민하다 이제 겨울도 왔겠다 역시 겨울스포츠의 꽃 하면 보드 아니겠어! 라며 스키장에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보드는 커녕 스키장 구경도 못해 본 나였기에 괜히 가서 돈만 날리는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 사정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단은 기초적인거라도 알려줄 사람이 있어야 되는거 아닐까 고심하고 있는데 금새 문제가 해결됐다. 뒤늦게 도착한 친구가 자기가 한보드 한다며 자기가 다 알려줄테니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말만 철썩같이 믿고 그 주 주말에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주말. 오랜만에 느끼는 설레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경험을 할 기대에 들뜬 우리들은 룰루랄라 스키장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을거란 우리 예상과는 달리 스키장은 꽤나 한산했다. 아직 본격적인 스키 시즌이 아니라 그런 모양이었다. 우선은 장비를 빌리기로 했다. 장비를 고르는 모습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초심자의 향기가 느껴졌는지 대여점 사장님은 처음 타시는 거면 보호장비를 착용 하시는게 좋을거라는 조언을 해 주셨다. 하지만 내 친구들은 우리는 풋내기가 아니다. 남자라면 맨몸으로 부딪히겠다. 라고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며 사장님의 호의를 거절했다. 오직 나만이 보호장비를 착용했고 난 친구들에게 보호장비를 착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겁쟁이. 생긴건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개잡초 같이 생긴게 온실속의 화초같은 짓을 한다. 꼬추 떼뿌라. 등 갖은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장비를 빌리고 리프트권을 끊은 후 마침내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설원에 첫 발을 내딛었다. 우리를 가르쳐 주기로 한 친구는 처음이 아닌지 익숙한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어미새를 쫓는 아기새마냥 친구 뒤를 졸졸 쫓아가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걸어가니 완만한 경사의 언덕이 보였다. 아 저기서 배우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친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그 장소를 지나쳐 걸어갔다. 친구가 멈춘 곳은 리프트 앞이었다. 일단 타라는 친구의 말에 얼떨결에 우리는 리프트에 탑승했고 내린 곳은 중급자 코스였다. 
초급자코스에서 시작해야 되는거 아니냐는 우리의 말에 친구는 그딴 나약한 소리를 지껄이는 놈이 누구냐며 날 못믿는 놈은 당장 하산하라고 불같이 화를 냈고 그 기세에 눌린 우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우리를 일렬로 세워놓고 친구는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알려주기 시작했다. 신발과 보드를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낑낑대며 보드와 신발을 연결하고 나니 친구는 일어서는 법을 알려준다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가 일어난 것 처럼 일어나. 라고 말했다. 그게 끝이었다. 두 번은 없었다. 
다행히 일어나는 것 까진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 다음은 미끄러지지 않고 균형잡는 법이었다. 그리고는 좌우로 움직이는 법을 알려줬다. 그게 낙엽타기라며 친구는 이제 천천히 내려오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한 친구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 친구는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일어서면 앞으로 자빠지고 다시 일어서면 뒤로 자빠지기를 반복했다. 한동안 잊고있었던 그 친구의 별명이 떠올랐다. 인간빙수기.몇 년 전이었다. 처음 친구들과 스케이트장에 갔을 때였다. 처음 스케이트를 신고 아이스링크에 들어서자마자 그 친구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서 땅을 짚었을 테지만 그 친구에겐 그 정도의 운동신경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대로 아이스링크에 얼굴을 쳐박은 친구는 앞니로 얼음을 갈았다. 그 이후로 생긴 별명이 인간 빙수기였다. 숨쉬고 손발을 움직이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최소한의 운동신경만 지니고 있는 친구가 그 친구였다.
우리는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그자리에서 멈춰선 채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우리는 쟤좀 어떻게 해보라고 친구에게 말했지만 친구는 가차 없었다. 열성유전자는 무리에서 도태되는게 세상의 법칙이라며 거들떠 보지조차 않았다. 난데없는 친구의 진화론 주장에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친구의 표정은 심장에 대못을 박아 넣어도 피 한방울 안 흘릴것 처럼 냉정할 뿐이었다.그러니 너희들도 패배자가 되기 싫으면 어서 집중하라는 친구의 말에 야 이 미친 놈아. 우리가 보드를 배우러왔지 인생을 배우러 왔냐고 따져봤지만 친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선 그 친구가 갑이었다. 우리는 어쩔수 없이 친구를 따라가야 했고 이제는 아스라이 들려오는 우릴 부르는 친구의 서글픈 외침을 애써 외면해야 했다. 
한참을 조심스레 내려가고 있는데 친구가 멈춰섰다. 이번엔 또 뭘 가르쳐 줄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 친구가 이제는 모든것을 전수했다며 나머지는 너희들이 몸으로 체득하라고 했다. 그리고 딱 두가지 만을 기억하라고 했다. 첫 째, 넘어지지 말 것. 둘 째, 직활강 하지 말 것. 직활강이 뭐냐고 묻기도 전에 친구는 몸을 돌려 내려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황했다. 야! 우리가 아프리카 새끼 사슴도 아니고 태어나자 마자 뛰라는 거랑 뭐가 달라 이 개 새.. 
우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친구는 쏜살같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미새는 그렇게 훨훨 우리들 곁을 떠나갔다.
그렇게 황량하게 친구의 뒷모습만 한참동안 바라보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직접 몸으로 부딪히기로 결정했다. 천천히 내려가려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자연적으로 눈이 오기 이전의 인공눈이라 그런지 눈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곳곳에 얼어있는 부분이 있었고 그 부분은 맨땅이나 다름 없었다. 사람들이 없는 진짜 이유를 그제서야 알았다.
다른 친구들과도 점점 멀어졌지만 친구들의 위치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곡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면 그 곳엔 친구들이 있었다. 즐기러 온 여행이 살아남기 위한 여행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보호장구를 했는데도 한번 넘어지면 엉덩이가 네조각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친구들은 오죽 했을까. 갑자기 대여점 사장님의 얼굴이 부처님의 얼굴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반은 타고 반은 구르다시피 해서 겨우겨우 맨 아래까지 도착해서 다시 친구들을 만났다. 처음 리프트를 탈 때의 산뜻한 모습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지고 잠깐 사이에 다들 며칠동안조난당했다가 구조된 사람들의 몰골이 되어 있었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우리가 다 내려오기가 무섭게 다시 리프트로 우리를 내몰았다. 지쳐서 따질 힘도 없었다. 제발 조금만 쉬었다 가자고 사정했지만 친구는 인정사정 없었다. 빡세게 굴리기가 레오니다스 급이었다.결국 우리는 다시 리프트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뜻 밖의 재회를 하게 되었다. 
인간빙수기친구는 아직도 그자리에 있었다. 여전히 일어섰다 넘어졌다를 반복하면서. .. 저건 뭐지? 누가 저기에만 구간반복을 해놓은건가? 아니면 새로나온 주유소 풍선인형인가? 그 모습을 본 친구는 저걸 보라며 저게 도태된 인간의 최후라며 저렇게 되고 싶지 않은 사람만 날 따라오라고 말했다. 우리는 기를 쓰고 친구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동안의 스파르타식 교육이 계속된 이후에야 어느정도 넘어지지 않고 내려갈 수 있었다. 
넘어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그래도 중급은 아직 무리인 것 같아 초급코스로 이동해 혼자 보드를 타고 있는데 초급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그 중 유독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초등학생 쯤이나 되었을까. 온갖 보호대에 머리엔 헬멧까지 쓴 차림으로 부모님은 어디 갔는지 혼자서 보드를 타고 있었다. 그 아이도 처음 타보는 건지 내려오다 넘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혼자 낑낑대는 그 모습이 귀여워 한동안 그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내려오던 그 아이는 갑자기 속도가 붙었는지 빠른 속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자로. 점점 그 아이가 가까워져왔다. 당황한 나는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내 두발은 보드에 묶여 있었다. 
멈추라고 말했지만 그 아이는 들리지 않는듯 했다. 야 정지! 정지! 어? 저.. 정지가 안돼. 정지시킬수가 없어. 아이구 맙소사. 난 인제 죽었어. 이건 미친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겠어. 이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청난 스피드로 일자로 내려온 그 아이는 그대로 내 가슴팍을 머리로 들이 받았다. 스트리트 파이터에 나오는 혼다의 기술이었다. 
그대로 쓰러진 후 이것이 직활강이구나 라는 깨달음과 함께 심장이 멎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호흡곤란으로 눈밭을 뒹구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다. 다만 내가 무사하지 않았다. 거의 5분동안을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옆에선 왠 주인없는 보드가 혼자 눈길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뒤를 빙수기 친구가 쫓고 있었다. 
아비규환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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